-찾으셨습니까?
드높은 성벽을 훌쩍 뛰어오른 집사가 빠르게 다가와 예를 갖추며 입을 열었다.
“어. 물어볼 게 있어서 불렀어.”
-말씀하시죠.
“지금 저 뒤에서 몰려오는 것들. 이번이 처음이 아니지?”
-물론입니다.
역시 내 생각대로 이번 경우에 한해서만 나타난 녀석들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어떻게 저것들을 막아온 거지?”
아무리 봐도 저것들을 막을 수 있을 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은 영지였기에 궁금증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은 막대한 마석을 들여 후작 이상의 귀족에게 기사단을 빌려 처리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기에 부르지 않았습니다.
“기사단을 빌려준다고?”
-그렇습니다. 물론 막대한 마석을 보상으로 주어야 했기에 지금껏 영지의 운영이 힘들었습니다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기에 앞으로 영지는 더욱 발전할 것입니다.
‘짠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던 거였어?’
집사에게 듣기로 성의 뒤쪽에 존재하는 광산에서 얻는 마석의 양이 막대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와 다르게 영지의 꼴은 정말 처참한 수준이었기에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꼭 필요한 수준의 마석만을 배급할 뿐 아니라 영지의 발전을 전혀 신경 쓰지 않기에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기사단을 빌리는 문제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기사단에게 들어가는 마석이 어느 정도길래?”
-저희 영지에서 생산하는 1년 치 마석 대부분입니다.
“그 정도라고?”
2년에 한 번 발생하는 웨이브에 1년 동안 생산한 마석 대부분을 사용해야 하니 영지 꼴이 처참한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희 영지는 원래 후작의 영지였습니다. 막아내야 할 마수들의 수준이 높은 것은 당연하죠.
“잠깐만? 설마 상납해야 하는 마석을 포함한 1년 치 전부를 말하는 거야?”
-그렇습니다.
“그럼 생산한 마석 전부가 기사단을 부르는데 사용한다는 말이잖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생산한 마석의 반을 승자에게 보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기사단을 부르는데 2년 동안 모아둔 마석을 전부 내어줘야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도대체 지금껏 영지를 어떻게 유지한 건데? 병사들의 봉급이라던가 영지민들에게 배급하는 마석들은 어디서 나온 건데?”
마족들에게 마석이란 없어서는 안 될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인간이 음식을 섭취하지 않으면 죽는 것처럼 마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마족들에게 마석은 인간의 화폐와 다르지 않았는데, 아니 인간의 화폐보다 더욱 귀한 취급을 받는 것이 바로 마석이었다.
-전대 후작님께서 모아둔 마석이 많아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습니다. 거기다 영지민들이라고 해서 생산 활동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병사들이 성 밖에서 사냥을 통해 벌어들이는 수익이 있어 힘들긴 해도 영지를 꾸려나갈 정도는 됩니다.
나 역시 들어서 알고 있긴 했다.
마족들에게도 특산품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곳 역시도 그런 특산품이 존재했는데, 그것은 바로 무구들이었다.
마수들의 부산물로 만든 무기나 방어구를 만들어 1년에 한 번 방문하는 상단에 납품하는데, 그게 가능한 이유는 바로 영지에 곳곳에 굴러다닐 정도로 흔한 붉은 돌 덕분이었다.
그 붉은 돌이 바로 대장장이 기술을 가진 마족들에겐 보물이나 다름없다는 것이었다.
일명 화석.
마력을 주입하면 높은 화력을 뿜어내는 특이한 돌멩이.
이것이 바로 이곳의 특산품이었다. 그것 때문에 뛰어난 제련 기술을 가진 대장장이 마족들이 영지로 몰려들면서 무구를 생산하는 영지로 탈바꿈했다고 한다.
“정말 그들이 괜찮은 수익을 내는 것이 맞단 말이야?”
그들 덕분에 괜찮은 수입을 얻는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지만, 솔직히 믿지는 않았었다.
그저 그런 수준일 거라 짐작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마을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초라한 부락들 때문이었다.
-물론입니다. 저희 영지에서 생산되는 무구들은 귀족들에게조차 귀한 취급을 받을 정도로 대단한 수준입니다.
“확실해? 그런 귀한 취급을 받는 무구들을 생산하는 영지가 이런 꼴인데도?”
-그건……. 대장장이들의 폐쇄성 때문입니다. 힘이 없는 그들에게 있어 기술은 생명줄이나 다름없습니다. 기술이 유출될 경우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을 잘 아는 그들이기에 결국 저런 부락 형태의 혈족 중심 사회가 되어 버린 것이죠. 원래는 저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전대 후작님께서 살아계실 적만 해도 이곳은 도시라 불릴 정도로 거대했지만, 후작님께서 돌아가신 후부터 외부인들이 함부로 영지에 침입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저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저런 방식을 취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저 수많은 부락이 전부 가문 같은 거란 말이야?”
-그렇습니다.
들어보니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힘이 없는 마족에게 마계는 정말 혹독한 곳이었다.
그런 혹독한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작은 기술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이 조금이라도 더 사는 것이 편해지기에 남에게 기술을 유출 시키는 것을 최대한 꺼리는 것은 당연했다.
어쩐지 좀 이상하다 했다.
부락들이 존재하는 사이사이에 정비가 된 큰길들이 뚫려 있을 뿐 아니라 군데군데 오래된 건축 양식을 뛴 빈 건물이나 반파된 건물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필요가 없었기에 그랬던 모양이었다.
“상무님.”
“응? 왜?”
“나타났어요.”
지안의 말에 고개를 돌리자 수백의 마수들이 이곳을 향해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게 그놈인가? 엄청 크네?”
수십 킬로는 떨어져 있음에도 확연히 그 모습이 보이는 녀석.
거대한 크기를 가지고 있는 녀석의 생김새는 조금 익숙한 모습이었는데, 모습이 나무늘보와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온몸에 검은 털이 가득했고, 양손의 끝에는 길다란 손톱들이 자라나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녀석의 키가 백 미터를 훌쩍 넘어설 정도로 거대했다.
“처리할까요?”
“가능하겠어?”
“네.”
별것 아니라는 듯 말하는 지안은 자신감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해봐. 얼마나 강해졌나 보자.”
내 말이 떨어지자 곧장 녀석을 요격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럼!”
아스트라를 들어 올려 녀석을 정확히 조준한 지안이 활시위를 당기는 동시에 마력을 끓어 올리기 시작했다.
쿠웅-
한순간에 마력을 방출한 지안은 이어서 마력을 한 곳에 뭉치기 시작했고, 그에 지안이 당긴 활시위에 붉은빛을 내는 마력 화살이 모습을 드러내며 힘을 마음껏 뽐내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막대한 마력을 압축했기 때문일까?
마력 화살을 중심으로 특이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치 공간이 굴절된 듯 화살 주변의 공간이 찌그러지기 시작했고, 이어서 주변을 떨쳐 울리는 소음이 발생하던 그때.
후웅- 퍼엉-
지안이 잔뜩 당겨진 활시위를 놓았다.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 충격파를 터트리곤 녀석을 향해 쏘아져 나가며 죽음의 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녀석 역시 지안의 공격을 눈치채고 있었는지 곧장 화살을 향해 마력이 실린 긴 손톱을 휘둘렀고.
콰과과과광-
둘의 충돌에 굉음이 터져 나오며 충격파가 모두를 휩쓸며 시야를 가리는 먼지 폭풍을 만들어 내었다.
‘막아낸 건가?’
분명 지안의 공격에 반응한 녀석.
그 덕에 막아내지 않았을까 생각하던 그때 지안이 아스트라를 내리며 진한 미소를 짓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시야를 가리던 먼지가 사라지며 녀석의 모습이 드러났다.
지안의 공격을 막기 위해 휘둘렀던 손이 사라져 있었고, 그 뒤로 보이는 거대한 구멍이 놈의 몸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우와아아아-
1차 웨이브를 거의 처리해가던 병사들이 그 모습에 환호를 터뜨렸고, 잠시 후 가슴 한가운데에 거대한 구멍이 뚫린 녀석이 천천히 앞으로 기울며 쓰러지는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단 한발의 화살로 자작급의 힘에 필적하는 마수를 쓰러트린 지안. 그녀는 아무래도 내 생각보다 훨씬 강해진 것 같았다.
“그나저나 저놈은 뭐라고 불러야 하지?”
상급 마수를 넘어서는 존재.
최상급 마수라고 하면 되려나?
-저 정도 힘을 가진 녀석은 최상급 마수라 불립니다. 그 위에는 왕급 마수라 불리는 괴물 중의 괴물이 존재합니다.
“왕급? 설마 저놈보다 강한 등급이 존재한다는 말이야?”
-그렇습니다.
허! 생각했던 것보다 강한 것들이 많네?
마족은 이제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최상급과 왕급이라니?
“왕급은 어느 정돈데?”
-개체마다 다르지만 일단 왕급 마수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공작 이상의 힘을 가진 마족이 나서야 합니다. 물론 왕급 마수는 극히 드문 존재라 4천 년 이상을 살아온 저 역시도 본 적은 없습니다.
집사가 4천 년이나 살았다고?
왕급 마수를 보지 못했다는 것보다 4천 년이란 오랜 삶을 살았다는 것에 놀란 나였다.
물론 마족들의 평균 수명에 대해 들어 알고 있긴 했지만, 그때에는 좀 와 닿지 않았었다.
“4천 년 동안 멀리서조차 본 적이 없단 말이야?”
-멀리서라도 본 적이 있다면 아마 저는 이 자리에 없었겠죠.
“그 정도로 무시무시한 존재야?”
-저희 마족에게 왕급 마수란 전설 속에나 등장하는 존재나 다름없습니다. 나타난 순간 주변의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괴물 중의 괴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작 이상이라고 했지 공작이 처리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공작이 나선다고 해도 대피할 시간을 버는 게 고작입니다.
집사의 말은 공작의 힘을 가진 마족조차도 왕급 마수를 처리하는 것은 힘들다는 의미였다.
“그럼 대공이라는 자가 나서야만 처리할 수 있다는 말이야?”
-그것도 불확실합니다. 대공 홀로 처리한 왕급 마수가 존재하긴 하지만, 대공과 수호 기사단이 함께 움직이고 나서야 겨우 토벌한 왕급 마수 역시 존재합니다. 그 때문에 왕급 마수의 경우 개체에 따라 강함의 차이가 차원이 다르다 전해지고 있습니다.
“마수가 어떻게 그리 강할 수 있는 거지? 최상급 마수랑은 아예 차원이 다른 수준인데?”
조금 전 지안이 처리한 최상급 마수만 봐도 왕급 마수의 강함은 말이 되지 않았다.
겨우 한 등급 차이일 뿐인데 그런 차이가 난다는 것은 분명 이상한 일이었으니까.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왕급 마수라는 존재는 마수 자체를 초월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니까요.
“초월?”
-그렇습니다. 바하무트나 균열에서 흘러나온 사념에 의해 마수가 된 존재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사념의 지배를 벗어나면서 새롭게 태어나는 존재들이 바로 왕급 마수입니다.
마수가 깨달음을 얻는다는 말이야?
대충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말이야. 스스로 사념의 지배를 벗어났다는 놈들이 왜 마족을 공격하는 거야?”
-아마도 마족들이 자신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공격하는 것 같습니다. 마족에게 마수란 적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으니까요.
들어보니 이해가 좀 되는 기분이었다.
적대감을 드러내는 마족들을 보면 당연히 적이란 인식이 생겨나겠지.
거기다 아무리 왕급 마수라 해도 마수 특성상 기본적으로 이성보다는 본능이 강한 존재일 테니 일단 공격을 하고 보는 것일 테고.
“그나저나 이제 얼추 정리되는 모양이네.”
1차 웨이브는 이미 정리가 끝난 지 오래였고,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녀석들 역시 현지의 활약에 의해 거의 정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현지가 상급의 마수만을 처리했기 때문인지 병사들에게 경험을 쌓게 해주는 것 역시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 보였고, 병사들이 위험에 빠진 순간 지안이 화살을 쏘아 도움을 주었기 때문인지 큰 피해를 본 것 같지도 않았다.
“이제 잠시 집에 다녀와도 되겠는데?”
* * *
-나도! 나도 따라갈래요!
집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려던 그때 내 다리에 매달린 존재가 있었다.
“이걸 어쩌지?”
“그냥 데려가요. 어차피 상관없잖아요.”
절대 내 다리를 놔 주려 하지 않는 레이를 보며 입을 열자 현지가 뭘 그런 걸 고민하냐는 듯 입을 열었다.
“그래도 될까?”
-괜찮습니다. 레이 님이 자리를 비운다고 해서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니까요.
현지의 말에 집사에게 고개를 돌려 묻자 집사가 괜찮다는 뜻을 내비쳤다.
“정말 문제없는 거지? 레이가 영지를 비워도?”
-물론입니다.
“그럼, 레이야 같이 갈까?”
-우와~
같이 가자는 말에 신이 나는지 꼭 잡고 놔주지 않던 다리를 놓으며 손을 번쩍 들어 올리는 레이를 보자 기분 좋은 미소가 지어졌다.
“괜찮을까요? 그래도 인간과는 조금 다른 아이인데?”
현지와 다르게 지안은 조금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인간과 드른 사고방식이라던가 머리 위에 있는 작은 뿔 같은 것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상관없지 않을까? 인간의 아이들과 큰 차이는 없으니까. 그리고 저 뿔도 모자를 쓰면 감춰지잖아. 게다가 이제 말도 조금은 한다며?”
한글을 가르치며 지안이 가장 놀라워했던 것은 바로 그 습득력이었다.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순식간에 한글을 마스터하는 마족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머리가 좋았다.
일반 암기력만 따지면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수준이었다.
다만 상상력이라던가 하는 기술의 발전에 공헌하는 지능 쪽은 많이 떨어지는 수준이었다.
인간에 비하면 호기심이 없는 편이었고, 새로운 뭔가를 배우려 하는 의지가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
아무래도 이곳의 특성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곳에서의 호기심은 죽음과 가까워지는 길이었고, 창의력 역시도 무력이 전부인 이곳에서는 필요가 없었기에 그런 쪽으로는 발전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자! 그럼 가 볼까? 미호야!”
미호를 부르자 공간이 열리며 문이 나타났고, 그에 나를 배웅하는 마족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다녀올게. 무슨 일 있으면 알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다녀오세요.
-레이 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룩산과 셰인, 집사의 배웅을 받으며 나는 그대로 공간의 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수아와 가족들을 볼 수 있다는 기쁨을 품은 채로.
이땐 몰랐었다.
어떤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