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 결렬.
신문의 스포트라이트를 장식하는 큰 글자.
정말 황당하게도 그들은 아버지 말대로 시간을 끌고 있었다.
최선을 다했지만, 유명과의 협상이 결렬되었다는 뉴스들이 TV 채널은 물론 인터넷 매체를 통해 마구잡이로 쏟아지고 있는 상태였다.
당연히 그 결과로 유명은 잠깐 욕을 먹었지만, 이쪽 역시도 여론전을 펼쳤기에 금방 사그라들었고, 반대로 협상 테이블에 앉았던 정치인들이 엄청난 욕을 먹고 있는 상태였다.
유명에서 원하는 것은 큰 것이 아니었다.
유명시에서 물러나기 전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그때의 유명이 가진 권리를 그대로 돌려놓으라는 조건을 걸었지만,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니, 시간을 끌고 있을 뿐인 것이었다.
그들은 설마 이쪽에서 조건을 언론에 밝힐 거라곤 생각도 못 했을 거다.
절대 유명시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발표했기에 이 사실을 대중에 밝힐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겠지.
협상 테이블에 나간 것도 억지로 나온 줄 아는 자들이었기에 더욱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그나저나 이 기자는 뭔데 이리 설치는 거지?”
대형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기사를 훑어보던 나는 황당함에 말문이 막혀왔다.
마치 유명이 인류의 멸망을 바라는 듯 기사를 써놨기 때문인데…….
“큰 대가를 약속받았겠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겁이 없는 수준이 아니라 죽고 싶다고 광고하는 것 같은데?”
“저도 좀 충격이긴 합니다. 설마 이런 기사를 쓰는 기자가 있을 거라곤 예상도 못 했으니까요.”
평양 신도시에 철옹성을 짓고 있다는 내용으로 시작하는 기사.
처음이야 그런대로 맞는 말이었기에 봐줄 만했지만, 이어지는 내용을 읽어보면 충격 그 자체였다.
평양 신도시와 게이트 도시에 생활에 필요한 모든 생산시설과 농지를 만든 유명은 자신들만 살기 위한 모든 준비를 끝내놓은 상태라고?
물론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놈은 이번 협상에 나온 유명이 모든 조건을 거부하고 평양 신도시로 숨어들 생각만 하고 있다는 기사를 써 놓았다.
유명을 열심히 설득하기 위해 정치인들이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 어떤 조건에도 고개를 저어버리는 유명이라는 내용.
심지어 아버지나 나, 형이 이번 협상에 참여하지 않은 것을 볼 때 유명은 유명시로 돌아갈 생각이 절대 없을 뿐 아니라 인류가 멸망 당하든 말든 우리만 살면 그만이라는 태도를 보였다고 적어 놓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놈은 상황이 변한 지금도 기사를 내리지 않고 있었는데, 마치 유명을 도발하는 듯 보일 정도였기에 어이가 없었다.
“이 새끼 어떻게서든 족쳐. 이런 놈들은 가만히 놔두면 언제고 큰 사고 한번 칠 놈이니까.”
“알겠습니다.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어때? 잘 돼가?”
“아마 다음 협상에서는 전과 같은 태도를 보이지는 못하겠죠.”
나라를 버린 매국노가 되어버리기 직전인 그들 상황상 아마 이쪽의 조건을 바로 수락하지 않을까 예상 중이었다.
“그럼 이제 끝인가?”
“네. 협상 후 마지막 기자회견을 끝으로 저희 유명은 모든 인간의 위에 존재하게 될 겁니다.”
“모든 인간의 위라? 그거 재밌는 말이네.”
“물론 지금도 꼭대기에 올라있긴 하지만, 그때가 되면 누구도 침범하지 못할 성역을 구축하게 될 겁니다.”
“그나저나 이거 완전 악당 아니야?”
“살짝 그런 느낌이 없지 않아 있긴 하지만, 상관없지 않습니까? 저희 유명이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는 건 사실이니까요.”
사람들을 위한 희생이라?
그게 정말 희생일까?
그저 나를 아니, 유명을 위해 하는 일들일 뿐인데?
지금까지 내가 해온 모든 일은 모두가 유명을 위해서 한 일들이었다.
딱히 사람들을 위해서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김 실장의 말이 가슴에 와닿지 않았다.
* * *
-이 여성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유명의 호위팀장인 이현지 양입니다. 그녀는 그날 마수들의 웨이브를 죽음을 무릅쓰고 겨우 막아 낸 후 유명시로 복귀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유명시로 돌아온 그녀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어떻습니까? 눈살을 찌푸리거나 그녀의 조금 사나운 분위기에 두려워할 뿐이었습니다. 그날 그녀를 봤던 자들이 저희 유명에 어떤 물음을 던졌는지 아십니까? 그녀가 가지고 가던 부산물을 사고 싶다는 물음뿐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녀가 왜 저런 꼴이 되었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TV 화면에 나오는 김 실장은 현지를 정말 불쌍한 여인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날 현지는 그저 마계를 막 탐사하고 돌아왔을 뿐이었고, 뿔의 특성 때문에 은신을 사용하지 못했을 뿐이지만, 김 실장은 현지를 정말 불쌍한 여인으로 만들었다.
누가 들어도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현지야, 너 저렇게 보니까 엄청 불쌍해 보인다.”
“내가 봐도 그래 보이긴 하네?”
함께 기자회견을 보던 지안이 현지에게 말하자 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근데 대표님, 현지를 저렇게 노출 시켜도 돼요?”
“한 번 정도는 상관없을 거야.”
“네! 이번에는 어쩔 수 없지만, 다음부터는 이런 일은 없게 해주세요. 저는 저런데 나서서 뭔가 하는 건 체질상 맞지 않거든요.”
현지를 몰라도 특성을 들으면 현지의 성격을 대충 예상할 수 있을 거다.
암살 같은 특성은 성격과 많이 연관되어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나와 함께 지내며 성격이 많이 달라진 거였지, 예전에는 정말 차가운 성격이었다고 들었다.
물론 지금의 성격도 나나 지안이와 함께 있을 때만 밝을 뿐이었고, 다른 자들과 있을 때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무뚝뚝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회장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저희 유명은 앞으로 달라질 것입니다. 유명을 욕하는 자는 그 대가를 치르도록 만들 것이고 권리 역시도 정당하게 행사할 것입니다!
단상 앞에서 열변을 토하는 김 실장은 지금까지 유명이 엄청난 희생을 해 온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유명에게 손해를 입히거나 비방하고 욕한 자들 대부분을 선처해 준 것처럼 말하고 있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대부분 틀린 말이었다.
-인류의 구원자가 되어주겠지만, 그 대가는 확실히 받을 생각입니다!
이로써 이번 일은 마무리되는 건가?
“근데 김 실장님 저렇게 보니까 되게 멋진데요? 항상 무표정해서 몰랐는데, 저런 면이 있었네요?”
“나는 조금 이상한데. 김 실장님이 아닌 것 같아.”
기자회견을 여러 번 했지만, 지금처럼 열변을 토한 적은 없던 김 실장이었기 때문일까?
지안과 현지는 김 실장의 새로운 면을 보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제 준비들 해놔.”
“무슨 준비요?”
“떠날 준비. 마계 다시 다녀와야 할 것 아니야?”
“아! 맞다! 내가 왜 그걸 잊고 있었지?”
“나도 깜빡했어.”
그나저나 레이를 어쩌지?
학교에 다니는 레이를 데려가고 싶었지만, 수아와 아버지가 많이 섭섭해할 것 같았기에 조금 그랬다.
솔직히 레이를 좀 더 머물게 해도 상관없긴 했지만, 인간의 삶에 너무 심하게 빠져들면 문제가 될 수도 있었기에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건 일단 레이에게 물어봐야겠네.
* * *
똑똑똑-
“아버지, 저예요.”
“들어오거라.”
아버지의 허락에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버지와 수아 그리고 레이가 함께 다과를 즐기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또 떠나려는 게냐?”
“알고 계셨어요?”
“들었다. 현지와 지안이가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고 하더구나.”
현지와 지안이 지금 가장 열심히 준비하는 것은 바로 요리를 배우는 것이었다.
저번처럼 라면으로만 식사를 때우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
“그래서 말인데요. 이번에는 좀 오래 걸릴 것 같아요. 제대로 좀 둘러보고 오려고요.”
“그러냐? 뭐 필요한 건 없고?”
“필요한 것보다는 인력을 조금 지원해 주셨으면 해요.”
“인력을?”
“네. 레이의 영지를 조금 발전시켜 보려고요.”
그곳의 환경은 솔직히 말해 최악이라고 해도 좋았다.
레이처럼 먹고 마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이 맛대가리 없는 마석을 복용해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거기다 중세시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시원찮은 환경은 솔직히 조금 그랬다.
마석을 복용하기에 인간처럼 배설하는 행위는 없었지만, 제대로 씻지 못해 때가 잔뜩 끼어 있던 영지민들을 떠올리자 편의시설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전만 보장된다면 상관없긴 하다만, 괜찮겠느냐?”
“당연하죠. 미호의 분신을 사용해 그곳에 도착하기만 하면 문제없을 거예요. 마족들 역시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을 테니까요.”
“호오- 정말이냐? 그렇다면 나도 한번 가 보고 싶구나.”
“나중에 제대로 변하면 모실게요.”
“그러려무나.”
고개를 끄덕이시며 대답하시는 아버지를 보며 나는 이어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고민이 하나 있거든요? 레이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원래는 바로 데려갈 생각이었는데, 조금 고민이 되네요.”
“아빠! 나 그냥 여기서 살면 안 돼요?”
“응?”
아버지가 아닌 레이가 나를 보며 슬픈 눈으로 말하는 것을 본 나는 역시 데려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더 지내고 싶다고 말했다면 조금 더 머무를 수 있도록 했겠지만, 살고 싶다는 말은 마족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레이야.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큰 후회를 할지도 모른단다.”
레이는 인간이 아닌 마족이었다.
100년, 200년이 아닌 만 년을 넘게 살지도 모르는 레이는 친했던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는 것을 겪게 되면 큰 충격에 빠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하지만…… 레이는 할아버지랑 할머니랑 언니랑 같이 있고 싶어요……. 가족이 있는 곳이 좋아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는 레이를 보자 너무 안쓰러웠다.
내가 괜히 레이를 데리고 온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쁜 놈이 되어 버린 것 같았는데.
“그럼 할아버지랑 계속 같이 있으면 되지?”
“그래도 돼요?”
“그럼! 이 할아버지가 대빵이란다! 아무도 할아버지 말을 거부하지 못해요.”
“아빠도요?”
“물론이지.”
“와아~”
아버지의 말에 금방 울음을 그치고 밝게 웃는 레이를 보자 마음이 점점 약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빠! 수아도 레이랑 같이 있고 싶어요!”
괜히 레이와 수아 앞에서 말을 꺼낸 것 같았다.
이대로는 절대 레이를 데려가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버지 역시 그러길 바라시는 듯싶었고.
“그럼 그렇게 하자. 대신 레이야. 아빠랑 약속 하나만 할까?”
“어떤 약속?”
“학교가 방학을 하면 방학 동안만이라도 영지에서 지내야 해. 알았지?”
“정말! 방학에만 가 있으면 돼?”
“그래. 그렇게 하도록 하자.”
어떻게서든 레이가 영지에 정을 붙이도록 만들려면 잠깐이라도 영지에 가 있도록 해야만 했다.
레이가 영지와 영지민 그리고 가신들에 대한 책임감을 가질 수 있도록 말이다.
* * *
“모두 원래대로 돌아온 거 맞지?”
“그렇습니다. 유명시의 부지를 모두 회수했을 뿐만 아니라 권리도 되찾아 왔고, 유명시로 몰려드는 몬스터들 역시도 전부 몰아낸 상황입니다.”
“근데 왜 이렇게 시끄러워?”
게이트가 있는 본사의 건물 앞에는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있었는데, 떠났던 각성자들이 유명시가 안정되자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였다.
시위자들.
많은 사람이 본사 건물 앞에서 격렬한 시위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보상 문제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거 거의 끝났다며?”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시지 않습니까? 투자금의 회수는커녕 엄청난 손실만 본 상황이니 저러는 것이죠.”
유명과 협상을 하기 전 정부는 유명시의 부동산에 투자한 자들을 살살 꼬드겼다.
떠나고 싶어도 투자한 금액이 커서 떠나지 못하던 자들에게 보상해 주겠다며 접근한 정부는 유명시의 당시 가치를 따져 처음의 10%도 되지 않는 금액으로 부동산의 권리를 돌려받은 것이었다.
그들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었다.
길드 연합이 물러날 것이란 소문이 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몰려든 기업들 역시 일반 노동자들을 제외한 간부들이 유명시를 하나둘 떠나고 있었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싼값에 권리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조금만 시간이 더 지나 유명시가 망하면 10%는커녕 1%도 건지지 못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듣기론 정부가 손을 내밀었을 때는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고 하던데?”
“상황이 바뀌지 않았습니까. 유명이 돌아왔고, 유명시가 정상화되어가고 있으니 아까운 것이지요.”
“당연히 아깝긴 하겠지. 하지만 그건 본인의 선택문제 아니야? 안 판 사람들은 지금 제대로 된 보상을 받고 있잖아.”
“그것 때문에 더욱 심하게 반발하는 것이죠. 누구는 10%를 보상해주고 누구는 80%를 보상해주니 화가 날 만도 하죠.”
“그렇긴 하네.”
정부가 머리를 참 잘 쓴 것 같았다.
많이 치사한 방법이긴 했지만, 이전의 보상에서 정부는 유명시의 97%의 권리를 되찾아 왔다.
지금 남은 자들은 고작해야 3%.
결과적으로 보면 고작 10% 남짓한 금액으로 유명시의 권리를 되찾아 왔기에 정부로서도 많이 남는 장사를 했다고 볼 수 있었다.
“길드 연합은 남는다던데 사실이야?”
“그렇습니다. 길드 건물의 경우 임대의 형식으로 그들에게 빌려주기로 했습니다.”
“임대?”
“네. 물론 임대료가 조금 비싸긴 하지만요.”
“얼마나 되는데?”
“세계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홍콩이나 싱카폴보다 무려 10배 이상의 임대료로 계약을 체결한 상태입니다.”
“10배? 그렇게 비싸게?”
솔직히 조금 놀랐다.
10배라니? 그 정도면 남는 게 있으려나 모르겠네?
“아시지 않습니까. 정수를 구할 수 있는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는 것을.”
“아! 그렇네? 그들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수익이 날 만하겠네.”
마수에게서 나오는 정수.
이제 마수를 잡으려면 죽음의 땅까지 진출해야 하는데 다른 어비스의 도시들에서는 그곳까지 원정을 떠나기가 너무 힘들었다.
거기다 10강 정도의 수준에 맞는 존재가 마수뿐이었기에 더 강해지기 위해서는 이곳에 머물러야만 했다.
“괜찮네. 이제 걱정할 필요는 없겠어.”
이제 곧 인류는 죽음의 땅에 진출하게 될 거다.
그 결과로 인류의 전력도 크게 상승할 테고.
‘괜찮겠지?’
그들이 마계에 도착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조금 되었지만, 이내 걱정을 지워 버렸다.
죽음의 땅이란 곳은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었으니까.
마수들도 마수들이었지만, 죽음의 땅이란 곳의 면적 자체가 지나치게 넓었기에 당장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다.
나조차 죽음의 땅을 전부 살펴볼 수 없을 정도로 넓었는데, 어느 정도냐면 평양에 존재하는 게이트 도시에서 유명시까지의 거리와 비슷하다고 하면 설명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