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녀오겠습니다.”
“조심해.”
요 며칠간 집사와 함께 영지를 둘러보며 발전에 대한 견적을 낸 김 실장은 유명시로 돌아가 필요한 자재와 인부들을 데리고 오기 위해 떠날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이제 나도 내 할 일을 조금 해볼까?”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괜찮겠어?”
“물론입니다.”
집사가 수배해 놓은 아다만티움 광산으로 출발해야 했지만, 룩산을 싫어하는 하임이 여정을 함께할 예정이었기에 조금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나저나 이건 왜 이렇게 안 깨어나는 거야?’
룩산과 함께 마수들이 기다리는 장소로 향하며 지금껏 관심을 두지 않았던 알에 대한 생각에 잠겨 들어갔다.
미호의 능력 덕분에 내 눈에만 보이는 커다란 알이 내 등 뒤에 떠다니고 있었다.
얼마 전 드래곤을 처리한 후에 얻게 된 알이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깨어날 생각이 없는지 아무런 반응도 없는 알.
처음 알을 얻었을 때 알 속을 스캔해 보았는데, 안쪽에 이미 드래곤의 새끼로 추정되는 생명체를 확인했고 성장 역시도 거의 끝난 듯 보였기에 조만간 부화할 거라 생각했지만, 몇 개월째 마력만 잡아먹고 있었다.
마력을 계속해서 흡수하는 거로 봐서는 문제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기에 더욱 답답할 따름이었다.
‘아! 몰라! 일단 내버려 두자.’
“뀨!”
어느새 마수들이 머무는 연무장에 도착한 나는 나에게 달려오는 하임을 보며 입을 열었다.
“미호야 바로 문 좀 열어줘. 외성 쪽으로.”
“끼웅!”
하임과 드잡이질을 하고 싶지 않았기에 바로 출발하기 위해 미호에게 입을 연 나는 마수들을 데리고 외성 밖으로 이동했다.
“일단 하임하고 뚱이, 미호만 같이 갈 거야. 니안이는 이 주변에서 마수들 좀 사냥하고 있어. 정수 챙기는 거 잊지 말고.”
마족에게도 정수의 가치가 마석의 수천 배의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최대한 많은 정수를 모으리 위해 주변을 돌아다니며 최대한 많은 마수를 사냥하라고 지시했다.
현지와 지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둘은 조금 달랐는데.
지안은 펜릴과 함께 마계를 돌아다니며 최상급 마수를 사냥해 오라 지시했고, 현지의 경우 돌아올 때를 대비해 미호의 분신과 함께 사냥을 나섰다.
“키릭-”
니안이 대답하는 것을 들은 나는 룩산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럼 이제 출발할까? 방향은?”
“일단은 이쪽입니다.”
“저쪽이래. 출발할까?”
“뀨!”
아다만티움을 구하러 간다는 걸 아는 하임은 기분이 좋아져서인지 룩산에 대한 관심을 끊어 버린 듯 보였다.
“출발!”
말이 끝나는 순간 주변 환경이 엄청난 속도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하임의 이동술로 인해.
* * *
“얼마나 멀길래 아직 반밖에 못 온 거야?”
하임의 이동술로 이틀이나 이동했음에도 이제 절반 정도 왔다는 룩산의 설명.
“이 정도면 그리 먼 수준은 아닙니다. 제가 공작의 영지에서 군주님이 계신 곳까지 오는데 최대한 빠르게 이동했음에도 2개월이 조금 넘게 걸렸으니까요.”
“마계가 그렇게나 넓어?”
“일곱 종족 중 마족이 가장 넓은 땅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들어서 알고 있긴 했다.
다른 종족의 경우 자신들의 특색에 맞는 땅을 차지해 살아가지만, 마족에게는 딱히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았기에 넓은 땅을 차지할 수 있었다는 것.
그럼에도 이건 너무 넓었다.
하임의 이동술은 시속으로 따지면 수천 킬로는 나올 거다.
웬만한 전투기보다 훨씬 빠를 뿐 아니라 이동에 제한이 없음에도 이틀 동안 반밖에 오지 못했다는 건 좀 어이가 없었다.
물론 중간중간 식사나 휴식 또는 방향을 확인하기 위해 자주 멈춰 서긴 했지만, 그럼에도 마계가 엄청나게 넓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마계라 불리는 동쪽 땅만으로도 지구보다 넓을지 모른다는 것.
아니 확실히 넓었다.
그것도 몇 배 수준이 아닌 수십 배 정도로.
하임의 이동 속도로 이 정도 시간 동안 지구를 돌았으면 벌써 한 바퀴는 돌고도 남았을 테니까.
군주들의 힘이 도대체 어느 정도길래 이렇게 큰 차원을 끌어올 수 있었을까?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너 괜찮아?”
“뀨!”
하임은 오랜 시간 이동술을 펼쳤음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다.
오히려 기분이 좋은 것 같았는데.
“그나저나 마수들이 정말 많네?”
이동하던 도중 느껴지던 마수들의 수는 장난이 아니었다.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계속해서 마수들이 느껴졌는데.
“모든 종족의 수를 합한 것보다 마수들의 수가 100배는 많을 겁니다.”
“그 정도야?”
“번식이 가능한 개체들이 끝없이 번식할 뿐만 아니라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존재들 역시 수없이 많기 때문에 많은 자가 마수들을 사냥하고 있음에도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늘어나는 실정입니다.”
억 단위.
그것도 수백억 단위는 될 것 같았기에 황당할 따름이었다.
하긴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개체뿐만 아니라 물조차 필요 없는 개체들이 존재하기에 당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그렇고 가만히 있으려니까 좀이 쑤시나 봐?”
“조금 그렇습니다. 가만히 있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인지 몰랐습니다.”
“그럼 가서 좀 놀다 와.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 거니까.”
“그래도 되겠습니까?”
하루가 지나자 룩산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는 것을 확인한 나는 그가 가만히 있는 걸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 대신 사고는 치지 말고.”
“감사합니다.”
“응?”
룩산이 움직이려던 순간 하임이 룩산의 몸을 타고 올라가 머리 위에 자리를 잡았다.
“넌 왜?”
“뀨!”
“너도 놀고 싶다고?”
“뀨!”
“허! 그래 다녀와라. 대신 룩산 괴롭히지 말고.”
“뀨!”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는 하임은 이어서 챙겨온 아다만티움을 움직여 룩산의 몸을 감싸버렸다.
“으헉- 응?”
전신 갑옷처럼 룩산의 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싸버린 아다만티움 덕에 놀란 룩산은 이어서 움직임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것을 깨닫고는 의문을 나타냈다.
“뀨!”
전방을 가리키며 소리친 하임과 그에 따라 움직이는 룩산을 보니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마치 로봇을 조종하는 하임을 보는 것 같아서.
“뚱아 우리는 밥이나 먹자. 미호야 너도 먹을래?”
-밥!
뚱이는 밥이라는 말에 기쁨에 찬 의념을 보냈고, 미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둘이 떠나는 모습을 보며 뚱이가 메고 있는 배낭에서 요리사가 만들어 준 볶음밥과 반찬 몇 개를 꺼낸 나는 이어서 뚱이가 먹을 고기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소고기부터 돼지고기, 닭고기에 양고기까지 200㎏이 넘는 고기들을 꺼내어 뚱이의 앞에 내려놓자 뚱이가 닭고기부터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참고로 뚱이가 맨 가방은 뚱이 전용의 음식들이었다.
소만 거의 100마리 가까이 들어가 있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고기들이 들어 있었는데, 사실 조금 걱정이었다.
한 끼에 소 한 마리 가까이 먹어 치우는 뚱이의 특성상 가지고 온 고기들로 이번 여정을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었기 때문이다.
‘안 되면 몬스터라도 먹여야지 뭐. 별수 있나?’
수석 주방장이 직접 만들어 준 볶음밥을 크게 한 숟가락 퍼서 입에 넣은 나는 꼭꼭 씹어 먹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나저나 볶음밥이 이렇게 맛있기 힘든데? 역시 수석 주방장이라고 해야 하나?
딱히 특색이 있어 보이지 않는 볶음밥이었지만, 이상하게 맛있었다.
집에서 평소 먹던 음식들에 비해 전혀 꿇리지 않는 수준.
김치도 맛있네?
집에서 먹던 식사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맛은 전혀 아니었다.
그 말이 정말인가?
모든 음식은 지붕을 없애는 순간 맛이 극도로 좋아진다던?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맛있는 식사에 만족하고 있을 무렵, 어디선가 커다란 굉음이 터져 나왔고, 이어서 먼지 폭풍이 밀어닥쳤기 때문이다.
“아! 이래서 밖에서 밥을 먹으면 안 된다니까?”
흙먼지가 잔뜩 들어간 볶음밥을 보던 나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리 좀 가서 찾지. 저기서 저러고 있네.”
멀지 않은 곳에서 연달아 충격파가 터져 나오는 것을 발견한 나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우걱우걱.
가까운 곳에서 싸우든, 먼지가 음식에 들어가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계속 고기들을 먹어 치우는 뚱이.
“이것도 너 먹어라.”
“우걱우걱? 우워!”
내가 내미는 볶음밥을 받아 들고는 그대로 입으로 밀어 넣는 뚱이를 보던 나는 살짝 궁금증이 들었다.
“할 것도 없는데 구경이나 갈까? 잠깐 다녀올 테니까. 먹던 거 마저 먹어.”
입맛이 사라진 나는 생각보다 길어지는 전투에 궁금증이 생겨 몸을 일으킨 후 전투가 벌어지는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잠시 이동하자 전투의 현장이 시야에 들어왔는데, 전투를 잠시 지켜보던 나는 당황한 채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최상급? 왜 최상급이 여기 있어?”
룩산이 전투를 벌이는 대상이 바로 최상급 마수였기에.
멀리 있을 때는 룩산과 마수, 하임의 기운이 뒤섞여 눈치채지 못했는데, 가까이서 확인해 보니 녀석의 기운이 룩산에 비해 조금이지만 더 강해 보일 정도였다.
쿵- 콰앙-
전투는 하임이 방어, 룩산이 공격을 담당하는 듯 보였는데, 이상한 건 타격에 비명을 지르는 것은 대부분 하임이 가끔 하는 공격이었다.
룩산의 공격을 당한 마수는 아무런 비명도 없었고, 상처 역시도 곧바로 회복했는데, 반대로 하임의 공격에는 큰 충격이 오는지 비명을 지르며 하임을 죽일 듯이 노려보기 시작했다.
“뀨? 뀨!”
하지만 하임은 그것을 다르게 받아들인 듯 보였다.
놀자는 표현으로 받아들였는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춤을 추듯 주변을 돌기 시작했고, 그에 마수가 더욱 열이 받는지 룩산의 공격을 전부 무시하고는 하임에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덩치가 10m 정도 되는 붉은 피부를 가진 녀석은 마치 영화나 게임에 나오는 발록 같은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는데, 얼마 전 죽음의 땅에서 보았던 상급 마수와 비슷한 생김새였다.
그놈하고 같은 종족인가?
정말 비슷하네?
생긴 건 비슷했지만, 무력에서는 큰 차이를 보이는 녀석.
하지만, 녀석의 공격은 그 어느 것도 하임에게 통하지 않았다.
아다만티움이란 사기적인 금속 때문에.
눈으로 붉은 레이저 같은 것도 발사해 보고 육체를 이용해 몸통 박치기도 했지만, 하임이 만들어내는 아다만티움 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녀석의 공격이 끝난 후 하임의 반격에 녀석이 당할 뿐이었다.
거기다 뒤에서 미친 듯이 대검을 휘두르는 룩산 덕분에 등 뒤에 달려있던 2쌍의 날개만 잘려나갔을 뿐이었다.
물론 금방 재생이 되었지만.
“크롸롸롸롸!”
화가 잔뜩 났는지 하임을 노려보는 두 눈이 빨갛게 물들었지만, 녀석에게는 하임의 방어를 뚫을 방법이 없었다.
쾅-
이어서 보락색의 거대한 주먹이 분노의 외침을 터트리던 녀석의 몸통을 강타했고, 그 덕분에 녀석이 멀리 튕겨 나가며 나를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내 앞에 녀석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엥?”
다행히도 녀석은 큰 충격을 받았는지 바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고, 그에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녀석에게 지배를 걸어보았다.
생각과 동시에 의지가 샘솟으며 녀석을 향해 뻗어 나가는 파괴의 마력.
다급한 순간은 아니었다.
어차피 내 어깨 위에는 미호가 있었으니까.
“이렇게 쉽게?”
파괴의 마력이 녀석을 순식간에 지배해 버리는 것을 확인한 나는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 확인한 전투와 뿜어내는 마력만 봐도 녀석이 룩산 보다 강하다는 걸 알 수 있었기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내 의지력이 강해졌다고 해도 눈앞의 녀석 정도면 심하게 반발해야 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어이없을 정도로 녀석은 쉽게 나의 지배를 허락했다.
“군주님?”
“뀨!”
“이놈 뭐야? 뭔데 이렇게 쉬워?”
“홍마족입니다.”
“홍마족? 그게 뭔데?”
“군주님의 지배를 받은 마족들이 군주님이 사라진 후 바하무트의 사념에 잠식되면서 변하게 된 존재들이죠.”
“그래서 그렇게 쉽게? 응?”
난 지배의 군주가 아닌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그놈도 분명 내가 지배의 군주가 아니라고 했는데?
“홍마족의 경우 자아라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군주님이 사라짐과 동시에 혼란에 빠진 자들이 정식적으로 문제가 생기면서 바하무트의 사념에 취약해져 변해 버린 것이니까요.”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능만 있다는 소리야?”
그래서 이렇게 쉬웠던 건가?
“그렇습니다. 그것도 소멸에 대한 본능만 존재할 뿐이죠.”
“그건 무슨 소리야?”
“자아의 충돌 때문이죠. 군주님을 배신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자아를 지워 버리고 소멸만을 바라며 움직이는 존재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룩산의 말에 나 역시도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난 지배의 군주가 아니지만, 분명히 같은 힘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
내가 사라지면 내 지배에 걸린 마수 혹은 현지와 지안이도 이렇게 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구, 군주님을 뵙습니다!
“응? 너 누구야?”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사이 누군가 나에게 의념을 보냈고, 그에 고개를 돌린 나는 처음 보는 마족을 발견했다.
분명 이 자리에는 우리 일행과 홍마족이 있었는데, 어느새 홍마족이 사라지고 처음 보는 마족이 나타난 것.
무릎을 꿇은 채로 머리를 바닥에 찍은 얼마 전 자주 보았던 자세로 말이다.
“군주님. 그 홍마족입니다. 군주님의 힘 덕분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정말?”
“네.”
“네가 그 홍마족이라고?”
-그렇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감히 군주님을 배신한 죄 소멸로 죗값을 치르겠습니다. 다만 군주님을 다시 뵈어 너무, 너무…….
감격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가지 못하는 녀석을 보며 한숨을 내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멸은 됐고, 군주라고?”
-네? 배신의 죄를 물으심이.
“그건 됐다니까? 그나저나 내가 군주가 확실해?”
-다, 당연한 말씀을 하십니다. 저를 원래대로 돌려주실 수 있는 분은 군주님뿐이십니다.
호오- 이것 봐라?
그러니까 내가 군주든 아니든 같은 힘을 사용하는 이상 홍마족이란 놈들을 이렇게 쉽게 지배할 수 있다는 거잖아?
이거 홍마족을 찾으러 다녀야 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