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6화 (156/214)

-이봐!

가슴 깊은 곳에서 방 하나 얻어 살아가는 또 다른 나를 만나기 위해 정신을 집중한 나는 금방 녀석을 볼 수 있었다.

내 부름에 새하얀 공간에서 홀로 가만히 앉아 명상하듯 눈을 감고 있는 녀석의 눈이 떠졌고, 나에게 고개를 돌린 녀석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더는 이곳에 오지 말라 했지만, 녀석도 쓸쓸하긴 했나 보다.

미소를 짓는 걸 보니.

-무슨 일이지? 분명 다시 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말이야.

-뭐가 궁금하지?

-너. 저번에 내가 지배의 군주가 아니라고 했었지?

내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

-그걸 또 물어보려고 이곳에 온 건가?

-정말로 내가 지배의 군주가 아니야?

-아니다.

단호하게 말하는 녀석이었지만, 이번에는 쉽게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이유는?

-이유를 묻는 다라? 확신을 가지고 있는 거냐? 네가 지배의 군주라는?

-확신은 아니야.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이상해서 말이야. 같은 힘을 사용한다는 건 그렇다 쳐도 그의 수족이라고 불리는 자들마저 나를 지배의 군주라 생각한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아서 말이야. 그들은 어째서 나를 지배의 군주라 생각하는 거지?

-네가 방금 말하지 않았나? 같은 힘을 사용한다고.

아무리 봐도 이놈은 지금 나에게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느낌이라고 할까?

녀석의 의념이 전해질 때마다 다른 무언가가 함께 전해졌는데, 뭐랄까? 감정의 파편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비슷한 것이 조금씩 나에게 흘러들어오는 것 같았다.

-맞아. 같은 힘을 사용하지. 지배의 군주만이 사용할 수 있는 힘을 말이야.

-지배라는 힘이 그에게만 한정된 힘이라고 어떻게 단정 짓지?

-네 말도 맞아. 아무리 위대한 능력이라고 해도 같은 능력을 사용하는 자가 존재할 수는 있는 거니까. 그래서 너에게 부탁을 하나 하려고 해. 개인적으로 꼭 들어줬으면 하는 부탁이야.

만약 녀석이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어느 쪽으로든 결론이 나리라.

-부탁?

-그래.

-말해봐. 일단 들어보고 결정하지.

-네가 품고 있는 기억을 보여줬으면 해.

봉인된 기억.

내가 자신을 둘로 나누었고, 녀석을 봉인함으로써 기억까지 봉인한 이유는 분명 가볍지 않으리라.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지금 상황은 최악이라고 해도 될 만큼 암울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봉인이 풀릴지도 모르는 바하무트.

녀석을 막아야 하는 군주라는 자들의 부재.

이건 마계뿐만 아니라 지구까지도 멸망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지금 나에겐 힘이 필요했다.

분명 녀석은 내가 지배의 군주에 비해 꿇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 말은 기억을 얻음으로써 완전한 힘을 얻는다면 지배의 군주에 비견되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뭐라고?

-내가 봉인했다는 그 기억을 보여달라고.

-보여달라고? 기억을?

-맞아. 기억을 전부 보여줘.

솔직히 내가 지배의 군주이건 말건 상관없었다.

핑계에 불과할 뿐 진실 따윈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그저 힘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만약의 상황에 대비할 수 있는 강한 힘이.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후회?

-그래. 넌 분명 기억을 보게 되면 다시 기억을 봉인하려 할 정도로 큰 후회를 하게 될 것이다. 아니, 정신이 나가려나?

그 정도라고?

도대체 어떤 기억이길래?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저 전생의 기억일 뿐인 것으로 후회를 하게 된다고?

그것도 정신이 나가버릴 정도로?

설마 내가 전생에 극악무도한 존재였나?

-어지간히도 두려운 모양이구나. 감정의 통제조차 제대로 못 하는 걸 보니.

내가 아무런 말도 없이 가만히 멈춰있자 녀석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뭐?

-네놈의 감정이 흔들리면서 너의 감정과 생각이 모두 나에게 흘러들어온다는 말이다.

-아!

저번처럼 생각을 잃지 못하는 것에 조금 의문이 들었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던 거야?

감정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면 녀석에게 내 생각이 그대로 전달이 되는 모양이었다.

아마 그건 녀석도 마찬가지일 테지만.

-그나저나 그런 거였나? 기억이 아닌 힘이 필요한 거였군.

-맞아. 힘이 필요해. 지금이야 문제가 생기지 않겠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고 구걸이라도 할 수밖에.

-그거라면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군.

-도움을 준다고?

-그래.

-어떻게?

-아주 간단하다. 힘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주면 되니까.

힘을 사용하는 방법?

그런 것이 있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나에게 힘을 사용하는 방법은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기에 의문이 들었다.

더욱 많은 양의 파괴의 마력을 사용할 수 있거나 의지를 키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 보였으니까.

-멍청한 놈. 너의 능력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또다시 감정이 흔들린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단순하지 않다고?

-무슨 말이지?

-너는 그 힘을 파괴의 마력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지만, 그것은 지배의 힘이다.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힘.

-전지전능이라고?

-그렇다. 겨우 생명체 따위를 지배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란 말이지.

이게 무슨 소리지?

그럼 또 뭘 지배할 수 있다는 거야?

녀석의 말에 의문에 잠겨있던 그때 녀석의 말이 이어졌다.

-그 힘은 네놈이 말하는 마력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세상의 법칙까지도 지배할 수 있는 힘이란 말이다.

-법칙이라니? 그게 가능하다고?

-당연하지. 애초에 그런 능력이었으니까. 물론 지금의 넌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하겠지만.

녀석의 말은 너무 허황된 이야기였다.

법칙을 지배한다니?

쉽게 풀어서 이야기한다면 온도가 내려가면 추워야 정상이었고 온도가 올라가면 더운 것이 바로 세상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법칙을 지배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말 그대로 신이었다.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신.

-놀라운가?

-당연한 소리를 하네. 신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말인데 안 놀라겠냐?

-지금의 넌 불가능하다니까?

-그렇겠지. 하지만 언젠가는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말이잖아?

녀석은 분명 지금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소리였기에 일말의 희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되면 바하무트를 신경 쓸 필요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심하군.

-뭐가?

-너와 같은 힘을 사용하던 지배의 군주조차 실패한 일이다. 가능할 것 같은가?

‘어? 그렇네?’

지배의 군주는 아마도 이 힘의 완성형을 가지고 있었을 거다.

그런 존재조차도 실패한 일이란 소리는 내가 힘을 완성하더라도 녀석을 홀로 어떻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잠깐만? 뭔가 이상한데?

군주들은 원래 바하무트를 쉽게 상대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지 않았나?

달만 한 거대 균열을 막기 위해 큰 힘을 소모하는 바람에 힘들어진 거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럼 나는 가능할 수도 있는 거 아니야?

-그런데 말이야. 그거 어떻게 하는 거야?

나는 이어가던 생각을 멈추고 녀석에게 방법을 물었고, 녀석은.

-알아서 잘 생각해 보도록. 충분한 힌트를 주었으니.

-뭐?

나에게 알아서 하라며 모습을 감춰 버렸다.

-야! 어디 갔어!

새하얀 공간에서 혼자 남겨진 나는 녀석을 찾기 위해 한참을 소리쳤지만, 녀석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나에게서 모습을 숨기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처음 안 나는 많이 당황했고,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심각한 부작용을 안고.

* * *

“이제 괜찮으시죠?”

“어. 괜찮아.”

돌아온 나는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모든 사람에게 짜증을 내며 돌아다녔다.

조용히 방 안에 가만히 있었으면 그나마 괜찮았겠지만, 짜증을 낼 상대를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닌 것이 문제였다.

거기다, 나의 그런 모습을 목격한 김 실장의 반응이 대박이었다.

김 실장을 발견하고 크게 소리친 나는 김 실장에게 성큼성큼 걸어갔고, 이어서 쌍욕을 내뱉으며 일의 진행 상황을 물었다.

나의 이상행동에 조금 당황한 김 실장은 금방 놀란 표정을 감추며 내 물음에 답했지만, 계속해서 신경질과 짜증, 욕설을 내뱉는 나를 보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그리고.

“설마 예전의 도련님으로 돌아가시려는 겁니까?”

“뭔 X소리야! X발!”

“제발 다시 생각해 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지금의 도련님을 모시는 것이 행복합니다.”

“미쳤어? 뭔 X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집사라는 자리가 마음에 들어 회장님의 비서실장 자리도 내놓은 상태입니다. 앞으로 도련님의 집사로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저에게 도련님께서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그 당시 김 실장의 말을 들은 나는 짜증이 폭발하는 상태였음에도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 이후로 한마디도 하지 못한 나는 그대로 등을 돌려 김 실장에게서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부작용으로 인해 짜증이 폭발할 뿐만 아니라 모든 일이 내 맘대로 흘러가야 직성이 풀리던 내가 김 실장으로부터 도망을 친 것이었다.

“지안아. 김 실장이 그때 분명 집사를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사실이야?”

“네? 저는 처음 듣는데요?”

“저는 들었어요! 앞으로 집사님이 되시겠대요!”

지안은 모르는 일인지 고개를 갸웃했고, 현지가 대신 대답했다.

내가 부작용 때문에 주변에 피해를 끼치던 그때 현지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몸을 숨긴 채 나를 따라다녔기 때문에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직접 들었어?”

“네. 회장님께 사표를 내셨대요.”

“정말로? 왜?”

“회장님께 집사를 시켜달라고 했다는데요?”

“그러니까 왜?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그거야 저도 모르죠. 그냥 물어보니 그렇게 알려주셨어요.”

이유가 뭘까?

내 생각으로는 김 실장의 보직이 집사가 된다고 해도 하는 일이 변할 것 같지는 않았기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가서 김 실장 좀 불러와.”

“네.”

대답과 함께 방문을 열고 나간 현지는 금방 김 실장을 데려왔다.

“도련님.”

“내가 정신이 나가 있는 동안 이상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사실이야?”

“정신이 나가 있었다는 말은?”

“있어, 그런 게. 그나저나 사실이냐고?”

“사실입니다.”

“왜? 왜 갑자기 집사가 되겠다는 건데?”

나는 김 실장이 비서실장이든 집사이든 상관없었다.

지금처럼 일만 잘해준다면 말이다.

다만, 조금 궁금할 뿐이었다.

“몇 년 전부터 생각해 오던 것에 대한 답을 찾은 것이죠.”

“답? 무슨 답?”

“저도 나이가 드는지 요즘 들어 깜빡깜빡합니다. 거기다 요즘에는 한 번에 많은 일을 처리하는 것이 힘에 부치기도 하고요. 그래서 이제는 회사 일은 그만두고 회장님과 도련님 그리고 두 분 아가씨를 모시며 살고 싶어졌습니다. 물론 집사교육 역시 차차 받을 생각입니다.”

김 실장의 이야기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충분히 힘들만 했으니까.

김 실장은 그동안 너무 많은 일을 해 왔다.

집사교육을 받겠다고 했지만, 김 실장은 이미 집사의 일을 완벽하게 하고 있었고, 회사까지도 김 실장이 없으면 돌아가지 않을 정도였기에 충분히 힘들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안의 대소사는 물론 회사까지 완벽히 챙겨온 김 실장.

이제 그는 조금은 내려놓고 싶은 모양이었다.

“김 실장이 집에 들어오게 된 것이 전에 계시던 집사님이 나가면서부터였지?”

“그렇습니다.”

분명 어렸을 적에는 김 실장 말고 집사가 따로 있었다.

형수님의 아버지가 바로 전 집사님이었는데, 형과 형수님의 사이를 아신 아버지의 분노로 집사님께서 그만두셨고, 그 때문에 잠시 김 실장이 그 자리를 대신하다가 그대로 굳어버린 것으로 알고 있었다.

김 실장이 일을 너무 잘했기 때문에 아버지는 따로 집사를 구할 생각을 하지 않으셨으니까.

“그래서. 아버지는 뭐래?”

“처음에는 만류하셨지만, 허락해 주셨습니다.”

“아버지가?”

“네. 아직은 조금 부족하지만, 조금만 더 교육이 된다면 저를 대신할 인재가 있으니까요.”

“김 실장을 대신할 인재가 있다고?”

이건 솔직히 조금 놀라웠다.

김 실장을 대신할 수 있는 인재라니?

물론 있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인재를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 생각해 본다면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아직 입사한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저를 대신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신입사원이란 말이야?”

“그건 아닙니다. 이제 3년 차 정도 되었으니까요.”

“누군데? 내가 아는 사람이야?”

“제 조카 녀석입니다. 어렸을 적 제 형님 되시는 분, 그러니까 그 아이의 양친이 모두 사고로 죽은 후 제가 맡아서 키운 아이라 그런지 영특한 편입니다. 그동안 제 일을 많이 도와주었을 정도로 뛰어난 녀석입니다.”

김 실장이 맡아서 키운 아이라면 분명 나도 봤어야 정상이었다.

내가 알기로 김 실장은 집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기에 분명 그 조카라는 아이는 우리 집에서 자랐을 게 분명했으니까.

“설마 밖에서 키운 거야?”

“아닙니다. 도련님도 어렸을 적에 자주 보셨을 겁니다. 어린 나이에 시중을 들던 아이를.”

“응? 나 어렸을 적이라고? 아!”

내가 10대 초중반이었을 때 잠깐 일을 하던 어린 여자가 하나 있었다.

나보다 기껏해야 두 살 정도 많아 보이던 여자가 메이드 복을 입고 집안을 돌아다닌 적이 있었는데.

“도대체 왜 그런 거야?”

분명 당시의 나도 그녀를 보며 황당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일을 할 나이로는 보이지 않았고, 대부분 일을 하시는 분들의 나이가 30대 이상이었기에 더욱 그 여자를 이상하게 바라봤었다.

“회장님 명령이셨습니다.”

“설마 나도 형처럼 될까 봐 걱정하셨던 거야?”

“그렇게 생각하신 모양입니다.”

“너무 나가셨네. 근데 왜 갑자기 안 보이게 된 건데? 몇 년 안 있었던 거 같은데?”

“잠시 유학을 보냈습니다. 아이가 워낙 영특해서 직접 가르치고 싶었지만, 아시다시피 제가 시간이 많은 편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김 실장 조카가 이제 김 실장의 자리를 대신하는 거야?”

“아닙니다. 회장님께서 직접 지켜보시고 결정을 하겠다 하셨습니다. 그 덕에 당분간은 비서실장으로 지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잘 되길 빌게.”

“감사합니다.”

나야 김 실장이 집사든 비서실장이든 상관이 없었다.

다만 집사가 된다면 좀 더 이쪽 일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기에 집사 쪽으로 조금 더 마음이 기울긴 했지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