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모르니까 계획한 대로 움직이자.”
“네.”
-네.
거창한 계획은 아니었다.
그냥 주변을 정찰하다가 홍마족을 발견하면 신호를 보내 모인 다음 살짝 힘을 보여 유인한 후 지배하는 것이 다였으니까.
처음에는 내 힘을 드러내고 홍마족을 유인할 생각이었지만, 그 계획은 너무 큰 위험을 동반할 수도 있었기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한 둘이 내 힘에 끌려 이곳을 향한다면 상관이 없을지도 몰랐지만, 만약 그 수가 셋 혹은 넷 이상이 되어버릴 경우, 정말 큰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아무리 내 힘에 이끌리는 존재라고 해도 이성이 없는 존재였기에 위험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고, 루시안 역시도 그리 생각하는 듯했다.
홍마족이었던 루시안은 분명 나에게 향하는 것이 목적이긴 했지만, 딱히 어떤 것을 하려 했는지는 정작 자신도 모르는 상태였다고 한다.
그 말은 나에게 향한 후 공격을 할지도 모른다는 말이었기에 더욱 조심해야만 했다.
“그나저나 부단장이 둘이나 있다고?”
-그렇습니다.
“정말 그들이 그렇게 강해?”
-물론입니다. 그 둘이라면 단장조차 모든 힘을 사용하고도 승리를 점칠 수 없을 정도이기에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대공과 비슷한 수준의 단장이 쉽사리 승리를 점칠 수 없다라? 대단하긴 하겠네?”
만약 그 둘을 얻는다면 더는 영지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질 거다.
설령 대공이라 해도 함부로 도발하지 못할 정도는 되었기에 더욱 걱정이 없어질 테니 앞으로 내 힘을 성장시키는데 걸리적거릴 건 없어지겠지.
근데 왜 나는 대공이란 자가 신경 쓰이는 걸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분명 언젠가는 부딪히게 될 거라는 이상한 예감 같은 것이 자꾸 고개를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건지, 무엇 때문에 자꾸 그가 신경 쓰이는 건지,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했기에 조금 답답하긴 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와 언젠가는 대립하게 될 것이란 확신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꾸만 고개를 들었기에 더욱 황당할 뿐이었다.
“지안이와 펜릴은 공중. 루시안과 현지는 계획대로 정해진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홍마족을 찾아보고.”
“네.”
“네.”
-네.
펜릴과 함께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지안은 금방 시야에서 사라졌고, 루시안 역시 왼쪽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현지는 언제 은신을 사용했는지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그렇게 모두가 떠난 후 나는 하임과 함께 정면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느껴지는 기운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그렇게 잠시 시간이 지난 후.
‘이건 마수고. 이것도 마수고. 응? 이건 뭐지?’
주변의 기운을 느끼며 천천히 이동하던 나는 특이한 기운을 하나 발견했다.
마수라고 하기에는 너무 약한 기운일 뿐만 아니라 느껴지는 기운의 색이 너무 밝았다.
딱히 신경 쓸 필요는 없어 보였지만, 궁금증에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천천히 이동한 나는 그곳에서 거대한 비석 같은 것을 발견했다.
난쟁이족의 그림이 잔뜩 그려져 있는 이상한 비석을.
“뀨! 뀨뀨뀨!”
“그래. 너랑 똑같네.”
그림과 자신을 번갈아 가리키는 하임을 보며 대답한 나는 이어서 비석을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아무래도 이 비석은 난쟁이족이 세운 비석인 모양이었다.
많은 난쟁이가 그려져 있었고, 그 난쟁이의 꼭대기에는 군주를 표현한 듯 보이는 난쟁이가 그려져 있었다.
내용을 유추해보기로는 난쟁이족의 일상을 담은 그림인 듯 보였다.
그나저나 이 비석은 어떻게 멀쩡할 수 있는 거지?
느껴지는 기운이 너무 밝았기에 마수들은 이 비석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 거다.
분명 발견했다면 부숴 버렸을 것이 틀림없었기에 멀쩡히 자리를 잡고 있는 비석의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관리를 하는 난쟁이가 주변에 있는 걸까?
그나저나 이거 되게 이상하네?
마치 하임과 임프들의 모습을 그려 놓은 것 같잖아?
모습이 조금 다르긴 했지만, 분위기가 정말 비슷했다.
밝은 표정을 짓는 하임과 주변에서 신나게 뛰어노는 임프들의 모습을 자주 보았던 나로서는 정말 비슷하다는 생각을 감출 수 없었는데, 하임 역시 마찬가지인 듯 그림에 나오는 난쟁이족의 군주와 똑같은 미소를 지으며 그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임프들 생각나서 그래?”
“뀨!”
고개를 끄덕이는 하임을 보자 이번에 돌아가면 임프들을 영지로 이주시키는 것을 앞당기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했다.
임시로 평양 신도시의 숲 한편에 자리를 잡고 살아가는 임프들.
지금껏 임프들을 너무 많이 부려먹어서 조금 쉬게 해주고 싶었기에 영지의 일에 끌어들이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어차피 임프들을 영지에 정착하도록 할 생각이라면 빠른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 너 뭐 하냐?”
마치 노래를 부르듯 뀨뀨 거리는 하임은 어느새 땅바닥에 쪼그려 앉아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비석의 그림과 똑 닮아있는 그림이었다.
마치 비석의 그림을 하임이 그렸다고 해도 될 정도로 똑같은 그림체의 그림.
물론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처럼 조잡한 수준이긴 했지만.
“뀨! 뀨뀨!”
“이럴 때는 그냥 의념으로 말해줄래?”
-똑같아!
자신이 그린 그림과 비석의 그림을 비교하며 의념을 보낸 하임.
“그래. 똑같네.”
내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하임은 이어서 의념을 보냈다.
-왜 똑같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냐?”
내가 모르는 것이 없을 거라 생각하는지 하임은 자주 이런 식의 질문을 던졌다.
-왜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며 왜 모르냐고 묻는 하임을 보자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모르니까 모르지.”
-그럼 알아와.
“어디서?”
-저기서.
“저기? 응?”
하임이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숨어 있는 난쟁이를 하나 발견했다.
다만 조금 특이한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주름과 긴 수염이었다.
늙은 난쟁이족?
솔직히 말하면 너무 안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그나저나 정말 숨는 기술이 뛰어나긴 하네.’
누군가 숨어있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나였기에 난쟁이족의 숨는 기술이 대단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하임은 진작에 눈치를 채고 있었는지 늙은 난쟁이족에게 뚜벅뚜벅 걸어가 의념을 보냈다.
-누구야? 왜 보고 있던 거야?
-신기해서 보고 있었다.
-신기해? 뭐가?
-옛 기억과 너무 똑같은 모습이 신기했다.
옛 기억과 너무 똑같은 모습이라?
-그게 뭐지?
의문이 든 나는 직접 난쟁이에게 물어봤고, 그는 잠시 멈춰서 뭔가를 회상하는 것 같더니 입을 열었다.
-그런 게 있다. 그나저나 너희는 누구냐?
대답해 주고 싶지 않은 모양인지 대뜸 이쪽의 정체를 묻는 난쟁이.
-내가 먼저 누구냐고 물어봤는데?
갑자기 하임이 나서서 난쟁이를 보며 의념을 보내는 것을 보며 조금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임은 이상하게 의념을 보내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아니 싫어한다기보다 귀찮아한다고 해야 할까?
아무래도 생각이라는 것을 해야 하는 것 자체를 기피하는 것 같았다.
-너는 참으로 특이하구나. 다른 종족과 함께 다니는 것도 그렇고 다른 종족의 편을 드는 것도 그렇고.
-나 특이해?
늙은 난쟁이의 말에 나를 올려다보며 묻는 하임.
“어. 너 엄청 특이해.”
-와! 나 특이해!
분명 좋은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지만 하임은 그저 좋아할 뿐이었다.
-우리는 잠시 이곳에 일이 있어서 들린 여행자라고 하면 되려나?
-여행자라? 정말 똑 닮았군.
-아까부터 누구를 닮았다고 하는 거지?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저것을 관리하는 자다.
뭔가를 말하려던 난쟁이는 비석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 비석을 관리한다고?
솔직히 말하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런 비석 따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저것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이라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솔직히 이곳의 종족들에게 역사적 물건이 중요할 거란 생각은 들지는 않았다.
내가 듣기로는 마계의 종족들은 역사적 물건에 가치를 매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 특별한 것들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예를 들어 군주의 물건 같은?
-그렇다.
-저 비석이 뭔데?
-우리 난쟁이족의 보물이지.
-저게?
난쟁이족의 보물이라면 설마?
-우리의 신께서 우리를 위해 남겨둔 유일한 보물이다.
-난쟁이족의 신이 저걸 만들었단 말이야?
-그래. 우리를 위해 남겨주신 특별한 것이다.
듣고 나서야 저 비석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 난쟁이족의 신이란 자는 저 어둠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며 난쟁이족에게 슬퍼하지 말란 의미로 비석을 만든 모양이었다.
난쟁이족의 신이 난쟁이족을 얼마나 아꼈는지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그들의 잘못 때문에 자신이 희생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들을 걱정해 저런 것을 남겨두었다는 것은 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과연 신이란 말인가?
인간인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였다면 어땠을까?
과연 그처럼 저렇게 밝은 에너지를 담은 비석을 남겨둘 수 있었을까?
아마 나였다면 비석은커녕 다른 신들과 함께 난쟁이족에게 벌을 내렸을지도…….
그 정도로 힘든 결정이었다.
억겁의 시간 동안 자유를 빼앗겨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신이라도 견디기 어려웠을 테니까.
-그나저나 신이 만든 비석이 왜 관리가 필요할 정도로 약한 거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신이 만든 비석이 지나치게 약하다는 사실에.
아주 조금의 힘만으로도 얼마든지 부수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약한 비석.
설마 난쟁이에게 내리는 벌인가?
-처음에는 이렇지 않았다. 같은 신들이 아니라면 조금의 흠집도 내지 못할 정도로 강대한 힘을 품고 있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점차 품고 있던 힘이 소모되어 결국 이렇게 변해버린 것이지. 처음부터 관리해야 했건만, 영원할 줄 알았던 신의 힘이 마수들에 의해 조금씩 깎여 나가면서 결국에는 이렇게 변해 버렸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방치했다는 말인가?
아마 난쟁이족은 마수들이 하는 짓거리들을 보며 신의 위대함을 계속 되뇌었을 거다.
그러다 힘이 점차 약해진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관리를 시작했겠지.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관리했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노심초사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비석을 보며 이야기하는 난쟁이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뀨!”
“응?”
나와 난쟁이의 대화를 가만히 듣기만 하던 하임이 갑자기 비석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곤 비석에 손을 데고 마력을 끌어올렸고, 이후 비석에서 느껴지던 힘이 급속도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2배 이상 증가했던 힘이 금방 10배가 되었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순식간에 100배를 넘어설 정도로 증폭해 버리는 모습에 당황했던 나는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맞아. 난쟁이족은 강화가 가능하잖아?
하임이 지금 하는 것처럼 강화하면 되었던 거 아니야?
하지만, 난쟁이의 반응은 나와는 달랐다.
경악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커다랗게 벌린 채 눈을 계속해서 비비는 난쟁이.
-어, 어떻게?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한 일을? 설마? 아! 그, 그랬구나. 내 착각이 아니었어!
혼잣말을 내뱉던 난쟁이의 두 눈이 점차 붉게 변하기 시작했고, 이어서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뭐야?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데?’
기쁜 미소를 지은 채 눈물을 뚝뚝 떨구는 난쟁이를 보며 묻고 싶은 것이 잔뜩 생겨났지만, 희열에 가득 찬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에 조금 기다리기로 했다.
진정이 될 때까지.
-왜 울어? 때렸어?
“안 때렸거든.”
비석을 강화한 하임은 난쟁이의 모습을 보곤 고개를 갸웃하며 물어왔다.
-왜 웃는데 울어?
“좋아서 눈물이 나는 거지.”
-어떻게?
“그런 게 있어. 너무 좋으면 눈물이 나는 경우가.”
-나는 안 그런데?
“너 오늘 조금 이상하다? 의념 보내는 거 싫어했잖아?”
“뀨!”
내 말에 곧장 뀨뀨 거리기 시작하는 하임.
지금은 저러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았기에 일부러 사실을 상기시켜주었다.
-이제 조금 진정이 되었나?
-그, 그렇다.
나와 하임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던 난쟁이의 모습에 묻자 긴장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한 난쟁이.
-그럼 이유도 알려줄 수 있나?
비석이 강화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이 아닐 거란 이상한 확신이 들었기에 이유를 물어보았는데.
-지금껏 신께서 남겨주신 보물을 강화한 난쟁이는 없었다. 많은 난쟁이가 시도해봤지만, 그 어떤 난쟁이의 힘도 받아들이지 않았었지. 당연히 기쁠 수밖에.
-아닌 거 같은데?
충분한 이유이긴 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었다.
이 난쟁이는 지금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 하임에 대해 뭔가를 알아차린 것이 틀림없어.
확 지배해 버릴까?
-저, 정말이다. 곧 사라질 거라 생각했던 보물이 사라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기뻤을 뿐이다.
내 눈빛에 당황했는지, 급히 의념을 보내는 난쟁이를 보자 의문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확실해?
-저, 정말이라니까.
진짜 확 지배해 버려?
만약 이 난쟁이가 하임에 대해 뭔가 알아챈 것이 있다면 들어야만 할 필요가 있었다.
하임은 정말 특별했으니까.
아니 특이하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하임은 정말 이상했다.
다른 마수들뿐 아니라 같은 종족들과도 달랐기 때문인데.
정말 황당한 이야기지만, 하임은 내 지배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를 따라다니고 있을 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만들었다.
분명 내 명령을 듣긴 하지만, 뭔가 좀 달랐다.
뭐랄까? 명령이 아닌 부탁을 들어주는 느낌이라고 할까?
내가 이것을 느낀 것은 처음 하임을 지배했을 때부터였다.
갑자기 튀어나온 존재.
지배했는지조차 모르던 존재.
분명 나와 연결된 것은 틀림없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느낌을 자주 받았었다.
‘대표님, 찾았어요!’
“응?”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늙은 난쟁이를 보던 그때 지안에게서 연락이 왔다.
하필 지금!
조금만 더 있다 찾아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지만, 이미 찾은 건 어쩔 수 없었다.
‘금방 갈게. 조금만 기다려!’
‘네.’
-어디 숨지 말고 기다려. 금방 올 테니까.
지배의 마력을 퍼트리며 녀석을 협박하듯 말한 나는 녀석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 그러지.
“하임아. 가자.”
“뀨!”
난쟁이의 대답을 들은 나는 하임을 데리고 지안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빠르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최대한 빠르게 홍마족을 지배한 후 다시 이곳을 찾아오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