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단장 크림슨이 군주님을 뵙습니다.
눈을 뜬 부단장은 급히 몸을 일으켰고, 주변을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는 듯 행동했다.
이어서 나를 발견하고는 빠르게 다가와 부복했다.
“그래.”
-군주님께서 분명 저희를 다시 찾으실 거란 희망을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힘들 텐데 조금 쉰 후에 이야기하자.”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으니까. 조금 쉬어.”
사실 내가 너무 힘들었다.
의지력이야 그렇다 쳐도 내 마력이 고갈 직전이었다.
마력이 많이 필요할 거란 예상은 했지만, 고갈 직전까지 갈 거라곤 예상하지 못한 나에겐 휴식이 절실한 상태였다.
얼마 전 깨달음을 얻고 마력이 큰 폭으로 상승했기에 이제 마력이 부족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건 내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마력이 조금만 부족했으면 지배에 실패했을지도 몰랐으니까.
이럴 때 미호가 있었으면 참 편했을 텐데.
미호 대신 데려온 분신은 현실조작능력을 사용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미 사라지고 없는 상태였는데, 그 이유는 바로 2차로 데려올 자재들과 인부들 덕분이었다.
생각보다 인원이 많고 들여올 자재들이 많은지 갑작스럽게 분신까지도 필요하다는 연락이 와 분신은 돌려보낸 상태였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인부와 자재를 실어 날라야 했기에 분신까지 동원되어야 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구, 군주님!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사이 나를 부르는 라구스의 급박한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응? 왜?”
라구스의 뒤로 보이는 크림슨을 보자 라구스가 왜 나를 불렀는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는데, 크림슨의 표정을 봐선 전의 상황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사, 살려주세요!
살려달라고 할 정도로 화가 많이 난 건가?
살벌한 미소를 지으며 내 등 뒤에 숨은 라구스를 노려보는 크림슨.
-군주님께서 말려 주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그럼 빨리 좀 말려 주세요. 이러다 제가 죽게 생겼다고요.
“설마 죽이기야 하려고?”
-이놈! 군주님의 휴식을 방해하지 말고 냉큼 이리로 오지 못하겠느냐!
-말했잖아요! 저도 이성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요!
-그렇다고 해도 용납하지 못할 일이다! 어디 감히 자식이 아비를 팬단 말이냐!
‘헉! 라구스의 아버지가 크림슨이었어?’
만약 저 말이 진실이라면 내가 참견하는 건 조금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정말 크림슨이 너의 아버지야?”
-그, 그렇긴 한데…….
라구스의 긍정에 나는 이 일에서 손을 떼기로 마음먹었다.
아버지가 설마 자식을 죽이기야 하겠냐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럼 난 몰라. 아비가 자식을 훈계하겠다는데 내가 무슨 권리로 그걸 말리겠어?”
-하, 하지만…….
“다만! 크림슨. 적당히 해. 너무 심하게 하지 말라는 소리야.”
-알겠습니다.
내 말에 대답한 크림슨은 이어서 내 등 뒤에 숨어 있는 라구스의 귀를 잡고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귀를 잡힌 채 끌려가는 라구스는 날 원망하며 울상을 지었다.
그나저나 대단한 집안이네?
아버지가 마계 최고의 기사단 부단장에 아들이 서열 7위라?
그 정도면 명문 중에서도 명문이라 불려도 부족할 정도였기에 조금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계에서 핏줄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인간들이 흔히 말하는 호랑이의 자식이 X새끼 일리 없다는 말은 인간보다는 마족에게 더욱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저 둘. 사이가 정말 안 좋아요. 저도 처음 봤을 때는 둘이 원수인 줄 알았어요.
둘의 모습을 구경하던 내게 다가온 코넬리아가 의념을 보냈고, 그에 의문이 생겨난 나는 코넬리아를 향해 물었다.
“무슨 말이야?”
-처음 라구스가 기사단에 들어왔을 때 부단장의 반응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올 정도로 가관이었어요. 거기다 그 이후부터 아무런 이유도 없이 라구스를 굴리기 시작했는데, 정말 깜짝 놀랐어요. 이러다 죽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라구스를 굴렸다니까요? 단원들 모두가 둘이 원수 사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라고요.
“왜 그랬다는데?”
-라구스가 어렸을 때 가출을 했는데, 황당하게도 400살에 가출해서 2500살이 되었을 즈음 갑자기 수호기사단원으로 나타났다는 거예요.
“설마 2100년이란 시간 동안 크림슨은 라구스를 본 적이 없는 거야?”
-그러니 얼마나 놀랐겠어요. 2100년 동안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소식조차 없던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으니 화가 좀 났겠어요? 그때부터 부단장은 라구스만 보면 훈계라는 목적으로 미친 듯이 굴리기 시작했죠.
솔직히 조금 어이가 없었다.
2100년이 지난 후에 나타난 아들을 알아본 크림슨도 놀라웠지만, 가출해서 2100년 동안 소식 한번 전하지 않은 라구스는 기가 막힐 정도였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지?
내가 지금껏 마족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인간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자주 했던 나였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만년 이상을 살아가는 고위 마족의 경우 각성까지 걸리는 시간은 최소 500년에서 최대 600년까지였다.
그런 고위 마족이 400살에 가출을 했다는 건 인간으로 치면 10대 중반 즈음에 가출했다는 말인데, 그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지.
레이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10대는커녕 10살이 되기 전에 가출을 했다는 거잖아?
물론 레이의 수면기를 생각하면 너무 나간 생각일지 몰랐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빨랐다.
“그래서 가출을 한 이유가 뭔데?”
-세상을 구경하고 싶었다고 하던데요?
“그게 이유라고?”
-네. 그게 전부래요.
“라구스가 마족 중에서 특이한 편인가?”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저런 특이한 마족은 아마 라구스 말고는 없을 거예요. 그래서 재능이 저렇게 뛰어난 건가 싶기도 하고요.
보통 일반인과 많이 다른 자 중에 천재가 나올 확률이 높은 편이었는데, 라구스가 그런 경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재능이 많이 뛰어난 편이야?”
-엄청요. 아마 다음 단장은 라구스가 차지할지도 모르겠어요. 다른 단원들과 다르게 라구스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거든요.
“무슨 말이야? 완성이 되지 않았다니?”
-가끔 있거든요. 라구스처럼 돌연변이 같은 존재가. 머지않아 2차 각성을 할 것 같다는 단장의 말이 틀리지 않는다면 말이죠.
“2차 각성? 그런 것이 있었어?”
처음 듣는 말이었기에 의문이 들어 물어보자 코넬리아가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모르셨어요? 마족 중에 가끔 2차 각성을 하는 존재들이 있어요. 1차 각성에서 완전한 각성을 이루지 못하고 여력이 남아 있는 자들이 2차 각성을 하게 되는데, 단장이 보기에는 라구스가 그런 경우 같데요.
“그럼 2차 각성을 한 마족들 대부분이 엄청 강하겠네?”
-그건 또 아니에요. 완전한 각성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가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2차 각성을 하는 존재들은 백작 이하의 마족들이거든요. 물론 2차 각성을 통해 공작급의 힘을 얻는 자들도 존재하지만, 그건 극소수고 라구스가 정말 특이한 경우죠.
코넬리아의 설명을 듣자 저 멀리서 크림슨에게 무자비하게 구타당하는 라구스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미 공작급의 힘을 넘어선 존재가 다시 각성하게 된다면 과연 얼마나 강해질까?
대공과 단장까지도 넘어설 수 있지 않을까?
“도련님.”
생각에 잠겨 있던 사이 다가온 현지가 나를 불렀고, 그에 고개를 돌리자 뭔가를 결심한 표정을 짓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현지의 얼굴이 보였다.
“왜 그래? 갑자기 진지해져서.”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 되겠어요.”
“무슨 말이야?”
평소와 너무 다른 현지의 모습에 의문이 들어 묻자 현지가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아무래도 그 공간에 발을 들여야 할 것 같아요.”
“그 공간이라니?”
“도련님이 들어가지 말라고 했던 곳이요.”
그제야 현지가 한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 깨달은 나는 한숨을 내쉰 후 입을 열었다.
“너무 조급한 거 아닐까?”
“하지만.”
“네가 저들을 보고 초조해하는 건 알겠는데, 그건 너무 성급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루시안이 나타나고부터 현지가 많이 초조해한다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현지가 조금 전 말한 그 공간은 너무 위험했다.
사람의 감정을 지워 버린다는 사실만으로도 위험했지만, 더욱 위험한 것은 바로 그 공간에 들어가면 시간 개념이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감정을 지워 버릴 뿐만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평생을 그곳에서 멈춰 있을 가능성이 존재했기에 출입을 금한 공간.
-그 공간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와 현지의 대화를 듣던 코넬리아가 물어왔다.
“있어. 현지만이 출입할 수 있는 이상한 곳이.”
-다른 차원 같은 건가요?
“그걸 모르겠어. 다만 확실한 건 그곳이 정말 위험한 곳이라는 거야.”
-보여주면 안 돼요?
“못 들었어? 얘만 출입이 가능하다니까?”
-그럼 설명이라도 해 줘요.
코넬리아는 호기심이 많은 편인 모양인지 나를 재촉하기 시작했고, 그에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코넬리아에게 그곳에 대해 설명해 주었는데.
-어? 정말이에요?
“그래. 감정을 지워 버릴 뿐만 아니라 시간 개념까지도 없애 버리기 때문에 잘못했다가는 그곳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하는 수가 있다고.”
-거기가 맞나? 그럴 리가 없는데? 그곳은 군주님 말고는 아무도 출입할 수 없는데?
“무슨 소리야? 혹시 그곳이 어딘지 아는 거야?”
-확신은 못 하지만, 제가 아는 곳과 비슷하긴 해요.
“거기가 어딘데?”
-군주님이 만든 훈련소요.
“훈련소?”
코넬리아의 말은 솔직히 조금 황당했다.
그런 위험한 곳이 훈련소라니.
아니, 훈련소라고 쳐도 그곳에서 도대체 무엇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은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지만, 예전에 저희가 훈련한 장소가 지금 군주님께서 말한 장소와 정말 비슷해요. 근데 그곳은 군주님만이 열 수 있을 텐데? 이상하네?
“그곳에서 뭘 훈련하는데?”
-마력에 대한 지배력을 키우는 훈련이요.
“지배력?”
-네. 저희 기사단이 강한 이유가 바로 지배력에 있거든요. 솔직히 지배력을 빼면 수호 기사단은 그리 강한 수준이 아니에요. 특히 마력의 양으로 따지면 저나 루시안조차도 후작보다 조금 위일 뿐이죠. 물론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지만요.
이게 무슨 소리야?
마족들의 마력이 인간에 비하면 높은 수준인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코넬리아나 루시안의 마력 양이 후작 정도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최소 공작 이상은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곳에서 어떻게 지배력을 기르는데?”
-버티는 거죠. 최대한 오래.
“자세히 설명해봐.”
-그러니까 그곳은 육체의 감각과 감정까지도 강제로 억제하는 곳이거든요. 그곳에서 느낄 수 있는 건 단 하나에요. 바로 마력이죠. 물론 마력도 처음엔 이곳과 똑같이 느껴지지만, 시간이 지나면 점차 흩어지기 시작해요. 그곳에서는 그것을 가지고 마력을 붙잡고 버티는 훈련을 하면서 정신력이라던가 지배력을 기르는 거죠.
“그게 도움이 된다고?”
-네. 마력을 제외하곤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기에 마력에 집중하기가 훨씬 수월해지거든요. 물론 그것도 한계가 존재하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강해질 수 있어요.
코넬리아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대박이었다.
마력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으니까.
아무리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어도 거의 늘지 않는 지배력.
만약 그 공간에서 훈련한다면 순식간에 몇 배, 아니, 수십 배의 효율을 볼 수도 있는 일이었다.
다만,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현지는 그 안에서도 밖으로의 공격이 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혹시 그 안에서 공격이 가능할까?”
-이론적으론 가능해요. 애초에 군주님이 그곳을 만드신 이유가 저희에게 새로운 무기를 쥐여주기 위해서였으니까요. 다만, 자기 육체도 못 느끼는데, 어떻게 공격이 가능하겠어요. 그 때문에 방향을 바꾼 거죠. 훈련소의 개념으로.
어? 그럼 현지는 어떻게 공격이 가능한 거지?
“도련님. 저 말대로라면 제가 그곳에 들어가는 건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일단 허락할게. 그래도 조심해야 해.”
“네!”
살짝 들뜬 표정을 지은 현지가 대답과 함께 자리에서 순식간에 사라졌고.
-어? 맞아요! 훈련소!
그 모습을 본 코넬리아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확실해?”
-네. 확실해요. 방금 느꼈던 기운은 확실히 훈련소에 퍼져있는 군주님의 기운이었어요!
코넬리아의 대답에 안심한 나는 이어서 궁금한 것들을 묻기 시작했다.
“그런데 말이야. 왜 저곳에서 너희들은 공격을 못 하는 거야? 육체가 느껴지지 않더라도 마력을 이용하면 공격이 가능할 텐데?”
-네?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요? 마력을 이용한다고 해도 저희는 군주님과 달리 저곳에서 이곳을 보지 못한다고요. 안 보이는데 어떻게 공격을 해요?
“안 보인다고?”
-당연하죠. 보이긴커녕 이곳의 존재를 느끼지도 못한다고요.
뭐지? 그럼 현지는 저곳에서 이곳의 존재를 어떻게 보는 건데?
“현지는 보는데?”
-네? 에이~ 농담하지 마세요. 제가 바보도 아니고…… 말도 안 돼요.
손사래까지 쳐가며 부정하는 코넬리아를 보던 나는 현지와 연결된 선을 통해 현지에게 지시를 내렸다.
‘현지야. 거기서 코넬리아를 공격해봐.’
‘네.’
현지의 대답과 함께 코넬리아의 왼팔 부근에서 현지의 단검이 불쑥 나타났고.
-꺅!
코넬리아가 깜짝 놀라며 단검을 피했는데, 계속해서 단검이 코넬리아를 노리며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하며 코넬리아를 공격하는 모습에 가만히 이곳을 주시하고 있던 루시안이 급히 다가왔다.
-정말 그 안에서 코넬리아를 보고 공격하는 겁니까?
“그렇다니까.”
-이,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단장조차도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데…….
-군주님 믿을 테니까 이것 좀 멈추라고 해봐요.
불쑥불쑥 나타나는 단검에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코넬리아가 급히 소리쳤고, 그에 난 현지에게 공격을 멈추란 지시를 내렸다.
“이제 좀 믿겨 지나?”
-네. 믿어요! 믿어!
여러 번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코넬리아를 보자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단검이 불쑥 튀어나오는 순간 메뚜기처럼 펄쩍펄쩍 뛰며 피하던 코넬리아의 모습은 한편의 경극을 보는 것 같았으니까.
그나저나 현지는 어떻게 저게 가능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