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에는 거대한 나무들이 잔뜩 심어져 있었다.
원래부터 존재하던 나무들은 아니었다.
너무 황량한 정원의 모습에 주변 숲과 산에서 괜찮아 보이는 나무들과 풀, 꽃들을 선별해 이곳에 심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괜찮은 정원이 완성된 듯싶었다.
물론 아직은 조금 부족한 모습이지만, 그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이얍!”
힘찬 기합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나무를 타고 오르는 수아의 모습이 보였다.
넓은 가지에 올라선 수아가 가지에 걸터앉으며 레이를 보며 미소를 지었고.
“나두! 나두 올라갈래!”
레이가 수아를 따라 나무를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한 번에 훌쩍 뛰어오를 수도 있는 레이였지만, 수아와 똑같은 모습으로 나무를 타고 오르는 레이.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지만,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상쾌해지는 것만 같았다.
응? 저게 뭐지?
주먹밥인가?
레이가 옆에 앉자 수아가 품에서 주먹밥으로 보이는 것을 꺼내 정확히 반으로 나누었고, 반쪽을 레이에게 주자 레이의 표정이 환하게 물들었다.
“맛있어! 더 먹을래! 더 줘!”
“이제 안돼. 이건 아빠랑 먹어야 한다구.”
“히잉-”
주먹밥을 허겁지겁 먹는 레이였지만, 그 모습이 오히려 레이의 귀여움을 증폭시켰고, 그에 내 입가에 어렸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그나저나 식탐은 그대로인 건가?
음식이라는 것을 처음 맛본 마족들은 대부분 식탐이 숨기지 못했다.
배가 아무리 불러도 계속 먹으려 할 정도로 대단했는데.
레이 역시 다른 마족과 다르지 않았다.
맛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 누군가 멈춰주지 않으면 먹는 행위를 멈추지 않을 정도였기에 살짝 걱정될 정도였는데.
“우리 저기 가볼까?”
“응!”
높은 가지 위에서 훌쩍 뛰어내린 둘은 이어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한 방향을 향해 나아갔다.
이상하네? 왜 뭔가 달라진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아! 레이의 키가 컸네?
수아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 레이를 보며 레이가 자랐다는 것을 안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지만, 금방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또래보다 조금 더 큰 수아와 비슷하다는 건 레이가 많이 성장했다는 걸 의미했고, 그건 마족의 특성을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수면기가 끝난 마족은 각성 전까지는 거의 성장을 하지 않는다.
각성과 함께 한순간에 육체가 완성되어 버리기 때문인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어떻게 레이가 성장을 한 거지?
그러고 보니 뿔이 사라졌잖아?
레이를 자세히 살펴보던 나는 레이의 뿔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곤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뿔이 작아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완전히 사라질 줄은 몰랐기에 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나는 아이들에게 급히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얘들아!”
“아빠!”
아이들을 부르자 동시에 나를 발견하고 소리치며 달려오는 아이들을 보며 환한 미소를 지어주고 싶었지만, 내 굳은 표정은 쉽게 펴지지 않았다.
레이에 대한 걱정 때문에.
별일 아닐지도 몰랐지만, 뿔이라는 것이 마족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그리 쉽게 판단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강함의 상징이자 마족의 상징이기도 한 것이 바로 뿔이었다.
그런 것이 사라졌다는 건 분명히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아빠 얼굴 이상해! 히히히!”
“아빠?”
레이와 다르게 수아는 내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챈 모양인지 잠시 멈칫했는데.
“레이야. 아빠가 궁금한 게 있는데 대답해 주겠니?”
“네!”
“뿔이 사라진 것 같은데 혹시 언제 사라졌는지 아니?”
“뿔? 어! 없다! 뿔이 없어!”
지금껏 뿔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는지 레이는 뿔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곤 환한 미소를 지으며 펄쩍펄쩍 뛰었다.
“수아도 모르니?”
“네. 근데 방학하기 전에 사라진 건 알아요. 같이 목욕하다가 봤거든요. 근데 그게 왜요?”
“아, 아니야. 그냥 아빠가 궁금해서.”
“와아- 이제 레이도 언니랑 똑같다! 그치?”
어? 그러고 보니?
레이의 외모는 수아와 쌍둥이처럼 똑같았다.
조금 과장하긴 했지만, 머리칼과 눈동자 색을 제외하면 쌍둥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는데.
왜 이걸 지금 눈치챈 거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세히 살피기 시작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눈에 들어오지 않던 것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가장 놀라운 것은 바로 레이의 마력이었다.
자작에 근접할 정도였던 레이의 마력이 지금은 콜라를 넘어설 정도로 막대한 수준이었고, 마력의 질 역시 현지와 비슷한 정도로 지배의 마력을 닮아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레이의 변화는 각성을 하지 않고는 설명이 불가능했다.
분명 아직 각성을 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설마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각성을 한 건가?
아직 마력의 통제가 부자연스러워 움직일 때마다 주면 마나들이 출렁거렸는데, 이것만 봐도 레이가 품고 있는 마력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예상할 수 있을 정도였다.
혹시 모르니 이런 현상에 대해 아는 자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던 그때 레이의 입이 열렸다.
“아빠! 나 밥! 밥 먹을래요!”
조금 전 먹었던 주먹밥이 부족했는지 레이가 밥을 먹자며 나에게 매달려왔고, 그에 심각한 표정을 지우고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아빠랑 밥 먹을까? 수아하고 레이는 뭐를 제일 좋아할까?”
아무래 생각해도 나 혼자서는 도저히 답을 찾아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지금은 아이들과의 시간을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레이는 주먹밥!”
“수아는 아이스크림!”
레이는 조금 전 먹었던 주먹밥이 떠오른 모양이었는데, 문제는 수아였다.
아이스크림을 여기서 어떻게 구한단 말인가?
“아, 아이스크림?”
“응! 그때 먹었던 아이스크림!”
“그때? 아!”
생각해 보니 수아와 함께했던 기억 대부분이 집 아니면 학교 앞이라는 것이 떠올랐고, 그에 내가 정말 무책임한 아빠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먹었던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는 수아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은 마음보다 나와 함께 했던 추억에 그리움을 품은 것 같았다.
“수아야. 이곳에는 아이스크림이 없단다.”
“있어요!”
“있다고?”
“네. 여기!”
곧바로 들려오는 수아의 대답에 의문이 든 나는 수아의 이어지는 행동에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허리에 매단 주머니를 들어 올린 수아가 그 안에서 커다란 아이스크림 통을 꺼내기 시작했고, 그 수가 무려 31가지라는 것을 확인한 나는 황당함에 말문이 막혀왔다.
수아는 나와 함께했던 시간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정말로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와아- 아이스크림! 나도 먹을래요!”
“아빠가 퍼주세요!”
마지막으로 아이스크림을 푸는 도구를 꺼내든 수아는 그것을 나에게 건네며 소리쳤다.
“그, 그래. 뭘 먹고 싶니?”
“@[email protected]#%&요!”
“응?”
지금 내가 잘 못 들었나?
수아의 입에서 나온 언어가 내가 아는 언어와는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아이스크림 이름이 죄다 이 모양이야?
그나저나 이거 내가 아이스크림 매장의 종업원이 된 기분이 드는데? 뭐지?
그 이후 나는 수아와 레이가 주문하는 아이스크림을 계속해서 퍼다 날라야 했다.
* * *
레이의 뿔이 사라진 것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집사를 불러 물었지만, 집사는 뿔이 사라진 이유에 대해서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크게 당황했을 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는데, 다행히 수호기사단원들에게 뿔에 대한 진실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뿔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말이네?”
-사라진다고 하기보다는 없애는 것이죠. 단장이나 대공처럼 말입니다.
“그 둘은 뿔이 없다는 말이야?”
-마족에게 있어서 뿔은 강함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약점이기도 합니다. 보통의 마족들은 뿔에 대부분의 마력을 담고 있습니다. 잘못된 진화로 인해 마력을 담기에는 육체가 담을 수 있는 용량이 적은 편이기 때문이지요. 그렇기에 뿔에 많은 마력을 담아두고 필요할 때마다 마력을 사용하는데, 뿔에 문제가 생기면 당연히 약해지지 않겠습니까? 거기다 뿔은 마력의 통제가 아직 미숙한 마족에게 마력의 통제를 쉽게 만들어주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그 때문에 보통의 마족들에게 뿔은 강함의 상징이며 동시에 마족의 상징이 되는 것이지요.
크림슨의 설명에 마족들이 가지고 있는 뿔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레이의 뿔이 사라진 이유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기에 여전히 의문은 풀리지 않고 있었다.
“왜 레이의 뿔이 사라졌을까? 직접 없앤 것이 아닌데도 말이야.”
-정확하지는 않지만 제가 생각한 것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뭔데?”
-아무래도 진화가 아닐까 합니다.
“진화?”
-네. 뿔이 필요 없는 육체로 변화하면서 자동으로 사라진 것이죠.
“일반 마족과 달리 육체가 담을 수 있는 마력의 용량이 늘어났다?”
-그렇습니다.
듣고 보니 그럴듯하긴 했다.
뿔이 없음에도 레이의 육체는 마력을 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으니까.
“정말이라면 좋을 텐데 말이야.”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공주님을 뵈었을 때 제가 느낀 것이 정확하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입니다.
“무슨 소리야? 느낀 것이라니?”
-군주님을 닮으셔서 그런지 두 분 공주님 모두 그 나이에서는 절대 이룰 수 없는 강함을 품고 계셨습니다. 특히 수아 공주님은 저조차도 그 끝을 짐작하지 못할 정도의 힘을 품고 계시더군요. 마치 군주님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수아가 크림슨조차 짐작하지 못할 정도로 대단한 힘을 품고 있다니?
수아가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는 나도 동의하지만, 레이에 비하면 조금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기에 크림슨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수아가 레이보다 대단한 힘을 품고 있다는 말이야?”
-네? 모르셨습니까?
“설명해 봐.”
-공주님을 뵙는 순간 저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단원이 공주님에게서 풍기는 강한 파동을 느꼈습니다. 군주님이 두 분이 되신 것만 같은 착각을 느꼈을 정도로 말입니다.
지금 아부하는 건가?
그것이 아니라면 크림슨의 말은 설명되지 않았다.
아부가 아니라 그것이 진실이라면 수아가 이미 나와 같은 수준까지 올라왔다는 말이었다.
아니지……. 나야 이들을 지배했기에 더욱 대단해 보이는 거고 수아는 아니잖아?
그럼 수아가 나보다 더 강하다는 거야?
그게 가능해?
“느꼈다는 강한 파동이 정확히 뭔데?”
-고귀한 분들에게나 느낄 수 있는 아우라 같은 것 말입니다. 마계에 군림하는 군주님들에게서만 느껴본 적 있는 아우라를 느꼈습니다.
아부 맞네.
크림슨 이거 그렇게 안 봤는데, 아부하는 기술이 장난 아니네?
말이 아우라지 그냥 내 딸이라고 해서 대단하게 본 것일 뿐이잖아?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레이에겐 정말 아무 문제 없는 거겠지.”
-그렇습니다. 진화 중인 것이지요. 진화를 끝마치는 순간 또 한 명의 군주님이 탄생하게 될 것입니다.
크림슨의 아부는 스케일이 커도 너무 큰 듯 보였다.
또 한 명의 군주라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마족들이나 군주라 부르지 다른 종족들은 모두 신이라 부를 정도로 대단한 존재가 그리 쉽게 태어날 리가 있나.
“그래. 알았어. 난 이만 가볼게.”
-모시겠습니다.
“아니야. 됐어. 할 일 해.”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아! 됐다니까?”
나를 따르겠다는 크림슨과 몇 차례 실랑이를 벌이고 나서야 크림슨을 떼어 놓은 그대로 김 실장에게 향했다.
앞으로의 일정을 듣기 위해서.
* * *
“응? 집사랑 같이 있었네?”
“의논할 일이 있어서 잠시 대화 중이었습니다.”
김 실장을 찾아온 나는 집사와 함께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집사를 발견했고, 둘을 보자 둘이 어딘가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논할 일이라는 게 뭔데?”
“저- 그것이…….”
가볍게 물었지만, 집사는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심각한 일이야?”
“얼마 전 퍼뜨린 소문이 너무 크게 퍼진 모양입니다.”
“소문? 무슨 소문?”
“군주님께서 퍼뜨리라 명하셨던 소문들 말입니다.”
내가 퍼뜨리라고 했던 거?
후작급의 홍마족을 막아내었다는 소문을 말하는 건가?
“그게 왜?”
“아무래도 그 소문이 크게 와전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500년 전의 도전의식 때 승리해 후작의 자리를 빼앗은 귀족에게 이상한 소문이 흘러 들어간 모양입니다. 곧 그 자리를 빼앗기 위해 레이 님이 도전할 것이라는…….”
“뭐라고?”
무슨 이런 황당한 경우가 있지?
아직 각성조차 하지 않은 레이가 어떻게 후작에게 도전을 한단 말인가?
설마 레이가 홍마족을 막았다고 소문이 퍼진 건가?
“아무래도 루시안 님을 막은 게 레이 님이라고 소문이 퍼진 모양입니다.”
“허! 어쩌다가? 아니, 그게 아니지. 레이에게 후견인이 생겼다는 걸 알면서도 그걸 믿는다고?”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는 저도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지금은 공작이 되어버린 드래드 공작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정보를 입수했기에 김 실장과 의논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공작? 후작이 아니라 공작이란 말이야?”
“네. 250년 전에 있던 도전의식에서 승리해 공작이 되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저런 소문이 그의 귀에 들어갈 수 있을까?
아니, 그놈은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믿는 건데?
물론 놈이 덤빈다 해도 처리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다만, 영지가 시끄러워지는 것이 싫었기에 짜증이 날 뿐이었다.
이제 겨우 영지가 안정을 찾는 상태였고, 대규모의 마족들이 영지에 유입되는 중이었다.
가장 중요한 시기인 지금 이런 문제가 발생했다는 건 뒤에서 누군가 수작을 부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공작이나 되는 존재가 이제 500살이 된 레이를 처리하려 한다는 것은…….
잠깐만? 혹시 그놈 벼르고 있던 거야?
보호 기간이 끝날 때까지?
“집사. 혹시 레이의 재능에 대한 소문이 나돈 적이 있어?”
“네. 제가 영지를 떠나려는 자들을 붙잡기 위해 소문을 낸 적이 있습니다.”
“직접?”
“그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레이 님의 오라버니 되시는 분이 돌아가시면서 모든 기사와 병사들이 떠나려 했기에 병사들이라도 붙잡기 위해서는 레이 님에 대한 소문을 퍼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병사들을 조금이라도 붙잡을 수 있었고요.”
“어떤 소문을 퍼뜨렸는데?”
“레이 님에 대해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말했을 뿐입니다. 전 후작님의 재능을 가볍게 넘어설 정도로 대단하신 분이라고요.”
이거 때문이었어?
분명 그놈은 소문의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 움직였을 테고 소문이 사실이라는 것을 파악했을 거다.
그 때문에 보호 기간이 끝나는 순간 레이를 처리하기 위해 벼르고 있었을 테고, 마침 딱 좋은 명분까지 생겨 얼씨구나 하고 움직인 것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