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훈련의 결과는 놀랍게도 수호기사단의 패배로 끝을 맺었다.
첫 격돌 당시만 해도 당연히 수호기사단이 이길 거라 생각했던 것을 뒤집어 버린 존재는 바로 라구스였다.
시작과 함께 돌진한 크림슨은 순식간에 앞을 가로막는 신입기사단원 둘을 쓰러트린 후 곧장 수아를 향해 달렸지만, 그 앞을 막아서는 라구스의 존재로 인해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 정말 놀라운 장면이 연출되었는데, 마력을 사용하지 않음에도 엄청난 속도로 격돌한 둘은 마치 검술의 달인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정말 마력을 사용하지 않는 건지 의심이 될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둘의 격돌에 잠시 시선을 빼앗긴 사이 어느새 신입기사단원들이 수호기사단원을 전부 리타이어시켰고, 이어서 크림슨 홀로 남은 신입기사단 전부를 상대해야만 하는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물론 수호기사단이 아무것도 못 하고 리타이어 된 것은 아니었다.
18명의 신입기사단원을 단 셋이서 상대해 반을 처리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남은 9인이 라구스에게 합류하게 되면서 크림슨이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이었다.
그 결과 크림슨 역시 버티지 못하고 리타이어 되면서 수호기사단의 패배로 끝을 맺었다.
하지만 정말 놀라운 것은 크림슨 홀로 라구스를 제외한 모든 신입기사단원을 처리했다는 것이었고, 라구스 역시 겨우 크림슨을 리타이어시켰다는 것에 있었다.
전투 기술이 부족할 거라 생각했던 내 예상을 산산조각내어버린 크림슨은 현지조차도 상대가 안 될 정도로 뛰어난 검술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라구스 역시 그에 조금 미치지는 못했지만, 뛰어난 검술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다만 나머지 단원들은 역시 내 생각대로였다.
모두가 무기를 들고 있기는 했지만, 실력이 뛰어난 편이라고는 말하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내가 검을 들어도 쉽게 승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은 실력은 형편없었다.
다만, 육체를 다루는 것에는 익숙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그 덕에 신입기사단원의 반을 쓰러트릴 수 있던 것이다.
“그나저나 왜 저 둘만 저렇게 실력이 뛰어난 거야?”
-하루도 쉬지 않고 대련을 했으니까요.
코넬리아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둘의 실력이 뛰어난 이유를 퉁명스럽게 설명해 주었다.
크림슨은 대련이라는 핑계로 라구스를 훈육했는데, 문제는 라구스가 가만히 당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크림슨은 라구스의 수준에 맞는 힘으로 라구스와 대련을 치렀는데, 그 덕에 라구스 역시 조금이라도 덜 맞기 위해 매일같이 훈련을 거듭했고, 반대로 크림슨은 그런 라구스를 어떻게든 한 대라도 더 때리기 위해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훈련을 해왔다고 한다.
수백 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말이다.
그 결과 저 둘만 저런 실력을 보유하게 된 것이었다.
“근데 너희 요즘 너무 치사한 거 아니야?”
-승부에 치사한 게 어딨어요? 이기면 그만이지.
처음만 해도 시간을 정해 대련을 하듯 훈련을 했지만, 지금은 그 양상이 전혀 달라진 상태였다.
일주일을 내리 지기만 했던 수호기사단이 전략을 바꿔버린 것이었다.
정당한 대결에서 기습으로 말이다.
어떻게든 수아를 터치하면 승리한 것으로 해 주겠다는 내 말에 수호기사단에게서 정정당당함이란 말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 결과 일주일을 내리 지던 수호기사단이 이제는 매일같이 승리를 쟁취하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요즘 라구스는 신입기사단원들을 죽기 직전까지 굴리고 있었다.
처음에만 해도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던 라구스는 요새 종일 죽상을 유지하고 있었고, 반대로 크림슨은 요새 아주 좋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라구스를 약 올리고 있었다.
이쯤 되면 부자지간이라기보단 원수라는 말이 더욱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참 대단한 부자지간이구만.”
-그렇죠? 저런 관계인 부자지간도 마계에서는 찾기 어려울 거예요.
* * *
-이놈들! 당장 공주님을 풀어드리지 못하겠느냐!
-공주님을 그 더러운 입에 올리다니! 네놈이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어휴-”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된 걸까?
얼마 전까지 평범했던 대련은 하나의 계기를 시작으로 이상하게 변질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그 계기가 바로 유명의 직원들을 위해 만든 편의 시설 때문이었다.
바로 영화와 드라마라는 현대 문물.
이곳에서 고생하는 직원들을 위해 최신 영화나 드라마, 혹은 TV 프로그램 등을 볼 수 있도록 문화센터를 만들어두었는데, 수아와 레이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들도 그곳에서 관람할 수 있었기에 수아와 레이는 매일같이 그곳을 방문했고, 그것이 문제가 되어버렸다.
그곳에 따라갔던 라구스와 신입기사단이 영화에 빠져버렸다는 것.
그 이후 황당하게도 수호기사단을 상대로 그곳에서 봤던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의 명대사 등을 따라 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시작이었다.
훈련이 이상하게 변질된 것이.
갑자기 변한 라구스와 신입기사단의 태도에 처음에는 어이없는 태도를 취하던 수호기사단이었지만, 그들 역시 영화라는 것을 보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훈련이 한 편의 연극처럼 변해버린 상태였다.
-뭐? 네놈?
-아, 아니 그러니까…….
-아버지에게 네놈이라니! 정녕 네놈이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아! 몰라! 아무리 아버지라 해도 반역을 용서해 줄 수는 없다! 쳐라!
-누가 반역자란 말이냐! 지금 반역을 저지르는 것은 너희들이다! 수호기사단! 공주님을 구출한다!
-충!
크림슨의 뒤에 정렬해있던 코넬리아, 루시안, 콜라가 대답과 함께 돌진하기 시작했고, 이어서 정상적인 대련의 모습이 연출되는 듯싶었지만.
-우리 가문에서 반역자가 나오다니! 네놈이 수만 년을 이어져 내려온 우리 가문을 기어코 파멸로 몰고 가는구나!
-제가 말입니까? 그럴 리가! 반역은 아버지가 저지르고 계십니다!
둘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듯 계속해서 준비해 둔 대사를 내뱉고 있었다.
아마 둘은 기사들의 싸움이 끝날 때까지 대사를 멈추지 않고 기다릴 거다.
기사단원들 역시 지든 이기든 둘의 싸움에 참전하지 않을 테고, 결국 승부는 둘이서 결정짓게 되겠지.
-덤벼라. 이놈! 네놈을 세상에 내놓은 내 잘못을 바로잡겠다!
저렇게 말이다.
-아버지의 욕망은 도가 지나쳤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에게 하는 제 마지막 효도가 될 것입니다!
근데 왜 둘 다 선이야?
참 이상하게도 둘은 절대로 악한 역할을 맡으려 하지 않았다.
돌아가며 악한 역할을 맡는 것이 당연했지만, 이상하게도 대련에 참가하는 기사단원들은 악한 역할만큼은 죽어도 하지 않으려 했다.
그 결과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이상한 연극이 되어버렸는데.
특이하게도 하고 싶은 말만 하는데 대화가 통하는 것 같단 말이지?
"히히히!"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수아가 좋아한다는 것일까?
수아는 자신을 두고 싸우는 기사단을 보며 정말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처럼 재밌어했고, 더 나아가 연극에 참여하기까지 했다.
-크윽!
-아버지의 욕망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만 가시지요.
-공주님을 지키지 못한 죄는 저세상에서 받겠습니다! 쿨럭! 무탈하시길!
크림슨이 말을 마치며 그대로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떨궜고, 이어서 수아의 입이 열렸다.
“너무 쓸쓸해하지 말 거라. 나 역시 금방 따라갈 테니!”
“언니 멋있어!”
그에 고개를 떨군 크림슨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고, 라구스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오늘의 수아는 크림슨의 편이었나 보다.
-으하하! 보았느냐! 너는 이 아비를 평생 이기지 못할 것이다!
-공주님! 왜 제 편은 안 들어주시는 거예요?
“오늘도 크림슨이 더 멋졌으니까!”
아니, 수아는 항상 크림슨의 편이었다.
처음에는 라구스의 편을 자주 들어줬지만, 크림슨이 뭔가를 깨달은 후부터는 달랐다.
수아가 누구의 편을 들지 기가 막히게 눈치채고는 패배 혹은 승리를 선택하는데, 나보다 수아를 더 잘 아는 듯 보일 정도였다.
그나저나 이거 괜찮은 거 맞지?
수아와 레이가 좋아하기 때문에 일단 지켜보는 중이었지만, 훈련이 제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었기에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건 또 아니었다.
더욱 멋있는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다른 훈련들 역시 필사적으로 참여하고 있었고, 그 덕에 두 기사단 모두 몰라볼 정도로 강해져 있는 상태였다.
동등한 힘을 가진 자들을 순식간에 쓰러트릴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런 자들을 홀로 서너 명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기술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마력 역시도 엄청난 속도로 늘어나는 중이었고, 거기에 더해 지배력에 대한 훈련까지 받고 있었기에 신입기사단원들 모두가 급속도로 강해지고 있었다.
벌써 남작의 힘을 넘볼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저 둘이었다.
라구스와 크림슨.
저 둘은 훈련은 뒷전이고 시간 대부분을 영화를 보거나 대사를 생각하는데 보내고 있었으니까.
마족들이 영화를 좋아할 줄이야.
요즘은 유명의 공사를 돕는 마족들뿐 아니라 영지민들 대부분이 일이 끝나면 문화센터로 향하고 있었다.
영화와 드라마, 거기다 애니메이션까지 영상에 푹 빠져있는 마족들은 일을 다시 시작하기 전까지는 절대 문화센터를 벗어나지 않았고, 그 덕에 문화센터가 꽉꽉 들어 차버려 유명의 직원들이 문화센터를 이용하지 못하는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그 덕에 문화센터를 증축하는 사태까지 벌어졌고.
그래도 좋은 점은 있었다.
언어를 배우는데 무관심했던 마족들이 지금은 너도나도 언어를 배우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마족들의 사치는 대부분 무기와 의류 쪽이었다.
좋은 무기와 멋있는 의류가 마족들의 사치 전부였다면, 이제는 조금씩 변하는 것 같았기에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조금 걱정은 되었다.
내가 마족이란 종족의 문화를 바꾸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먹지 않던 마족을 먹이고, 취미라는 것이 없던 마족에게 취미를 만들어 준다는 것은 자칫 잘못했다가는 큰 화로 다가올 수가 있었다.
음식을 섭취한다는 것에 대한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었고, 취미를 만들어 줌으로 인해 나태해지는 마족이 생겨날 수도 있었다.
정말 별것 아닌 듯 보일지 모르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기에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역시도 점차 변하는 마족들을 보며 괜한 욕망을 심어준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을 보이셨을 만큼 말이다.
그나저나 벌써 3주가 지났네?
현지가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은 지 3주라는 시간이 지났고, 지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안이와 현지.
둘과 연결된 선이 멀쩡한 것을 보면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둘과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휴가 좀 다녀오라는 부탁에도 내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던 둘이었기에 둘을 생각할 때마다 조금 쓸쓸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괜찮겠지?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앞에 나타났으면 좋겠는데…….
예전에는 좀 떨어졌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많았는데 지금은 반대로 옆에 없다는 것 때문에 쓸쓸하다고 생각하는 걸 보면 나도 정말 많이 변한 것 같았다.
* * *
“움직였다고?”
-네. 그곳으로 보낸 병사의 말에 따르면 기사단이 출격했다고 합니다.
미호의 분신을 딸려 보낸 병사가 연락을 해 왔다면 움직인 것은 한 시간도 되지 않았을 거다.
“언제쯤 도착할까?”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리 멀지 않은 편이니 2주 안으로는 도착할 거라 예상됩니다.
“공작은?”
-움직임이 파악되지 않습니다. 다만, 공작의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보고를 봐서는 기사단과 함께 움직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공작 정도 되면 아무리 약한 병사라도 힘의 파동을 느끼는 건 가능했다.
당연히 힘을 숨기지 않았을 테니까.
그게 공작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만약 공작이 힘을 숨겼다면?”
-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힘을 숨긴다는 것은 고위 마족에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성안을 파악하지도 못한다며?”
공작쯤 되면 자신이 머무는 성 전체를 아다만티움으로 코팅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힘을 전부 드러내기 때문이었다.
힘을 숨기지 않는다는 것은 주위에도 그 영향을 끼친다는 말이었다.
공작쯤 되면 그 힘의 영향이 절대 적지 않기에 아다만티움이 아니면 성이 버티지 못하는 건 당연했고, 그 때문에 밖에서 그의 존재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렇긴 합니다만, 설마 공작이 자신의 힘을 숨기면서까지 움직일 거라 생각되진 않습니다.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거야?”
-그건 아닙니다만, 어차피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직접 행차한다면 저희로서는 최고의 기회를 잡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건 그렇지.”
공작이 직접 온다면 우리로선 대환영이었다.
단숨에 상황을 끝낼 수 있을 테니까.
물론 공작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그가 온다면 힘을 보여준 후 경고만을 남길 생각이었으니까.
그를 직접 처리할 수도 있지만, 그럴 경우 모든 마족의 관심이 이곳을 향할지도 몰랐고, 레이에게 복수의 기회를 빼앗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아직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레이는 점차 커가며 그에 대한 복수심이 생겨나기 시작할 거다.
자신이 왜 아버지가 없이 자라야 했고, 왜 성에 갇혀 지내야 했는지 이유를 찾기 시작할 테고 그 이유를 알게 되면 분명히 복수를 위해 움직이겠지.
물론 복수라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지만, 레이에게는 기폭제가 되는 장치였기에 지금 그를 없애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일단 주변에 병사들을 풀어 두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까 최대한 촘촘하게 깔아둬.”
-네.
그나저나 현지가 빨리 나왔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강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현지에게 공작과의 실전 경험은 큰 도움이 될 테니까.
물론 위험한 순간이 오면 크림슨이 바로 나설 수 있도록 하겠지만, 최대한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현지에게 실전 경험을 시켜주고 싶었다.
언제쯤 나오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