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와 다름없이 기사단의 훈련을 지켜보던 나는 점점 이것들이 이상해진다는 생각을 감추지 못했다.
크림슨과 라구스를 제외하면 그나마 멀쩡한 편이었던 나머지 놈들까지도 이상하게 변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미안해요.
라구스의 외침에 대답한 코넬리아.
지금까지는 흔한 로맨스물로 보이겠지만, 이어지는 크림슨의 대사를 듣는 순간 저들이 연기하는 장르가 무엇인지 금방 파악할 수 있을 거다.
-미안하구나! 아들아. 너를 위해 포기하려고도 해봤지만, 내 사랑은 그리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더구나.
-어, 어떻게 아버지가! 으아악! 용서 못 해!
막장 드라마에 빠져 버린 것.
문제는 코넬리아까지도 연극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저를 이렇게 만든 건 당신이에요. 항상 일! 일! 일! 당신의 삶 속에 제가 들어 있긴 했어요? 당신은 제가 어떤지 관심조차 없었잖아요! 제가 얼마나 지옥 같은 삶을 살아야 했는지 당신은 절대 모를 거예요.
-모두 변명일 뿐이야!
-그래요. 변명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제는 저도 어쩔 수 없어요. 아버님을 향한 제 마음은 당신을 사랑했던 그때보다 더욱 뜨거우니까요.
그래도 보는 재미는 있네?
코넬리아를 보며 화가 나기도 했고, 라구스가 안쓰러워 보이기도 하는 걸 보니 연기가 제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모든 것이 당신을 위한 일이었어! 당신이 조금 더 행복하길 바라는 내 마음을 왜 모르는 건데! 최고가 되고 싶다며? 그래서 죽도록 일했다고! 당신을 최고로 만들어 주기 위해!
그 이후의 상황은 뻔했다.
라구스를 제압하란 명령을 내린 크림슨.
하지만 기사단은 라구스를 향해 움직이지 않았다.
크림슨을 향해 검을 겨눈 것.
그랬다.
라구스는 이미 크림슨의 세력 대부분을 손에 넣은 상태였다.
그렇게 기사단의 분열과 충돌이 발생하기 직전.
“이게 뭐 하는 거예요?”
현지가 갑작스럽게 내 옆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 너 언제 나왔어?”
“방금이요. 근데 이게 뭐 하는 거예요?”
“어? 훈련하는 중이지.”
“방금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정말 훈련 맞아요?”
“조금 특이한 훈련이긴 하지.”
현지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기에 이어서 입을 열려던 나는 현지의 얼굴을 보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미 이 괴상한 연극에 빠져 버렸기 때문이다.
뭔가를 물어도 제대로 된 답을 들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연극이 끝나길 기다리기로 한 나는 이어서 연극에 집중했다.
-죄송합니다. 주군. 설마 기사들 대부분이 도련님의 편으로 돌아섰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루시안은 기사단장의 역할인 듯 보였고.
-그것이 왜 자네 탓인가. 모두 부덕한 내 탓이지.
-네놈들이 그렇고도 기사라고 할 수 있느냐! 주군을 배신하다니!
콜라는 부단장의 역할인 듯 보였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네놈이 감히!
그 이후의 충돌은 역시 전과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갔다.
이기든 지든 결국 남는 건 라구스와 크림슨뿐이었다.
물론 이번에는 코넬리아 역시도 남아 있었지만, 코넬리아는 이번 연극에서는 전투원이 아닌 모양인지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다 아버지가 자초하신 일입니다.
-그래. 모두 내 잘못이다. 하지만, 코넬리아를 남겨두고 떠날 수는 없다. 오거라 아들아!
코넬리아를 바라보는 크림슨의 눈에는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마치 정말 사랑하는 연인을 바라보는 것처럼.
“우와- 진짜 같아요!”
현지가 감탄할 정도로 그들의 연기는 진짜 같았고, 그에 현지는 더욱 그들의 연극에 빠져들었다.
그 결과 연극은 더더욱 막장으로 흐르기 시작했고.
-이것이 내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이구나. 잘 가거라 아들아.
아들의 괴로움을 끊어주기 위해 검을 치켜드는 크림슨과 그 모습을 원망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라구스를 마지막으로 연극은 끝나는 듯싶었다.
하지만,
챙!
-응? 다, 당신은!
막혀버린 검에 정말로 당황한 크림슨은 현지를 발견하고는 굳어 버렸고.
“당신이 뭔데 내 아들을!”
-어, 어머니?
“푸흡!”
나는 마시던 물을 뿜어낼 수밖에 없었다.
언제 없어졌는지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인 현지가 크림슨의 검을 막으며 소리쳤고, 그에 크림슨뿐만 아니라 라구스까지도 당황해버렸다.
“내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여자란 존재는 믿을 만한 존재가 아니라고! 이 어미 말고는 그 어떤 여자도 믿지 말라고 했건만, 네가 결국 이 사단을 만들었구나.”
-아버지만 아니었다면 코넬리아는 변하지 않았을 겁니다!
뭐야? 계속 이어지는 거야?
“이놈이 아직도!”
현지의 일갈에 찔끔한 라구스가 고개를 숙였고, 이어서 현지가 입을 열었다.
“일단 저 연놈들부터 처리하고 이야기하자꾸나!”
-당신이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오?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아는 법. 그동안 내가 놀고만 있었을 거 같은가요? 무려 20년이에요. 오늘 같은 날을 위해 칼을 간 세월이!”
‘오! 연기 좀 하는데?’
현지의 연기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거기다 즉석에서 나온 대사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괜찮은 대사를 치는 현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현지가 크림슨을 향해 돌진했고, 이어서 화려한 장면을 연출하기 시작했다.
채채채챙-
빠르게 움직이며 크림슨을 공격하는 현지와 제자리에서 현지의 공격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고 완벽하게 막아내는 크림슨.
-이게 다라면 당신은 절대 나를 이기지 못하오!
크림슨의 대사와 함께 현지가 훌쩍 뒤로 물러났다.
“오늘을 위해 내 모든 것을 걸고 준비한 최후의 기술을 보여 드리죠.”
-내 모든 것을 걸고 막아보리다!
크림슨이 소리친 순간 현지가 자리에서 사라졌고, 이어서 두 개의 단검이 나타나 빠르게 크림슨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하지만 크림슨은 현지의 공격을 가볍게 피했고, 이어서 소리쳤다.
-겨우 이걸 보여주기 위해 수십 년의 세월을 보냈단 말이오! 그렇다면 정말 실망이구려!
“이제 시작일 뿐!”
현지의 목소리가 들린 후 단검의 속도가 점차 가속하기 시작했다.
두 개로 보이던 단검이 점차 분열하듯 늘어났고, 이어서 점차 단검의 수가 불어나기 시작했다.
잠깐만? 현지 마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걸 모르잖아?
현지는 지금 마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것도 점점 양을 늘리면서 크림슨을 압박하고 있었는데, 크림슨 역시 더는 버티지 못하겠는지 마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채채채챙-
대부분의 공격을 피하고 있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공격들은 쳐내며 버티고 있는 크림슨과 공격 일변도인 현지의 격돌은 점차 영역을 넓혀가기 시작했고, 이어서 주변 환경을 파괴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억!
-꺅!
그에 비교적 가까이 있던 라구스와 코넬리아가 놀라 황급히 자리를 피했고, 다른 기사들 역시 급히 자리를 벗어나며 둘의 결전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어떻게 된 거지?
아무리 봐도 두 개의 단검 모두가 현지의 손에서 벗어나 있는 듯 보였는데, 황당하게도 단검에 실린 마력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 상태였다.
‘설마 지배력을 벌써 저 정도로 키운 거야?’
손을 떠나게 되면 마력이 흩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크림슨이야 오랜 시간 마력을 붙잡고 있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라구스나 루시안, 코넬리아 조차도 마력을 이렇게 오래 유지하는 것은 어려웠다.
그런데 현지가 지금 그것을 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단검에 실린 마력의 양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고, 속도 역시도 점차 가속하면서 크림슨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강해졌구나!
크림슨에게는 미치지 못할지 모르지만, 라구스나 루시안을 넘어서는 지배력을 손에 넣은 듯 보였고, 마력의 양조차도 더욱 늘어난 것처럼 보였을 뿐 아니라 질 역시도 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거기다, 일방적인 공격이 가능해진 현지.
지금의 현지는 전보다 월등히 강해져 있는 상태였다.
-지금 단검의 궤적이 순식간에 변한 것 같이 보였는데? 내가 제대로 본 건가?
-맞아. 분명 단검이 순식간에 방향을 바꿨어. 근데 좀 이상한걸? 어떻게 저것이 가능한 거지?
루시안과 라구스의 대화처럼 현지의 공격은 마치 법칙을 무시하는 것만 같았다.
단검의 궤적이 변했다는 것은 진행 방향이 바뀌었다는 것인데, 특이하게도 방향을 순식간에 바꾸었음에도 속도가 느려지긴커녕 더욱 빨라지는 것처럼 보였기에 나 역시 의문이 드는 부분이었다.
크림슨 역시 계속해서 변하는 단검의 궤적에 점점 궁지에 몰리는 것처럼 보였다.
-궤적이 바뀌기 전에 잠깐 단검이 흐릿해지는 것 같은데 그것 때문일까?
-그런 것 같긴 한데……. 어떻게 저게 가능한 거지?
현지에게 답을 듣기 전까지는 누구도 그 이유를 유추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호기심을 보일 뿐.
“그만!”
내 입이 열렸고, 그에 주변을 가득 메우던 엄청난 수의 단검이 씻은 듯이 사라지며 크림슨의 시선이 내 옆을 향하였다.
크림슨 역시 조금 전 상황에 의문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현지가 나타나는 순간 곧바로 현지에게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보니.
“왜 말리셨어요?”
다만 현지는 뭐가 그리 불만인지 나에게 왜 말렸냐 따지듯 물었고, 그에 나는 주변을 한번 둘러본 후 대답했다.
“주변 꼴을 좀 볼래?”
성의 뒤쪽에 위치한 거대한 연무장이 그 용도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박살이 난 상태였다.
오래전 아직 후작이었을 당시에 기사들이 훈련하던 연무장이었지만, 기사들이 떠난 후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얼마 전 완전히 밀어버린 후 새롭게 꾸며놓은 연무장.
그런 연무장이 지금 크림슨이 서 있던 작은 공간을 제외하고 전부 날아가 버린 상태였다.
물론 다시 복구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하임의 능력으로 지었던 연무장이었기에 겨우 몇 분만 있으면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올 테니까.
“어? 언제 이렇게 됐어요?”
입을 연 현지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알긴 아는지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고.
“뭘 언제야. 니가 방금 날뛰면서 이렇게 된 거지. 그나저나 성과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렇죠? 저도 깜짝 놀랐어요. 그 공간에 이런 능력이 있을 줄은 몰랐거든요.”
“능력? 그게 무슨 말이야?”
“음-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시간? 거리? 증폭? 그런 것들이 짬뽕 된 공간이라고 할까요?”
“설명 좀 제대로 해주면 안 되겠니?”
현지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뭔가를 설명하는 것이 서투르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급하게 설명하려다 보니 말이 꼬이는 걸까?
“그러니까 제가 말한 것들이 이곳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거예요. 예를 들면 그곳에서의 1초가 이곳에서는 2초가 되는 것 같다고 하면 될까요?.”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 그리고.”
대충 현지의 설명을 들은 후 정보를 조합하여 유추하는 것이 편할 것 같다는 생각에 이어서 설명하도록 했고.
“거리도 달라요. 그곳에서는 제자리에 있을 뿐이지만, 이곳에서는 조금 더 넓은 거리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어요.”
“그럼 증폭은 무슨 말이야?”
“마력의 위력이 달라지는 것 같더라고요. 저는 분명 1이라는 힘을 사용했는데, 나타나는 결과는 10 혹은 11이라는 힘으로 변해버려요.”
그러니까 그곳과 이곳은 시간도 거리도 마력의 파괴력도 달라진다는 말인가?
-그래서 마력이 흩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던 것이군.
“무슨 말이야?”
-제가 처음에는 현지 양의 공격을 쳐내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랬나?”
-네. 처음 현지 양이 마력을 사용하기 시작한 후부터 저는 현지 양을 공격할 수단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모든 마력을 소모하게 만들기 위해 현지 양의 공격을 전부 쳐내었습니다. 그런데 분명 쳐내는 순간 마력이 흩어지는 것 같다가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더군요. 그것이 이곳과 그곳의 시간의 차이라면 납득이 되지 않겠습니까?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력이 흩어지는 순간 마력을 순식간에 다시 채워 넣는다면 이쪽의 입장에서는 흩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너무 사기 아닌가?
게임으로 치면 치트키나 다름없어 보이는 사기적인 능력들이었다.
시간도 거리도 마력의 파괴력도 모든 것이 차이가 난다는 건 너무 사기였다.
군주가 자신의 기사단을 얼마나 아꼈는지 알겠네.
이런 사기적인 무기를 쥐여주려 했다는 것은 그들을 그만큼 잃고 싶지 않다는 걸 의미했다.
“그럼 크림슨이 보기에는 현지가 어느 수준까지 올라온 것 같아?”
-라구스 정도는 아마 쉽게 이길 수 있을 겁니다.
-정말로요?
크림슨의 말에 라구스가 놀라며 되물었고, 그에 크림슨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다만, 저나 대공, 단장에게는 통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어째서야?”
-제가 현지 양을 죽이려 했다면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정말?”
-그렇습니다. 현지 양은 아직 모르는 모양이지만, 잠깐잠깐 틈이 보였습니다. 그 틈을 노려 공간과 함께 현지 양을 베어 버릴 경우 현지 양은 절대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언제? 언제 틈이 보였는데?”
크림슨의 설명에 깜짝 놀라며 묻는 현지.
-마력이 흩어지는 그 찰나의 순간과 단검의 궤적이 변하는 순간순간에 틈이 살짝씩 보이더군.
“아!”
-그렇다고 너무 실망하지는 않아도 된다. 공간 자체를 어쩌지 못하는 자들은 너에게 피해를 줄 수 없을 테니까.
“그 말은 공간 자체를 무너뜨리거나 베어버릴 수 있는 자라면 나를 상대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말이잖아.”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군. 너의 성장 속도는 나로서도 화가 날 정도로 질투가 나는데 말이야. 저들을 봐라.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너는 저들의 상대조차 되지 않았는데, 이제는 저들이 너를 올려다봐야 할 정도가 되었다. 마족이라는 종족뿐만 아니라 마계에 존재하는 모든 종족에게 너의 성장 속도는 이해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다. 넌 욕심이 너무 커.
조금 실망한 듯 보이는 현지에게 크림슨은 조금 화가 난 듯 보였다.
하지만, 정정해 줄 것이 하나 있었다.
“크림슨. 인간이라는 종족은 말이야. 많은 것을 바라기 때문에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거야. 욕망이라는 감정은 위험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성장의 원동력이 되기도 해. 그걸 기억해. 내가 보기에 너희 마족들은 너무 쉽게 만족하는 버릇이 있는 것 같아. 신입 기사들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 저들은 전에 비하면 엄청난 성장을 이뤘지. 하지만, 그것에 만족해서 요즘은 실력이 거의 늘지 않고 있잖아. 분명 지금보다 더욱 강해질 수 있음에도 말이야. 그것이 바로 만족에서 나오는 나태함이란 거야.”
-아! 그 말을 들으니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욕망이라?
인간이란 욕망의 화신이었다.
만족을 모르기 때문에 더욱 빠르게 발전할 수 있지만, 그것 때문에 반대로 파멸의 길에 들어설 수도 있는 이중적인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