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잖아!”
“뀨!”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후 정수를 다시 입가로 가져가는 하임.
저걸 어디서……. 아!
순간 내 고개가 조금 전 재가 되어버린 마수들이 있던 장소로 돌아갔다.
“너 설마 저쪽에 있던 걸 가져온 거야?”
“뀨!”
정수를 맛있게 먹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하임.
그 모습을 보던 내 머릿속으로 섬광이 스쳐 지나갔다.
“더 있어? 더 있냐고!”
“뀨!”
내 물음에 땅속에서 뭔가가 마구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정수.
최상급 마수의 정수로 보이는 엄청난 양의 정수가 땅속에서 마치 새싹이 솟아나듯 올라왔고, 그와 동시에 미호와 뚱이, 니안, 펜릴이 빠르게 정수를 집어 입가로 가져가기 시작했다.
하나를 입에 넣을 때마다 폭발적으로 강해지기 시작하는 뚱이들을 보며 희망을 본 나는 크림슨에게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숨겨! 힘을 뿜어내서라도 얘들 숨겨!”
-아, 알겠습니다.
동시에 크림슨과 라구스, 루시안, 코넬리아가 기운을 분출하며 뚱이들의 기운을 숨겼고, 이어서 아무도 다가올 수 없도록 투기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이럴 줄 알았으면 왕눈이들도 데려올 걸 그랬나? 아니지? 어차피 양은 넘치도록 많잖아? 그냥 조금 챙겨서 후에 가져다주면 되겠는데?”
뚱이들이 이 많은 정수를 모두 흡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분명한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신보다 약한 존재의 정수로는 더욱 강해지지 못했기에 정수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강해지는 데는 한계가 존재했다.
지금 뚱이들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처음 폭발적으로 강해지던 녀석들이 벌써 강해지는 속도가 줄기 시작했고, 시간이 더 지나자 더는 정수에 손을 데지 않기 시작했다.
물론 뚱이와 하임, 니안, 펜릴 모두가 엄청나게 강해져 있었다.
느껴지는 힘이 라구스들과 차이가 없을 정도로 말이다.
어? 잠깐만?
하임은 난쟁인데? 어떻게 정수를 흡수하는 거지?
물론 난쟁이족이라고 해서 정수를 통해 강해지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마계의 모든 종족은 정수를 복용함으로써 더욱 강해질 수 있었는데,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그들 모두가 정수를 바로 복용하지 못한다는 것.
정제 과정을 거쳐야만 정수를 통해 강해질 수 있었을 뿐 아니라 힘의 증가량이 크지 않다는 것이었다.
근데 이놈은 뭐야?
어떻게 이게 가능한 거지?
얼마 전까지는 하임이 난쟁이족이 아닌 마수라 생각했었기에 아무렇지 않게 넘겼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하임은 분명 마계의 종족 중 하나인 난쟁이족이었다.
당연히 정제 과정을 거쳐야만 정수를 흡수할 수 있었고, 단번에 이렇게 강해지지 못해야 정상이었다.
이놈 이거 도대체 뭐야?
뭔데 상식을 벗어나는 거지?
하임을 보는 내 두 눈에는 의문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 몰라.”
생각이 복잡해진 나는 이쯤에서 하임에 대한 생각을 접기로 했다.
좋으면 좋았지 나쁠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이 정도면 가능성이 생긴 건가?”
-아직 안쪽을 확실히 살피지 않아 확신은 없지만, 가능성은 충분할 거라 생각합니다.
“저도요! 펜릴의 힘이 강해져서 더 강한 공격이 가능할 거예요!”
“거기서 더?”
“네!”
이거 놀라운데?
지안과 펜릴의 연계 공격은 나조차도 품고 있는 파괴력이 어느 정도인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너무 막대한 에너지였기에 총량이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파악이 불가능했고, 파괴력 역시도 군주의 결계를 뚫었다는 것만 알지 얼마나 강한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서 더 강해진다?
저 안에 도사리고 있는 놈이 얼마나 강한지 모르겠지만, 명중만 한다면 절대 무사하지 못하리라.
-내 친히 녀석을 정리하겠다. 길을 열어라!
그때였다.
이 장소에 존재하는 모든 자들에게 의념을 보내며 미르카엘이 오만한 표정으로 명령했다.
그의 명령에 가장 먼저 움직이는 천족.
그 뒤를 따라 용족의 포효가 터져 나왔고, 특이하게도 이후 마족들 역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마족들이 그의 명령을 듣는듯한 이상한 모습.
하지만, 마족들은 그의 명령을 듣는 것이 아니었다.
-대공께서는 도대체 언제 도착하시는 거지?
-이러다 전부 저놈들에게 빼앗기는 거 아닌가?
그랬다.
마족은 천족과 용족에게 정수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움직인 것일 뿐이었다.
“근데 말이야? 왜 다른 종족은 안 보이는 거지?”
난쟁이야 당연히 이런 곳에 참가하는 존재들이 아니었고, 정령 역시도 자신들의 영역을 절대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엘프나 수인족은 아니었다.
그들 역시도 정수에 대한 욕심이 대단하다 들었기 때문이다.
-거리가 가장 먼 종족들이기에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용족의 영역은 천족과 마족의 영역 중앙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마족과 천족이 다른 종족에 비해 빠르게 도착할 수 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하나도 안 보여?”
-엘프야 태생이 느긋한 편이기에 도착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릴 것입니다. 수인족의 경우 호기심이 워낙 많은 편이라 다른 곳에 시간을 쓰고 있을 테고요.
“느긋한 거야? 게으른 거 아니고?”
-그렇게도 말할 수 있겠군요.
크림슨의 표정을 보자 엘프뿐만이 아니라 수인족 역시 호기심이 왕성하다고 하기보단 산만하다고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일단 뒤쪽에 붙어 천천히 이동하며 상황을 살피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얘들은 어쩌고?”
하임이야 난쟁이족이라 생각할 테니 상관없을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뚱이를 비롯한 마수들이었다.
-군주님께서 저곳의 마수들을 지배해 안에 섞여 들어가면 모를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향하는 방향이 아닌 외각의 마수들을 지배해서 그 안으로 이동하자?”
용족과 천족, 마족이 함께 움직인다고 해도 마수들의 영역이 워낙 넓었기에 창 모양의 진형으로 마수들의 틈을 파고드는 모양새일 뿐이었다.
당연히 그들이 공략하는 곳과 조금 떨어진 곳에는 여전히 마수들이 득실거렸기에 놈들을 지배하며 움직인다면 뚱이와 니안뿐 아니라 우리의 존재까지도 숨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괜찮네. 그럼 조금 기다렸다 움직이도록 하자.”
* * *
“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데?”
“그러게요? 도대체 얼마나 뚫고 들어가야 하는 걸까요?”
용족의 집단 공격으로 인해 안쪽을 살필 수 있었던 나는 금방 안쪽까지 진입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벌어졌던 틈이 순식간에 메워지며 엄청난 수의 마수들이 천족과 마족, 용족의 앞을 틀어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자들이라 할 수 있는 자들이었지만, 끝없이 앞을 가로막는 마수들을 뚫기란 그리 쉬워 보이지 않았다.
아니, 용족의 브레스가 다시 한번 작렬한다면 가능하겠지만, 이상하게도 용족은 마수들의 틈으로 파고들며 단 한 번도 브레스를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다른 존재들 역시 마찬가지.
범위공격을 사용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마치 힘을 아끼는 듯 보였기에 의문이 들었다.
“왜 저러는 거야? 순식간에 뚫어버리지 않고 왜 저리 천천히 전진하는 거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최대한 힘을 아끼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다, 조금 있으면 마주칠 최상급의 마수들을 상대한 후를 생각하는 것이겠지요.
“뭐? 그럼 지금 저들 대부분이 미르카엘의 패배를 예상한다는 거야?”
뒤를 생각한다는 것은 미르카엘을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럴 겁니다. 미르카엘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무려 용족의 로드를 잡아먹은 존재입니다. 저들의 머릿속에는 지금 미르카엘의 승리는 들어있지 않을 겁니다. 아니, 승리한다고 해도 곧바로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게 될 거라 생각하는 것이겠지요.
나야 당연히 미르카엘이 지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저들조차도 미르카엘의 패배를 예상하고 있다는 건 조금 어이가 없었다.
“아니, 그럼 왜 따라 들어온 건데? 천족이야 그렇다 쳐도 용족이나 마족은 따라올 이유가 없잖아.”
-용족의 경우 로드가 정말 잡아먹혔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일 테고, 마족의 경우 천족에게 정수를 빼앗기기 싫어서일 겁니다.
용족의 입장은 이해가 됐지만, 마족의 입장은 전혀 아니었다.
마족은 내가 보기엔 욕심이란 것이 거의 없는 종족이었다.
물론 인간에 비해서일 뿐이지만, 이 정도의 위험을 자초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더욱 어이가 없었는데.
-저들이 천족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이야?”
-마족이 욕망이 약하다는 군주님의 말에는 어느 정도 동의를 하는 편이지만, 그것이 천족과 관련되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마족은 천족에게 그 무엇도 빼앗기지 않으려는 이상한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런 쓸모가 없는 돌멩이라도 천족이 원하면 그것을 빼앗으려 할 정도로 마족은 천족과 관련되면 이성을 잃어버릴 정도로 욕망을 분출합니다. 물론 그것은 천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정도라고?”
-네. 천족의 것을 빼앗기 위해서라면 목숨조차도 아무렇지 않게 던져버릴 정도라고 하면 될까요?
솔직히 말하면 어이가 없었다.
둘이 싸우는 이유를 들었을 때도 어이가 없었지만,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질 걸 알면서도, 죽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천족이 정수를 차지하는 꼴을 보기 싫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따라 들어왔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근데 말이야? 그럼 왜 밖에서는 가만히 있던 거야?”
마수들의 영역으로 진입하기 전에 싸움이 났어야 정상이라는 생각이 든 나는 크림슨에게 물었고, 크림슨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황당한 대답을 내놓았다.
-마족과 천족은 무력으로 부딪히지 않습니다. 물론 상황이 심각해지면 무력이 동원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무력싸움은 금지입니다.
“어째서?”
-군주님들께서 그렇게 정하셨으니까요.
“그럼 난쟁이족이 마족의 영지를 공격한 것은?”
-마족과 천족에 한해서만 금지입니다. 수십만 년 전에 마족과 천족의 전쟁이 벌어진 후로 군주님들께서 무력의 충돌을 금하라 명하셨거든요.
“내가?”
-그렇습니다.
군주들은 절대 참견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의아함에 크림슨에게 그 이유를 물어본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생각했던 전쟁과 달리 천족과 마족의 전쟁의 스케일은 엄청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마계 전체를 혼돈으로 물들였을 만큼.
"모든 종족이 지워질 뻔했다고?"
-그렇습니다. 그 당시의 천족과 마족 모두의 머릿속에는 둘 중 하나는 사라져야만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천족과 마족은 마계 곳곳에서 부딪혔습니다. 둘의 영역뿐만이 아닌 용족, 엘프, 정령, 수인들의 대지에서도 그 힘을 발산하며 미친 듯이 부딪혔고, 그 결과 난쟁이족을 제외한 모든 종족이 전쟁에 참여하게 되는 대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다른 종족이 참여하게 되었다고? 어째서?”
-자신들을 방해하는 종족을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뭐? 전쟁 중에 자신들을 방해하는 종족을 공격했다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으니까요. 살의에 빠져서 자신을 방해하는 모든 존재를 적으로 규정하였고, 그 결과 엘프와 정령이 천족의 편에 수인족과 용족이 마족의 편에 붙어 마계 전체에 전란을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사상자의 수가 억을 넘어섰을 뿐만 아니라 마수들이 활개를 치기 시작하면서 피해가 가중되기 시작했죠. 그 결과 지켜만 볼 수 없었던 군주님들께서 나서신 것입니다.
“그 시작이 마계냐 천계냐였던 거고?”
-그렇습니다.
어이가 없었다.
이 땅의 명칭 하나 때문에 사상자가 억이 넘어가는 전란이 발생했다니?
마족과 천족의 자존심 싸움으로 모든 종족이 지워질 뻔했다는 말에 황당하다는 심정이 들었다.
* * *
“드디어 시작인가?”
계속해서 마수들을 지배하며 안쪽으로 파고들던 내 시야에 드디어 최상급으로 보이는 마수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어서 천족과 마족 그리고 용족과 부딪히기 시작했다.
시작은 용족이었는데, 순식간에 최상급의 마수를 쓸어버리는 용족의 모습에 천족과 마족이 참여하기 시작했고, 전과 다르게 힘을 마음껏 발산하며 마수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마족하고 천족은 왜 저러는 거야?”
-하, 하, 하.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전투 중에 저래도 돼?”
참 황당한 모습이었다.
마족과 천족은 상대 진영을 노려보며 자신들이 쓰러뜨린 마수들의 정수를 꺼냈는데, 그 눈빛이 마치 도둑놈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훔쳐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드는 건지 정수를 꺼내는 동안은 상대 진영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대표님.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이곳에서 멈춰서 살피실 거예요? 아니면 저들에게 합류하실 거예요?”
“일단 내 한계까지는 지배하면서 따라갈 거야.”
“괜찮으시겠어요? 지금부터는 대부분의 마수가 상급 이상일 텐데요?”
“해 봐야지.”
이곳까지 오며 내가 지배한 마수의 수는 벌써 1만을 넘어선 상태였다.
물론 하급과 중급이 대부분이었지만, 지금부터 내 앞을 막아서는 녀석들 대부분이 상급과 최상급의 마수들이었기에 살짝 걱정되긴 했다.
하지만, 나 역시도 내 한계를 시험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최대한 지배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볼 생각이었다.
가능하려나 모르겠네.
생각과 동시에 내가 지배하는 영역에 들어온 모든 마수를 보며 영역 전체에 의지를 퍼트렸고, 이어서.
“크헉!”
머리가 깨지는 듯한 통증과 함께 두 눈과 코, 입에서 피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의지가 소모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내 의지에 거부하려 하는 수많은 마수의 반항이 반작용으로 돌아와 내 정신에 타격을 주는 것이었다.
한 번에 너무 많은 수를 지배하려 한 걸까?
점차 심해지는 고통에 그대로 주저앉은 나는 최대한 버티기 위해 노력했다.
응? 이 새끼가!
점차 나에게 지배되어 가는 마수들을 느끼고 있던 그때였다.
마수들의 영역 전체에 퍼져있던 사념 덩어리가 내 영역을 침범하려 하는 것이 느껴졌다.
바하무트의 사념.
마치 나를 방해하려는 듯 사념이 영역을 침범해 의지를 흐트러뜨리기 시작했고, 그에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고통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