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더 버틸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지금 저게 말한 건가?
황당하게도 로드의 육체에서 튀어나온 반투명한 무언가에게서 의념이 들려오고 있었다.
-로드?
로드라고?
미르카엘은 반투명한 무언가를 보며 로드란 말을 꺼냈고, 그에 모두의 시선이 미르카엘을 향해 돌아갔다.
-오랜만이구먼.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던 건가?
-그렇다네. 어떻게든 저 괴물을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으득-
로드의 말에 미르카엘이 이빨을 꽉 깨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거였으면 어째서 사념에 잠식이 되어 버렸단 말인가!
-나 역시 해명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닐세. 하지만 지금 그것이 중한 것이 아닐세. 시간이 없어.
-그것이 중하지 않다고? 헛소리를 지껄이는구나! 한 종족의 지배자라는 자가! 이 땅을 위협하는 적에게 넘어간 것이 중하지 않다면 도대체 무엇이 중하단 말인가!
미르카엘에게서 강한 분노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로드가 잠식된 모습을 목격했을 때도 보이지 않던 감정을 드러냈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분노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도대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사념에 잠식된 로드의 육체에서는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상황이 종료되었다는 말이었다.
-끝나지 않았네.
-뭐라?
뭐? 지금 안 죽었다고 한 거야?
쓰러진 로드의 육체에서는 생명력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죽지 않았다니?
-생명을 가지고 있던 내가 분리되었을 뿐이네.
-그 말은?
-그렇다네.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라는 소릴세.
진짜라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저것을 상대하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나?
-그게 무슨 말인가?
-육체가 품고 있는 힘에 비해 너무 약하다는 생각 말일세.
-아!
-자네도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이군. 하지만, 지금부터는 다를 걸세. 놈의 힘을 약화하기 위해 나 역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네. 하지만, 정신이 담겨있던 머리가 날아갔고, 그 덕분에 더는 버티지 못하게 되어버렸지.
조금 전의 공격이 더 큰 최악을 초래했다는 거야?
솔직히 말하면 나를 비롯한 모두가 눈치채고 있었다.
놈이 품고 있는 거대한 기운에 비해 놈이 너무도 약하다는 것을.
나는 그것이 용족의 특성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용족은 사념에 잠식되면 약해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당연히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무리 로드라고 해도 어쨌든 그 역시 용족이었으니까.
-그렇다고 너무 실망하지는 말게. 내가 사라짐으로써 녀석의 이성 역시도 사라질 테니까. 파괴의 본능만 남은 마수라고 생각하면 편할 게야. 물론 그 강함이 일반적인 왕급 마수와는 차원이 다르겠지만.
그게 그거 아니야?
이성이 사라진 대신 차원이 다를 정도로 강해진다면 일정 수준 이하의 존재는 감히 비벼볼 생각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더욱 강한 공격이 아니면 상처조차 입히지 못한다는 말이었으니까.
-황당하군. 네놈은 지금 천계에 너무나도 큰 위기를 몰고 왔다. 그것도 신들께서 전부 자리를 비운 이 시기에 말이야! 그러고도 네놈이 한 종족의 지도자라 할 수 있느냐!
뭐? 군주들이 모두 자리를 비웠다고?
그 말은 지금 이 땅에 군주가 존재하지 않다는 말이야?
이런 미친!
만약 저 말이 사실이라면 위기도 이런 위기가 없었다.
은연중에 깔려 있던 생각.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오면 군주 중 하나가 나서게 될 테고 당연하게도 순식간에 저 괴물을 처리하겠지.
그런 생각이 은연중에 깔려있었다.
그랬기에 내 지배하에 있는 권속들만을 신경 썼던 것이었고.
그런데 아니라고?
군주들이 없다고?
그럼 저 괴물을 어떻게 막으란 말이야?
-이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군.
-네놈이!
-내 말 잘 듣게. 내가 남아 있었던 이유는 이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으니.
으드득-
이를 가는 미르카엘.
하지만, 로드는 그런 그를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자신의 할 말만을 내뱉기 시작했다.
-대공을 조심하게.
-뭐?
-마족의 대공이 나를 찾아온 적이 있었네. 그 이후 내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무슨 괴변이냐! 내가 알기로 네 녀석이 마지막으로 대공을 만난 것은 무려 1천 년 전이다. 네놈은 그 1천 년간 나에게 그에 대한 어떤 말도 하지 않았어! 심지어 너는 그 변화조차도 나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런 네놈이 지금 와서 그딴 말을 지껄이는 것이냐! 네놈의 정신이 사념에 잠식당한 것이 틀림없구나. 천족과 마족의 사이가 아무리 나쁘다 한들 네놈의 이간질에 넘어갈 듯싶었더냐!
대공이라?
그러고 보면 대공은 이상한 점이 정말 많았다.
그중 가장 이상한 것은 바로 지배의 군주에 대한 이야기였다.
룩산은 분명 대공이 자신에게 지배의 군주라는 자를 만나게 해 주었다 말했다.
그 당시에는 그가 정말 지배의 군주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내가 바로 진짜 지배의 군주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아니, 내가 아닌 내 안에 있는 그놈.
그놈이 바로 지배의 군주였다.
이건 확신할 수 있었다.
놈의 기억이 흘러들어왔을 당시에는 알 수 없었지만, 크림슨을 만나고 난 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는 사실에 그 기억을 떠올린 후 알 수 있었다.
분명 그 기억 속에는 크림슨이 존재했으니까.
-1천 년 전 그를 만났지. 하지만, 그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다네. 아니, 작은 이질감을 느끼긴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 뿐이었지. 하지만, 지배의 신께서 다시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은 나는 다시 그를 찾아갔다네.
-뭐라? 지배의 신께서 돌아오셨다고?
-자네는 듣지 못했겠지. 놈이 노린 것은 나였으니까. 내 귀에만 들어오도록 조치한 것이었어. 내 안에 심어놓은 씨앗을 개화시키기 위해. 당연히 지배의 신께서는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고, 나는 그에게 당해 이런 꼴이 되어버렸지.
로드의 이야기를 듣던 나는 의문스러운 점이 한두 개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그중 가장 의문스러운 것은 바로 그 씨앗이라는 것이었다.
그런 것을 도대체 어떻게 구했으며 어떻게 로드에게 심을 수 있었냐는 것이었다.
거기다, 로드가 사념에 잠식당하는 게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이득이 있는 거지?
잘못했다가는 마계 전체가 혼란에 빠질 위험이 있었다.
그것은 다른 종족만이 아닌 마족 역시 마찬가지였다.
-너의 말이 정말이라면 더욱 의문이 드는데?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이득이 있기에 너를 그 꼴로 만들었다는 거지? 또 그 방법은 무엇이고?
-그건 나도 모른다네. 하지만 생각은 해볼 수 있지. 놈이 노리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나를 이 꼴로 만들었는지.
-대답해라! 그게 무엇인지!
-바로 놈이 사념에 잠식된 상태라는 것.
-무, 뭐라? 대공이…….
허! 저런 미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거지?
1천 년 전에 씨앗을 심었다는 이야기는 그가 최소 1천 년 전에 사념에 잠식되었다는 말이었다.
당연히 1천 년 전이라면 지금껏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설령 숨기는 것이 가능했다고 해도 더 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대공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다는 것.
사념에 잠식되면 파괴의 본능이 이성을 눌러 버리기 때문에 제대로 된 생활은 불가능했다.
-네놈은 그것이 말이 되는 소리라 생각하느냐! 만약 그놈이 너처럼 사념에 잠식되었다면 마족들이 가만히 있었을 리 없다. 무려 자신들의 신을 빼앗아 간 존재다. 배신자 정도가 아닌 패륜을 저지른 행위란 말이다! 그 자존심 강한 녀석들이 그걸 두고만 보고 있겠느냐!
미르카엘의 말에 내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전에는 불가능하다고 말했겠지만, 지금은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게 무슨 말이냐?
-나의 정신이 남아 있었던 것처럼 그 역시 정신이 남아 있다면 어떻냐? 그뿐 아니라 놈의 정신체가 나와 반대로 협력을 하고 있다면?
-뭐?
로드의 말을 듣는 순간 온몸을 관통하는 정신적 충격과 함께 소름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으니까.
-이런! 아무래도 여기까지가 한계인 듯싶구나.
-자, 잠깐!
-대공을 조심하거라! 절대 그와 단둘이 있는 상황은 피해…… 야…… 한다.
미르카엘이 급하게 로드의 정신체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순식간에 흩어져 버리며 그의 존재감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크롸롸롸롸!
머리통이 날아가 버린 로드의 육체가 서서히 그 거대한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 * *
“X발! 저런 놈을 도대체 어떻게 쓰러트리라는 거야!”
그날로부터 벌써 일주일이란 시간이 지났음에도 완전한 마수로 탈바꿈한 로드의 육체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날.
로드의 정신이 사라진 후 몸을 일으킨 놈은 그야말로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상처를 입히는 것조차 쉽지 않을 정도로 강해진 육체.
놈의 주위에 퍼져있는 파괴적인 마력.
마지막으로 놈의 등 뒤에서 꿈틀거리는 수천 개의 촉수.
전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놈은 강해져 있었다.
내 버프로 강해진 뚱이조차도 십여 개의 촉수를 겨우 막을 수 있을 정도였고, 놈의 주둥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브레스는 마수들이 모여 있는 영역을 관통하며 수백 킬로의 거대한 고속도로를 뚫어버릴 정도였다.
그 덕에 우리는 놈을 공격하기는커녕 겨우 도망 다니며 녀석을 끌고 다녔고, 그 덕에 지금 용족의 영역 절반이 쑥대밭이 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미르카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조차도 놈의 공격을 겨우 피하며 빛나는 창을 놈의 몸에 박아 넣어 봤지만, 비늘을 겨우 뚫고 들어갈 뿐 거의 피해를 입히지 못하고 있었다.
-우피엘!
-네!
-수왕 놈과 하이엘프 년은 도대체 언제 도착하는 것이냐! 분명 가까이 왔다 하지 않았느냐!
-그, 그것이…….
욕설을 내뱉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미르카엘 역시 전처럼 분노를 숨기지 않고 우피엘이란 자에게 화풀이하고 있었다.
그만큼 상황이 치열하다는 반증이었다.
다만, 다행인 것은 놈에게 이성이 없다는 것과 미르카엘이 우리에 대한 의심을 거두었다는 것이었다.
라구스가 처음 대공이 보낸 자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던 미르카엘은 놈의 폭주를 힘겹게 버텨내면서도 크림슨에게 다가가 대공에 대해 캐묻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크림슨은 결국 그에게 자신의 정체를 말할 수밖에 없었다.
수호기사단의 부단장이었다는 사실을.
다행히도 미르카엘은 수호기사단이 바하무트의 결계에 진입했던 사실을 알고 있었고, 천운으로 그곳에서 간신히 빠져나왔던 크림슨과 기사단 일부가 돌아가지 않고 마계를 떠돌고 있었다는 설명을 듣고 납득을 한 것이다.
일부 거짓이 섞여 있었지만, 진실 역시 포함되어 있었기에 의심을 한 꺼풀 벗어낼 수 있었던 것.
하지만, 이어지는 미르카엘의 말에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는데, 바로 뚱이와 니안이었다.
누가 봐도 마수라 생각하는 둘을 보며 저것들은 뭐냐 물었는데, 그에 크림슨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곤 미르카엘에게 설명했는데.
저 둘이 홍마족이라 설명하는 것이었다.
바하무트의 강한 사념에 잠식되어 모습이 변한 둘이지만, 자신들과 함께 다니면서 조금이나마 이성을 찾았고, 함께 마계를 떠돌았다는 이야기.
물론 미르카엘이 그 설명에 넘어간 것은 아니었지만, 어찌 되었든 그가 의심을 지우는 계기가 되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거기다 수만 마리의 마수 군단을 거느리는 것 역시도 홍마족이기에 가능하다는 설명으로 대충 무마할 수 있었다.
물론 저기서 지랄 발광 중인 로드의 육체가 소멸한다면 잠깐 내려놓았던 의심이 다시 고개를 들겠지만, 우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을 거다.
저것을 처리하는 것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 * *
-크하하하하! 오랜만에 몸을 좀 풀 수 있겠쿠엑!
뭐야 저 미친놈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녀석이 로드의 육체를 향해 돌진하다 꼬리에 처맞고 그대로 멀리 날아가 처박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크하하하하! 생각보다 더욱 대단하군! 싸울 맛이 나겠어!
-수왕! 이제야 얼굴을 내미는 것이냐!
수왕? 저 미친놈이 수왕이라고?
충격이 심할 텐데도 바로 몸을 일으킨 사자를 닮은 생물.
수왕의 등장이었다.
피피피피핑- 콰과과과광-
순간 멀리서 날카로운 소음이 들려왔고, 그와 동시에 수십 개의 촉수를 순식간에 꿰뚫어 버린 무언가가 폭발을 일으켰다.
미르카엘이 천천히 물러나는 모습을 보며 조금 전 공격이 엘프들의 지도자인 하이엘프의 공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미르카엘.
-이제 한시름 놓을 수 있겠군.
-그게 무슨 소린가! 이제 시작이거늘!
-이제야 도착한 것들이 말이 많구나! 나는 좀 쉬어야겠으니 그동안은 네놈들이 상대하고 있어라!
미르카엘이 수왕과 하이엘프에게 소리치는 것을 들은 나는 급히 내 권속들에게 의념을 보냈다.
-우리도 잠깐 빠진다! 휴식이다!
“뀨!”
“쿠오!”
“키릭!”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내가 계속해서 마력과 상처를 회복시켜주고 피로를 풀어주었다고 해도 지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정신적인 피로는 회복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것들은 뭐지?
-미르카엘! 저자들은 누구죠?
-일단은 한편이다! 그런 시답잖은 질문은 사태가 끝난 후에나 물어라!
허! 지도 다급하던 그 순간에 우리의 정체를 캐물어 놓고 저런 소리를 지껄이네?
그래도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덕분에 귀찮음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미호야!”
“끼웅!”
미호를 부르는 그 순간에도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는 지배자들을 무시한 나는 멀리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거대한 저택을 향해 이동했다.
“일단 밥부터 먹자! 배고파 죽겠다.”
“꾸워어어어어!”
내 말에 가장 기뻐하는 것은 역시나 뚱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