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8화 (188/214)

멀리서 강력한 기운이 느껴진 후 용마왕의 움직임이 멈췄다.

키잉-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소름 끼치는 기운이 이곳까지 그 힘을 전해오고 있었던 것.

-못 간다!

콰앙-

굉음과 함께 수왕의 의념이 터져 나왔고, 그에 급히 용마왕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 나는 용마왕의 표정에서 다급함을 읽을 수 있었다.

“키엑-”

용마왕의 앞을 막아선 수왕은 드러낸 투지와는 다르게 순식간에 멀리 나가떨어졌고, 수왕에 의해 움직임이 잠깐 멈춘 용마왕을 향해 크림슨들이 달라붙었다.

크림슨 역시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치챈 모양인지 어떻게든 녀석을 붙잡아 두려 하고 있었지만, 찰나일 뿐이었다.

놈의 발걸음을 잠시 멈춰 세우는 것이 다였을 뿐 오랜 시간을 잡아두지는 못했는데, 다행히 수왕이 다시 나타나 녀석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분명 한계는 있었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

그렇게 용마왕을 붙잡고 늘어지며 어떻게든 시간을 벌고 있던 중 나는 이상한 장면을 목격했다.

그들과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볼 수 있는 장면이었는데, 용마왕은 잠시 멈칫하긴 했지만, 분명히 앞으로 전진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미르카엘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이 아닌 점점 나에게 다가오고 있는 용마왕.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용마왕이 왜? 설마? 하임?

순간 하임의 이동술이 떠오른 나는 하임에게 고개를 돌렸는데, 역시나 하임이었다.

족히 수십 킬로는 되는 거대한 땅덩이를 이동술을 이용해 뒤쪽으로 이동시키고 있었던 것.

물론 기존의 이동술에 비해 그 속도가 많이 느렸지만, 수왕과 크림슨들의 노력 덕분에 용마왕이 움직이는 속도보다는 확실히 빨랐고, 그 덕분에 용마왕은 계속해서 뒤로 이동 중이었다.

근데 이거 괜찮은 거야? 놈이 눈치채면 큰일 날 텐데?

그나마 다행인 건 녀석에게 이성이 생겨나긴 했지만, 여전히 멍청하다는 사실이었다.

앞을 막는 수왕과 뚱이들을 처리하고 움직이면 벌써 미르카엘에게 도달하고도 남았겠지만, 놈은 눈앞의 위험에 급급해 앞을 막아서는 수왕과 뚱이들을 무시하고 있었다.

콰아앙-

이런! 말이 씨가 되어 버렸다.

녀석은 앞을 계속해서 막아서는 수왕과 뚱이를 처리할 생각인지 강력한 공격을 하기 시작했고, 그에 수왕은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로 멀리 나가떨어져 버렸다.

용마왕의 공격을 수왕이 홀로 받아내었기에 뚱이와 니안, 크림슨은 무사했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였다.

포기하지 않고 녀석을 막기 위해 달려드는 셋.

아, 안 돼!

멈추라는 신호를 보내기도 전에 이미 용마왕의 앞을 가로막은 셋과 그와 동시에 크림슨들을 향해 입을 벌리는 용마왕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마치 슬로우모션처럼 시간이 늘어지는 현상이 나에게 찾아왔다.

녀석의 벌어진 입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가진 작고 검은 마력의 구가 점멸하며 일직선상의 모든 것을 꿰뚫으려던 찰나.

콰앙-

순간 녀석의 뒤통수에 길쭉한 무언가가 작렬하며 녀석의 머리통이 땅에 처박힘과 동시에 늘어졌던 시간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지안아!’

지금까지와는 다른 강한 공격.

힘을 최대한 감추라는 내 지시를 어긴 지안이였지만, 이번만큼은 지안의 결정에 찬사를 보내고 싶었다.

‘저, 조금만 쉴게요.’

‘그래. 수고했어.’

다시 전투가 시작된 후 그 누구도 타격을 입히지 못했던 용마왕을 땅에 처박았을 정도로 강한 일격을 선사했기에 지안 역시 큰 힘을 소모해야 했고, 그 덕에 다시 마력을 충전하기 위해 휴식에 들어갈 필요가 있었다.

근데 지안이가 정말 대단하긴 하네?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있던 용마왕은 몸을 일으켰지만, 그 용마왕조차도 충격이 심한지 몸을 일으킨 후 작게 비틀거리며 한 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바로 조금 전 자신에게 타격을 준 지안이가 있는 방향을 말이다.

“어허헝!”

용마왕의 시선이 잠깐 돌아간 사이 멀리 나가떨어졌던 수왕이 포효를 터뜨리며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구멍이 나 있던 가슴의 상처가 모두 치유된 상태로.

정말 괴물 같은 회복력이 아닐 수 없었지만, 내 표정은 펴질 줄 몰랐다.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긴 했지만, 수왕의 분위기가 전과는 많이 달라 보였기 때문이다.

투지를 뿜어내던 그때와 달리 지금의 그에게서는 조금의 투지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용마왕에 대한 두려움이 가슴속 깊이 각인되기라도 했는지 용맹스럽던 표정이 사라졌고, 거대한 몸을 잘게 떨고 있었다.

-물러나.

응?

용마왕과 수왕이 다시 맞붙기 직전 어디선가 의념이 들려왔다.

-너? 성공한 건가?

-그래. 이유는 모르겠지만, 부름에 답을 해 주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었지만, 하이엘프의 모습을 보니 무언가 변하긴 한 듯 보였다.

오색으로 빛나는 반투명한 무언가가 그녀의 전신을 휘감고 있었는데.

-하하하. 이제 좀 쉴 수 있겠군.

정령인가?

언뜻 느껴지는 기운이 정령의 그것과 비슷해 보이긴 했지만, 확신은 할 수 없었다.

하나의 색만을 가지는 정령과 달리 지금 그녀를 감싸고 있는 그것은 여러 가지의 색이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덤벼. 이 새끼야!

“키릭?”

콰앙-

덤비라 소리친 하이엘프는 자신의 말과 달리 순식간에 자리에서 사라지며 용마왕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고, 그와 동시에 앞차기를 날려 용마왕의 아래턱을 강타해 놈을 허공으로 뛰어 올리곤 그대로 뒤돌려 차기를 날려 녀석의 배를 강타했다.

콰과과과광-

내가 있는 방향으로 튕기며 긴 고랑을 만들어낸 용마왕.

“이런! 피해!”

나와 하임, 미호를 비롯한 라구스들이 있던 곳 바로 앞에 떨어진 용마왕을 보며 소리치자 미호가 급히 공간의 문을 열었고, 공간의 문을 통과해 빠르게 자리를 벗어난 나는 하이엘프를 보며 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미친년이!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이었던 것 같던 하이엘프였지만, 지금 보니 착각을 하고 있었던 듯싶었다.

물론 조금 싸가지가 없어 보이긴 했지만, 설마 저런 미친년일 줄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었다.

하이엘프의 지금 모습은 그야말로 미친년이 따로 없었으니까.

-꺄하하하하! 이 새끼야! 때릴 땐 좋았지? 너도 맞아보니까 어때?

내가 있던 자리를 폭격하듯 강력한 화살을 쏘아내며 쉬지 않고 입을 놀리는 하이엘프.

-뒈져! 뒈지라고!

저거 괜찮은 건가?

-저런 년이 엘프를 이끄는 지도자라니. 쯧쯧쯧.

언제 나에게 다가왔는지, 수왕이 하이엘프를 보며 혀를 차다 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저것이 하이엘프의 원래 성격인가?

근데 크림슨들과 다르게 별로 안 힘들어 보이네?

크림슨들은 지금 미호의 곁에 다가가 미호의 회복을 받으며 그대로 주저앉은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평소에는 숨기고 있지만, 미친년이 따로 없지.

-근데 지금 저 모습은 뭐지? 마치 정령과 합체라도 한 것처럼 보이는데?

-모르나 보군. 하긴 아직 어리니 모를 수도 있겠네. 정령들이 모습을 감추고 수만 년이 지났으니……. 아무튼, 엘프는 정령들의 힘을 빌릴 수 있다네. 지금 저 모습이 바로 정령화라 부르는 엘프들의 전용 기술이지.

-정령화? 그게 뭐지?

정령화라는 말에 궁금증이 생긴 나는 수왕을 향해 다시 질문을 던졌다.

-정령을 불러내 합체한다고 하면 설명이 되려나?

수왕은 이어서 엘프가 정령을 이용하는 방법을 설명했는데, 대답을 들은 나는 황당하다는 생각을 감추지 못했다.

정령을 불러낸 엘프는 정령을 육체에 받아들임으로써 정령의 힘과 자신의 힘을 동화시켜 마력을 증폭시키고, 육체를 강화함으로써 폭발적으로 강해진다 설명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저렇게 순식간에 강해질 수 있는 거지? 지금 보면 용마왕을 압도하는 듯 보이는데.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왕과 왕이 합쳐졌는데 저 정도도 못하면 죽어야지.

-왕이라고?

-그렇다. 지금 하이엘프가 불러낸 존재는 정령들의 왕이다.

수왕의 말에 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정령들이 모습을 감춘 것이 벌써 수만 년 전이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정령들의 군주가 이 땅에서 사라진 후 정령들 역시 이 땅에서 모습을 감추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던 나로서는 지금 상황이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아까 그럼 이유를 모르겠다던 말이?

분명 하이엘프는 이유는 모르지만, 대답을 해 주었다 말한 적이 있었다.

-정령들이 돌아왔다는 말인가?

-그런 듯 보이는군. 이유는 모르지만. 그나저나 아까 줬던 그거 더 있나?

-그거라니?

-그 왜 있잖은가? 마력을 순식간에 회복시켜 주었던 거.

-엘릭서?

-그걸 엘릭서라고 부르는 모양이군. 그래 그걸 하나 주었으면 한다. 마력이 텅텅 비었거든.

빠르게 마력을 회복하려는 수왕을 보며 약간의 의문이 들었지만, 엘릭서를 꺼내 그에게 건넨 후 하이엘프와 용마왕의 전투를 지켜보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대단하긴 하네?

용마왕을 향해 화살을 쏘아내는 것이 아닌 활대를 휘둘러 마구잡이로 쥐어패는 하이엘프의 모습을 보자 이상하게 현지가 떠올랐지만, 애써 생각을 지웠다.

이거 미르카엘이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는데.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마구잡이로 쥐어뜯기는 용마왕의 모습을 보자 미르카엘이 괜한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방 한방이 얼마나 강력한지 활대가 지나간 자리가 터져 나가며 점차 용마왕이 처참한 모습이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재생하듯 회복하는 용마왕이었지만, 상처가 재생되는 속도보다 상처를 입는 속도가 압도적으로 빨랐다.

-슬슬 준비해야겠구나.

-무슨 말이지?

가만히 하이엘프를 구경하던 나는 수왕이 꺼낸 말에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저 강함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다.

-시간제한이 있다는 말인가?

-당연하지 않은가? 평범한 정령도 아닌 무려 왕을 육체에 담아두는 일이다. 이 정도만 해도 오래 버틴 것이지.

-아!

그래서 엘릭서를 달라고 한 거였어?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희망이 순식간에 절망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말게. 미르카엘이 있지 않은가? 그라면 분명 어떤 해결책을 가져오겠지.

그래, 미르카엘!

근데 1분이라는 시간이 원래 이렇게 길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1분이라는 시간을 훌쩍 넘은 것 같았기에 조금 의아했는데, 나와는 달리 수왕은 태연한 표정이었다.

-1분이 지난 것 같은데?

-하이엘프가 버티고 있지 않은가? 그 역시도 놈을 처리하기 위해 최대한으로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겠지. 그나저나 저 난쟁이는 뭐지? 난쟁이도 왕이 있었나?

수왕은 하임을 보며 의문을 드러냈는데, 하임은 지금 이동술을 멈춘 채 용마왕을 붙잡는 데 총력을 다하고 있었다.

하이엘프의 공격에 용마왕이 튕겨 날아가지 않도록 전력을 다해 놈의 하반신을 붙잡고 있는 상태.

-왕은 아니고, 그냥 우리와 함께 여행하는 난쟁이다.

-그런가? 대단하군.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수왕은 상황이 점차 변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뛰어들 자세를 취하려다 말고 급격히 고개를 꺾었다.

-이제 슬슬? 오호? 이제야 주인공이 등장하셨군.

그에 내 고개가 수왕의 시선을 따라갔고, 이어서 천천히 용마왕을 향해 움직이는 미르카엘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 저게 뭐야?

보는 것만으로도 전신에 소름이 돋아나는 괴상한 무언가를 들고 있는 미르카엘.

길쭉한 무언가가 미르카엘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찬란한 빛을 뿌리는 검처럼 보이는 그것은 지금껏 내가 봐왔던 그 어떤 것보다 무시무시한 힘을 품고 있었다.

그저 손에 쥐어져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공간을 쫙쫙 갈라버리는 모습은 용마왕조차 초라하게 만들 정도로 강한 힘을 품고 있었는데.

-미안하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어.

하이엘프를 보며 말하는 미르카엘.

그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다행이네. 나도 한계였는데.

용마왕을 상대하던 하이엘프는 말과 함께 사라졌고, 이어서 수왕의 곁에 모습을 드러냈다.

자리를 뜨는 하이엘프를 붙잡지 않은 용마왕의 시선은 미르카엘이 쥐고 있는 빛나는 검에 머물러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털석-

자리에 주저앉은 하이엘프의 몸에서 밝게 빛나던 반투명한 무언가가 서서히 사라지자 하이엘프는 피로가 한 번에 몰려오는지 헉헉대기 시작했다.

-덤벼라. 네놈의 숨통을 끊어주마.

“크롸롸롸롸!”

미르카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포효를 터트리며 미르카엘을 향해 질주하는 용마왕.

그를 보며 천천히 자세를 잡는 미르케일.

그에 나는 지안을 불렀다.

‘준비해.’

‘네!’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란 말을 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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