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0화 (190/214)

용마왕의 조각난 시체가 녹아내리며 땅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땅속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강대한 마력.

콰앙-

분명 생명력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영혼까지도 소멸시킬 것 같던 미르카엘의 천검에 당한 녀석은 땅속 깊은 곳에서 재생과 동시에 마력을 폭발시키며 튀어나왔고, 그를 본 모두가 녀석을 향해 달려들었다.

가장 먼저 수왕과 뚱이가 녀석을 속박하기 위해 움직였고, 이어서 검을 빼든 크림슨이 녀석을 향해 검을 찔러 들어갔으며 미르카엘이 만들어낸 빛나는 창과 하이엘프가 빠르게 쏘아낸 화살이 녀석의 가슴과 배를 타격하며 폭발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

재빨리 창을 꺼내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공격으로 녀석을 향했다.

단 한 줄기의 선.

창에 불어넣은 지배의 마력에 소멸의 의지를 담은 채로 녀석의 머리통을 향해 찔러 넣는 것과 동시에 하임이 녀석의 전신을 속박했고, 미호가 만들어낸 수백 개의 불덩이가 녀석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크롸롸롸롸”

내 창은 녀석의 피부조차 뚫지 못한 채로 막혀 버렸고, 하임의 속박 역시도 순식간에 깨져 나갔다.

수왕과 뚱이가 녀석의 저항에 멀리 튕겨 나갔고, 크림슨의 검 역시 녀석이 휘두른 꼬리에 막혀 바닥에 긴 고랑을 만들며 밀려났으며 미호의 불덩이 역시 녀석에게 조금의 고통을 줬을 뿐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녀석의 힘이 많이 줄어 있다는 것일까?

분노한 용마왕의 표정과 달리 녀석이 뿜어내는 기운은 전에 비하면 반 이상이 줄어든 상태였다.

문제는 이쪽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

천검을 만들어내느라 대부분의 힘을 소모한 미르카엘과 정령왕과의 합체로 인해 녹초가 되어버린 하이엘프.

가장 강하다고 할 수 있는 둘이 전력에서 빠져나갔다는 건 생각보다 큰 문제였다.

놈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건 미르카엘과 하이엘프 둘뿐이었으니까.

물론 지안이가 남아 있긴 했지만, 이렇게 모두가 모여 있는 상황에서 지안이는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최대한 마음을 차갑게 가라앉히며 생각에 생각을 더한 내가 내릴 수 있는 결정은 단 하나였다.

놈과 떨어지는 것.

용마왕 역시 아직 완전히 회복된 것이 아니었다.

팔과 다리가 존재하긴 했지만, 제대로 된 형태는 아니었고, 육체 곳곳에 구멍이 뻥뻥 뚫려 있는 상태였다.

그 덕에 녀석은 이쪽을 향해 달려들기는커녕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녀석을 처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미르카엘이 만들어낸 빛나는 창은 전과 다르게 그 크기가 반도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찬란한 빛을 뿜어내지도 못하는 상태였고, 하이엘프의 공격도 마찬가지.

이대로라면 놈의 재생을 방해하기는커녕 순식간에 썰려 나갈 것이 뻔했다.

-물러난다!

내 외침과 동시에 미호가 공간의 문을 열어버렸고, 모두가 내 뜻을 알아채고 공간의 문을 향해 천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대로 물러나야 한다고?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는데?

이미 공간의 문 속으로 사라진 하이엘프와는 다르게 미르카엘과 수왕은 용마왕에게 시선을 거두지 않으며 의념을 퍼뜨렸다.

-시간 없어! 빨리!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둘을 향해 소리치자 둘 역시 천천히 공간의 문으로 다가왔고, 그와 동시에 용마왕의 주둥이가 벌어지며 공간의 문을 향해 핏빛의 레이저가 쏘아졌다.

-어딜!

그에 크림슨이 앞으로 나서며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며 놈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전력을 다했고, 하임이 녀석의 벌어진 아가리를 노리고 땅을 일으켰다.

콰앙-

놈 역시 지금을 기회라 생각하고 있었는지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음에도 이쪽이 도주하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는 듯 보였다.

-빨리 들어가! 빨리!

또 한발의 브래스를 쏘아내려는 녀석을 보며 급히 외치자 미르카엘과 수왕이 공간의 문 속으로 사라졌고, 이어서 모두가 그 뒤를 따라 사라졌다.

공간의 문을 통과한 나는 모두가 무사한 것을 파악하는 순간 지안을 향해 지시를 내렸다.

‘부탁해.’

‘네!’

지안의 대답이 들려옴과 동시에 나는 하임과 미호를 향해 소리쳤다.

“놈이 끝장나는 순간 정수 가져와. 재생 따위는 꿈도 꾸지 못하게. 알았어?”

“뀨!”

“끼웅!”

그와 동시에 용마왕을 향해 지안의 일격이 쏘아져 나갔고, 이어서 놈이 있던 자리를 타격했다.

쿠아아아앙-

거대한 버섯구름을 만들어내며 폭발한 화살은 강력한 후폭풍을 일으키며 그 위력을 과시했다.

콰과과과과광-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강력한 마력의 후폭풍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한 채 멍하니 보고만 있었고, 후폭풍이 코앞까지 다가오고 나서야 급히 마력을 끌어올리며 저항하기 시작했다.

괜찮겠지?

만약을 대비해 지안이의 곁에 라구스들을 보내 둔 상태였기에 지안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지만, 저 정도의 공격을 날렸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었다.

그때 목격했던 공격에 비해 몇 배는 강력해 보이는 위력.

물론 펜릴의 성장이 바탕이 되었겠지만, 힘을 컨트롤하는 것은 지안이기에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도련님!’

응? 뭐야 멀쩡한가 본데?

순간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가 지안이라 착각했던 나는 곧바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현지? 너 현지야?’

‘네! 저 깨어났어요.’

하나를 처리하자 다른 걱정거리가 해결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몸은 어때? 괜찮아?’

‘물론이죠. 그런데 도련님 지금 어디세요?’

‘일이 있어서 어디 좀 왔어. 너는 신경 쓰지 말고 일단 몸 회복하고 있어.’

‘저도 가면 안 돼요? 재밌을 것 같은데?’

‘다 끝났어. 금방 돌아갈 거니까 기다리고 있어.’

‘에이- 좋다 말았네.’

역시 특이해.

이제 막 깨어난 주제에 벌써 싸울 궁리를 하는 현지.

‘잠깐 기다려. 거의 끝났으니까 마무리하고 이야기하자.’

‘네.’

현지와 짧은 대화를 나누던 나는 하임과 미호에게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찾았어?”

내 물음에 고개를 젓는 둘.

하긴 그 무시무시한 마력의 폭발 속에서 정수를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려나?

후폭풍이야 아무렇지 않게 견딜 수 있었지만, 뻥 뚫린 저 거대한 구멍을 보면 찾는 게 절대 쉽지는 않아 보였다.

지름이 수십 킬로에 이르는 거대한 크레이터.

마치 거대한 운석이라도 떨어진 듯한 모습이었다.

-조금 전…… 그건 뭐지?

수왕은 황당하게도 미르카엘을 보며 물었다.

조금 전의 폭격이 천족에 의한 공격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 역시 궁금하군.

그에 미르카엘의 고개가 크림슨에게 돌아갔고, 그에 크림슨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비밀이다.

-타…… 천사인가?

-마음대로 생각하도록.

미르카엘이 아는 천족 중에는 저런 공격이 가능한 존재가 없었다.

아니, 모든 종족을 통 털어도 저런 공격을 할 수 있는 존재는 알지 못했는데, 아마 타천사라면 가능한 존재가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스스로 자신의 날개를 뽑아버린 천족.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마족이라도 되는 듯 강함을 추구했고, 투쟁을 원했다.

천족의 사회와 어울리지 않던 돌연변이들.

그들은 다툼과 경쟁이 없는 천족의 사회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날개를 뽑아버린 후 마족의 사회로 들어가 마족처럼 생활하는 자들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마족들이 쉽게 받아들여 주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강함을 추구하는 마족 특성상 힘을 증명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받아들여 주었다.

물론 나 역시 타천사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대충 조사를 해 보았기에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대단하군. 저런 전력을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가끔 도움을 주던 공격들이 조금 전 그자의 공격이었던 건가?

수왕은 가끔 날아오던 공격들을 떠올리고 크림슨에게 물었고, 그에 크림슨은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그렇다.

-거기까지 하고 일단 움직이는 게 어떤가? 놈이 확실히 끝났는지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나?

-확인할 필요가 있을까? 그 상태에서 저런 공격을 처맞았는데?

-혹시 모르지? 놈이 아직 살아 있을 수도.

그에 우리는 천천히 크레이터의 중심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 * *

아무것도 없네?

시체는커녕 뭔가 있었다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때? 찾았어?”

하임과 미호 역시 이곳으로 향하며 계속 놈의 흔적을 찾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러면 조금 그런데?

정수를 얻지 못하면 이곳에 와서 놈을 처리한 의미가 퇴색되어 버리기 때문이었다.

물론 얻은 게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처음 계획했던 대로 왕급으로 진화를 하고 있었으니까.

거기다, 미르카엘이 건네주기로 한 정수 역시도 이미 내 손에 들어온 상태였기에 이득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래도 아까운 것은 아까운 것이었다.

용마왕의 진짜 정수가 내 손에 들어왔다면 지금보다 더욱 굉장한 전력을 얻게 되었을 테니까.

뭔가 조금 허무한데?

솔직히 말하면 용마왕에게 이성이 생겨났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나는 지금 당장 놈을 처리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후에 다시 충돌하게 될 것을 대비해 녀석의 힘을 파악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마계에 큰 피해가 오긴 하겠지만, 미르카엘과 수왕, 하이엘프만 살려 놓으면 후에 이쪽의 전력이 완성된 후에는 분명 어렵지 않게 녀석을 처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완전한 왕급으로 거듭난 뚱이들과 2차 각성을 한 크림슨과 라구스, 각 종족의 지배자들이 힘을 합치면 피해 없이 녀석을 막아낼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지안을 계속 아끼고 있었던 것이었다.

놈에게 벗어날 시간을 벌기 위해서.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은 하이엘프가 다시 나타났을 때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용마왕을 압도하는 하이엘프의 모습을 보며 생각이 점차 변하기 시작했고, 이어서 천검을 들고 나타난 미르카엘을 보며 가능성을 발견했다.

놈을 처리할 수 있겠다는.

그래서 미르카엘의 천검에 녀석이 꿰뚫렸을 때도 정수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놈을 살폈다.

아직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분명 놈의 존재감이 완전히 사라졌음에도 나는 일말의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뭐. 그것도 여기까지인 것 같지만.

-끝났으면 난 그만 돌아가도 되지?

하이엘프 역시 의심을 완전히 거두었는지 돌아가겠다는 말을 꺼냈는데.

-아직이다. 할 말이 남았어.

미르카엘은 아니었다.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는 모양.

-무슨 할 말?

-로드가 이렇게 된 이유.

아! 그 이야기가 남아 있었구나.

마족의 대공에 대한 이야기.

놈을 만난 후 로드가 잠식되기까지의 과정.

그것이 남아 있었다.

-멍청하게 사념에 잡아먹힌 거 아니야?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로드는 대공을 만난 후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을 발견했다고 했다.

-무슨 말이야?

-대공이 자신의 몸에 씨앗을 심었다고 하더군.

-지금 네놈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이건 용족과 마족의 전쟁으로 끝날 만한 문제가 아니다. 그때의 상황이 재현될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미르카엘의 말에 수왕은 살짝 화가 난 듯 보였는데.

-내 말에 거짓은 없다. 의심이 가면 저들에게 확인해 보아라. 저들 역시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정말이야?

-정말인가?

미르카엘의 말에 수왕과 하이엘프의 고개가 크림슨에게 돌아갔다.

-미르카엘의 말은 사실이오. 나 역시 로드에게 그리 들었으니까.

-그 자리에는 우리만 있던 것이 아니다. 용족의 장로들 역시 그곳에 있었으니까. 아마 그들은 전쟁을 준비하고 있겠지.

-뭐라고? 그걸 보고만 있었단 말인가? 사념에 잠식된 로드일세! 어떤 이간질을 할 줄 알고!

-맞아요. 사념에 잠식된 로드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거라고!

조금 전 전쟁에 대해 별것 아닌 듯 떠들던 수왕과 하이엘프였지만, 정말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말아라. 그들도 사실이 확인되지 않으면 쉽사리 움직이지 못할 테니까. 나 역시 그들을 가만히 두고만 보고 있지는 않을 거고. 그래서 말인데. 제안할 것이 있다.

-제안?

-그렇다.

-말해봐.

-1년 후 이곳에서 다시 모이는 것이 어떤가?

뭐야? 제안치고는 너무 초라한데?

그나저나 우리는 왜 계속 이곳에 있는 거지? 가도 되려나?

솔직히 말하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괜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나와 다르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크림슨 때문에 쉽사리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지금의 나는 아무런 힘이 없다. 천검을 만들어내기 위해 너무 큰 힘을 소모해 버렸어. 충분한 휴식이 필요한 상태라는 말이다. 그건 하이엘프, 너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맞아. 최소 6개월 이상은 쉬어야 할 것 같아.

어쩐지 이상하다 했다.

수왕과 다르게 둘은 조금의 기운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근데 정말 이상하네?

저 둘처럼 모든 힘을 쥐어짠 지안이는 어떻게 하루 만에 회복을 하는 거지?

-그렇겠지. 그래서 1년 후라 말한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찾아가고 싶지만, 정말 로드의 말이 사실이라면 모두가 위험에 처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 로드의 말이 도대체 뭐길래 우리가 위험에 처한다는 거지? 너도 알겠지만, 대공은 그리 강하지 않다. 나 혼자서도 충분히 그를 감당할 수 있단 말이다.

-그래. 우리가 알던 대공이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로드는 그가 적어도 천 년 전에 사념에 잠식되었다고 생각하더군.

-허! 어이가 없군. 너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나도 처음에는 너와 비슷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로드는 가능할 수도 있다고 하더군. 자신처럼 사념에 저항하지 않고 사념을 받아들인다면 말이야.

-그게 가능하다고?

-로드의 말을 들어보니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

미르카엘의 말에 수왕과 하이엘프는 깊은 고민에 빠져 침묵했고, 잠시 둘의 모습을 보며 기다리던 미르카엘이 이어서 의념을 보냈다.

-어떻게 할 텐가? 내 제안을 받아들일 텐가?

-알겠다. 1년 후 이곳에서 만나기로 하지. 이대로 찝찝함을 남기는 것보다는 확인해 보는 것이 좋을 테니.

-나도요. 그때 만나도록? 응? 뭐지?

하이엘프는 말을 이어가다 말고 내 등 뒤를 바라보았고, 그에 모두가 내 등 뒤로 시선을 두었다.

뭔데 그래?

궁금증에 등을 돌리자 미호가 만든 공간의 문이 시야에 잡혔는데, 그곳에서 뭔가가 나오고 있었다.

지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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