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련님! 저 왔어요!”
공간의 문을 통해 나타난 것은 현지였다.
“기다리라니까 왜 왔어?”
“심심해서요.”
“다 끝났다니까?”
“진짜 끝났어요?”
“그럼 내가 거짓말하겠냐?”
내 말에 실망을 감추지 못하는 현지.
참 한결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다 살아난 건 아니었지만, 고생을 그렇게 해 놓고서 또 이러는 걸 보면 참 특이했다.
다만 현지에게서 약간의 이질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뭐랄까? 조금 변한 것 같다고 해야 할까?
“그럼 저건 뭐예요?”
“뭐가?”
현지를 보며 생각을 하던 나는 허공을 가리키며 입을 여는 현지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에 현지가 이어서 입을 열었다.
“저 위에 숨어있는 쟤요.”
“위?”
“잠깐만요.”
순간 눈앞에서 현지가 모습을 감췄고.
콰앙-
이어서 하늘 높은 곳에서 거대한 타격음이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뭔가가 추락하고 있었는데.
“어? 설마?”
쿠웅-
내가 입을 염과 동시에 무언가 땅에 처박히며 강한 진동을 만들어냈고, 그와 동시에 그 위로 무언가가 떨어져 내리며 녀석을 짓밟았다.
“이 아이요. 저 위에 숨어서 이쪽을 몰래 지켜보고 있던데요?”
-소멸하지 않았다고?
-이런!
용마왕.
놈은 소멸한 것이 아니었다.
심각한 타격을 받긴 했지만, 소멸하지 않았고, 그에 이쪽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몸을 숨긴 채 이곳을 주시하며 힘을 회복하고 있었던 것.
“키에엑-”
-모두 피…… 어?
“가만히 좀 있거라. 아이야. 뒤지게 처맞기 싫으면.”
피하라 소리치려던 나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구타에 입을 다물었다.
뭐지? 왜 꼼짝도 못 하고 맞기만 하는 거지?
현지의 가벼운 발길질에 놈의 고개가 이리저리 꺾이고 있었다.
모든 힘을 소모한 건가? 아닌데? 이 정도면 수왕 정도는 쉽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놈은 힘을 모두 소모한 것이 아니었다.
놈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수왕의 힘을 가볍게 웃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저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도련님. 이 아이 지배하실 거예요? 아니면 제가 좀 가지고 놀아도 되죠?”
“어? 어. 그래.”
“아싸!”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현지는 주먹을 꽉 쥐며 기뻐했고, 이어서 녀석을 강하게 차올렸다.
그에 멀리 나가떨어지는 녀석.
그리고 시작된 현지의 구타는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퍼퍼퍼퍼퍼퍼퍼퍽-
눈에 제대로 잡히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며 놈을 향해 주먹을 날리고 발길질을 하는 현지도 어이가 없었지만, 용마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놈은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공처럼 둥그렇게 말고는 고통을 줄이기 위해 필사적으로 굴러다니고 있었다.
-저게 지금…….
-저놈이 조금 전에 우리가 상대하던 그놈이 맞는 건가?
미르카엘과 수왕은 용마왕을 보며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물론 나와 크림슨 역시 마찬가지.
다만 하이엘프만이 조금 다른 반응을 보였는데.
-엘프? 저렇게 강한 엘프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뭐? 엘프?
지금 현지를 보고 엘프라고 한 거 맞지?
-지금 쟤를 보고 엘프라고 한 거야?
-내가 물어보고 싶은 말이다. 저자는 누구지? 어째서 저자에게서 진한 엘프의 향기가 나는 거지?
향기? 뭔 개소리야?
무슨 향기가 난다는 거야?
-쟤는 엘프가 아닌데?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검은 머리의 엘프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어째서 저토록 진한 향기가 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
-그 향기라는 것이 뭐지? 혹시 설명해 줄 수 있나?
-향기는 향기다. 엘프들만이 맡을 수 있는 종족 특유의 개성이지.
종족 특유의 개성이라?
그러니까 엘프들만의 고유한 뭔가를 의미하는 듯했는데, 나로서는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한 듯싶었다.
-뭘 그렇게 어렵게 말하는가? 그냥 엘프들이 가지고 있는 특유한 마력의 성질이라고 하면 될 것을. 내가 설명해 주도록 하지. 너도 알고 있겠지만, 모든 존재는 비슷하지만 다른 마력을 품고 있다. 그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우리 천족의 마력이 빛으로 표현되는 것처럼 엘프 역시도 마력의 색이 다르다는 것이지.
가만히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던 미르카엘은 하이엘프의 설명이 답답했는지 직접 나서서 설명하기 시작했는데, 덕분에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마력의 성질이라는 거지?
내 지배의 마력과 비슷한?
다만, 미르카엘의 설명을 듣던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현지의 마력은 내 지배의 마력을 닮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와 현지의 마력은 비슷하지만, 하이엘프가 느끼기에는 다르다는 말인가?
생각에 잠겨 현지를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현지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이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현지의 마력이 왜?
지배의 마력과 비슷한 것은 여전했지만, 이상하게도 다른 종류의 마력처럼 느껴졌다.
현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은 여전히 붉은 빛이 강했지만, 그 사이사이 녹색의 빛이 섞여 있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붉은빛을 띠고 있었지만, 개별적으로 보면 녹색 빛이 섞여 있었던 것.
“도련님. 얘 어떻게 할까요? 완전히 뻗어버렸는데?”
생각을 정리하던 사이 현지는 놀랍게도 정신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용마왕의 뿔을 잡고 땅에 질질 끌어 나에게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은 용마왕이 정신을 잃은 것도 아니었고, 용마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도 아니었다.
“근데 얘 지배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힘드실 것 같은데?”
“너…… 누구야?”
바로 이것이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현지의 몸을 차지한 존재.
분명히 말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이 녀석은 현지가 아니었다.
물론 나와 연결된 선도 그대로였고, 모습도 현지 그 자체였지만,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왜 이걸 모르고 있었지?
분위기.
지금 내 앞에서 현지를 흉내 내고 있는 존재의 분위기는 절대 현지라고 할 수 없었다.
“네?”
“너 누구냐고.”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저것조차도 연기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존재는 현지가 아니라고.
“어떻게 아셨어요?”
“누구냐고!”
“저 현지 맞아요. 조금 달라졌을 뿐이죠.”
“안 믿어.”
“아! 왜요! 저 현지 맞아요!”
모두가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지배자들을 비롯한 내 부하들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나는 쉽게 넘어갈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바로.
“아 진짜 왜 그러세요? 저 현지라니까요?”
“그럼 그 어조는 뭐야? 왜 그렇게 나긋나긋해?”
말투가 완전히 변한 건 아니었지만, 풍겨 나오는 분위기나 어조? 억양? 아무튼, 그 비슷한 것들이 나에게 심한 불쾌함을 주고 있었다.
현지가 깨어나고 나에게 처음 연락을 했을 때 내가 현지를 지안이로 착각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지안이와 비슷한 차분함이 현지에게서 느껴졌기 때문에.
거기다 말투에 조금 거친 부분이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고귀함? 권위? 그 비슷한 것이 느껴졌기에 더욱 현지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네? 제가요?”
“소름이 끼친다고.”
“그 정도예요? 고친다고 고쳤는데 아직 남아 있나 보네요.”
역시 스스로 인정을 하는 것을 보니 내 눈앞의 존재는 현지가 아님이 틀림없었다.
현지라면 저렇게 고귀해 보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설명해 드릴게요. 지금은 일단 이 아이부터 처리하는 게 어떠세요?”
“그게 제일 이상해. 아이? 너 지금 이놈보고 아이라고 하고 있잖아!”
소름이 끼쳤다.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부터 현지의 말투뿐만이 아니라 몸짓 하나하나까지도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특히 용마왕을 가리키는 아이라는 단어와 저 우아한 손짓은 뭐란 말인가?
도저히 눈앞의 존재가 현지라 생각되지 않았기에 이제는 두려움까지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 좀! 정말 이러실 거예요? 저도 이상하다는 거 안다고요. 그런데 어떻게 해요? 그 이상한 곳에서 빠져나온 후부터 이렇게 변해버린걸? 도련님도 예전에 그러셨잖아요. 갑자기 난폭해지신 것처럼 저는 성격이 유해졌을 뿐이라고요.”
“아니. 넌 성격은 그대로야. 그저 행동이 조금 유해졌을 뿐이지.”
“나도 알아요!”
나에게서 고개를 획 돌려버리는 현지를 보자 이제 좀 현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그곳에서 빠져나온 후에 성격이 변했다고?
분명 나와 비슷한 경우처럼 보였다.
하지만, 도대체 현지가 무엇이길래 행동이 저렇게 변한단 말인가?
설마 전쟁의 기억이?
현지가 전생에 고귀한 신분이기라도 했나?
혹시 귀족 집안의 영애라던가 귀부인 뭐 그런 거였나?
일단은 현지가 맞는 것 같았다.
“일단 일 끝나고 다시 이야기하자.”
“네.”
“그놈 처리해.”
“네.”
푸욱-
대답과 함께 용마왕의 뒤통수에 손을 박아 넣은 현지.
“도망을 가?”
혼잣말과 함께 현지의 팔꿈치가 뒤통수 속으로 사라졌고, 이어서 현지는 어깨까지 팔을 박아 넣었다.
그리고.
“어쭈?”
푸확-
어깨까지 박아 넣고도 정수를 빼내지 못한 현지는 얼굴을 살짝 찡그린 후 오른손을 들어 올린 후 용마왕을 반으로 찢어 버리고 나서야 정수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여기요.”
정수를 나에게 들이밀며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현지는 역시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일단 그렇게 일이 일단락되었다.
* * *
“모두 편히 쉬도록 해. 현지 너는 좀 따라오고.”
“네.”
모두의 마중을 받으며 영지에 도착한 후 나는 일행에게 휴식을 취하라 명한 후 현지를 데리고 내 방으로 이동했다.
“어떻게 된 거야?”
“그러니까 제가 그 이상한 곳에서 벗어나는 도중에 잠깐씩 이상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이상한 거?”
“네. 어떤 기억들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지금은 그 기억들이 어떤 기억인지는 생각이 나질 않아요. 아무튼, 그 기억들에 영향을 받은 것 같더라고요.”
“음? 확실해?”
기억에 영향을 받았다라?
생각이 나지 않더라도 무의식중에 그 기억에 대한 잔재가 남아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기억을 봤다는 것 말고도 예상이 가는 것이 있긴 한데 확실하지 않아서요.”
“뭐가?”
“그곳에서 누군가를 본 것 같거든요.”
“무슨 말이야?”
설마? 나와 비슷한 경우인가?
현지에게도 또 다른 자신이 존재할 가능성.
아니, 나와 현지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에게 존재할지도?
“저도 확실하지 않은데 이상하게 누굴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근데 기억에 없으니 알 방법이 없죠. 다만, 깨어난 후 많은 것이 변했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어요. 통제하지 못했던 힘이 통제된다던가 마력의 성질이 변했다던가 도련님의 말대로 행동이 변한 거 말이에요.”
“그걸 깨어난 순간 알아챘다고?”
“네. 그 모든 것을 제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더라고요.”
나와 비슷해 보였지만, 다른 부분이 꽤 크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나는 성격이 변한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변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 그러고 보니?
마계를 발견했을 당시에 나는 또 다른 나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분명 한순간에 강해졌었지?
그것과 비슷한 경우인가?
일단 이건 넘어가고.
“얼마나 강해졌는데?”
“그걸 저도 모르겠어요. 비교할 대상이 있으면 좋겠지만, 대상이 없다 보니 제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알 방법이 없잖아요.”
“그건 그렇네?”
“근데 하나는 알 수 있었어요. 그곳에 있던 지배자들? 그들보다는 확실히 강해요. 훨씬.”
“그 정도야?”
“네. 그들 셋이 함께 덤벼도 어쩌지 못할 정도로 강해졌어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미르카엘과 하이엘프가 온전치 못한 상태였기에 현지가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는 것은 힘들어 보였는데.
“도련님 지금 그들이 정상이 아니었다는 생각하고 있으시죠?”
“어? 어떻게 알았어?”
“저 바보 아니라니까요. 그 정도는 도련님 표정만 읽어도 알 수 있다고요.”
역시 현지가 아닌가?
“맞다고요!”
“그래. 그렇다고 치고.”
“뭘 그렇다 쳐요!”
“아무튼. 그들은 정상이 아니었다고. 그러니 셋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위험해.”
“아니요. 저 정도 되면 그들이 어디까지 힘을 낼 수 있는지 정도는 파악이 가능해요. 그들이 전력을 발휘한다고 해도 제 상대는 아니에요. 이건 확신할 수 있어요.”
“확실하다고?”
“네.”
설마 현지 홀로 정상적인 상태의 용마왕을 잡을 수 있을 정도란 말이야?
궁금해진 나는 곧바로 현지에게 물음을 던졌다.
“너 혹시 그놈이 멀쩡했어도 처리할 수 있었어?”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 가능하지 않을까요? 제가 느낀 것이 확실하다면 저와 비등하거나 살짝 아래 정도로 보이거든요.”
“너…… 정말 괴물이 되어버렸구나?”
“뭐라고요!?”
너무 놀라 나도 모르게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하지만.
“사실이잖아.”
진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인간의 몸으로 이 정도까지 강해진다는 것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차라리 마족이나 마계의 다른 종족이었다면 모를까 인간이 어찌 이렇게 강해질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따지면 저보다 지안이가 더 괴물이거든요! 제가 도련님 말을 무시하고 그곳에 간 이유가 뭔지 아세요? 두려움 때문이에요. 말도 안 되는 파괴적인 힘을 느끼고 깜짝 놀라서 확인하기 위해 간 거라고요. 물론 지안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무슨 소리야? 너 정도 되면 이제 그 정도 공격은 가능한 거 아니야?”
“아니요. 아무리 저라고 해도 그런 공격은 불가능해요.”
“어째서?”
“아무리 대단한 존재라고 해도 단번에 모든 힘을 뽑아내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요. 아니, 힘이 거대하면 거대할수록 그 힘을 다루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일정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면 지안의 공격이 비정상이라는 걸 알 수 있다고요.”
그러니까 힘을 견디지 못한다는 건가?
아무리 강한 힘을 몸에 품고 있다고 해도 그 힘을 끄집어내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말이었다.
나 역시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할 방법이 존재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기에 지금껏 의문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불가능하다고?
“그럼 지안이는 어떻게 가능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