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구스가 군주님을 뵙습니다!
각성이 끝나자마자 나를 찾아온 라구스에겐 그때의 패배감은 없었다.
용마왕을 상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패배감에 빠져 있던 라구스는 각성과 동시에 자신감을 되찾은 듯 보였다.
“만족할 만한 성과가 있었나 봐?”
-그렇습니다. 이제 이 라구스가 군주님을 곁에서 보필하겠습니다.
물음에 옆에서 대기하는 크림슨을 잠시 바라본 라구스가 미소를 머금으며 우쭐한 표정으로 대답했고.
-이, 이놈이.
-어허! 아버지. 이제는 제가 위입니다. 제가 모시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만나자마자 충돌하는 둘을 보자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괜히 크림슨의 신경을 건드는 라구스와 그에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크림슨.
거기다 그런 모습까지도 멋있는지 옆에 꼭 붙어서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는 안나.
-누가 위인지 한번 확인해 보겠느냐? 내가 보기에 네놈은 아직 애송이다.
-그 말, 후회하실 텐데요?
전에 나에게 했던 말과 다르게 크림슨은 라구스를 보며 이죽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아직은 자신의 상대가 아니라는 듯이.
-후회는 네놈이 하게 되겠지.
누가 후회를 하게 될까?
과연 라구스는 크림슨을 이길 수 있을까?
아마 당분간은 힘들 것이다.
라구스가 깨어나기 전까지 현지와 수많은 대련을 치러온 크림슨은 지금 새로운 무기를 손에 쥐었다.
처음 현지에게 상대도 되지 않았던 크림슨이 대련을 거듭하며 점차 힘의 통제와 활용에 익숙해지며 점차 한계를 넘어서기 시작했고, 그를 더욱 증폭시킬 무기가 그의 손에 들어온 것.
“한번 해봐. 라구스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나도 궁금하니까.”
* * *
-이럴 수가?
-어떠냐 이놈아. 아직도 네놈이 강하다고 생각하느냐?
-말도 안 돼!
라구스와 크림슨의 대결은 크림슨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영지의 안전을 위해 바하무트의 결계가 있는 장소로 이동한 후 크림슨과 라구스는 곧바로 부딪혔고, 허무할 정도로 간단히 크림슨이 승리해 버렸다.
“힘의 크기는 라구스가 훨씬 크지만, 저건 못 막나 보네요.”
옆에서 현지가 함께 대련을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에이- 저랑은 다르죠.”
“뭐가 다른데? 너도 비슷하지 않아?”
“아니요. 저는 저걸 부수려면 얼마든지 부술 수 있다고요. 다만, 저걸 부숴 버렸다가는 크림슨이 난동을 부릴까 봐 못하는 거죠. 아깝기도 하고.”
크림슨은 어디선가 본 기술을 만들어 냈는데, 바로 미르카엘의 빛의 검과 같은 공간을 자르는 검을 만들어 낸 것이다.
파괴력 면에서는 조금 차이가 났지만, 실용성에서는 미르카엘의 빛의 검을 능가하는 굉장한 기술.
유지하기 위해 누군가를 희생할 필요도 없었고, 크림슨의 마력 소모 역시도 그리 큰 수준이 아니었지만, 단점도 있었다.
바로 지금 크림슨이 들고 있는 저 검으로만 가능한 기술이라는 것이었다.
-그 검. 뭡니까?
-뭐가 말이냐?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그 검 말입니다!
-그저 검일 뿐이다. 설마 무기의 차이로 네놈이 졌다고 생각하는 거냐?
-아니라고요?
-아니다.
뻔뻔한 표정으로 부인하는 크림슨.
하지만, 라구스는 이미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검에서 느껴지는 힘이 보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당연히 눈치채겠지.
용마왕의 정수 10분의 1이 들어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검신을 유지하는 재질이 바로 용마왕의 뼈였으니까.
용마왕의 정수.
그것은 왕급에 올라선 마수들조차 함부로 탐낼 수 없을 만큼 위험한 물건이었다.
미르카엘을 비롯한 수왕이 정수를 탐내지 않은 이유.
그것은 정수에 담긴 사념이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손을 데는 것만으로도 사념에 잠식되어 버릴 수 있는 위험한 물건.
그랬기에 나는 정수를 활용할 방법을 찾아야 했고, 의외의 장소에서 활용법을 찾을 수 있었다.
바로 하임 덕분에.
하임은 어느 날부터 손에 이상한 막대기를 들고 다녔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용마왕의 뼈였다.
언제 챙겼는지 하임은 용마왕의 조각난 육체를 모두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 정강이뼈를 들고 다녔던 것이었다.
거기다, 하임은 황당하게도 그 용마왕의 뼈를 강화까지 해둔 상태였다.
용마왕을 처리한 후 하임은 모습을 감췄는데, 나는 그것이 완전한 왕급으로 재탄생하기 위해 휴식에 들어간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하임은 새로 얻은 장난감을 어떻게 가지고 놀지 궁리를 했던 것.
1개월 이상의 시간 동안 용마왕의 뼈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한 하임은 간신히 50cm 정도의 뼈만을 강화할 수 있었고, 그를 들고 다시 나타난 것이었다.
덕분에 나는 용마왕의 정수를 활용할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용마왕의 뼈로 무기를 만들면 정수를 무기에 박아 넣음으로써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나는 하임과 미호를 비롯한 영지의 대장장이들을 전부 투입하여 무려 4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검을 하나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검의 주인은 보는 대로 크림슨이 되었는데, 검이 완성되었을 당시 크림슨이 보인 탐욕만 생각하면 정말 진저리가 날 정도였다.
내 곁에 붙어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검을 자신에게 하사해달라며 막무가내로 조르는 크림슨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악몽이었다.
“근데 넌 안 아까워?”
“뭐가요?”
“너도 저 검 탐냈잖아.”
“어쩔 수 없죠. 그리고 저한테는 단검 만들어 주신다면서요? 그것도 두 개나.”
지금은 이렇게 아무렇지 않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현지와 크림슨의 신경전에 영지가 수백 번은 날아갈 뻔했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거기다 지안이까지.
활을 쓰는 지안이까지 검을 달라며 나를 물고 늘어졌고, 루시안과 코넬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기를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나서야 겨우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었는데.
하긴 욕심이 날 만도 하지.
최하급 마족인 대장장이가 보인 힘을 보면 누구나 눈이 돌아가겠지.
검이 완성된 후 정수를 박아 넣는 작업을 마친 후 대장장이가 호기심에 검을 손에 쥔 적이 있었는데, 황당하게도 대장장이는 검을 들어 올려 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보인 그 파괴력은 장난이 아니었다.
영지가 통째로 날아갈 뻔한 것은 물론이고 대장장이의 몸이 검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대로 터져 버린 것.
검에 손을 데는 순간 대장장이의 눈이 붉게 물들며 순식간에 사념에 잠식되었고, 곧바로 보이는 모든 것을 없애버리려 했다.
다행히도 검을 휘두르는 순간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대장장이의 몸이 터져 버리며 사건이 마무리되었지만, 문제는 정수에 담긴 사념이 너무 강하다 보니 현지조차도 검을 쥐는 것을 피할 정도였다.
그에 일단 검은 내가 보관하기로 했는데, 그러던 차에 뜻밖의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사념이 나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을.
아니, 오히려 사념을 내가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가끔 검에서 새어 나오는 사념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고민하던 나는 내가 사념을 지배했던 것을 깨닫고 사념을 지배해 보았다.
정수에 가득 찬 사념까지도 내가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정수의 사념을 모조리 지배했고, 그 결과, 더는 사념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리고 일어난 1차 검 쟁탈전에서 크림슨이 승리한 것이었다.
그때 생각만 하면 진저리가 쳐졌는데, 아직 몇 번이나 그 짓을 반복해야 한다는 사실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1주일 가까이 검을 붙잡고 씨름하며 머리를 싸매야 했으니까.
* * *
“아빠!”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두 팔을 벌리고 나에게 달려오는 미녀가 시야에 들어왔다.
“응? 누구?”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미소녀.
내 기억에는 없는 존재였다.
“저, 저기 잠깐만요!”
나에게 안기려는 여성을 멈춰 세운 나는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왜요?”
내 만류에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 여성을 보자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역시 아니었다.
이 여성은 내 기억 속에 없는 존재가 틀림없었다.
“누구시죠?”
“어?”
내 물음에 당황한 표정을 지은 여성의 두 눈가에 습기가 차오르기 시작했고, 이어서 볼을 타고 두 줄기의 눈물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으앙~ 아빠가 레이를 못 알아봐!”
“레이? 레이라고?”
설마 각성을?
그럴 리 없는데?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레이는?
얼마 전 레이와 수아는 방학이 끝나 다시 지구로 돌아갔는데, 그때의 레이에게서는 각성의 전조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각성했다고 해도 이렇게 빨리 각성을 끝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최소 3개월은 걸리는 각성을 지구로 돌아간 지 1주일도 지나지 않아 끝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훌쩍- 훌쩍- 레이 맞는데…….”
목소리가 조금 성숙해지긴 했지만, 레이와 비슷한 목소리이긴 했다.
말투 역시도 그렇고.
“정말 레이니?”
“응!”
“각성한 거야?”
“응! 레이 각성했어요!”
눈앞의 미소녀가 레이라는 사실은 금방 알 수 있었지만, 조금 당황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제 다 컸다고 해도 될 만큼 성숙한 외모와 달리 말투와 행동은 아직 어린아이 그대로였으니까.
“그, 그렇구나.”
“안아주세요.”
“어? 그, 그래. 이리 오렴.”
눈치를 보는 레이를 보며 일단 전과 똑같이 행동하려 했지만, 뭔가 좀 그랬다.
내 품에 안겨 오는 레이는 전과 전혀 달랐으니까.
“레이야. 이쪽에 앉아 보겠니?”
“응.”
“혼자 온 거야?”
“아니! 할아버지랑 같이 왔어요!”
아버지와 함께 왔다면 곧 있으면 아버지가 도착하실 거다.
그에 잠시 기다리자 아버지가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오셨어요?”
“그래.”
“어떻게 된 거예요?”
“나도 잘 모르겠구나. 분명 전날까지만 해도 아이의 모습이었는데, 자고 일어나니 저리 변해 있더구나.”
“음- 그나마 다행이네요.”
“뭐가 다행이란 말이냐? 애가 갑자기 어른이 되었는데.”
아버지는 레이의 갑작스러운 성장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가 걱정했던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마족의 각성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성이 날아가 버릴 정도로 강한 마력을 뿜어내는 현상.
레이 정도 되면 저택이 날아가 버리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 그러고 보니 레이에게서 왜 마력이 느껴지지 않지?
처음 레이를 봤을 때 레이가 마족이 아니라 생각했던 이유는 레이에게서 마력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느껴지긴 했지만, 평범한 인간 수준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레이야? 혹시 마력을 숨기고 있는 것이니?”
“응! 이제 레이 마력 잘 다뤄요! 그리고 엄청 세졌어요!”
“그래? 그럼 아빠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
“응! 그런데 여기서요?”
“아니, 여기서 말고 연무장으로 가서.”
* * *
쿠구구구구-
안과 밖을 철저히 격리하는 미호의 결계가 안에서부터 박살이 나는 모습에 나는 당혹감을 숨기지 못한 채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저 마력을 뿜어내는 것만으로도 미호의 결계를 부수어버리는 강대한 마력.
더욱 황당한 것은 저것이 끝이 아니라는 거였다.
아직 여력이 한참은 남아 있는 듯한 레이의 여유 있는 모습에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나와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역시 공주님이십니다. 마력의 양도 엄청난 수준이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저 밀집력입니다. 마력의 밀집만으로 공간을 파괴하시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크림슨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저 정도의 파괴력이면 그저 뿜어내는 것만으로도 저는 상대조차 되지 않겠는데요?
이어서 라구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너는 어때?”
그에 나는 현지를 보며 물었고, 이어서 현지의 대답이 들려왔다.
“지금은 제 아래지만, 전투 경험을 쌓는다면 저를 넘어설지도 모르겠어요. 마력을 저 정도로 압축하는 것은 저도 불가능하거든요.”
현지는 레이의 모습에 자존심이 조금 상한 모양이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힘을 시험할 상대가 나타났기 때문에.
“그럼 한 번 가르쳐봐. 대신 너무 심하게는 하지 말고. 몸은 저래도 아직 애니까.”
“네.”
레이를 약속 장소에 데려갈 생각은 아니었다.
내가 그곳에서 돌아오지 못해도 레이가 있다면 조금 안심이 될 정도라고 할까?
하지만, 그 생각은 틀린 모양이었다.
-군주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제가 보기엔 공주님께서는 아직 각성이 끝나지 않으신 것으로 보입니다.
“뭐? 그 말은 2차 각성을 할지도 모른다는 말이야?”
-그렇습니다.
크림슨의 말이 확실하다면 조금의 안심이 아닌 확실한 대안이 생기는 것이었다.
용마왕 따위는 가볍게 넘어설 힘을 가진 존재가 탄생할 거라는.
물론 오랜 세월이 흘러야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