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 거지?”
-그러게 말입니다. 분명 오늘이 맞을 텐데요.
총 열넷의 일행이 한자리에 모여 미르카엘과 수왕, 하이엘프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적어도 약속을 꺼낸 미르카엘은 미리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어야 정상 아니야?
벌써 약속했던 시간을 훌쩍 지났기에 조금씩 걱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설마 1년 사이에 전부 당한 건가?
“아 진짜! 제가 그냥 그놈들 싹 다 잡아 올까요?”
현지는 그들을 기다리기가 많이 지루한 모양인지 살짝 짜증을 내며 입을 열었고, 그에 지안이 현지를 말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우리가 너무 일찍 온 것일지도 모르잖아? 오늘이 지나려면 아직 시간 많이 남았다고.”
“그래도! 우리보다 늦는 게 말이 되냐고! 싫다는 사람 억지로 불렀으면 미리 와서 기다리는 게 예의 아니야!?”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오늘 안으로는 오겠지.”
성에 있으나 이곳에 있으나 다를 건 없었다.
나에겐 미호가 있었으니까.
다만, 그들이 오지 않을까 걱정이 될 뿐이었다.
* * *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미르카엘이 아닌 수왕이었다.
이미 그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안 우리와 다르게 수왕은 미호가 만든 저택을 호기심에 찬 표정으로 기웃거리다 정원에서 밥을 먹는 뚱이를 발견하고는 힘차게 걸음을 떼었다.
-이곳에서 쭉 지냈던 건가?
-안 줘.
-안 준다니? 무엇을 말인가?
수인족 역시도 뭔가를 먹는다는 행위를 하지 않았기에 뚱이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전부 내가 먹을 거다.
뜻 모를 말에 수왕이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때 크림슨이 나타나 그를 불렀고.
-수왕.
-오! 크림슨 경!
-오랜만이군. 일단 안으로 들어가지.
크림슨을 따라 안으로 들어온 수왕은 저택을 보며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정말 신기하군. 그 짧은 시간 만에 이렇게 거대한 집을 짓다니. 약속 이후로 계속 이곳에 머물렀던 모양이야.
-우리도 오늘 도착했다.
-그럼 이 거대한 집은 뭐지?
-이 저택은 마수의 능력이다.
-마수?
-너도 알 텐데? 이동형 마수에게는 특이한 능력이 많다는 것을.
-설마 이 저택이 환영이란 말인가? 환영치고는 모든 것이 그대로 느껴지는데?
-이동형 마수가 왕급에 올라서면 실체를 가진 환영을 만들 수 있다.
-오! 그거참 대단하군.
수왕의 질문에 대답해주던 크림슨은 거대한 문 앞으로 그를 안내했고, 이어서 문을 열며 입을 열었다.
-아직 하이엘프와 미르카엘이 도착하지 않았다. 그들이 도착할 때까지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나?
-알겠다. 그런데 크림슨 경. 정말 강해졌군.
-고맙군.
-빈말이 아니야. 거기다 이곳에서 느껴지는 기운 대부분이 내 아래가 아닌 듯 보이는데 그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그건 모두가 도착한 후 설명하도록 하지. 여러 번 설명하는 건 귀찮아서 말이야.
-지금 듣지 못한다는 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 알겠네.
* * *
-도착한 모양입니다.
“나도 느꼈어. 그나저나 특이하네. 하이엘프와 미르카엘이 함께 오다니.”
멀리서 나타난 기운은 하나가 아니었다.
미르카엘과 하이엘프 그리고 우피엘.
총 셋이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일단 이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그래.”
내 대답을 들은 직후 크림슨이 방을 나섰고 이어서 그들을 향해 빠르게 움직여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잠시 멈칫한 후 그들과 함께 저택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는데.
-언제 이곳에 이런 걸 만든 거죠?
크림슨을 따라 이동하던 하이엘프는 결계 안으로 진입한 후 놀란 표정으로 크림슨에게 말을 걸었다.
-하하하. 이건 이동 마수의 능력이야.
대답은 크림슨이 아닌 미르카엘에게서 나왔다.
-이동 마수라면 이것이 전부 환영이란 말인가요?
-아니. 너도 느끼고 있겠지만, 이건 실체를 가지고 있지. 이동 마수가 왕급에 올라서며 얻은 능력인 모양이야.
-대단하군요. 아무리 실체를 가진 것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하지만, 이런 발상을 할 줄이야.
-이것이 생각의 차이라는 것이겠지.
둘의 대화를 듣던 나는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호가 현실조작능력을 얻은 것은 상급으로 진화하면서였기 때문이다.
그걸 모른다는 건 이동 마수가 상급으로 진화한 것을 본 적이 없다는 말인데 이건 좀 이상하지 않은가?
분명 상급으로 진화한 이동 마수가 존재한다고 들었는데 왜 현실조작능력을 모르는 것일까?
진화한 순간 처리했다고 해도 능력을 봤을 텐데?
혹시 미호가 특이한 건가?
다른 이동형 마수는 현실조작능력이 없는 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잠깐만? 그때 얻은 미호의 짝이 지금 최상급으로 진화한 상태였지? 그놈도 현실조작능력이 있었나? 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지?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미호를 제외한 다른 이동형 마수에게서 현실조작능력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을 떠올린 후 미호가 일반 이동형 마수와는 다르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는데.
지금 영지에는 이동형 마수가 생각보다 많이 있었다.
유명시와 영지를 오가며 인력과 자재를 운반해야 했기에 상업 도시에서 이동형 마수를 대량으로 사들였기 때문이다.
그에 지금 영지에 존재하는 이동형 마수는 백여 마리에 가까웠는데, 그 많은 이동형 마수들은 단 한 번도 현실조작능력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미호를 제외한 그 어떤 이동형 마수도 분신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매혹, 환영, 공간의 문, 불.
그를 제외한 미호의 다른 능력은 어떤 개체도 사용하지 못했는데.
내가 이걸 왜 잊고 있었지?
침대 위에서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잠을 자던 미호가 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더니 입을 쩍 벌리며 하품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미호가 특별한 거였어?
-군주님.
“응? 언제 왔어?”
생각에 잠겨 있던 사이 들려오는 음성에 고개를 돌리자 크림슨이 문 앞에서 대기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조금 전 도착했습니다.
“음- 모두 모아놨지?”
-네. 일단 모두 모아놓기는 했습니다만 혹 그들을 만나는 것이 껄끄러우시면 제가 나서겠습니다.
“아니야. 나도 함께 가지. 대신 조심해. 군주라는 말은 절대 사용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알아서 갈 테니까. 현지하고 지안이도 불러와.”
-네.
이곳에 오기 전 모두를 불러 모은 나는 나를 절대 군주라 부르지 말라 지시해 둔 상태였고, 나에게 존칭 역시도 사용하지 말라 지시해두었다.
그편이 앞으로 그들을 상대하는 것이 편하기도 했고, 괜한 혼란 역시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불안하지?
대공을 만날 생각을 하니 굉장히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아! 몰라! 만나 보면 알겠지.
* * *
문을 열고 들어가자 U자 모양의 거대한 테이블이 보였다.
오른편에는 크림슨을 비롯한 라구스, 루시안, 코넬리아, 현지, 지안이 조용히 앉아 있었고, 왼편에는 미르카엘과 우피엘, 하이엘프, 수왕이 착석하고 있었다.
상석으로 보이는 자리를 비워두고 있는 걸 보니 내가 그곳에 앉으면 되겠다 싶어 그곳으로 향해 자리에 앉았는데.
-왜 저자가 상석으로 보이는 곳에 앉는 거지?
미르카엘이 나를 불편하게 보며 입을 열었고,
-지금 그게 중요한가?
그에 크림슨이 나를 옹호해 주었다.
-맞아.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지.
라구스 역시 마찬가지.
-별거 있나? 그냥 쳐들어가면 되지.
-아니, 그것은 안 될 말이다. 한 종족의 지도자를 찾아가는 것인데 기본 예의는 지켜야 하지 않겠나?
수왕의 말에 미르카엘이 반박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우린 지금 그를 의심 중이라고요.
-그래서 더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소리다. 우리가 찾아가는 곳은 무려 마족의 대공이 사는 성이다. 마족의 중심부라는 말이지. 어떻게든 그를 끌어내야 하는 처지인 우리가 소란을 일으키면 대공에게 우리를 피할 명분만 줄 수 있다는 소리다.
하이엘프의 말에 미르카엘은 명분을 언급하며 방법을 찾아야 한다 말했고, 그에 크림슨이 미리 생각해 두었던 계획을 꺼냈는데.
-이쪽에서 계획을 세워봤는데 들어볼 텐가?
대단한 계획은 아니었지만, 대공의 성에 들어가는 것에는 이보다 확실한 방법이 없었다.
-말해보게.
-다들 알겠지만, 나는 수호기사단의 부단장이다. 대공의 성을 출입할 수 있는 신분이라는 말이지.
-그렇군. 그게 있었어.
-대신 그대들은 신분을 숨겨주어야만 해. 대공의 관심이 나에게만 집중되도록 말이야.
크림슨과 라구스, 루시안, 코넬리아가 한꺼번에 나타난다면 관심이 모두 그쪽으로 쏠릴 테고, 그를 이용해 남은 자들은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일행인 척 끼어 들어가는 것이었다.
다만, 이것은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바로 저들이 자신들의 기운을 대공에게 들키지 않고 완전히 숨길 수 있느냐였다.
-가능하겠는가?
-나는 가능하다. 그까짓 마력 어차피 그리 많지도 않으니.
수왕은 통과.
-나도요. 숨기는 것이라면 자신 있어요.
하이엘프도 통과.
-이쪽은 힘들지도 모르겠군. 다들 알겠지만, 마족과 천족은 상극이다. 아무리 잘 숨긴다고 해도 근원적인 부분에서 탄로가 날 거다.
역시 천족이 문제였다.
그럼 어쩔 수 없겠네.
미르카엘과 우피엘은 밖에서 기다리는 수밖에.
-그렇다면 둘은 일단 밖에서 대기해라. 이쪽이 문을 열어줄 테니.
-문을 열어준다? 무슨 뜻이지?
-이쪽에는 이동형 마수가 있다.
-가능하겠나? 무려 대공의 영역이다. 성 전체를 대공의 힘이 감싸고 있는데 이동형 마수가 문을 여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잊은 모양이군. 이쪽의 이동형 마수가 무려 왕급이라는 사실을.
-아! 그렇군. 아무리 대공이라도 왕급의 이동형 마수라면 가능하겠어.
미호를 이용할 거였다면 수왕과 하이엘프 역시 같은 방식으로 들여보내는 것이 좋았겠지만, 수를 맞춰야만 하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다.
현지의 은신으로 비게 될 자리를 미르카엘이 대신하는 것.
안타깝게도 우피엘은 들어갈 수 없었다.
지안이와 함께 퇴로를 확보하는 역할을 맡길 예정이었으니까.
* * *
-이쯤이 좋겠군.
멀리 마족의 중심부라 불리는 대공의 성이 시야에 들어오는 곳에서 멈춰선 우리 일행은 조를 나누었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퇴로를 확보할 조와 성에 들어갈 조.
미호를 제외한 왕급 마수 전부와 지안, 우피엘이 남기로 했고, 나머지가 성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물론 미르카엘은 잠시 이곳에서 기다린 후 미호의 문을 통해 합류할 예정이었고.
‘어때? 가능하겠어?’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때와 달라지지 않은 듯 보입니다.’
크림슨이 성에 들어갈 수 있다 확신하는 이유.
그것은 성의 출입구가 하나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대공의 부하들이 이용하는 정문과 수호기사단이 이용하는 후문.
우리는 수호기사단이 이용하는 후문을 통해 들어갈 예정이었다.
크림슨의 말이 정말이라면 후문을 지키고 있는 것은 수호기사단일 테고, 당연히 그들은 크림슨을 알아볼 것이다.
‘그럼 준비를 좀 하고 출발하도록 하자.’
‘네.’
연결된 선을 통해 크림슨과 대화를 나누는 이유는 혹시 모를 실수가 나올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나를 향해 군주라는 말을 꺼내게 될 경우를 생각해 나와 대화를 나눌 때는 항상 연결된 선을 통해서만 대답하라 지시해 둔 상태였다.
“미호야.”
“끼웅!”
내 부름에 미호는 금방 그 뜻을 알아채고는 수왕과 하이엘프의 모습을 서서히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신기하군. 몸을 변화시켜버리다니.
-그러게요.
수왕과 하이엘프는 자신들의 외모가 변한 것을 확인하곤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미호의 현실조작능력은 창조의 영역에 가까웠다.
물론 미호의 힘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기에 가능한 일이긴 했지만, 지도자급의 힘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기에 거부가 가능한 것이었지 그 아래로는 미호의 힘을 거부하지 못할 거다.
-준비는 끝났다. 힘을 숨기도록.
-이 정도면 눈치채지 못하겠지?
-괜찮군. 하이엘프는 아직인가?
-잠깐만요.
하이엘프가 눈을 감고 잠시 시간이 흐르자 그녀에게서 느껴지던 기운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는데,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마치 마족의 기운처럼 어둠을 품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되겠지요?
-좋군. 마족이라고 해도 되겠어.
-이 정도야 가뿐하지요.
마치 내가 마력을 지배의 마력으로 변환하는 것처럼 마력의 성질을 변화시킨 하이엘프.
솔직히 말하면 조금 신기했다.
마족의 기운처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은 천족이나 용족, 수인족과 비슷하게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저게 어떻게 가능한 걸까?
-나는 기다리는 신세인가?
-조금만 기다려라. 곧 문을 열어줄 테니.
미르카엘에게 대답을 해준 크림슨은 이어서 의념을 보냈다.
-내가 말하기 전까지는 절대 나서지 마라. 알겠나?
-입을 다물기만 하면 되는 건가?
-그래 줬으면 좋겠군.
-알겠다.
-저는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출발하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