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화 (198/214)

-신분을 밝혀라.

-오랜만이군. 고렘. 잘 지냈나?

-부, 부단장님?

크림슨을 보며 깜짝 놀라는 자는 후문을 지키는 경비였다.

그 역시 수호기사단이긴 했지만, 정식 기사는 아니라고 한다.

수호기사단은 하급과 중급, 상급으로 나뉘어 있긴 했지만, 그 외에도 수호기사단을 보필하는 최하급의 기사들이 존재한다고 한다.

허드렛일.

그러니까 수호기사단을 대신해 성의 잡무를 보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었는데, 그렇다고 무력이 낮은 건 아니라고 한다.

잘못을 저지르거나 회복하지 못할 심한 부상을 입은 자들, 혹은 은퇴한 기사들이 그들 안에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하겠지.

군주의 거처로 향하는 통로를 지키는 자들의 무력이 낮을 리 없을 테니까.

이곳을 후문이라 부르긴 하지만, 원래는 이곳의 명칭은 따로 있었다.

군주의 거처로 통하는 문이었기에 따로 이름이 있었지만, 지배의 군주가 사라진 후 이곳의 명칭은 후문으로 굳어졌다고 한다.

대공의 성 뒤편에 존재하는 성을 초라하게 만들어 버릴 정도로 거대하고 화려한 궁전.

그곳이 바로 지배의 군주가 머물던 거처.

그곳을 관리하는 것은 오로지 수호기사단뿐이었기에 인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을 관리할 자들을 뽑는 과정에서 무력이 필요한 자들은 수호기사단에서 충당했는데, 고렘이라는 자가 바로 그들 중 하나였다.

-여! 오랜만이야.

-라구스? 루시안? 코넬리아까지? 어, 어떻게?

-우리가 어떻게 됐는지 알고 있나 본데?

-그러게? 어떻게 아는 거지?

크림슨들이 바하무트의 결계에 들어갔다는 사실은 극비 중의 극비였다.

상위 기사단원들이 사라진 이유는 마계를 돌아다니며 군주의 흔적을 찾고 있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지금 보니 그들이 사라진 이유를 아는 모양이었다.

-다, 단장님께 들었습니다!

상황을 금방 파악했는지 고렘은 곧바로 존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단장이?

-그렇습니다. 남아 있는 수호기사단원 전부를 모아 진실을 말씀해 주신 후 회복에 들어가셨습니다.

-아직 안 나오셨단 말인가? 2천 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는데?

-그렇습니다. 수백 년에 한 번 얼굴을 비추시긴 하지만, 아직 완전하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가장 최근에 모습을 비추신 게 언제인가?

-2년 전입니다.

2년 전이면 비교적 최근이네?

-어떠시던가?

-많이 좋아지신 듯 보였습니다. 그 전과는 많이 달라지셨으니까요. 아! 여기서 이러실 게 아니라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이곳은 어쩌고?

-아!

-그런데 왜 자네 혼자인가? 원칙상 최소 셋은 이곳을 지켜야 하는 것으로 아는데?

-그, 그것이…….

뭔가 문제가 있나 본데?

크림슨의 물음에 표정이 급격히 안 좋아지는 고렘을 보자 수호기사단에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편하게 말해보게.

-수호기사단의 3계급 대부분이 자리를 비운 상태라서요.

3계급이라면 하급 기사단이었다.

-어찌하여?

-성 내에 은밀히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군주님께서 돌아오셨다는.

-그, 그걸 어떻게?

크림슨은 진심으로 놀란 듯 보였고, 수왕과 하이엘프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는데.

-설마 소문이 사실이었습니까? 부단장께서도 그것을 아시고 군주님을 뵙기 위해 오신 것입니까? 아니지? 부단장님께서는 그곳에 갇히셨다 들었는데? 아! 그럼 군주님께서 부단장님을?

-지금 어디 계시느냐!

곧장 군주가 어디 있는지 묻는 것을 보니 크림슨은 그의 물음에 대답할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근데 왜 이리 놀라?

크림슨은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성에 가짜 군주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연기하는 건가?

-대공의 성에 머무르고 계신다는 소문이 퍼져 있습니다. 그 때문에 3계급의 수호기사단이 그곳에서 군주님을 호위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죠.

-왜 하필 그들인가? 다른 기사들은 뭐하고?

고렘은 지금까지 소문을 진실로 믿지 않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의 거처가 있음에도 대공의 성에 머무르고 있다는 건 의심될만한 일이었으니까.

거기다 상위 기사단과 중위 기사단이 존재함에도 하위 기사단이 호위한다는 건 더욱 이해하지 못할 일이었겠지.

남아 있는 상위 기사단이 얼마 없었기에 상위 기사단은 어쩔 수 없다 해도, 중위 기사단은 비교적 멀쩡한 편이었으니까.

-다른 계급의 기사분들 모두가 그것에 대해 침묵을 지키는 중입니다. 그 때문에 모두가 소문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고요.

고렘의 말에 크림슨은 잠시 침묵하며 생각에 잠긴 듯 보였지만, 나와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연기를 하는 것이었다.

‘진실을 알리고 도움을 받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자야?’

‘네. 제가 보증할 수 있습니다.’

‘알았어. 그렇게 하도록 해.’

내 허락이 떨어지자 크림슨은 고렘을 향해 표정을 굳히며 진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내 말 잘 듣게. 내가 돌아온 이유는 군주님을 뵙기 위해서가 아니야.

-네? 그 말씀은?

-그렇다네. 지금 퍼지고 있는 소문은 모두 거짓일세.

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로드가 잠식되어 버렸고, 이곳을 찾은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을 시작한 크림슨.

-그, 그것이 정말입니까? 대, 대공이 어찌!

-아직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네. 내 대공을 직접 만나봐야겠어.

-너,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걱정하지 말게. 내가 설마 아무런 대책도 없이 대공을 만나려 하겠는가? 저자들이 누군지 아는가? 바로 수왕과 하이엘프라네. 천족의 지배자인 미르카엘 역시도 성 밖에서 대기 중이지.

뒤에서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수왕과 하이엘프를 가리키며 그들의 정체를 밝혔고, 그에 수왕과 하이엘프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꺼냈다.

-반갑군.

-반가워요.

둘의 인사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은 고렘이 이어서 나와 현지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그, 그럼 저들은 누구입니까?

-밖에 있던 동안 많은 도움을 받은 자들이다.

나는 그를 향해 조용히 고개를 까딱였다.

-아! 이럴 것이 아니라 일단 안으로 안내를 해 드리겠습니다.

-이곳은 어쩔 생각인가?

-괜찮습니다. 이곳은 이제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 되었으니까요.

-그게 무슨 말인가?

-이곳을 지나는 자들 전부가 저주를 받는다는 소문이 돈 적이 있습니다. 어쩌다 그런 소문이 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5백 년 전 소문이 돈 이후로 이제는 그 누구도 이곳을 찾지 않게 되었죠.

저주를 받는다는 소문 하나 때문에 아무도 찾지 않는 다라?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마족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과 다르게 어비스의 종족들은 의심이 없는 편이었다.

특히 마족.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그들은 너무 순진했다.

아니, 순수하다고 해야 할까?

자신을 숨기는 것에 스스로가 치욕을 느낄 정도로 마족은 참 순수한 종족이었다.

-그럼 부탁하겠네.

-네.

* * *

생각보다 쉽게 군주의 궁전에 들어온 크림슨은 고렘에게 소문을 하나 내 달라 부탁했다.

수호기사단의 부단장이 돌아왔노라고.

그 덕에 문밖에는 많은 마족이 모여 있었는데, 대부분이 수호기사단이었다.

이쪽의 힘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자들.

하지만, 아직 만나줄 수는 없었다.

모든 수호기사단을 불러 모은 후에 그들의 이목을 크림슨에게 집중시켜야만 했으니까.

그래야 미르카엘을 불러내는 데 의심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아직이야?’

‘하위 기사단원은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네. 일단 시작해.’

‘네.’

대화가 끝나자 크림슨은 천천히 이동해 문을 열었고, 라구스와 루시안, 코넬리아가 뒤따랐다.

그와 동시에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의념들.

-저, 정말 부단장님께서!

-부단장님께서 돌아오셨다!

-코, 코넬리아 님!

-라구스 님과 루시안 님도 계셔!

그렇게 크림슨들이 방을 나섰고, 그와 동시에 나는 현지에게 입을 열었다.

“숨어.”

“네!”

대답과 함께 자취를 감춘 현지.

이제 남은 것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크림슨이 자신의 힘을 온전히 들어낼 그 순간을.

쿠웅-

멀리서 거대한 기운이 폭발하듯 솟구치는 것을 느낀 나는 미호에게 곧장 소리쳤다.

“미호야!”

“끼웅!”

그와 동시에 결계가 만들어졌고, 잠시 후 공간이 벌어지며 안에서 미르카엘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뀨!”

“응?”

미르카엘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벌어진 공간이 닫히려던 찰나 하임이 공간을 비집고 튀어나온 것.

“넌 왜 나와!”

“뀨!”

양손을 번쩍 들어 올린 하임은 기분이 좋은지 이상한 춤을 추며 나에게 다가와 다리를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나도! 놀 거다!

“어휴!”

하임 덕분에 한숨이 절로 나오던 그때 미르카엘의 의념이 들려왔다.

-이곳이 대공의 성인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방안을 둘러보는 미르카엘.

긴장감이 없기로는 저쪽도 마찬가지였다.

-대공의 성이 아니다. 마족들의 신께서 머무시는 거처지.

-이곳이 말인가?

-그렇다는군.

수왕과 미르카엘 이어서 하이엘프까지 긴장감 없는 모습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한숨을 내쉰 후 크림슨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연결된 선에 접촉했다.

-모두 오랜만이군.

-뵙고 싶었습니다!

거대한 대전에 도착한 크림슨은 자신의 힘을 온전히 뿜어내며 눈앞에 도열한 수호기사단을 보며 내 앞에서는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위엄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찌하여 3계급의 기사들은 보이지 않는가?

아무도 크림슨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왜 아무런 말이 없느냐! 하위 기사단은 어딜 갔냐 묻지 않느냐!

-그, 그것이…… 대공의 성에…….

-뭐라? 대공에게? 어찌 군주님의 기사단이 궁전을 비우고 사사로이 움직인단 말이냐!

-저희 역시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을 찾아가 회유도 해보고 타일러도 보았지만, 그것이 자신들의 역할이라며 꿈적도 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괘씸하여 그들을 벌하려 해 봤지만, 대공의 위세에 막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죽여 주십시오!

자신들의 역할?

그 말은 대공의 성에 있는 군주가 그들의 눈에는 진짜로 보였다는 말인가?

-역할? 그 무슨 망발이냐? 그럼 소문이 진실이란 말이냐?

-아닙니다! 저희가 어찌 군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겠습니까?

-그럼 어찌하여 가만히 있었던 것이냐? 군주님을 기만하고 전 마족을 모욕하는 일이다. 너희들이 나서서 진실을 밝혔어야지!

-때를 기다리라는 단장의 명이셨습니다.

단장의 명이라고?

그럼 저들은 단장과 연락이 된다는 말인가?

크림슨 역시 의아한지 곧바로 그들에게 단장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단장은 어디 있느냐? 혹 이미 사념을 걷어낸 것이냐?

-아닙니다. 단장은 아직 사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입니다. 다만, 가끔 모습을 보이셔서 길을 제시해 줄 뿐입니다.

-대충 상황은 파악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대공의 생각을 완전히 파악한 것은 아니지만, 대충 무슨 일을 저지르려는 것인지는 파악한 상태입니다.

의도를 알고 있다는 거야?

대공이 왜 가짜 군주를 내세우고 있는 것인지?

-그것이 무엇이냐?

-그,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그리 뜸을 들이는 것이냐?

크림슨의 재촉에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는 수호기사단.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때 대전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자가 있었다.

-킬리언!

-허! 대공의 수작이라 생각했건만, 정말 부단장이었군요.

‘누구야?’

‘서열 15위의 킬리언입니다. 또 하나의 부단장이었던 페리스의 부관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상위 기사단인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부단장의 부관이라?

그럼 머리가 좋다는 말인가?

듣기로 페리스라는 자는 수호기사단의 두뇌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런 그의 부관을 했다는 것은 그 역시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아니, 마족답지 않다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이겠지.

-그래. 자네가 남아 있었어.

-부단장. 대답을 해주기 전에 하나 물어도 되겠습니까?

-말해보게.

-페리스님은…….

-내 손으로 목숨을 끊어 주었네.

-그렇군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킬리언을 보며 크림슨은 그에게 충격적일지도 모를 말을 꺼냈다.

-미안하다는 말은 않겠네. 자네 역시 그의 모습을 봤다면 외면하지 못했을 테니까. 아무리 아버지라 해도 말일세.

아버지?

그러니까 지금 아들 앞에서 아버지의 목숨을 끊어버렸다고 말한 거야?

그것도 저리 당당하게?

-아버지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부단장님도 어쩔 수 없었겠죠. 아! 한 가지 더 물어도 되겠습니까?

-말해보게.

-어떻게 원래의 모습을 되찾으신 겁니까? 완전히 잠식되지 않았던 단장조차도 지금까지 사념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데 말이죠.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상위 기사단이라면 크림슨들이 들어갔던 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고 있을 테니까.

-어렴풋이 느끼고 있지 않은가?

-설마 2차 각성을 하신 겁니까?

-자네 아버지 덕분에 말이지.

-설마 코넬리아와 루시안도?

-그렇다네.

2차 각성을 통해 홍마족에서 벗어났다는 것.

진실은 아니었지만, 믿을 수밖에 없을 거다.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이제 말해 주겠는가? 대공의 생각이 뭔지?

감격에 차 있는 킬리언을 보며 잠시 기다려 주던 크림슨이 더는 기다리지 않고 그에게 대공의 목적을 물었다.

-대충 예상이 되지 않습니까? 그 욕심 많은 놈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설마?

-네. 놈은 군주님의 자리에 오르려 하고 있습니다.

-그놈이 감히!

쿠웅-

순간 크림슨에게서 뿜어져 나온 막대한 기운.

그것은 미리 준비했던 상황이 아니었다.

본래의 힘을 감추기로 했지만, 진실을 들은 크림슨은 분노를 참지 못했다.

라구스와 루시안, 코넬리아 역시 마찬가지.

-이건?

-놀랍군. 힘을 감추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이 정도면 나를 넘어섰을지도 모르겠군.

수왕과 미르카엘의 의념이 들려왔다.

그들조차 놀랄 정도로 엄청난 힘을 분출한 크림슨들 덕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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