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그만 멈춰주십시오!
넷이 뿜어낸 파괴적인 마력에 수호기사단 전부가 모여 대항해 봤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 강대한 힘은 그들 모두를 대전의 벽에 처박아 버렸으니까.
상위 기사단에 속한 자들까지도.
‘지금 뭐 하는 거야! 멈춰!’
갑작스러운 상황에 급히 그들을 말려 보았지만, 크림슨의 분노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참으라니까!’
‘저희가 어찌 그런 말을 듣고 참을 수 있겠습니까?’
‘알아.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일단 녀석을 만나야 한다고.’
크림슨의 분노를 진정시켜야만 했다.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대공을 찾아가 그를 찢어발길 생각인지 내 만류에도 한 곳을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었다.
대공의 성이 있는 곳을 말이다.
‘하지만!’
‘놈을 만나 진실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참아.’
‘알겠습니다. 지금은 참겠습니다. 하지만, 놈이 정말 그런 생각을 조금이라도 품고 있다면 그땐 저를 말리지 말아 주십시오.’
‘그래. 알았어.’
내 허락이 떨어지자 크림슨은 기운을 갈무리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라구스들 역시 기운을 갈무리했는데.
-네놈들은 뭐 하는 놈들이냐! 어찌 그런 놈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단 말이냐? 죽음이 그리도 두려웠더냐? 아니, 단장 역시 이해가 가지 않는구나! 뭐가 무섭다고 그따위 놈을 가만히 내버려 뒀단 말이냐!
-저희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놈이 정말 그런 생각을 가졌는지 확인이 필요했단 말입니다.
-그따위 확인! 내가 당장 해주마. 어디냐? 그놈이 있는 곳이 어디냔 말이다!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기다려 주시지요.
-뭐라? 네, 네놈이!
크림슨의 호통에도 평정심을 유지한 채 제 할 말을 내뱉는 킬리언 덕분에 크림슨이 다시 분노할 기미가 보였다.
‘참으랬다.’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이야! 쟤도 생각이 있으니까 저렇게 말하는 거겠지. 일단 이야기나 들어봐.’
나 역시 크림슨의 말대로 지금 당장 쳐들어가고 싶었지만, 일단 이유를 들어보기로 했다.
조금 전 크림슨들의 힘을 직접 목격했음에도 기다리라 말한 이유가 분명 있을 테니까.
-이유가 무엇이냐?
-그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그것이 무슨 말이냐? 그가 성을 비웠단 말이냐?
-모릅니다. 그가 성에 있는지 아니면 성을 비웠는지 확실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럴 리가? 그럼 저곳에서 느껴지는 저것이 대공의 기운이 아니란 말이냐?
-대공이 아닌 대공자입니다.
-그 무슨?
어? 이게 무슨 말이야?
성의 중심부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분명 종족의 지도자라 불리는 자들과 같은 격을 갖추고 있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저희가 함부로 그를 치지 못한 이유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아직 마계에 공표하지는 않았지만, 첫째 공자가 2차 각성을 이루었습니다. 거기다 대공의 위치조차 특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저희가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모든 마족이 정말 그놈을 군주님으로 여기는 상황이 올지도 모릅니다. 그것만은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단장과 남아있는 모든 수호기사단이 목숨을 걸어도 대공을 처리하기는커녕 반대로 잡아먹히겠지.
거기다, 그의 말대로 모든 마족이 가짜 군주를 진짜로 받아들이게 되는 상황이 올지도 몰랐다.
-어찌 이런!
-그러니 기다려 주십시오. 놈을 처리할 확실한 때가 다가올 겁니다.
-놈이 그리 쉽게 틈을 내어 주겠느냐?
-올 겁니다. 기회가.
-정말이냐?
-작위 쟁탈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지금 그 150년마다 찾아오는 그거 말하는 건가?
근데 그거 아직 한참 남지 않았나? 아직 100년은 남아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것이 무슨 말이냐? 작위 쟁탈전은 아직 100년이나 남지 않았느냐?
크림슨 역시 아는 사실이었기에 의문을 드러냈는데.
-당겼습니다.
-뭐라? 어떻게?
-귀족들을 움직였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귀족의 과반수가 찬성하면 설령 대공이라고 해도 막지 못한다는 것을요.
-그들이 그리 쉽게 너의 말에 따라 주었다고?
-군주님이 만들어 두신 컬렉션을 주겠단 약속을 해 주었습니다.
컬렉션? 그게 뭐지?
지배의 군주가 수집욕이 있었나?
-뭐? 그것들을?
-네. 물론 저희를 위해 따로 보관해 두신 것이 아닌 실패작들을 줄 생각입니다.
-허! 머리를 정말 잘 썼군.
실패작이라?
‘무슨 말이야?’
‘아! 별것 아닙니다.’
어물쩍 넘어가려는 크림슨의 의도를 파악한 나는 집요하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뭐가 별것 아닌데?’
‘정말 별거 아닙니다.’
‘똑바로 말 안 해?’
‘하하하. 군주님께서 저희 수호기사단을 위해 만들어 두신 영약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수호기사단으로 뽑힌 자들을 위해 미리 만들어 두신 것이지요.’
‘그런 게 있었다고?’
‘네. 잠재력을 높여주고 마력을 상승시켜주는 보물입니다.’
크림슨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속에서 탐욕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얼마나 있는데?’
‘아주 많습니다. 수천 개 정도?’
오! 그런 게 있었단 말이야?
잠깐만? 그런 게 존재하는데 왜 수호기사단이 전부 복용하지 않은 거지?
‘그걸 왜 주는데? 직접 복용해서 강해지면 되는 거 아니야?’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크림슨에게 묻자.
‘일회성입니다. 정수와 다르게 단 하나만 복용이 가능한. 대신 왕급 마수의 정수를 뛰어넘을 정도로 굉장한 힘을 품고 있습니다. 물론 개개인의 잠재력에 따라 상승 폭이 제한되긴 하지만 말입니다.’
크림슨의 설명을 듣자 알 수 있었다.
수호기사단이 강한 이유와 등급이 나뉘는 이유를 말이다.
시작이 최하급인 마족과 시작이 고위급인 마족은 당연히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좋은 영약이라도 잠재력에 따라 소화할 수 있는 양은 다를 수밖에 없을 테니까.
‘나도 복용이 가능한 건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가능하면 대공을 만나기 전에 몇 개 가지고 와봐. 뚱이들 줘보게. 그리고 일단은 킬리언의 뜻대로 할 것처럼 행동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킬리언의 말대로 기다리고만 있을 생각은 아니었다.
이쪽 역시도 나름대로 대안이 있었으니까.
‘들었지?’
‘네. 도련님.’
‘대공을 찾아.’
‘넵!’
그나저나 이거 예상했던 대로 최악을 상정하고 움직여야겠는데?
처음 성에 근접했을 때 느꼈던 지도자급의 격을 갖춘 존재감 덕분에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릴지도 모르겠다는 판단을 내렸지만, 아쉽게도 그 기운은 대공이 아니었다.
역시 놈은 그 장소에 있었어.
정말 대공이 로드에게 씨앗을 심은 것이 틀림없다면 그놈 역시 그곳의 상황을 살피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니 틀림없었다.
놈은 그곳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다만, 의문이 드는 것은 놈이 왜 그때 나서지 않았냐는 것이었다.
설마 현지를 보고 겁을 먹은 건가?
이건 좀 아니란 생각이 들었는데.
로드보다 더욱 오래전에 사념에 잠식되어 버린 놈이 로드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건 조금 이상했다.
아니, 만약 정말이라면 그 이유는 뭘까?
마족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아주 적은 양의 사념을 조금씩 받아들여서?
아니면 기본 베이스의 차이?
둘 다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것 말고도 이유가 더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만?
만약 나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과연 용마왕을 처리할 수 있었을까?
아니, 미르카엘을 비롯한 종족의 지도자들이 살아남을 수 있긴 했을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그 결과 하나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설마 그놈?
마족만의 신이 아니라 전 종족의 신이 되려고 한 거야?
용마왕을 바하무트로 여기게 만든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종족의 지도자들이 전부 당해버린 후 놈이 나서서 용마왕을 처리했다면?
지금껏 신들이 막아내던 바하무트가 부활했고, 신들이 사라진 지금 바하무트를 처리할 수 있는 존재가 그뿐이란 생각을 모든 종족에게 심어준다면?
나라는 변수가 없었다면 분명 놈의 뜻대로 흘러갔을지도 몰랐다.
그럼 놈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놈의 목적이 마계의 신이 되는 것이라면 분명 또 다른 뭔가를 준비하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놈은 절대 직접 나서지 않을 거다.
그럼? 어떻게?
놈의 선택은 하나밖에 없었다.
바하무트와 연관된 괴물을 만들어 지도자들을 처리하는 것.
그 이후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 괴물을 직접 처리하는 것.
바하무트란 신들의 대척점에 서 있는 존재였다.
그런 존재를 처리했다는 것은 신과 같은 존재라는 뜻.
놈은 똑같은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잠깐만? 그럼 대공이 바하무트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건가?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절대 악.
그런 바하무트가 신이 되고 싶다는 생각 따위를 할 리 없었다.
대공의 욕망을 자극해 이용하고 있는 건가?
근데 그것을 대공이 모른다고?
아무리 마족이 거짓을 모르는 종족이라고 해도 고위 마족쯤 되면 그런 수작쯤은 눈치채고도 남을 텐데?
설마 대공 역시 바하무트를 이용하고 있는 건가?
만약 대공이 정말 바하무트를 이용하고 있다면 사념에 잠식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일단 대공을 찾아야겠네.
확인을 하려면 말이야.
* * *
나는 내 생각을 크림슨에게 곧바로 전했고, 그에 크림슨은 방으로 돌아와 내 생각을 미르카엘들에게 전했는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수왕이 곧장 반박하고 나섰지만, 미르카엘과 하이엘프는 달랐다.
-아니. 일리가 있어.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정말 상황이 그렇게 돌아갔다면 가능성이 없지는 않으니까요.
-다만, 도대체 어떻게 바하무트를 이용했냐는 건데. 봉인이라도 풀어주겠다는 약속을 한 건가?
-그건 아닐 거예요. 봉인을 풀어주면 모든 게 끝이니까. 아니, 애초에 대공이 봉인을 풀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아요. 아시잖아요? 봉인의 강력함을.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신이라 불리는 존재들이 힘을 모아 만든 결계.
그것은 난쟁이족의 신이 출입을 막기 위해 외각에 만들어 둔 결계와는 차원이 다른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것을 대공이 풀 수 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는데.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미르카엘의 생각은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무슨 말이지?
-봉인을 풀지 않아도 바하무트를 그 안에서 꺼낼 수 있다는 소리지.
-뭐라고?
-말도 안 된다!
미르카엘의 말에 크림슨과 수왕은 깜짝 놀랐고, 그건 나와 하이엘프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하무트란 사념으로 이루어진 존재다. 그를 완전히 부활시키지는 못해도 사념을 담을 매개체가 있다면 완전하진 않더라도 그를 꺼낼 수는 있겠지.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완전히 부활을 시키진 못해도 그의 의지를 조금이라도 꺼낼 수 있다면 바하무트가 대공을 돕는 이유가 설명되었다.
-그 말은?
-대공에게 바하무트의 사념을 담을 매개체가 존재한다는 소리다. 만약 크림슨 경의 예상이 틀리지 않는다면 대공은 그것을 가지고 바하무트와 거래를 한 거겠지.
-예를 들어 로드 같은?
-아니.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로드의 육체로는 바하무트의 사념을 만분의 일, 아니, 십만분의 일도 감당하지 못했다.
그 용마왕이 십만분의 일도 감당하지 못했단 말이야?
그렇게 강했는데?
-너는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마치 바하무트를 직접 본 것처럼 말하는군.
그러네?
미르카엘은 도대체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바하무트가 봉인된 지 천만년은 지났다고 하지 않았나?
-몰랐나? 나는 이 천계와 역사를 같이했다는 걸? 로드조차도 내 앞에서는 어린아이일 뿐이다.
-그, 그런?
-뭐?
-정말?
미르카엘의 말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나 역시 마찬가지.
마족 중 가장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는 수호기사단의 단장조차도 그에 비하면 10분지 1도 살지 못했을 정도라는 소리였다.
아니지. 시작을 함께했다는 건 억이 넘는 세월을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거잖아?
-그게 가능한가요?
-나는 가능하다.
-어떻게? 나도 좀 알려줘.
수왕의 어처구니없는 질문에 모두가 황당한 표정으로 수왕을 째려보았다.
-지금 그것이 중요한가?
-나는 중요해. 그러니까 좀 알려줘.
-너희의 신께 부탁드려라. 나의 수명은 천족의 신께서 관장하시니.
인간에 비하면 엄청난 세월을 살아가는 그들에게도 더욱 오랜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상하네.
보통 소설이나 영화 같은 데 보면 오랜 세월을 살아온 자들이 죽지 못해 안달이 나 있던데 다 뻥 이었나 보네?
하긴, 오랜 세월을 살아보지도 않은 자들이 뭘 알겠어?
그냥 그렇게 생각할 뿐이겠지.
-아무튼,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건가요?
보다 못한 하이엘프가 대화를 끊어 버리곤 다시 본론을 상기시켰다.
-찾아야겠지. 매개체든 대공이든 둘 중 하나를.
그나저나 로드를 뛰어넘는 매개체가 존재하긴 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매개체가 존재할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움직일 수 없잖아요.
-그건 그렇지.
-걱정하지 마라. 이미 찾고 있으니까.
-설마 수호기사단을 믿고 있는 건가요?
아무리 수호기사단이라고 하지만, 그들을 전부 믿을 수는 없었다.
하위 기사단이 넘어갔다는 것은 다른 기사단 역시 넘어갈 수도 있다는 말이었으니까.
-그들을 움직이긴 했지만, 그들로는 부족하지.
-그럼 어떻게 찾겠다는 거죠? 진실을 아는 자들은 모두 이곳에 있는데?
-확실한가? 모두 이곳에 있는 것이?
-아! 그러고 보니?
하이엘프는 현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혼자 움직이는 것은 너무 위험하지 않겠는가?
-맞아요. 그러다 들키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미르카엘이 걱정을 내비치자 하이엘프가 그에 동조하며 걱정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어지는 크림슨의 대답에 그들은 모두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위험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크림슨의 대답에 미르카엘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는데.
아마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을 거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덤벼도 현지를 당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