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자. 묻고 싶은 것이 있소.
-꺼져라! 이곳은 대공의 성이다! 너희 수호기사단이 함부로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니란 말이다!
검을 빼든 크림슨의 모습에도 발악하듯 소리치는 대공자를 보며 크림슨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저놈 참 특이하네?
명색이 대공자란 놈이 이렇게 많은 자 앞에서 벌벌 떨어놓고 쪽팔리지도 않나?
아니, 그래서 더욱 발악하는 건가?
-2차 각성을 이뤘다길래 변한 줄 알았건만, 아직도 그 모양이오?
곧바로 힘을 드러내 놈을 두려움에 떨게 할 것이라 생각했던 내 생각과는 다르게 녀석을 도발하고 있었다.
-뭐라고?
-그것이 마족의 자세요? 마족이 언제부터 주둥이만 나불대는 종족이 되었소?
-네놈이 감히!
점차 분노하는 녀석을 상대로 입꼬리를 올린 크림슨은 놈을 향해 제안을 하나 건넸다.
-분하오? 그럼 덤비시오! 그대에게 그만한 용기가 있다면 어디 덤벼 보란 말이오! 내가 지게 된다면 두말하지 않고 물러나리다!
-정말이냐?
어? 저놈 설마 크림슨을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거야?
크림슨의 제안에 표정을 일변한 녀석.
조금 전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긴 하는지 눈치를 살피고 있긴 했지만, 그만 제외하면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을 거라 자신하고 있는 듯싶었다.
그나저나 크림슨이 생각 잘했네?
무작정 쳐들어오긴 했지만, 놈의 입을 열 방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왕눈이의 정신지배나 내 지배 역시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었고, 왕눈이를 이곳으로 데려오거나 내 힘을 드러내기에는 걸리는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도자급의 격을 갖춘 대공자가 마음먹고 입을 다문다면 이쪽에서는 놈의 입을 열 방도가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놈이 입을 여는 것이 어려워 보이진 않았지만, 어찌 되었든 이쪽으로서는 녀석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실리와 명분 모두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것뿐인 줄 아시오? 내가 지게 된다면 마족의 법에 따라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줄 것이오! 하지만 당신이 지게 된다면 모든 것을 말해야 할 거요.
-그래. 이기면 되는 거였어. 내가 이기기만 하면!
어이가 없다 못해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며칠 전 크림슨이 분노와 함께 뿜어내었던 기운을 분명히 느꼈을 텐데도 놈의 눈에는 자신감이 차오르고 있었다.
어디 모자란 놈인 건가?
도대체 어떤 생활을 했길래 저렇게 개념이 없을 수 있는 거지?
-도전하시겠소?
-대공의 첫 번째 핏줄인 나 팔콘이 수호기사단의 부단장 크림슨에게 도전하겠다.
-안 돼!
공녀?
대공자가 크림슨에게 도전하겠다 선언하는 순간 들려온 목소리는 공녀였다.
-라헬?
-안 돼요. 오라버니!
-걱정하지 말 거라. 너도 알지 않느냐? 이 오라비가 얼마 전 2차 각성을 했다는 것을.
-부단장 역시 마찬…….
-받아들이겠다!
-아! 안돼! 지, 지금이라도…….
-늦었소. 공녀. 내가 받아들인 이상, 이 대결은 성사되었소.
공녀의 말을 끊어버리는 크림슨의 외침에 공녀는 절망적인 표정을 지으며 무너져 내렸다.
-라헬. 걱정하지 마라. 나는 크림슨에게 당할 만큼 약하지 않아.
도대체 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현지가 뿜어내던 살기에 질려 꼼짝도 못 하고 있었던 놈이었다.
설마 정말 저놈이 크림슨보다 강한 건가?
-좋은 자세요. 그럼 어디 덤벼 보시겠소?
크림슨이 대공자를 향해 손을 까닥이는 순간 주변에 있던 모두가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이거 성이 무너지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대전이 넓긴 했지만, 둘이 격돌하게 되면 당연히 견디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 뻔했다.
대공의 성답게 대전을 아다만티움으로 도배를 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고위 귀족에게나 통하는 수준이지 지도자급의 격을 갖춘 자들에게는 모래성이나 마찬가지였다.
-흥! 잘 봐라! 이것이 2차 각성을 한 마족의 힘이다!
쿠웅- 쿠구구구궁-
대공자가 뿜어내는 마력이 성 전체를 뒤흔들며 힘의 격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다만, 마력에 대한 지배력은 아직 완전하지 않은지 뿜어낸 마력이 불규칙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지도자급의 힘을 품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조금 걸리는 것들이 있었다.
놈의 주위를 맴도는 마력의 반 정도가 놈의 의지와 따로 놀고 있다는 것이었다.
강제로 격을 끌어 올렸나 본데?
지도자급의 힘과 격을 갖췄음에도 마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다는 점이 의미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크림슨 역시 그 사실을 눈치챘는지 입가에 옅은 비웃음이 어리고 있었다.
-죽어라!
크림슨의 비웃음에 대공자가 분노를 터뜨리며 크림슨을 향해 쏘아져 나갔고, 그런 대공자를 향해 크림슨은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크아악!
대공자를 감싸던 마력이 순식간에 베어지며 왼쪽 팔이 날아가 버렸으니까.
그와 동시에 비명을 터트리며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대공자를 실망한 눈으로 한참을 바라보던 크림슨은 발을 떼어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으, 으아악!
어찌 이리도 추할 수 있는지 참 신기했다.
오늘 본 대공자라는 놈은 지금껏 내가 봐왔던 그 어떤 마족보다도 추했다.
아니, 인간 중에서도 저리 추한 놈은 없을 거라 장담할 수 있었다.
타고난 혈통으로 인해 강한 힘을 가질 수 있었고, 높은 지위 역시 보장되어 있었지만, 그 자리에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쓰레기.
아마 놈이 대공의 뒤를 이어 대공이 되었다면 마족이라는 종족이 개망신을 당했으리라.
-사, 살려줘!
목에 검이 닿는 순간 살려달라 소리치는 녀석을 보자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잊었다 생각했던 옛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에.
-대공은 어디 있느냐?
-그, 그것이…….
머뭇거리는 대공자의 태도에 목을 압박하던 검이 조금씩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고, 그에 붉은 액체가 흘러내리자 대공자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악! 마, 말할게! 아, 아버지는…….
-오라버니!
-공녀! 더는 내게 자비를 바라지 마시오.
대공자의 말을 막아버리려는 공녀를 보며 크림슨이 살기를 뿜어내기 시작하자 공녀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와 동시에 대공자의 입이 열렸고.
-아, 아버지는 용족의 영역에 계신다! 나도 그것 말고는 아는 것이 없어!
-용족의 영역이라고? 마족이 아니라?
-그, 그래! 자세히는 나도 몰라! 그저 용족의 영역 어딘가에 계신다는 것만 안다고!
-바하무트를 봉인한 결계가 아니라?
-그, 그걸 어떻게?
크림슨이 진실을 아는 것처럼 바하무트의 결계를 언급하며 놈을 떠보았고, 그에 대공자가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대공이 지금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지 아는 것 같은데?
-네놈이 감히 거짓을!
-히익! 아, 아니야! 아버지는 용족의 영역에 있는 결계에 계신다고! 정말이야!
-이노옴!!
-거짓이 아니에요!
진실을 숨기려는 대공자의 태도에 화가 난 크림슨이 검을 치켜드는 순간 공녀의 외침이 들려왔다.
-공녀 지금 뭐라 그랬소? 지금 이놈이 지껄인 말을 듣고도 그딴 소리가 나오시오?
-정말이라고요.
-허! 내가 그딴 말에 속을 것 같았소? 이미 대공의 목적이 무엇인지 파악을 끝낸 나요! 마족의 땅에 버젓이 결계가 존재하는데도 용족의 땅에 있다? 당신이라면 그 말을 믿을 것 같소!
-그, 그건…….
-그건?
-군주님께서 마족의 영역에 존재하는 결계의 출입 권한을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에요.
이게 무슨 소리지?
결계의 출입 권한을 주지 않았다니?
-잘 아시잖아요! 군주님께서는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으셨다는 걸.
-그럼 더더욱 말이 안 되지! 군주님께서 대공에게 출입 권한을 주지 않았는데 용족의 영역에 존재하는 결계의 출입은 어찌 가능하다는 것이오?
-다른 군주님들이 그런 걸 신경 쓸 것 같아요? 아무리 지배의 군주님이 인정하지 않으셨다고 해도 일단은 마족의 대공이에요! 지도자라고요! 그분들이 출입 권한을 주는 건 당연하잖아요!
잠깐만? 공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해가 될 것도 같은데?
지배의 군주가 너 대공 아니야! 라고 못을 박는다고 다른 군주들이 그걸 신경이나 썼을까?
어찌 되었든 놈이 마족의 대공인 건 사실이었다.
그들에게는 지배의 군주가 인정하든 말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겠지.
거기다, 용족의 영역에 존재하는 결계를 노렸다면 로드를 노린 것도 그럴싸하고 말이야?
-설마 그래서?
-아!
-일리가 있어요.
미르카엘과 수왕, 하이엘프 역시 나와 생각이 일치하는 모양이었다.
-미르카엘! 혹시 용족의 영역에 존재하는 결계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가?
-미르카엘이라고?
-설마?
-천족의 왕이?
미르카엘을 향한 크림슨의 질문이 끝남과 동시에 중구난방으로 터져 나오는 의념들.
-닥쳐라!
답을 듣기 위해 모두의 입을 막아버린 크림슨을 보며 미르카엘이 참담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알지 못한다.
-나도.
-나 역시 마찬가지예요.
-이런 제길! 네놈 정말 모르는 것이냐!
-모, 몰라! 모른다고!
혼란이 일어났다.
마족들은 크림슨과 대화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이제야 눈치챈 듯싶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위치!
용족의 영역에 존재하는 결계의 위치를 찾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했으니까.
-일단 전투가 가능한 천족을 용족의 영역으로 보내라 지시하겠다. 부러 용족에게도 지원을 요청하지!
-나도 그리 지시하지.
-나도요.
크림슨과 미르카엘들이 앞으로 어떻게 할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조용히 공녀에게 다가갔다.
-이봐.
-응? 당신은 누구죠?
-그건 알 필요 없고.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자신의 정체도 밝히지 않는 자의 물음에 내가 왜 대답을 해줘야 하죠?
-일단 들어보기라도 하라고.
-내가 왜요?
나에게서 고개를 돌리는 공녀.
하지만 내 입은 멈추지 않았다.
-지배의 군주가 성으로 돌아왔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
-그건 말해줄 수 없어요!
역시 쉽지는 않네?
-그럼 혹시 이모탈이란 말을 들어본 적 있나?
-이모탈? 그게 뭐죠?
가짜 군주와 이모탈은 분명 연관이 있었다.
군주를 연기했던 그놈이 이모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럼 성에서 수상한 자를 본 적이 있나?
-지금요.
나를 수상한 눈빛으로 보며 말하는 공녀.
-지금 말고 대공이 성에 머물던 때에 말이야.
-아! 있어요!
-누구지?
-잠깐만요. 내가 왜 그걸 당신에게 말해줘야 하는데요?
잘 나가다 왜 이래?
그냥 좀 대답해주면 안 되나?
-급해서 그래. 내 예상이 맞다면 그놈은 이모탈이란 놈인데 아주 위험한 놈이란 말이야.
-정말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뜬 공녀는 나를 놀리려는 것처럼 보였다.
일단 대충 어울려 주며 정보를 캐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이어서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그놈을 꼭 잡아야 하는데 이놈이 어디로 숨었는지 코빼기도 안 보이지 뭐야?
-어떻게 생겼는데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공녀에게 대답을 해주려고 했지만, 내가 이모탈의 외모를 알 리가 없었다.
-그거야 나도 모르지.
-지금 장난해요?
-일단 좀 들어봐. 이모탈이란 종족은 아주 위험한 종족이야. 아주 오래전에 마계에 존재하는 모든 종족의 3할을 지워버렸을 만큼 말이야. 그런 종족을 그대로 내버려 뒀다가는 모든 종족이 지워질지도 모른다고.
마족은 웬만해서는 거짓을 말하지 않기에 정보를 캐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내 말에 관심을 가져야만 가능했기에 그녀의 흥미를 끌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종족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요?
-아주 오래전에 사라진 종족이라 그래.
-어째서 사라졌는데요?
-군주님들에게 도전한 대가를 받은 거지.
-네? 군주님들에게 도전을요?
-그렇다니까.
그나저나 조금 이상한데?
내 말투는 마치 어린아이를 상대하는 것처럼 변해가기 시작했고, 이어서 수아에게 말하듯 친근함을 품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을 자주 겪은 것 같은 이상한 기시감 역시 느껴졌는데.
-근데 그걸 왜 나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 생각에는 그 가짜 군주가 이모탈인 것 같단 말이지.
-가짜 군주인 건 맞지만, 이모탈인지 뭔지는 아닐걸요?
-그게 무슨 말이야?
-군주를 연기했던 자가 바로 단장이거든요.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단장이라면 그 수호기사단의 단장을 말하는 건가?
-뭐? 그게 정말이야? 군주를 연기한 게 수호기사단의 단장이라고?
-네. 맞아요.
-크림슨!
공녀의 대답에 나도 모르게 크림슨을 호출해 버렸고.
-네! 군……?
크림슨은 나를 군주라 칭하려다 말고 급히 입을 막았다.
-이쪽으로 와!
-무슨 일이시냐?
존대도 반말도 아닌 이상한 말투.
크림슨의 이상한 반응에 의문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나와 크림슨을 번갈아 보는 공녀.
-공녀. 지금 한 말 다시 해봐.
-그러니까 지금까지 군주를 연기했던 것이 단장이라고요.
-그, 그게 무슨?
-몰랐어요? 난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자, 자세히 말해 보아라!
-그러니까 아버지와 단장은 서로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손을 잡았어요. 그래서 수호기사단의 하위 기사들이 성에 머물렀던 것이고요. 물론 두 분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같은 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 단장과 대공이 함께 있을 것이다?
-네. 맞아요.
설마 단장이 대공과 연관이 있었을 줄이야.
상황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하나만큼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대공과 단장.
이 둘이 아주 위험한 발상을 하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