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너희 먼저 출발하도록 해. 난 들릴 데가 있으니까.”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용족의 영역이 마족의 영역에 비해 작긴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 작은 건 아니잖아? 나는 마수들을 데리고 이동하려고.”
2천의 마수와 새롭게 지배한 30만의 마수들을 용족의 영역에 보내기 위해서도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감출 수 없었다.
더욱 많은 마수가 필요했기에 대공을 찾을 때까지 계속해서 마수들을 지배해 용족의 영역으로 보낼 생각이었다.
-그것은 이동형 마수들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수가 아직 많이 부족해. 최대한 빨리 놈을 찾으려면 더 많은 마수가 필요하지 않겠어?”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가봐. 나는 미호와 따로 움직일 테니까.”
-네!
내 뜻을 이해한 크림슨은 곧장 자리를 떠났고, 그를 조용히 바라보던 나는 이내 창가로 이동했다.
-뭐 하는 거지?
-어? 그, 그게…….
-할 말 있으면 들어와.
공녀.
그녀는 계속해서 나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대전에 미르카엘들을 남겨두고 자리를 떠날 때부터 그녀가 따라오고 있다는 것은 진작에 파악하고 있었다.
크림슨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나와는 반응이 조금 달랐다.
크림슨은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듯 보였다.
-저, 저기…….
-내가 좀 바쁘거든? 할 말 있으면 빨리 좀 해줘.
-혹시 저희가 언제 만난 적이 있었나요?
내 재촉에 입을 연 공녀는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황당한 말을 내뱉었다.
-뭐라고?
이거 지금 나한테 작업 거는 건가?
-그, 그게요. 당신을 보면 누군가가 자꾸 떠올라서 그래요.
-누군가가 떠오른다고? 그게 누군데?
-구, 군주님이요.
-군주? 지배의 군주?
-네. 정말 이상하죠?
공녀가 지배의 군주를 만난 적이 있었어?
-잠깐만.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수줍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공녀를 보던 나는 급히 크림슨에게 연락했다.
‘크림슨! 공녀가 지배의 군주를 만난 적이 있었어?’
‘물론입니다.’
군주가 사라지고 엄청 오랜 세월이 지났다고 하지 않았나?
‘어떻게? 엄청난 세월이 지났다며?’
‘군주님께서 그녀에게 특별한 선물을 많이 주셨습니다. 그중 수명을 늘려주는 보물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대공자 역시도 그 선물들 덕분에 지금껏 살아 있는 것일 겁니다.’
‘그놈에게도 선물을 줬단 말이야?’
‘그건 아닙니다. 공녀에게 준 것을 훔쳐먹은 것이겠죠.’
뭐 그런 놈이 다 있어?
하긴 오래 살고 싶다면 못할 것도 없지.
‘잠깐만? 혹시 그놈이 2차 각성을 한 이유가?’
‘아마 공녀의 것을 빼앗아 먹었기에 가능했겠죠.’
지도자급의 격을 갖추게 되면 수명이 엄청나게 증가한다.
대공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는데.
‘그 선물이라는 것이 정확히 뭔데?’
‘제가 드렸던 컬렉션을 기억하십니까? 그중 정말 강한 힘을 품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몸이 약했던 공녀를 위해 군주님께서 특별히 혼의 파편을 담아 만드신 것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모두 공녀에게 선물하셨죠. 그 정도로 군주님께서는 공녀를 아끼셨습니다.’
‘이유가 뭐야?’
대공에게 지도자의 권한을 제대로 주지 않았을 정도로 대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군주였다.
그런 군주가 공녀를 아꼈다라?
‘대공이 버렸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핏줄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약한 공녀가 마음에 들지 않아 대공은 공녀를 성밖에 버렸고, 그를 발견한 군주님께서 공녀를 데려다 키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약했길래 대공이 버려?’
‘모습은 고위 마족과 비슷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마력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태어난 것이 기적일 정도로 말이죠.’
크림슨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태어난 것이 기적일 정도로 몸이 약한 아이.
그런 아이를 발견한 군주는 그 아이만을 위한 영약을 계속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살아남았지만, 최하급 마족조차 되지 못하는 아이.
그를 불쌍히 여긴 군주가 자신의 혼을 담은 영약을 만들어 꾸준히 먹였고 그 결과가 지금 눈앞에 있는 공녀였다.
지도자급의 격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그에 근접한 힘을 가지고 있는 공녀.
다만 의문이 드는 것이 하나 있었다.
‘하나만 효과를 볼 수 있다며?’
‘공녀만을 위해 혼의 파편을 담았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일반 컬렉션에는 혼의 파편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혼의 파편을 계속해서 흡수한 공녀는 점차 성장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지금의 모습으로 각성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알았어. 일 봐.’
‘네. 부디 공녀와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대공자 그놈.
어떻게 지도자급의 격을 갖췄나 했더니 그걸 훔쳐먹어서 가능했던 거였단 말이야?
-저, 저기…… 응?
내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는 공녀를 보자 나도 모르게 수아에게 하던 행동이 나왔다.
머리에 손을 올려버린 것.
아마 그녀에 대한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겠지.
-어? 이, 이건 말이야. 그러니까…….
문제는 나 역시 나의 행동에 당황해 버린 것이었다.
-군주님?
-아, 아닌데?
두 눈을 빛내는 공녀의 머리에서 손을 치운 나는 한 발짝 물러났다.
-맞죠? 군주님 맞죠!
-아니라니까?
시선을 피한 내 눈에 미호가 들어왔다.
일단 자리를 피하자.
“가자. 미호야!”
“끼웅!”
공간의 문이 열림과 동시에 나는 곧장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휴! 들킬 뻔했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곧장 지배의 영역을 퍼트려 모여든 마수들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무슨 마수가 이렇게 많지?
“응?”
미호는 공간의 문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고, 그 안에서 공녀가 모습을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망했네.
* * *
-군주님!
-아닌데요?
-맞잖아요!
-아니라니까요?
-에이~ 맞으면서.
-아 글쎄! 아니라니까!
내가 마수들을 지배하는 모습을 목격한 공녀는 내가 지배의 군주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럼 저건 어떻게 한 건데요?
-정신지배를 건 거라니까?
-마수에게 정신지배는 통하지 않는다고 하던데요?
마족 중에서도 정신을 조종하는 능력을 갖춘 존재가 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마수의 정신을 조종하지는 못한다는 것이었는데.
-나, 나는 가능해.
-군주님이라서요?
한결같은 미소로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공녀를 계속 이대로 내버려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되었든 그녀는 대공의 딸이었으니까.
-내가 군주가 맞는지 직접 확인해 보겠나?
-어떻게요?
-이렇게.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녀에게 지배를 걸어버린 나와 그것을 거부하지 않은 그녀.
그녀를 지배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지도자급의 격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지배를 거부하지도 않았으니까.
-아!
“아?”
그녀에게서 놀람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나 역시 놀랄 수밖에 없었는데.
선이 연결됨과 동시에 그녀에게서 이상한 것이 흘러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이게 뭐지?
“크윽!”
놀람은 잠시였다.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과 함께 정신이 확장되기 시작했고, 이어서 내 의지력이 폭발적으로 불어나기 시작했으니까.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갑작스럽게 불어나기 시작한 의지력이 내 한계를 무시한 채로 계속해서 커져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미친!
그녀와 연결된 선을 통해 끝없이 흘러들어오는 무언가는 내 의지력을 폭발적으로 성장시키고 있었지만, 문제는 의지력을 담는 공간이 이미 가득 찼다는 것이었다.
이, 이대로 가다간 머리가 폭발해 버릴지도 몰라!
위기였다.
내 의지를 담아두는 곳은 풍선과 같았다.
의지가 상승할수록 계속해서 커져만 가는 풍선.
하지만, 풍선 역시도 한계가 존재했다.
더는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공기를 주입하면 터지는 것은 당연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
이미 한계를 넘어선 듯한 의지력에 머리가 터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든 그 순간이었다.
펑-
내, 내 머리가 폭발했어!
머리가 터져 나가는 듯한 느낌과 함께 무언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응? 통증이 사라졌네?
분명 머리가 터져 버렸음에도 아무런 통증이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설마 나 죽은 거야?
이렇게 어이없게?
근데 저건 뭐지?
나를 향해 끝없이 밀려오는 찬란한 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게 뭐지?
시야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찬란한 빛을 뿜어내는 덩어리들뿐이었는데, 그것이 나에게 닿으며 사라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의지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이 느껴졌고, 이어서 정신이 무한대로 확장되어가는 것을 느끼던 그때 극한의 희열이 나를 감싸기 시작했다.
마치 분리되었던 영혼이 하나가 되는 듯한 느낌.
아니, 느낌이 아니라 정말 영혼이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극한의 희열이 사라진 후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감겨있던 눈을 뜨자 공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고, 그와 동시에 이유를 알 수 없어야 했던 사실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공녀가 가지고 있던 엄청난 양의 혼의 파편이 나에게로 흘러들어왔다는 것을.
엄청난 양의 파편을 담고 있던 공녀는 아주 소량의 파편만을 소화할 수 있었고, 남아 있던 혼의 파편 전부가 본래의 주인인 나에게 흘러들어온 것이었다.
거기다, 공녀 역시도 군주의 혼으로 인해 성장이 막혀 있었던 모양이었다.
군주의 혼으로 인해 정작 본인의 혼이 억눌려 있었던 것.
그것이 지금 성장하고 있었다.
찌그러져 있던 본래의 혼이 쫙 펴지며 그녀의 정신과 마력, 육체 모두가 진화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근데 이게 보이네?
정신과 마력, 육체를 비롯한 영혼까지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조금 당황한 상태였다.
모든 감각이 활짝 열려서일까?
마치 멀미가 나는 듯한 이상한 현상이 나를 찾아왔다.
확장된 감각은 공녀뿐만이 아닌 주변 모든 것에 대한 정보를 나에게 전하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 나에게 입력된 정보들은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특히 마나의 흐름은 나를 미치게 할 만큼 너무나 광활했다.
내가 있는 공간에서만 무한대로 꿈틀거리는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고, 그 덕분에 나는 아무런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는 건 그리 좋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에겐 독으로 작용하는 듯했는데.
-이제야 벽을 허문 건가?
순간 마음속에서 들려온 목소리.
그것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대로 영원히 멈춰있었을지도 몰랐다.
“커헉! 이, 이게 뭐야?”
-알을 깨고 나온 것이 기쁘지 않은 건가?
“알을 깨고 나왔다고? 그게 무슨 말이지?”
-세상과 너를 단절시키는 벽이 무너진 것이다. 네가 그토록 바라던 강함이라는 것이지.
“내가 바라던 강함이라고? 이것이?”
-그렇다. 너는 이제 세상을 구성하는 개념과 법칙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지금 당장 그런 것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거다. 이제야 조금 엿본 정도일 테니.
놀라운 이야기였지만, 거절하고 싶었다.
조금 전 느꼈던 그 모든 것들을 다시 느낄 바에는 그냥 이대로 사는 것이 천 배는 나을 테니까.
“필요 없어. 그딴 거 너 다 가져.”
-허! 싫다. 내가 왜?
“내 것이 아니니까. 조금 전 그것들 모두가 너에게서 흘러나온 힘들이잖아.”
비록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느꼈던 것들을 떠올리면 놈이 이러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내가 느낀 것들은 단순히 마나의 흐름만이 아니었으니까.
그가 살아가는 세계와 내가 살던 세계는 전혀 달랐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동시에 존재했고,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모든 시간 선까지도 동시에 존재하는 미친 세계.
미래를 안다는 건 아주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놈이 사는 세계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시간 선에 동일한 의지를 가지고 존재한다는 것.
그에게 과거, 현재, 미래는 이미 정해져 있는 따분한 세상일 뿐이었다.
아무런 기대감도 흥미도 느껴지지 않는 무감정의 세계.
이제 알 것도 같았다.
아니, 본능적으로 깨달았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놈이 이 세상에서 모습을 감춘 이유를.
놈은 바하무트를 봉인하기 위해 희생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영원히 이어지는 따분함을 참지 못했을 뿐이니까.
-크하하하하하하. 네놈은 아주 큰 착각을 하고 있구나.
“그게 무슨 말이지?”
-곧 알게 될 것이다. 지금 당장 모든 것을 되돌리고 싶지만, 그때의 즐거움을 놓치지 않으려면 조금 참아야 할 필요가 있겠지.
“즐거움이라고?”
-그때를 위해 이 힘은 당분간 내가 감당하고 있겠다.
“이봐! 그게 무슨 말이야!”
놈은 그렇게 사라졌다.
나에게 이상한 불안감을 남기고.
* * *
모든 힘을 가져가겠다던 놈의 말은 정확하지 않았다.
내 의지가 그것을 증명했으니까.
지배의 영역의 크기가 전보다 수십 배 이상 넓어졌을 뿐만 아니라 의지 역시도 엄청나게 증가한 지금 나는 마수를 따로 모아야 할 필요가 없어졌다.
마수들이 살아가는 영역을 통째로 지배하에 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배한 마수들의 수가 이제는 백만 단위를 넘어섰을 정도로 엄청난 대군을 이끌 수 있게 되었고, 그 모든 마수를 용족의 영역으로 보냄으로써 대공을 찾을 확률이 점차 높아지고 있었다.
천만이 넘어서는 마수들이 용족의 영역으로 동시에 몰려들어 많은 문제를 만들어내긴 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대공을 찾는 것이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인지도 몰랐다.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는 불안감.
그 불안감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기 위해 대공에 대한 것만 생각하려 했지만, 놈이 마지막에 남긴 말이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놈이 숨기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그때를 위해서라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예상 가능한 것들은 많았지만, 쉽게 답을 정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지금껏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으니까.
대공의 목적?
이모탈의 강함?
바하무트의 부활?
그 모든 것들이 전과 다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마계의 멸망이 아닌 나 자신의 파멸이란 것으로.
일단 대공을 찾자.
답은 그 이후에 내려도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