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7화 (207/214)

생겨난 호기심은 이내 의심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바하무트를 소멸시킬 수 있는 존재는 그들이 아는 한 신들이라 불리는 자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바하무트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은 불가능했고, 잠시 잠재울 뿐이었지만, 나에게는 이들의 그 잠시라는 시간은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었기에 소멸이라고 표현한 것뿐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신을 나에게 투영시키지 않는다는 것일까?

내가 다른 차원에서 넘어왔다는 사실과 현지라는 존재 덕분에 나를 다른 차원의 신 정도로 생각하는 듯싶지만, 이내 그들의 생각은 점차 변해가기 시작했다.

크림슨이라는 존재 때문에.

-크림슨 경. 묻고 싶은 것이 있소.

-말해 보시오.

-혹 저분이…….

미르카엘이 가장 먼저 눈치를 챈 것 같았다.

-저분에 대해서는 대답해 줄 수 없소.

크림슨은 지금 상황을 즐기고 있는 듯 보였다.

내 지시로 인해 차마 내 정체를 말하지는 못했지만, 미르카엘의 질문을 은근히 즐기고 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어째서 대답을 해주지 못한다는 거요?

-그거야 저분이…… 아! 아니오.

‘뒤질래?’

‘저는 군주님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에 대한 질문에 자부심을 드러내는 크림슨만 봐도 내가 누구인지 충분히 예상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배의 군주.

일곱 신 중 마족을 다스리는 신.

하지만, 미르카엘은 아직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저기…… 혹시 지배의 군주라 불리시는 마족들의 신이세요?

다만, 하이엘프는 확신을 가진 것 같았다.

-아닌데요?

-왜 갑자기 존칭을 사용하세요?

-그, 그냥?

당장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이었음에도 모두의 표정이 밝아져 있는 상태였다.

특히 하이엘프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마치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보일 정도였는데.

-야! 너 수작 부리지 마라!

그런 하이엘프를 향해 현지가 일침을 날렸다.

-수작이라뇨?

-지금 니가 우리 도련님한테 수작 부리고 있잖아!

-아닌데요?

-맞는데?

-아니라니까요?

-맞다니까?

현지와 말싸움을 시작한 하이엘프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크림슨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속도를 올리라고.

‘군주님. 하나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뭔데?’

‘어째서 이들에게까지 정체를 숨기시려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들은 마계의 정점에 서 있는 자들이었다.

내가 군주라는 사실을 밝힌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자들.

나 역시 처음에는 이들에게 군주라는 사실을 끝까지 숨길 생각은 없었다.

군주가 맞을 테니까.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놈이 마지막으로 남긴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군주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두려워졌다.

내가 군주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내게 파멸이 찾아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니까.’

‘네?’

‘내가 군주라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무언가 변화가 찾아오게 될 거야. 그리고 그 변화는 절대 좋은 변화는 아니겠지.’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그냥 그렇게만 알고 있어.’

‘알겠습니다.’

놈이 말한 ‘때’가 오면 아마 나는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어떤 선택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나 자신 혹은 주변인들에게 절망 혹은 슬픔을 선사할 거란 사실은 틀림없었다.

* * *

-생각했던 것보다 이모탈의 수가 많은 것 같은데?

미르카엘들의 의문을 무시한 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던 그때 앞을 막아선 존재들이 있었다.

누가 봐도 혼혈이라 생각되는 모습을 가진 존재. 이모탈.

무려 열셋이나 되는 이모탈이 우리의 앞길을 막은 채 이죽거리고 있었다.

-너희들은 이미 늦었다. 돌아가서 파멸을 기다려라.

-늦었다고?

-그렇다.

미르카엘이 앞으로 나서서 묻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는 녀석들.

우리가 그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상관없다! 네놈들이야말로 각오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크림슨은 열셋이나 되는 이모탈을 앞에 두고도 두려움 따위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투기를 드러내며 소리쳤다.

-죽음을 앞당기고 싶다면 그리해주지!

-흥! 누가 할 소리를!

더 이상의 대화 따위는 없었다.

크림슨이 코웃음을 치며 놈들을 향해 검을 뽑아 드는 순간 우리는 미리 계획해 두었던 진형대로 자신의 자리를 찾아 움직여 전투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가장 앞쪽에는 신기를 착용한 수왕이.

그 뒤쪽으로는 크림슨이 중심을 잡고 미르카엘과 라구스가 양옆을 받치고 있었고.

세 번째 줄에는 나를 중심으로 간격을 넓혀 루시안과 코넬리아가 수비자세를 취한 채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했고, 마지막 줄에는 지안과 하이엘프가 활을 들어 올려 이모탈을 조준하고 있었다.

화살촉 모양의 진형으로 일견 공격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상 방어를 위한 진형이었다.

우리의 공격은 단 하나 오로지 현지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테니까.

-우습구나. 겨우 그딴 것들로 우리에게 대항할 생각이라니.

역시 놈들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놈들이 나타나는 순간 일행의 가장 뒤로 이동한 현지가 모습을 감춰버렸다는 것을.

순간의 방심은 아마 놈들에게 뼈아픈 실책이 될 거다.

-쳐라!

스걱-

이렇게.

대장으로 보이는 놈이 공격 명령을 내리는 순간 놈들의 시선이 모두 이쪽으로 쏠렸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현지가 움직였다.

가장 뒤쪽에 있던 이모탈 둘의 목이 순식간에 몸통과 분리되어 버렸으니까.

-응?

-어?

콰앙-

자신의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둘이 의문을 드러내는 순간 대장으로 보이는 녀석이 둘의 뒤를 향해 빠르게 쏘아졌고, 동시에 현지의 모습이 살짝 드러났다.

-이년이!

하지만, 현지는 금방 다시 모습을 감추었고, 그와 동시에 이쪽을 공격하려던 이모탈들은 급히 자리에 멈추어 서며 주변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신들 중 가장 강한 이모탈조차도 현지의 공격이 끝난 순간이 돼서야 현지의 존재를 알아챘다.

그것은 자신들의 뒤를 봐줄 수 있는 존재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거기다, 현지를 제외한 이쪽의 전력은 저들에 비해 떨어지는 수준이었지만, 그건 1:1의 상황에서나 통할 뿐 이런 다 대 다의 전투, 그것도 이쪽이 수비적인 자세를 취하는 상황에서는 이쪽을 처리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저렇게 당황한 상태에서는 더욱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게 될 테고, 결국 현지의 일격에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할 거다.

-뭐 하느냐! 뒤는 내가 봐줄 것이다! 쳐라!

놈들의 대장이 그들의 뒤를 경계하며 소리쳤지만, 이모탈들은 살짝 움찔했을 뿐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들을 본 나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조금 전 대장이란 놈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하나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반드시 이쪽을 공격했어야만 했다.

그래야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테니까.

피잉- 쾅-

작은 소음 뒤에 나타난 커다란 폭음.

스걱-

지금처럼 말이다.

이쪽에는 현지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현지에 비해 부족하긴 해도 공격력만큼은 현지를 넘어서는 지안이라는 존재가 있었으니까.

끝났네.

지안의 화살이 대장을 노리고 날아가 폭발한 그 순간을 노려 현지가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란 이모탈들 중 하나를 처리해 버렸고,

이어서 놈의 양옆에 있던 녀석들이 놀라며 현지의 공격에 대비했지만, 이미 현지의 단검은 둘의 목을 베고 지나간 후였다.

13 VS 10이었던 전투가 순식간에 8 VS 10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리겠는데?

놈들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나는 솔직히 조금 당황한 상태였다.

놈들의 강함도 강함이었지만, 생각보다 많은 수 때문이었다.

거기다 대장으로 보이는 녀석은 현지에 비해서 떨어지는 수준이기는 했지만, 그리 큰 차이는 보이지 않았다.

현지가 놈을 처리하려면 당연히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기에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다행히도 놈들은 개개인의 전투가 아닌 단체전을 겪어본 적이 없는 모양인지 이쪽의 심리전에 쉽게 말려들었다.

‘도련님! 저놈들 재생하고 있어요!’

‘뭐?’

현지의 말에 급히 고개를 돌린 나는 목이 떨어져 나간 녀석들이 천천히 재생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게 뭐야?

놈들은 확실히 재생하고 있었다.

조금 특이한 것이라면 몸통에서 머리가 자라나는 것이 아닌 머리에서 몸통이 자라나고 있다는 것일까?

아무래도 사념이 뭉쳐 있는 곳이 머리 쪽이라 그런 모양이었는데,

그에 나는 급히 지배의 영역을 넓혀가며 녀석들을 영역 안에 집어넣었고,

동시에 놈들의 머릿속에 뭉쳐 있는 사념을 흩어버리기 시작했다.

휴- 큰일 날 뻔했네.

사념을 완전히 흩어버리자 놈들의 재생이 멈추었고, 그와 동시에 홀로 남아 있던 머리통이 천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이래서 사념에 잠식된 놈들이 싫단 말이야.

마계의 종족 중 머리가 날아간 상태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종족은 없었다.

하지만, 사념에 잠식되면 사념을 완전히 걷어내지 않는 이상 머리가 날아간다고 해도 재생을 하기 때문에 완전히 끝날 때까지는 절대 방심을 할 수 없었다.

-미르카엘. 저놈 상대할 수 있겠어?

-버티기만 하는 거라면 어느 정도는 가능할 겁니다.

내 물음에 존칭을 사용하는 미르카엘을 보니 나에 대해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 부탁해.

-네.

큰 타격을 입은 놈들은 지금 대장을 중심으로 뭉쳐 조금 전 우리처럼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겁을 먹어서라고 생각했지만, 그랬다면 조금 전 기회가 있었을 때 도주를 택했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놈들은 도주가 아닌 우리를 막는 것을 택했다.

그것은 저 안쪽에 있는 자들에게 시간을 벌어주려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놈들의 의식이 거의 끝나가고 있거나 아니면 이쪽을 처리하기에는 아직 충분히 사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건데?

뭘까? 전자? 후자?

비록 예상일 뿐이지만 전자의 확률이 높아 보였다.

지금까지도 충분히 오랜 시간을 이곳에서 머물렀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미르카엘! 네놈 따위가 감히 나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으냐?

-흥! 네놈들은 끝났다!

-정말 그럴까?

미르카엘은 녀석과 대치했지만, 바로 전투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전투가 아닌 대화를 유도해 놈을 더욱 오래 붙잡고 있으려는 의도로 보였는데, 놈은 멍청하게도 미르카엘의 의도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부하들이 하나둘 죽어 나가고 있음에도 말이다.

-너는 나의 태도가 이상하단 생각을 해보지 않은 모양이구나.

-뭐라?

-조금의 조급함도 보이지 않는 내 태도가 이상하단 생각을 하지 않았느냔 말이다.

-그, 그게 무슨?

-이 천계 전체가 위험에 빠졌음에도 내 표정에는 조금의 근심도 없지. 그 이유가 뭐라 생각하느냐?

미르카엘의 말에 놈의 표정이 굳어가기 시작했다.

-네, 네놈이 여, 연기를…….

-이 모습이 연기로 보이느냐?

분명 이상한 일이겠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종족이 멸망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미르카엘은 태평할 뿐이었다.

믿는 구석이 있다는 듯이.

-어, 어찌?

-바하무트가 부활한다고 해도 이제는 조금도 두렵지 않다는 말이다.

-뭐라고?

-너희가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를 잘 생각해 보아라.

-설마?

-내가 해줄 말은 여기까지다. 잘 가라.

미르카엘과 놈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남은 이모탈은 전부 정리가 되어 버린 상태였다.

놈이 너무 놀라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스걱-

-어?

-잘 가!

목을 가르는 단검과 함께 현지가 놈의 옆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손을 흔들며 미소를 지은 채로.

놈의 강함을 생각하면 허무한 죽음이었지만, 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군주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이미 삶을 포기한 듯싶었으니까.

그나저나 저 말을 믿네?

역시 순진하단 말이야.

나라면 절대 믿지 않았을 거다.

나를 흔들려는 수작이라 생각하고 더욱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을 테니까.

“이제 마지막만 남은 건가?”

사념이 흩어진 후 놈의 머리통이 녹아내리는 것을 보며 조용히 혼잣말을 내뱉은 나는 제발 아무 일 없이 끝나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또 다른 내가 말한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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