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막아요.’
‘저도요.’
이곳에 도착한 후 나는 곧바로 현지와 지안에게 머리 위에 떠 있는 저것이 폭발했을 때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지 물었다.
안타깝게도 저 에너지가 폭발하게 된다면 우리를 포함한 대공, 이모탈들까지 무사하지 못할 거란 사실을 알게 되었고, 결국 기다리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될 거란 사실을 예상하긴 했지만, 설마 모두를 날려 버릴 준비를 해 두었을 줄은 몰랐다.
물론 그 때문에 뚱이들을 데려오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거기다, 이모탈을 우리에게 보낸 이유는 그들을 버리기 위해서였을 뿐이었다.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사념을 흡수하는 자들이 사념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도중에 깨어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처구니가 없네.
‘쟤들은 어때?’
‘뒤에 있는 자는 저 혼자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지만, 앞에 있는 둘은 아니에요. 저와 지안이 힘을 합친다고 해도 하나를 상대하지 못할 정도로 강해요.’
계획대로 움직여야 하는 건가?
저들이 깨어나는 듯한 움직임이 보이면 곧바로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이곳에서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으니까.
일단 힘을 확인한 것으로 만족해야 하려나?
‘크림슨. 빠질 준비해.’
‘네. 그런데 대공은 어찌할까요?’
‘일단 데려가는 거로.’
‘알겠습니다.’
이제는 그도 진실을 알았을 테니 이쪽을 방해하진 않겠지.
아니, 그가 돕는다면 없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내 지시에 크림슨은 미르카엘들에게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거대한 눈. 그러니까 바하무트라 생각되는 존재에게 시선을 옮겼다.
기분이 진짜 이상하네.
저놈을 보면 꺼림칙하면서도 이상하게 친근감이 들었다.
두 가지의 상반된 감정이 함께 든다는 것은 무언가 조금 이상했다.
놈이 꺼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친근감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유가 뭘까? 어째서 저놈에게 친근감이 드는 걸까?’
분명 착각은 아니었다.
‘그럼 뭐지? 도대체 뭘까?’
그렇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사이 크림슨이 연결된 선을 통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준비 끝났습니다.’
‘그래? 그럼 천천히 빠지도록.’
‘네.’
점차 사념을 흡수하던 자들이 완성되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그에 이곳을 빠져나가려던 참이었다.
“헉!”
나도 모르게 입에서 당황이 음성이 터져 나왔다.
바하무트는 우리가 빠져나가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머리 위에 떠 있는 거대한 에너지에 폭발의 의지를 담아 우리를 협박하기 시작한 것.
우리가 이곳을 나갈 바에는 차라리 함께 죽자는 건가?
어째서지?
분명 저 에너지가 폭발하면 이곳에 있는 모두가 죽는다.
우리뿐 아니라 바하무트의 사념을 흡수하는 저들 역시 마찬가지.
설마?
순간 내 고개가 대공을 향해 돌아갔다.
‘나갈 수 없구나!’
그랬다.
대공이 없다면 저들은 사념을 완전히 흡수한다 해도 밖으로 나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아! 그래서 대공이 멀쩡한 거였어?
대공을 잠식시키지 않았던 이유가 결계의 출입 권한 덕분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대공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니, 저들을 이곳에 가둬둘 기막힌 방법이 생각났는데.
바하무트를 속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저들을 상대할 필요가 없었다.
‘크림슨. 대공은 이대로 두고 가야겠다.’
‘네?’
‘대공이 남지 않으면 저놈들도 밖으로 못 나가.’
‘아! 그렇군요!’
크림슨에게 이유를 설명하자 크림슨은 가차 없이 대공을 버렸다.
-네놈은 이곳에 남아라.
-뭐?
-네놈 때문에 일어난 일은 네놈이 마무리 지으라는 말이다.
-무슨 의미냐?
-알아서 생각하도록. 지옥에서 보자.
크림슨의 말속에는 어떤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가 나간 이후 저들을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자결하라는 뜻.
하지만, 대공은 그것보다 다른 것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지옥이 뭐지?
-어?
죽어서 보자는 의미였지만, 대공은 지옥이 뭔지 모른다.
이 마계에는 사후세계란 개념이 없었으니까.
지구의 영화와 드라마를 본 크림슨은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그 역시 그것들을 보기 전에는 사후세계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 그런 게 있다.
크림슨의 대답에 코웃음을 친 대공.
그는 이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이곳에 남도록 하지.
-이제야 좀 마족의 지도자 같군.
-흥! 너 따위의 인정은 필요 없다.
-잘 있어라.
과연 바하무트는 어떤 선택을 할까?
우리를 이대로 고이 보내 줄까?
걱정과는 다르게 바하무트는 대공이 남으려 하자 우리가 떠나려는 것을 막지 않았다.
우리가 이곳을 벗어난 뒤 대공이 자살이라도 하면 그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갈 텐데도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에 바하무트가 생각보다 멍청하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자리를 벗어났다.
* * *
-나는 바보가 아니다.
혼자 남은 곳에서 대공의 의념이 들려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행동했지만, 그에게도 계획이 있었다.
처음 단장이 자신을 꼬드겼을 때 그는 단장에게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크림슨. 네놈이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
군주님을 찾을 방법이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군주님에게 돌아올 의지가 없다면 그 어떤 짓을 해도 그분을 다시 이곳으로 불러들이지 못한다는 것을 자신이 모를 리가 없었다.
물론 혹하긴 했다.
용족의 로드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확인 정도는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결정으로 인해 마계가 멸망하는 일은 없을 거라 단정할 수 있었다.
크림슨이나 미르카엘들이 찾아오지 않았다고 해도 자신은 저들을 이곳에서 내보낼 생각이 없었으니까.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이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랬다.
이모탈의 존재와 그들의 힘을 깨닫는 순간 자신의 힘으로는 놈들을 처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기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저놈들은 마계를 멸망시키기 위해 움직였을 테지.
그래서였다.
놈들의 편에 서서 놈들을 돕는 척하며 기회를 노린 것은.
분명 자신에게 놈들을 막을 기회가 올 거라 생각했다.
바로 지금처럼.
크림슨들에게 한 말들은 그저 한풀이였다.
감정이 북받쳐 올라 마음속에 있던 이야기를 풀어놨을 뿐이었다.
-드디어 깨어나는구나. 바하무트! 네놈은 절대 이곳을 나갈 수 없을 것이다.
핏빛 폭풍이 잠잠해지는 것을 확인한 대공은 바하무트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 오랜 세월 자신의 군주를 비롯한 신들을 괴롭힌 존재.
놈의 마지막 희망을 짓밟고 싶었다.
-크하하하하! 대공! 네놈은 바보인가!
-너는?
-내가 바하무트로 보이느냐?
-단장이라고? 어, 어떻게?
핏빛 폭풍을 휘감으며 사념을 흡수하는 자 중 하나는 이모탈이 아닌 단장이었다.
-내가 고작 바하무트의 사념 따위에 굴복할 것 같으냐?
-말도 안 돼!
-저놈들 역시 마찬가지다. 바하무트의 사념 따위에 잠식되지 않을 자신이 있었기에 사념을 받아들였을 뿐이지.
-그, 그게 무슨.
-네놈은 모르고 있는 모양이지만, 바하무트는 지금 정상이 아니다. 놈은 껍데기일 뿐이야. 강한 힘을 가진 껍데기!
-뭐라고?
대공은 지금 단장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하무트가 껍데기라니?
주변에 존재하는 사념들만 봐도 그의 말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리 강력한 악의를 품고 있는 사념이 껍데기라니?
-사념에 담긴 악의에는 의지가 없다. 그 악의만 견뎌낸다면 사념의 힘을 이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단장의 말에 대공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악의란 악한 의지를 말함이었다.
그것이 의지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그리고, 정말 의지가 없었다면 로드는?
-말도 안 된다! 그럼 로드는 뭐냐? 그는 어째서 사념에 잠식당했느냔 말이다!
-몰랐으니까. 그는 사념에 담긴 악의를 걷어낼 생각만 했지 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니 멍청하게 잠식당해 버린 것이다.
-뭐라고?
-동료들을 모두 잃은 그곳에서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악의를 무시할 방법만 있다면 사념의 힘으로 더욱 강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보아라! 지금 나의 힘을!
쿠웅-
단장이 뿜어내는 힘에 대공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군주를 보고 있는 듯한 위화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이게 무슨!
-어떠냐? 신이 된 나의 모습이?
-네놈! 제정신이 아니구나!
사념에 잠식당하지 않았다던 단장의 말은 거짓이었다.
대공이 보기에는 사념에 잠식된 상태였으니까.
다만 그가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놈들도 슬슬 깨어나겠군.
단장의 말에 대공의 고개가 돌아갔다.
신에게 도전한 적이 있다는 이모탈.
그들이 지금 깨어나려 하고 있었다.
단장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힘을 가지고.
-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저놈들을 죽여!
-흥.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스스로 신이 되려는 자들이다. 이 마계를 멸망시켜 버릴 거란 말이다!
-그게 뭐? 어차피 신이 떠나 버린 세상이다.
-네, 네놈! 정말 미쳤군.
-그리고 너. 뭔가 착각하고 있군.
-뭐라고?
-내가 저놈들보다 못하다 생각하고 있지 않느냐?
-아니란 말이냐?
대공의 생각은 일견 타당해 보였다.
신에게 도전했을 정도로 강한 존재인 이모탈이 단장보다 강할 거라는 예상은 당연했으니까.
-지금은 그렇겠지. 하지만!
단장이 양팔을 들어 올린 순간 그의 손바닥에서 촉수가 자라기 시작했고, 이어서 빠른 속도로 둘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리고.
퍽- 퍽-
사념의 흡수가 거의 끝나가던 이모탈의 머리통을 뚫고 들어갔다.
-무, 무슨.
-멍청하기 짝이 없는 놈들.
-크아악!
-키에엑!
촉수를 잡고 비명을 지르는 이모탈을 보며 대공은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이모탈의 머리가 점점 쪼그라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머리뿐 아니라 전신이 쪼그라들고 있었다.
마치 생명력을 전부 뽑힌 미라처럼.
-네놈들이 정제한 사념은 내가 잘 쓰도록 하지.
이모탈이 흡수한 사념을 빨아들이는 단장의 힘은 끝없이 증가하고 있었다.
지금도 끝이 보이지 않는 단장의 힘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한 대공이 취할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흡!
자결!
몸속의 마력을 폭발시켜 자살하려던 대공은 마력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죽으려고?
-이, 이놈!
-끝은 보고 가야 할 것이 아닌가?
-무, 무슨 말이냐!
-내가 이 마계의 신이 되는 모습을 보고 가야 할 것 아닌가?
-으아악!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절망한 대공은 악을 쓰고 있었다.
-크크크. 그나저나 놈들이 속아주어서 다행이야. 놈들이 자폭할 생각이면 어쩌나 했는데 말이지.
-뭐라고?
-사념의 흡수가 끝나지 않았을 때 놈들이 나를 공격했다면 아마 나는 자멸하고 말았을 거다. 그 때문에 저것을 만들어 놓긴 했지만, 확신이 없었단 말이지. 놈들이 물러날 거란 확신이. 놈들이 물러나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이 날 뻔했어. 시간을 들여 저것을 만들어 두길 잘했군.
허공에 떠 있는 강력한 마력의 구를 가리키며 말하는 단장.
저것은 바하무트가 만들어 둔 것이 아니었다.
지금껏 단장이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저것이었으니까.
수백만이 넘는 마수들의 정수를 사념에 오염시켜 하나로 묶어 놓은 것으로 폭발력을 제외하면 아무런 쓸모도 없는 물건이었지만, 지금처럼 결계에 의해 사방이 막힌 곳에서 사용하면 엄청난 위력을 자랑했다.
-킥킥. 천 년이 걸렸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 암! 나쁘지 않지!
단장의 모습을 본 대공은 모두가 자신의 탓인 것만 같다는 생각을 감출 수 없었다.
자신이 없었더라면 그들은 죽음을 택해서라도 이들을 막았을 테니까.
-네놈은 절대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 내가 결계를 여는 일은 없을 테니까!
-큭큭큭. 네놈은 정말 착각이 심하구나. 내가 겨우 저딴 결계를 부시지 못할 것 같으냐?
-뭐라고?
-안쪽의 결계라면 네놈의 말대로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겠지만, 외각의 결계는 다르다. 내 힘으로도 충분히 부수어 버릴 수 있지. 네놈을 살려두는 것은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말이다. 킥킥킥.
절망이었다.
대공의 선택은 마계에 악마를 불러들이는 결과를 초래했으니까.
* * *
-준비 철저히 해둬.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분명 가능성은 있으니까.
-네.
대공을 믿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놈들이 결계를 빠져나올 거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이렇게 쉽게 끝날 리가 없었다.
분명 놈들은 나온다.
감일 뿐이었지만, 이상하게 긴장이 되는 것을 보니 내 감이 틀리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미르카엘들에게도 확실히 전해.
-알겠습니다.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지났을 뿐이었다.
최소 일주일은 지켜봐야 할 상황임에도 모두가 긴장을 푼 채 쉬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자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현지야.”
“네?”
“너 뭐해?”
“돌아갈 준비 하는데요?”
“왜?”
“끝났잖아요.”
어휴-
전투를 사랑하는 현지만 봐도 다른 자들의 생각을 예상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안 끝났다고!”
“왜요?”
“대공 없이 결계를 뚫어 버릴 수도 있잖아!”
“에이- 말도 안 돼요. 지안이가 모든 힘을 다해서 공격해도 꿈쩍도 안 하는 결계라고요. 그런 결계를 어떻게 뚫어요.”
직접 실험을 해 본 것은 아니었지만, 결계를 구성하는 에너지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난쟁이족의 신이 만든 결계와는 다르게 이곳의 결계를 구성하는 에너지는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엄청난 수준이었다.
“그건 맞지만, 이상하게 불안하다고! 그러니까 긴장 좀 유지하고 있어! 어떻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으니까.”
“네에.”
전혀 긴장하지 않는 현지의 모습에 한숨을 내 쉴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내가 과민반응을 하는 것일지도 몰랐지만, 이상하게 불안했다.
절대 이대로 일이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