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0화 (210/214)

쿠웅-

결계를 빠져나오고 반나절이 지났을 무렵.

굉음과 함께 땅을 로드의 레어를 중심으로 진동이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설마?

쿠웅- 쿠웅-

일정 간격으로 계속해서 들려오는 굉음은 점차 커지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 땅을 울리는 진동 역시도 점차 강도가 심해지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쉬던 모두가 벌떡 일어나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바로 로드의 레어였다.

쿠웅- 쿠웅- 쿠웅-

연속해서 세 번의 굉음이 울리고 잠시 멈췄을 무렵.

-가능할 리가 없지.

-그러니까.

미르카엘과 수왕이 코웃음 치는 순간.

콰앙-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의 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지며 강도 높은 지진이 발생했고, 로드의 레어가 폭발하며 거대한 에너지가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헉!

-이, 이런!

정말 결계를 뚫어버렸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 버렸다.

저 견고한 결계를 뚫어 버리다니.

걱정하긴 했지만, 그것은 대공이 배신했을 경우를 상정한 것이었다.

그런데 결계를 직접 뚫고 나와?

도대체 얼마나 괴물이길래?

-크하하하하하!

수천 미터 상공.

모두의 시선이 그곳을 향했다.

-다, 단장?

단장이라고? 저놈이?

고개를 치켜들고 기괴한 웃음을 터트리는 녀석을 본 크림슨은 그를 단장이라 불렀다.

-오! 크림슨인가?

-어, 어째서 단장이?

콰앙-

크림슨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충격파를 만들어내며 바닥에 착지한 단장이 천천히 크림슨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에 크림슨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오랜만이군.

-정말이었다고!? 단장이 이 모든 일을 꾸민 것이오?

-일을 꾸미다니? 나는 그저 내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다.

-마계를 혼란에 빠트리는 일이 단장의 일이란 말이오?

-혼란이라니? 나는 그저 군주의 역할을 대신하려는 것이다.

-미치셨소? 지금 그것을 말이라고 하는 것이오?

-나는 지극히 정상이다.

크림슨은 단장을 회유하거나 제정신으로 돌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상황을 냉철하게 판단한 크림슨은 모두에게 제대로 된 진형을 형성할 시간을 벌어주고 있었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단장의 모습을 보니 대공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겠구려.

-거짓은 아니지. 내가 그를 이용한 것은 사실이니.

-대공은 어찌했소?

-곧 나타날 거다. 놈은 내가 신이 되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봐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미쳤군.

정말 미쳤어.

마계의 신이라니?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그 끝에 남는 것은 본인의 파멸뿐일 텐데?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시오?

-불가능할 것 같으냐?

-당분간은 가능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분들께서 나타나시는 순간이 당신의 끝이란 사실을 왜 모르오?

-크림슨. 너는 그자들이 다시 나타날 거라 생각하느냐? 군주가 다시 나타날 거라 생각하느냔 말이다.

이미 나타났는데?

물론 아직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선택을 하는 순간 마계에는 군주가 나타나리라.

나라는 자아가 사라지겠지만.

이것이 내가 걱정하는 것이었다.

내가 군주라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내 자아는 사라져 버리고 그 자리를 정신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그놈이 차지할 테니까.

물론 확실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그 힘을 견디기에는 나 자신이 너무도 약했으니까.

-당연하지 않소! 그분들은 언제고 다시 돌아오실 분들이오. 잠시 유희를 위해 이곳을 떠나 계실 뿐 언제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실 분들이란 말이오!

유희라?

그럴 수도 있겠는데?

다른 신들 역시 나처럼 본래의 자아를 봉인한 채 어딘가에서 놀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때 내가 겪었던 그의 힘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철저한 회색빛의 세상.

그들에게 이 세계는 아무런 흥미도 기대감도 재미도 없는 무감각의 세계였으니까.

모든 시간선에 동일한 의지를 지니고 살아간다는 것은 지독하게 고독했을 테니.

나는 그때 분명히 보았다.

마계에 살아가는 생명체의 끝을 말이다.

물론 확실히 기억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순간 군주가 느껴야 했던 감정만큼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기에 군주가 왜 이 세상을 떠났는지, 왜 힘을 봉인한 것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들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그렇소!

-그렇다면 어째서 바하무트가 껍데기만 남아 있단 말이냐!

뭐라고?

바하무트가 껍데기만 남아있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그게 무슨?

-그곳에서 나는 깨달았다. 바하무트란 존재 자체가 허구였다는 것을. 바하무트 역시 그들이 만든 장치에 불과하단 말이다!

지금껏 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단장이 처음으로 격한 감정을 드러냈다.

-껍데기?

-그렇다. 바하무트와 접촉한 나는 알 수 있었다. 바하무트에게 아무런 의지도 자아도 없다는 것을! 바하무트는 그저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일 뿐이었다. 놈이 뿜어낸 에너지에 악의가 담기는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결계 때문이었다. 결계를 지나는 순간 에너지에 악의가 담기는 것이란 말이다!

왜 날 봐?

아니야! 난 모른다고!

단장의 말을 들은 크림슨은 몸을 틀어 나에게 시선을 돌렸고, 그에 나는 급히 고개를 저으며 모른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크림슨은 결국 나에게 다가왔다.

-저, 정말입니까? 단장의 말이?

-그, 그걸 왜 나한테 물어?

크림슨뿐만 아니라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는데.

지잉-

순간 뒤쪽에서 거대한 마력이 느껴졌고, 순식간에 단장을 꿰뚫으며 지나갔다.

왕눈이 나이스!

왕눈이의 공격이 단장을 정말로 꿰뚫은 것은 아니었지만, 대화를 끝내기에는 충분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군. 저 마수들은 다 뭐지? 수만에 이르는 최상급 마수와 수백의 왕급 마수라니? 설마 나를 상대하기 위해 마계에 퍼져있는 마수를 전부 끌고 온 것이냐? 아니지? 마계에 저리도 많은 왕급 마수가 존재한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데? 아니, 그것보다 어떻게 저놈들을 조종하는 거지? 도대체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군.

나 역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바하무트에게 의지도 자아도 없다고?

그럼 바하무트가 사념을 만들어내는 기계라도 된다는 말인가?

나에게 물어본들 내가 알 리가 없었다.

군주 본인이 아닌 이상 말이다.

X발. 도대체 무슨 짓을 해 놓은 거야? 이 새끼는!

-이, 일단 저놈 쓰러뜨려! 바하무트에 대한 건 그 후에 알아보면 되잖아!

모두가 내 설명을 기다렸지만, 내가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래서 지시를 내렸다.

놈을 쓰러뜨리라고.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 * *

-무, 무슨!

무너진 로드의 레어에서 겨우 빠져나온 대공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비록 외각이었지만, 신의 결계를 무너트릴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진 단장이 언뜻 밀리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수백의 왕급 마수와 수만의 최상급 마수.

거기다 종족의 지도자들을 비롯한 크림슨들.

물론 그것뿐이었다면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으리라.

-저건 도대체?

단장을 상대하며 조금도 밀리지 않는 저 괴물은 또 뭐란 말인가?

언뜻 마족처럼 보이긴 했지만, 마족보다는 엘프에 가까운 마력을 뿜어내는 존재와 그 강력한 힘을 가진 단장조차도 피해야 할 정도로 강력한 공격을 날리는 또 하나의 괴물.

천족?

천족과 언뜻 비슷해 보이는 힘을 사용하는 존재의 공격은 그의 등을 축축하게 만들 정도로 소름 끼치는 파괴력을 담고 있었다.

도대체 저런 존재가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어찌 마수들이 저런 전략과 전술을 사용한단 말인가?

마수들의 협동은 그가 살아오며 봤던 그 어떤 것보다도 황당한 장면이었다.

만약 마수들에게 저런 협동심이 존재했다면 마계의 종족들은 진작에 멸망하고도 남았을 거다.

마수란 존재의 강함은 마계 종족의 평균을 가볍게 넘어섰을 뿐만 아니라 그 수 역시도 모든 종족의 수를 합친 것의 몇 배를 가볍게 넘어설 정도였으니까.

그런 마수에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마수들이 뭉치지 못한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웨이브가 일정 기간마다 발생하긴 했지만, 그 짧은 시기가 지나면 뭉쳐 있던 마수들은 서로를 잡아먹으며 알아서 사라져갔다.

그런데 지금 그랬던 마수들이 협력하여 하나를 공격하고 있었다.

아니, 마수들만의 협동이 아닌 다른 자들과도 협동하는 모습은 절대 이해할 수도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 때문일까?

대공의 머릿속에 희망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이대로라면 단장의 야욕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하지만, 그것은 대공의 생각일 뿐이었다.

단장을 향해 무한히 솟구치는 파멸의 결정들은 금방이라도 단장을 찢어발길 것처럼 보였지만, 대공의 시야에서조차 사라질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단장은 지금까지 한차례의 공격도 허용하고 있지 않았다.

아니, 단장에게 근접하는 순간 그가 뿜어낸 검붉은 기운에 그대로 사라질 뿐이었다.

가끔 단장의 허를 찌르며 날아드는 소름 끼치도록 강력한 공격조차도 그의 방어를 뚫지 못한 채 허무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단장의 전투를 지켜보던 대공.

그는 결국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단장의 입가에 어린 미소처럼 그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없다는 사실을.

-내가 해결해야 해.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까.

무언가를 결심한 대공.

그는 곧 자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 * *

놀고 있다고?

단장은 전투가 벌어진 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있었다.

마치 조카의 재롱을 기쁘게 바라보는 삼촌의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을 지우기 위해 달려드는 모두를 농락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좀 다를 거다.

내가 나서지 않았으니까.

‘지안아 큰 거 한방 부탁해.’

‘네?’

‘기회를 만들어 줄게.’

‘가능하시겠어요?’

‘당연히 가능하지.’

‘네!’

내가 나서지 않았던 이유.

그것은 놈이 사용하는 힘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언뜻 보기엔 단장이 사념의 에너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놈은 사념의 에너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저 몸속에 담아둔 사념의 에너지를 뿜어내 강력한 파괴력을 얻을 뿐이었다.

지배력이 거의 느껴지지 않아.

자신의 의지로 통제하는 것이 아닌 몸 밖으로 파멸의 의지를 담은 사념을 배출함으로써 그 힘을 사용하는 방식.

물론 그것만으로도 대단히 위험하다는 사실은 틀림없었지만, 사념을 지배할 수 있는 나에게는 아니었다.

놈이 뿜어낸 사념을 단숨에 지배해 버린다면 비록 찰나일 뿐이지만, 놈의 방어에 균열이 발생하리라.

‘준비되면 말해.’

‘잠시만요.’

지안의 답을 기다리며 나는 녀석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지배의 영역을 넓혀가기 시작했고, 마침내 녀석을 지배의 영역 안에 둘 수 있었다.

그리고.

‘끝났어요.’

‘쏴!’

내 지시와 동시에 저 멀리 지안이 있던 장소에서 마력의 파동이 느껴졌고, 그와 동시에 단장은 그것을 느끼고 이전처럼 강력한 사념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여전히 미소는 풀지 않는 모습의 단장을 보며 나는 지배의 영역에 의지를 퍼뜨려 놈을 감싸기 시작했다.

-어?

자신이 뿜어낸 에너지가 순식간에 흩어져 버리자 당황을 표출하는 녀석을 향해 찬란하게 빛나는 은빛의 선이 그어졌다.

콰앙-

처음으로 폭발음이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놈은 기어코 지안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물론 작은 피해는 입었겠지만, 지안의 일격을 대부분 소멸시킨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폭발음의 크기와 진동의 세기만 봐도 지안의 공격이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노린 것은 지금 이 순간이었다.

놈이 조금이라도 충격을 받는 이 순간을 노린 것이었다.

지안의 일격으로 인해 놈이 작게나마 충격을 받는 순간 흩어졌던 사념이 내 의지에 따라 놈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파괴의 의지를 담은 사념이!

‘하임! 미호! 왕눈아!’

폭발이 일어나기 직전.

놈을 감싸는 하임의 벽이 솟구쳐 올랐고, 그것을 미호의 결계가 덮어버렸으며 마지막으로 왕눈이가 공간 자체를 찍어 눌렀다.

파괴력이 조금도 세어나가지 못하도록.

콰과과과광-

하임과 미호, 왕눈이가 전력을 다해 만든 방호를 순식간에 날려버리는 엄청난 폭발력에 모두가 휘청거렸다.

-말도 안 돼!

-이럴 수가!

하지만.

드러난 놈의 모습은 멀쩡했다.

여기저기 그을림이 있을 뿐 신체가 날아가지도 피를 흘리지도 않는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

-이번 공격은 꽤 아팠어. 킥킥킥.

-괴물!

-정녕 바하무트의 재림이란 말인가?

모두가 놀라는 모습을 보였지만, 나는 예상하고 있었다.

놈이 멀쩡할 것이라는 사실을.

지금의 시도는 실험일 뿐이었으니까.

그래도 피는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건만.

-그나저나 조금 전 그건 뭐지? 내 힘을 빼앗아가는 듯했는데?

-닥쳐라!

조금 전 상황을 떠올리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단장을 향해 크림슨이 일갈하며 다시 전투가 시작되었다.

다만, 이번에는 공격 방법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신기를 착용한 수왕이 선두에서 놈을 막아섰고, 그 뒤를 미르카엘과 크림슨, 라구스, 루시안, 코넬리아가 받쳤는데.

본래 놈을 상대하던 현지는 그대로 모습을 감추며 기회를 노리는 방식을 택했다.

그나저나 저놈.

우리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야?

방금 그 공격을 보고도 놈은 이쪽을 향해 제대로 된 공격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손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자신의 강함을 뽐내고 있을 뿐인 녀석.

놈의 태도는 우리에게 기회를 주겠지만,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미호야. 나를 하이엘프와 지안이가 있는 곳으로 좀 데려다줘.’

‘끼웅!’

눈앞에 열리는 공간의 문을 보며 살짝 긴장한 채 놈의 눈치를 살폈지만, 놈은 이쪽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하긴. 저리 강한데 신경이나 쓰겠어.

물론 그 방심의 대가는 절대 작지 않겠지만.

-둘 다 내려와!

공간의 문을 통과한 나는 하이엘프와 지안을 보며 소리쳤다.

-무, 무슨 일이세요?

-왜요?

실험은 이제 끝났다.

놈의 힘을 정확히 파악한 것은 아니었지만, 놈의 정신을 찰나라도 잃게 만들 수 있다면 놈을 처리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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