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1화 (1/279)

0. 탄생 (1)

The scariest part of being alone

is to begin to learn

why gods died except for one.

홀로 남는 일의 가장 끔찍한 점은

깨닫기 시작하는 것이다.

왜 하나를 제외한 신이 모두 죽었는지.

*

*

*

자정.

무성하게 우거진 수림이 하얗게 부서지는 달빛 아래로 고요히 그림자를 드리울 무렵. 수해(樹海)의 틈새로, 자그맣게 굽이치는 황톳길을 따라, 한 대의 마차가 달린다. 유령처럼.

마차는 특이했다. 보충하자면, 마차를 끌고 있는 것이 특이했다. 발 대신 흐릿하게 불타는 연청색 불꽃을 매달고 내달리는 갈기 하얀 말. 유령마가 마치 짐말처럼 양순하게 마차를 끌고 있었던 것이다.

유령마는 고위의 마법사만이 부릴 수 있는 말이다. 마차에 타고 있는 사람이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희끄무레한 말이 어둠을 달리지만, 숲은 여전히 적막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발굽이 없는 유령마가 흙바닥 대신 어둠을 밟고 달리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유령마가 투레질을 할 때 마다 서늘한 입김이 물안개처럼 푸르게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입김이 감싸듯 비추는 객실. 그 마차의 객실 안에서는 때 아닌 카드놀이가 한창이었다.

"됐다! 해냈다! 내 숫자가 제일 높아!"

붉은 머리카락의 여자아이가 펄쩍 뛰며 좋아한다. 유난히 큰 송곳니가 튀어나온, 꾀죄죄한 행색의 아이였다. 함께 카드놀이를 하고 있던 사람들도 모두 행색이 초라한 아이들이었다. 발에는 족쇄를 차고 있다. 예속의 증거. 모두 누군가의 노예인 모양이었다.

아이 네 명은 각자 숫자와 그림이 적힌 카드 한 장씩을 들고 앉아 있었다. 그중 여자아이의 숫자가 가장 높았다.

"그럼, 다음 제물은...아."

기뻐하던 여자아이가 사방을 둘러보곤 안색을 굳혔다. 가장 낮은 숫자가 적힌 카드를 뽑은 사람. 그건 희고 긴 머리의 아이였다. 목젖이 살짝 부풀어있는 것을 놓친다면 여자아이로 착각해버릴 정도로 곱상한 생김의 아이. 누더기와 먼지로 덮여 더러운 와중에도 미색이 수려하다.

그 심홍색 눈동자는, 지금 멍하니 카드를 바라보고 있다.

해골로 저글링을 하는 광대가 그려진 카드.

0번. 바보의 아르카나. 이들이 들고 있는 카드가 타로 카드라는 뜻이었다. 그 카드의 윗단에는 0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다. 모든 숫자 중 가장 낮을 수밖에 없는 숫자였다.

0부터 21까지의 숫자가 적힌 카드. 이들이 이 카드를 가지고 이런 놀이를 하고 있는 이유는 여흥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들의 주인이 이들에게 이 카드게임으로 순번을 정하라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스물두 명이 이 게임을 했다.

이 마차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중 열여덟이 죽었다. 이 게임을 해서 낮은 숫자를 뽑은 순서대로였다. 네 명이 남자, 앞 칸의 주인은 또 한 번 순서를 정할 것을 명령했다. 지금 각자의 손에 쥐어진 카드는 그 결과였다.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바보를 뽑은 아이보다 높은 숫자를 뽑은 아이들은 모두 안색을 굳히고 외면했다. 침묵을 깬 것은 마차 바깥에서 터져나온 울음소리였다. 유령마의 울음.

"히이이이이이잉!"

마차는 덜컹거리며 급히 멈췄다. 유령마는 상체를 일으켜 급히 마차를 세웠다. 무언가가 앞을 막고 있다. 드리우는 거대한 그림자.

"ㅡㅡㅡㅡㅡㅡ!!!"

곤봉을 든 머리 두 개 달린 거인이었다. 그 뒤는 어딘가에서 뽑아 온 커다란 바위로 막혀 있다. 마차가 다가오기를 한참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거인은 괴성을 내지르며, 바위를 깎아 만든 곤봉을 휘둘렀다. 유령마 두 마리는 급히 몸을 돌려 곤봉을 피하려 했다.

우지끈!

곤봉이 유령마와 객실을 잇는 마구를 후려치고, 중심을 잃은 객실은 옆으로 전복되고 말았다. 황톳길 위로 커다란 흙먼지가 일어나며 카드를 쥐고 있던 아이들도 엉망진창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객실 한가운데 놓인 수정구도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났다. 그 혼란의 중간에서, 섬뜩한 악의가 빛난다. 가장 높은 숫자의 카드를 쥐고 있던 여자아이의 손을 우악스레 비트는 손. 사내아이의 손.

"내놔!"

1번. 마술사의 카드를 쥐고 있던 사내아이였다. 가장 낮은 숫자는 피했지만 흰 머리 아이의 바로 다음 순번으로 제물이 될 아이였다. 그는 혼란을 틈타 가장 높은 숫자를 쥔 여자아이의 카드를 빼앗고, 자신의 카드를 들려주는 데 성공했다.

"읍...읍!!"

붉은 머리의 여자아이는 저항했지만 남자아이를 이길 수는 없었다. 배를 걷어차인 여자아이는 괴로워하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동시에, 문이 열리며, 네 명의 아이들은 쏟아지듯 마차 밖으로 튕겨 나왔다.

앞 객실의 문이 열린 것은 그와 동시였다.

"오, 습격, 드디어 제대로 된 습격인가. 고대했다."

두터운 쥐색의 로브로 온 몸을 감싸고 있는 남자였다. 소맷단에는 금사(金絲)로 수놓은 화려한 문양이 있다. 그것이 이 남자가 높은 신분이었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편집증적인 인상. 비쩍 말라 광대가 튀어나온 그 남자의 턱에는, 수염이 세모꼴로 길게 자라 있었다.

"ㅡㅡㅡㅡㅡ!!!"

거인이 다시 한 번 곤봉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마구에서 풀려난 유령마들이 허공을 뛰쳐올라 거인에게 달려들었다. 불의의 습격을 받은 거인은 팔을 허우적거리며, 머리로 자신을 들이받는 유령마와 싸우기 시작했다.

"아이, 아이들아, 내게로 오너라!"

남자가 소리치자, 여자아이에게서 카드를 빼앗은 남자아이부터 득달같이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주인님, 저, 저에요! 제일 높은 건 저라구요! 그리고 8호! 8호가 가장 낮은 숫자에요!"

"흐음, 흐으으으음."

남자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아이들이 들고 있는 카드를, 그리고 깨져 흩어진 수정구를 흘깃 바라보았다. 그리고 빼앗은 카드를 들고 의기양양해 있는 남자아이의 머리를 짚었다.

"ㅡㅡㅡㅡ!!"

거인의 거대한 곤봉이 유령마를 후려쳤다. 원래대로라면 물리적 실체가 희미한 유령마에게는 아무런 피해도 가지 않아야 마땅했다. 하지만 곤봉을 얻어맞은 유령마 한 마리는,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더니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져버렸다. 곤봉에 어떠한 마술적 처리가 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거인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유령마의 포위를 뚫고 달려들었다. 남자에게.

"안타깝게 됐구나."

"예? 흐으아아아악!"

남자는 카드를 든 아이의 머리에 손을 짚더니 무언가를 읊조렸다. 그러자 남자의 손바닥에서부터 기다란 등뼈 같은 무언가가 튀어나오더니, 아이를 먹어치웠다. 남자는 음산하게 뇌까렸다.

"아드마가랄리의 굉혈포."

그 직후, 잡아먹힌 아이의 피가 둥근 마법진을 만들어내더니 거기서부터 시뻘건 섬광이 터져 나왔다. 붉은 빛의 기둥 같은 모습이었다. 그 빛의 기둥은 거인의 몸뚱이를 크게 관통했다.

"ㅡㅡㅡㅡㅡ!!!"

거인은 단말마를 내지르고, 곤봉을 손에서 놓으며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굉혈포, 굉혈포는 위력도 강하고 기동식도 짧아서 좋긴 한데 말이야, 요구하는 희생이 너무 크단 말씀이야. 한 번 쏘는 데 목숨 하나라니. 선조도 참 인명을 경시하셨어."

툴툴대며 움직이는 남자. 그가 제일 먼저 향한 곳은 쓰러진 거인의 시체였다. 살덩이를 밟고 올라가 곤봉을 향해 다가간다. 명백히, 마법적인 축성이 되어 있는 그 곤봉으로. 그 곤봉에 마법을 부여한 자가, 이 커다란 암살자를 파견한 세력일 터이다.

"그래, 이 6위계의 대마도사 나하트를 죽이러 온 건방진 암살자가 어디 출신인가 볼까. 카나기? 두냐? 사소필렌?"

그의 이름은 나하트였다. 굉혈포가 뚫고 지나가며 그 여파로 혈관을 전부 부숴놓은 걸까. 나하트가 밟는 거인의 살점마다 피가 터져나오며, 그 발자국을 붉게 물들였다. 나하트는 빙긋빙긋 광인의 웃음을 지으며 혼잣말을 계속했다.

"아탕칼리? 가미온? 아니면... 라달라리아?"

그리고는 혼자 웃는다. 그럴 리가 없지. 나도 참 농담을 잘해. 아무도 듣는 사람도 없고 이해하는 사람도 없는데도. 비쩍 마른 웃음을 토해내는 나하트. 남겨진 세 명의 아이는 두려운 눈으로 그런 나하트를 쳐다보고 있었다.

곤봉에 다가간 나하트는 곤봉 위를 세차게 문질렀다. 그러자 곤봉에 덮인 먼지가 부스스 떠오르더니, 하나의 문양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마치 벌집이라도 되는 양, 독벌을 가득 품고 있는 두개골의 문양. 나하트의 로브의 소맷단에 새겨진 문양과 똑같은 문양이었다.

"아지프, 나의 빌어먹을 고향이여. 드디어 추적을 시작했구나."

나하트 칼벨레인.

그는 제국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일곱 마법의 학파 중, '희생의 학파' 아지프의 대마도사였다. 지금은 아니다. 공식으로 파문령이 내려졌으며 그를 죽이기 위한 암살자가 이렇게 파견되었다. 그는 쫓기는 몸이었다.

"그럼 더 빨리 달아나 주는 것이 도리겠지. 아, 그런데, 말 한 마리가 죽어버렸군."

유령마를 부르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제물이 필요했다. 이제 어떤 놈을 바쳐야 할까. 그의 흐리멍덩한 눈동자가 아이들을 향했다. 두 번째로 높은 숫자를 쥐었던 아이, 더벅머리의 아이가 흠칫 떤다. 손에는 12번, 매달린 남자. 형사자의 카드를 취고 있다. 나하트는 미끄러지듯 천천히 그 아이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 네가 몇 번 실험체더라... 141호던가? 맞지?"

"예! 맞습니다!"

부들부들 떨면서도 우렁차게 대답하는 141호 실험체. 나하트는 기억도 잘 못 하지만 141호는 달랐다. 그는 자신이 나하트에게 총애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몇 번인가 나하트가 그를 정식 제자로 삼을 것이라는 언질을 던진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아지프를 섬기기 위한 준비를 시킨 적도 있었다. 지금은 전부 허사가 되었지만.

나하트는 수염 한 가닥을 잡아당기며, 굉혈포를 쏘기 위해 희생된 아이가 마지막으로 건네준 카드를 바라보았다. 21번. 세계의 아르카나. 윗판과 아랫판이 천국과 지옥으로 장식된 모래시계, 그 속에 갇힌 세계가 그려져 있다. 악마가 뿔로 받치고 있는 모래시계의 밑단에 적혀 있는 것은 그 세계의 이름 세 글자. 센디엘.

마귀가 들끓는 지저의 나락으로 가라앉기엔 너무 가벼운, 허나 승천하여 하늘에서 신들과 잔을 나누기엔 너무 무거운. 이도 저도 아닌, 시계 속의 모래알처럼 값 없는 것들의 땅, 센디엘.

센디엘에서, 인간은 신을 섬김으로써 그 권능을 받고 기적을 빌려 살아왔다.

자연의 신을 따르는 이들은 새와 들풀과 교감을 나누는 힘을 받고, 바다의 신을 따르는 이들은 물속에서 자유로이 숨쉬는 힘을 받는 식이었다. 먼 옛날, 센디엘에는 그런 수천의 신앙이 대륙 곳곳에 가득하여 하나의 만신전을 방불케 했다. 하지만 지금은 오직 일곱의 신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그 신도들에게 '마법'이라는 기적을 선사하는 일곱 위의 신.

카나기, 두냐, 사소필렌, 아탕칼리, 가미온, 라달라리아, 그리고 아지프.

그 공통점으로 뭉친 그 신들은 센디엘에서 다른 모든 신을 몰아내고 천 년을 이어지는 제국을 세웠다. 세속적인 책임을 떠넘기기 위한 도구로 허수아비 황제를 세우고, 일곱 신의 신도는 각자 교리에 따라 마법의 학파를 이루어 세력을 쌓곤 제국의 실권을 독차지했다.

'희생의 학파' 아지프.

나하트가 몸담은 학파는 그중 가장 번성한 세력을 가진 학파였다. 기적을 일으키는 대가로 제물과 희생을 요구하는 마법을 연구하는 학파. 이들은 살아 숨쉬는 무언가를 희생시키는 대신 지옥의 괴물들을 불러내고, 거대한 파괴를 일으키고, 망자의 뼈를 병사로 되살아나게 하는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나하트는 그 아지프의 학통을 연구해 6위계에 도달하였고, 거의 7위계에 근접함으로써, 아지프에서도 최상위의 성취와 지위를 이루었던 대마도사였다.

그가 아지프의 마탑에서 연구에 심취해 있던 시절, 그는 그 닫힌 마탑에서는 작은 왕이나 다름없었다. 실험을 돕는 조수가 숫염소의 두개골을 천공하던 중 시약을 흘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염소 대신 조수의 두개골이 뚫리도록 만들어버리기도 했고, 새벽마다 마시던 커피를 잘 탔다는 이유 하나로 미천한 잡종 하인을 아지프의 정식 신도로 승격시켜주기도 했다.

여기까지 나하트에게 끌려온 141호. 그는 나하트의 잠옷과 잠자리를 준비하는 일을 하면서 그 모든 것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아직 열두어 살밖에 되지 않은 141호에게 나하트의 권위는 그렇기에 절대적인 것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너는 내가 왜 너희들에게 이걸로 순번을 정하라고 한 건지 이해하겠느냐?"

"아니오,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나의 탑을 떠나오기 전, 불길한 점을 하나 쳤기 때문이지."

나하트에게 내려진 파문령. 그 파문령의 사유는 배교였다. 그는 아지프를 버리고 다른 신으로 신앙을 옮기려 했다. 그것을 준비하던 중 때마침 정치적 이유로 아지프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던 감시자에게 꼬리를 밟히고 말았고, 급히 제물로 쓸 실험체들만을 데리고 탑을 나섰다. 파문의 이유가 배교인 이상, 정식으로 아지프에 적을 둔 제자들은 그를 따라나서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있던 아지프의 마탑 지하에는 미래를 점칠 수 있는 샘이 있었다. 탑에서 떠나오기 직전, 그는 마지막으로 그 샘에서 미래를 점쳤다. 그리고 샘을 독으로 오염시켜 망가뜨렸다. 혹여나 추적자가 이용하지 못하도록.

"그건 내게 이렇게 고하더구나. 너희들 중 한 명이, 내 목을 칠 것이라고 말이야."

누런 손톱이 흉하게 자란 검지로, 141호의 아랫턱을 긁는 나하트. 바짝 긴장한 141호는, 차렷 자세를 취한 뒤 소리쳤다.

"그럴 리 없습니다!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글쎄, 아무리 네가 부정한다 해도 말이지. 그건 이미 정해진 미래를 잘라내 내게 보여준 거란 말이지. 웬만해선 바뀌지 않아. 나 대마도사 나하트와 관련된 미래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배교를 눈치챈 아지프께서 내리는 징벌에 가까운 예언이야. 그래서 나는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너희 22명을 다 죽여버리기로 결정했어. 알겠나?"

"알겠습니다!"

나하트의 끔찍한 말에도 기립을 풀지 않는 141호. 나하트는 만족스럽다는 듯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신께서 예지한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는 미약하지만 이 쪽도 미래를 예지해 저항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지. 그래서 나는 너희에게 그 카드를 나누어 주어 남은 수명을 점치게 만들었다. 숫자가 빠른 놈일수록 남은 명이 긴 놈들이었어. 남은 명이 긴 놈일수록, 내 목을 치고 빠져나와 살아갈 확률이 높지 않겠나, 그렇지?"

"그렇습니다!"

"그래서 남은 명이 긴 순서대로 전부 죽였단 말씀이야. 그런데..."

나하트는 무언가를 꺼내 보여주었다. 21번, 세계가 그려진 카드. 아까 남자아이가 여자아이의 손에서 카드를 빼앗으면서 상한 모양인지, 카드가 반으로 접혀 구부러져 있었다.

"내가 그 순서대로 너희를 죽여버렸기 때문에, 운명이 뒤집혔단 말이야. 오히려 뒤의 카드를 뽑은 놈일수록 명이 길어져 버렸어. 점괘가 틀려서 마술이 깨져버렸단 말이지. 그래서 다시 점쳤더니, 이번엔 이렇게 망가진 카드가 내 손에 들어왔지 뭔가. 이건 무슨 뜻인가? 혹시 알고 있느냐?"

"아니오, 모릅니다!"

"세계, 세계의 카드가 이렇게 망가졌다는 건, 역위치, 역위치란 말이야. 세계가 혼돈에 빠져서, 뜻하는 모든 게 어지러워졌다는 거야. 아르카나가 전부 반전되었다는 뜻이지. 그래, 예를 들어 네 카드를 볼까."

나하트는 흥분했을 때 핵심이 되는 단어를 더듬는 버릇이 있었다. 그는 141호의 손에 들린, 형사자의 카드. 교수형을 당해 죽은 남자가 그려진 카드를 톡톡 건드렸다.

"이 목매달려 죽은 남자의 카드는, 정위치일 때에는 그 주인이 큰 뜻에 대한 헌신으로 희생하는 운명임을 가르쳐주지만, 역위치일 때에는 맹목적인 신봉 끝에 개죽음을 당한다는 걸 뜻한단 말이지."

장난스레 자신의 목을 두 손으로 붙잡고 목을 졸리는 시늉을 하는 나하트. 141호는 그제서야 나하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깨닫고, 얼굴이 파랗게 질려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서, 설마, 선생님..."

"누가 네 선생이냐."

"주,주인님..."

"이해해라. 신의 예언은 절대적이다. 그에 저항하는 미력한 인간이 사사로운 정리를 따라서야 되겠느냐. 아르카나가 뒤집힌 이상, 지금 이 세 명 중 가장 수명이 긴 놈은 너겠지. 그럼 너부터 죽여야 내가 살 수 있지 않겠느냐."

"안 돼! 안 됩니다! 실은...!"

나하트의 손에 목을 붙잡혀 허공에 떠오르면서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며 여자아이를 가리키려 하는 141호. 아무래도 마차에서 있었던 카드 바꿔치기를 말하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하트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걸 무시하고, 손에 힘을 줄 뿐이었다.

"먹어치워라."

"끄아아아아아악!!!"

다시 한 번 나하트의 손에서 창백한 등뼈가 튀어나오고, 141호를 잔혹하게 먹어치웠다. 141호를 깔끔하게 먹어치운 등뼈는 원기둥 모양으로 변형됐다. 환골탑(換骨塔). 아지프의 마술에서 무언가를 소환할때 마다 나타나는 탑이었다. 잠시 후, 환골탑이 알처럼 조각조각 부서져 흩어지고, 그 안에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유령마였다.

"오, 그래, 어디 너희 둘의 카드도 한 번 보자꾸나."

남은 아이는 둘이었다.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 여자아이. 그와 대조적으로 멍한 눈을 한 흰 머리의 아이. 나하트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17호와 8호인가. 둘 다 걸작이지. 얄궂게도 걸작들만 살아남았군.'

17호, 붉은 머리 여자아이의 카드를 확인하는 나하트. 거기에는 문을 열어젖히는 중인 듯싶게도, 닫는 듯싶게도 보이는 마술사가 그려져 있었다.

"마술사, 마술사의 카드인가. 정위치에서는 창조와 창의를 뜻하지만, 역위치에서는 기만과 속임수를 뜻하는데. 흐으음. 너, 나한테 뭔가 속이는 게 있느냐?"

"아,어,어,어어없습니다!"

"속이는 게 있군. 다음에는 너를 죽여주마."

나하트는 머리를 툭툭 짚는다. 17호는 그 충격을 못 이겨 다리에 힘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자기가 불러일으킨 공포에 흡족한 미소를 짓고, 8호에게 다가서는 나하트. 무릎을 짚고 몸을 숙여 그 손에 들린 카드를 바라보았다.

"바보. 그래, 너에게 딱 맞는 카드로군. 역위치에서는, 자신의 의지가 없는 백치. 멍청이, 속아 넘어가는 자를 뜻하지."

반응이 없는 8호. 나하트는 8호의 뺨을 쓰다듬으며 그 눈을 바라보았다. 8호는 그가 특별히 아끼던 걸작 실험체였다. 그의 실험실에 있던 실험체 중, 가장 번호가 앞쪽인 실험체기도 했다. 1번부터 7번까지의 실험체는 전부 죽었다. 가혹한 실험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8호는 데몬스폰의 피를 인간과 섞어 만든 융합체였다. 만 명에 가까운 인간의 생명을 들이부은 끝에 우연과 행운이 겹쳐 만들어진 녀석. 특이한 실험체이니만큼, 온갖 특이한 실험이 8호에게 가해졌다.

불사의 저주를 걸고 배를 갈라 내순환계를 살펴보기도 하고, 인면창을 두뇌에 접붙여 뇌를 복제해보기도 하고, 피부를 전부 잡아뜯어 혈관의 작동을 살펴보기도 했다. 이런 실험을 반복해서 겪은 끝에 금색이던 머리는 새하얗게 변색되어 버렸고, 마음이 죽었다. 이렇게 무슨 짓을 해도 반응하지 않는 바보 같은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그럼 우리의 여행도 슬슬 끝에 다다른 모양이다. 따라오너라."

유령마를 시켜 쓰러진 마차를 일으키고 객실에 8호와 17호를 집어넣는 나하트. 그가 앞 칸에 들어서려 할 때였다. 청아한, 그러나 조용한 음성이 나하트의 귀를 때렸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8호의 음성이었다. 나하트는 홱 고개를 돌렸다.

"무어냐. 물어보아라."

"그럼, 이 카드의 원래 뜻은 뭔가요."

눈썹을 꿈틀거리는 나하트. 원래 성미였다면, 8호는 심한 체벌을 받아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평생을 섬겨온 아지프를 버릴 정도로 바라마지않던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기 때문에, 나하트는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이 정도는 대답해줘도 괜찮겠지.

"갓 태어난 아이는 바보일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정위치에서의 바보는..."

"탄생. 모든 것의 시작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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