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탄생 (2)
*
어둑새벽.
그들은 늪에 도착했다.
아스라한 라벤더빛 하늘은 미명에 녹아 느릿하게 개여가고, 싯누런 갈대와 버들만이 고개 숙여 감싼 검은 늪. 그 차가운 수면이 8호와 17호의 얼굴을 반사하고 있었다. 17호의 하얗게 질린 얼굴, 8호의 무표정한 얼굴.
"커다란 거문비나무로부터 9걸음 뒤에 있는 못... 여기군. 이젠 못이라기보단 늪이 되어버렸구만."
군데군데 까맣게 벌레가 먹은 양피지를 쥐고 중얼거리는 나하트. 수백 년, 어쩌면 천 년을 넘었을까.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그 양피지는 나하트가 배교를 결심하게 만든 물건이었다.
그것은 잊혀진 신의 신전으로 향하는 지도였다.
나하트는 이제 나무둥치만 새까맣게 남은 거문비나무를 만지작거렸다. 여러 번의 수해를 겪으며, 뿌리가 드러나 말라 죽어버린 걸까. 거대한 옹이와 뿌리만이 이것이 한때 거목이었음을 알게 해 준다. 그 뿌리에는 하얗고 작은 버섯들이 잔뜩 자라나 덮고 있다. 수의처럼.
나하트는 마지막으로 확인을 마치고 늪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두 아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둘을 걷어차 물 속에 처넣었다.
"먼저 들어가서 확인해보거라."
"예? 꺄악!"
첨벙!
두 아이를 집어삼키고 이내 잔잔해지는 수면. 타르처럼 시꺼먼 수면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나하트의 얼굴을 비출 뿐이었다.
17호는 눈을 꼭 감고 팔을 허우적거렸다. 잠시 후 조심스레 눈을 뜬다.
"뭐야?"
그녀는 차가운 돌바닥 위에 넘어져 있었다. 일부러 반듯하게 깎아낸 흔적이 보이는 네모난 포석들. 그 앞에는 입을 쩍 벌리고 선 아치문이 있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자, 일렁이는 수면이 보인다. 환영이었다. 아무래도 이 늪은 이 장소를 숨기기 위해 마련된 위장 같았다.
"이렇게 감쪽같은 환영이라고?"
17호는 원래 인간과 흡혈귀의 잡종이었다. 그 사실을 들켜 부모는 모두 심장에 은말뚝을 박혀 죽었고, 본인은 추적을 피해 방랑하며 좀도둑질로 연명하다 붙잡혔다. 그리고 아지프의 마탑에 실험체로 팔려왔다. 그녀를 소재로 이루어졌던 실험은 이미 잊혀진 신이 남기고 간 주문을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그 실험을 행하기 위해서 그녀는 약간이지만 마술의 소양을 교육받았다.
"이런 걸 천 년 넘게 유지시킬 수 있다는 거야?"
그래서 그녀는 이게 얼마나 믿겨지지 않는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좁은 늪, 하지만 자신이 서 있는 공간은 아무리 봐도 광활했다. 늪보다도 훨씬. 두 개의 공간을 억지로 접붙여서 이어놓은 듯한 신비함이었다. 이런 대단한 마술을 그렇게 긴 시간동안 유지되게 만드는 것. 그건 나하트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잠시 후 또 한 사람이 물 속의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하트였다. 바깥에서 상황을 살펴보다, 자신이 짐작한 바가 맞는 듯싶자 뛰어든 것이다.
"드디어, 드디어 도착했구나!"
한껏 당황한 17호와는 대조적으로 이 공간에 도착하자마자 크게 웃어젖히는 나하트. 툭 튀어나온 광대 아래로 음영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 그 인상을 더욱 어둡게 만든다.
"나, 이 위대한 나하트를, 7위계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마도사로 만들어 줄, 아나테마의 신전에!"
아나테마(Anathema).
모두에게 거부당하는 자.
증오받는 자라는 뜻의 고어(古語).
센디엘에서 그 말은 잊혀진 신의 대제사장을 뜻하는 단어였다.
센디엘의 신들은 언제 사라지는가? 그 신을 신앙하는 모든 신도가 죽어 그 믿음이 잊혀졌을 때 사라진다. 제국을 세운 일곱 위의 신들은 그들을 제외한 모든 신들의 신도를 박멸하고, 성상과 신전과 제단을 모두 파괴함으로써 그들 외의 신을 모두 잊혀지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신은 언제 부활하는가? 그 제단에 부복하고, 그 잊혀진 이름을 호명하며 섬기겠노라고 서원하는 자가 나타날 때 부활한다.
아주 가끔씩 이렇게 박해를 피해서 숨겨진 잊혀진 신의 신전이 발견될 때가 있다. 그 신전에서 잊혀진 신에게 은총을 받는 필멸자는, 그 신이 내려주는 권능을 독점하는 대제사장. 신의 사도가 되어 엄청난 기적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그 자를 세상은 아나테마라고 불렀다.
아나테마는 모두가 총력을 기울여 제거해야만 하는 제국의 공적으로 여겨졌다.
대부분의 잊혀진 신들은 박해당하고 사냥당한 끝에 천 년이나 유폐 당했다. 그리고 그 유폐 속에서 회한과 복수의 다짐을 곱씹어 굉장히 난폭하고 공격적으로 변해 있었다. 물론 그 사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국에 나타난 아나테마들은 하나같이 역사에 길이 남을 재앙과 횡액을 일으킨 후에야 제압되었고, 이를 경험한 제국은 아나테마에게 척살령을 내리는 것은 물론, 아나테마가 되려고 시도하는 것조차도 사형에 준하는 중죄로 다스렸다.
"자, 들어가자."
나하트는 아나테마가 되려 하고 있었다.
나하트는 8호와 17호의 목줄을 잡아끌며 아치문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입은 황홀함으로 죽 찢어진 채였다.
몇 년 전, 나하트의 손에 의문스런 지도가 하나 들어왔다. 다른 이들은 그게 지도라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그 외의 어떤 이도 해석하지 못했지만, 평소부터 금지된 지식을 탐닉하듯 즐겨온 나하트만은 알아볼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것이 잊혀진 신의 신전 위치를 기록한 지도라는 걸 해독한 순간, 나하트의 뇌리에는 하나의 계획이 자리잡았다.
아지프를 버리고, 이 잊혀진 신의 사도가 되고자 하는 계획이.
그는 6위계의 벽에 부딪혀 있었다. 25년 전 불혹의 나이에 6위계에 도달한 이후로, 무려 오십 년의 절반 동안이나 성취의 진전을 얻지 못했다.
'아아, 아지프, 나의 아지프, 나의 등뼈를 보살피시는 아지프시여, 당신이 허락한 내 한계는 여기까지란 말입니까?'
그를 7위계로 만들어 자신 파벌의 대표로 만들려던 사람들의 전폭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6위계의 벽에 부딪혔을 때. 그는 고개를 쳐박고 일생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의 손에 신전의 지도가 들어온 것은 그 때였다.
지도를 전부 해석한 그는 고개를 쳐들며 비쩍 마른 웃음을 지었다.
'당신은 나에게, 나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희생하라고 가르치셨지요. 그럼, 이번에 희생될 것은 당신인 모양입니다.'
그는 아나테마가 되어 그 힘의 근원을 탈취함으로서 7위계에 도달할 생각이었다.
"흠, 원래부터 있던 천연 동굴을 깎아 신전처럼 꾸민 건가. 하긴, 고대의 건축 수준으로 이 정도의 신전을 바닥부터 짓는 건 힘들었겠지."
신전 속을 걸어 들어가며 벽의 기둥을 매만지는 나하트. 자세히 보면 그것은 홈을 파고 주두(柱頭)를 장식해 기둥처럼 꾸며놓았을 뿐 기둥이 아니었다. 그저 돌을 깎아 기둥처럼 보이게 만든 것 뿐이었다. 그 가짜 기둥과 가짜 아치를 지나자 거대한 통로가 나타났다.
"자, 너희들이 앞장서거라."
혹시라도 함정이 있을까 두려워 8호와 17호를 앞세우는 나하트. 17호는 8호의 팔을 붙잡고, 벌벌 떨며 발걸음을 옮긴다. 나하트는 그동안 이 특이한 건축양식을 살펴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래서, 이게 대체 누구의 신전일까.'
이 신전이 정확히 무엇의 신전인지 모른다는 것. 지도를 한참 전에 입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준비에 시간이 걸린 이유는 그것이었다. 고문헌학, 서지학, 훈고학 등등. 가능한 한 모든 지식을 동원해 지도의 내용을 추리해보았지만, 범위를 좁힐 수 있을 뿐 정확한 실체는 알아낼 수 없었다.
'1024년 전, 이 일대에서 자신들만의 연합 세력을 가지고 있던 세 위의 신이 갑자기 소멸한 일이 있었지.'
나하트는 그 때문에 이 신전에 잠들어 있는 것이 그 세 신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단죄의 키벨레, 질투의 멜렉, 금기의 에단.
'그리고 그 세 신앙 모두, 마법의 은총을 내리는 신들이었고.'
그것이 나하트가 배교를 결심하게 만든 또 다른 주요 원인이기도 했다. 체계나 교리가 어찌 되었든, 셋 모두가 신도에게 마법의 축복을 내리는 신이라는 것. 그 은총을 독점하면 억지로라도 7위계의 벽을 뚫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잠깐! 멈춰라."
어느새 회랑의 끝에 다다른 세 사람. 나하트는 손을 튕겨 빛을 일으켰다. 나하트의 손에서 뼛가루처럼 하얀 빛이 터져나오고, 벽면을 비춘다. 거기에는 벽감(壁龕,alcove, 조각상 따위를 세워놓기 위해 벽을 우묵하게 파 놓은 공간)이 있었다.
"이건 뭐지?"
벽감에는 하나의 동상이 서 있었다. 얼굴 없는 동상이. 흘러내리는 듯한 주름 많은 옷을 입고 있는 그 동상의 양손에는, 생간이 올려져 있는 저울과 단검이 들려 있었다.
"저울...간...단검... 이건 키벨레의 동상인가?"
사전에 그 세 신에 관한 모든 것을 조사해놓았던 나하트는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단죄의 키벨레. 그들의 신화에서 키벨레는 자신의 간을 뽑아 저울에 달고 죄인의 간을 다른 한 편에 올려 무게를 잰다. 키벨레의 것보다 무겁다면 단검으로 즉시 간을 찍어 먹어버린다.
이것은 그 장면을 묘사한 동상임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왜 얼굴이 없는 거지? 눈을 흐릿하게 뜨고 동상을 살펴보는 나하트. 그리고 이상한 것을 발견한다.
"음?"
단검만이 다른 재질로 이루어진 것처럼 반짝였던 것이다. 나하트는 직접 몸을 움직여 이 동상의 손에서 단검을 뽑아내었다. 단검은 그 손에서 부드럽게 뽑혀 나왔다. 나하트는 8호를 잡아끌어, 8호의 손등을 단검으로 살짝 베어보았다. 검은 예기를 잃지 않았다. 피부가 갈라지고 핏방울이 맺힌다.
"전혀 녹슬지 않았어. 마법으로 축성된 물건이군."
나하트가 깜짝 놀란 것은 그 직후였다.
"으윽...끄아아아악!"
칼로 손을 베여도 아무 말도 않던 8호가 갑자기 고통을 호소하며 바닥을 나뒹굴었기 때문이다. 상처에서는 울룩불룩한 피거품과 수포가 일어났다 터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평소 무슨 일을 겪어도 무감정을 유지했던 8호의 행동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행동이었다.
"응? 뭐냐."
8호의 손을 살펴보는 나하트. 8호는 데몬스폰의 피가 섞인 융합체였다. 그래서 상처를 입어도 다시 회복되는 자가수복력이 있었다. 그런데 그 재생의 힘이 오히려 독이 되고 있는 듯 보였다.
"아하. 이 칼의 효과로군. 이 단검에는 아무래도 마를 멸하는 축복이 깃들어 있는 모양이다. 상당히 강하군. 너조차도 심장을 찔리면 한 방에 죽을 지도 모르겠어. 오, 고통스럽더라도 조금만 참거라. 곧 잦아들 거다."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8호를 방치하는 나하트. 그리고 단검을 주머니에 찔러넣는다.
"그럼 여기는 키벨레의 신전이로군."
키벨레의 이름을 입에 담자 동상은 거품처럼 무너져 사라졌다. 그 뒤에는 널따란 길이 뚫려 있었다.
"따라와라. 30초만 더 나를 지체시키면, 너부터 죽여버리겠다."
그 말에 손을 붙잡고 간신히 몸을 추스리는 8호. 원래라면 죽어도 할 말이 없는 격통이었지만, 어려서부터 수천 수만번의 끔찍한 실험을 겪은 8호는 그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견뎌낼 수 있었다. 나하트는 다시 두 사람을 앞세워 통로를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
그는 곧 곤경에 부딪혔다.
"또 있군. 또 있어."
회랑의 끝에 동공처럼 파인 벽감. 그 위에 올려진 얼굴 없는 동상. 그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인간의 몸통만큼이나 거대한 책. 광물질의 회백색인 다른 동상의 부위와는 다르게, 책만은 가죽 특유의 두터운 밤갈색을 유지하고 있다. 키벨레의 동상과 거의 같은 구조였다. 나하트는 동상의 손에서 책을 빼앗았다.
"이건 에단. 에단이다. 금기의 에단의 경전이잖아."
세상의 모든 말을 다 지껄여보거라.
모든 진실도, 모든 거짓도 한 혓바닥 위에 품을 수 있나니.
거대한 책의 겉장에 휘갈겨 쓰여진 글자를 보고 골치가 아프다는 듯 눈쌀을 찌푸리는 나하트. 어떤 궤변가가 사형당하며 남긴 말이라고 와전된 이 경구는 원래 에단의 금언이었다. 에단의 이름을 입에 담자, 동상은 또 거품처럼 녹아내리고, 암흑으로 뒤덮인 길이 뻥 뚫린다.
"대체 뭐지? 이건, 이건 누구의 신전이라는 말이야."
나하트의 또 다른 손에는 횃불이 들려 있었다. 횃불은 질투의 멜렉의 상징물이었다. 에단의 동상과 마주치기 전, 이전 복도의 끝에는 멜렉의 동상이 있었고, 손에 들려 있던 횃불을 가져간 채 멜렉의 이름을 읊자 녹아 없어지며 길이 뚫렸다. 세 번이나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왜 세 신의 동상과 상징물이 전부 있는 거냐고!"
그의 상식상 하나의 신전은 하나의 신위(神位)밖에는 품을 수 없다. 즉, 지금까지 발견한 세 신중 두 신앙은 가짜라는 뜻이었다. 신경질적으로 발을 구르는 나하트. 아나테마가 되기 위해서는 신전의 끝에 놓인 제단에서 잊혀진 신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다른 신의 이름을 불렀을 경우, 온 몸이 불타게 되는 징벌을 받게 된다. 아나테마가 되기 위해 아지프를 버리고 마탑을 떠난 이래 나하트가 마주한 난관 중 최대의 난관이었다.
"제기랄... 제기랄!"
책, 횃불, 그리고 단검. 세 가지를 바닥에 내려놓고, 미친 듯이 서성이는 나하트. 편집적인 성격인 나하트는 지금처럼 준비되지 않고, 통제되지 않는 상황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신벌... 기록에 따르면, 대충 두냐의 5위계의 불꽃 정도라고 하던데. 한 번, 한 번은 견뎌낼 수 있지 않을까. 그냥 무턱대고 시도해 볼까?"
그럴 리 없지. 나도 참 농담을 잘해.
아무도 웃지 않는 농담을 흘리는 나하트. 이번에는 본인조차 웃지 않았다. 미친듯한 서성임. 붕 뜬 혼잣말. 물러설까? 자료를 모아 다시 준비해볼까? 하지만 아지프의 추적이 따라붙었는데. 유예가 없었다.
"가자!"
결론은 났다. 만용을 부려보기로. 나하트는 세 개 모두를 집어 들고 통로를 향해 걸어들어갔다. 제단으로 이어져 있을 통로로.
복도의 끝. 이번에는 거대한 방이 나타났다.
정육각의 정갈한 포석으로 말끔하게 덮인 바닥. 세로로 홈이 파인 기둥과 아치들이 서로 덧대어 원형의 방을 이루고, 푸른 돌로 만들어진 돔을 떠받친다. 정면에는 거대한 장미창이 숭고미를 뽐내며 음각되어 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이 방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은 거대한 동상이었다.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얼굴 잃은 동상.
지금까지 세 명이 마주친 모든 동상을 다 합친 것보다도 크다. 그 앞에는 여섯 단의 계단과, 제단이 놓여 있다. 아무래도 저곳이 이 신전의 주인을 섬기기 위한 제단인 듯싶었다.
"이 녀석도 머리가 없단 말인가. 그래, 잠시, 잠시 조사를 좀 해야겠다."
머리 없는 동상을 보고 복잡한 표정을 짓는 나하트. 곧, 이 신전의 주인이 누군지 추리할 수 있는 어떤 단서라도 없을까 철저하게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었다. 아나테마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며 쌓아온 방대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흔적도 얻어낼 수 없다. 찾아낸 것은 제단 밑에 적힌 문구 하나 뿐이었다.
The scariest part of being alone
is to begin to learn
why gods died except for one.
홀로 남는 일의 가장 끔찍한 점은
깨닫기 시작하는 것이다.
왜 하나를 제외한 신이 모두 죽었는지.
"이게 무슨 선문답이야?"
모든 신은 자신의 신앙을 한 줄로 집약하는 금언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건 나하트가 알고 있는 어떤 신의 금언과도 맞지 않는 문장이었다. 성질을 내며 다시 동상과 제단을 철저히 살펴보는 나하트. 동상의 손은 벌어져 있다. 책, 횃불, 칼. 무엇이라도 쥐여줄 수 있도록. 30여 분 후,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니까, 셋 중 하나를 쥐여주고, 이 제단에서 맞는 신의 이름을 말하라 이건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머리를 전부 제거한 거고?"
그것 외에는 해석의 여지가 없어보였다. 유일한 단서가 되는 경구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나하트. 다시 한 번 경구를 읽어 보며, 자신의 사전 지식과 새로운 지식을 조합해 진리를 찾아내고자 무던히 애쓴다.
'1024년 전, 이 곳에서 세 위의 신이 갑자기 사라졌다. 그리고 이 경구는 하나의 신 말고 모두 죽은 이유를 말하라 하고 있지. 아, 그런가. 이 세 위의 신은 내분으로 사라졌나?'
단죄의 키벨레. 질투의 멜렉. 금기의 에단.
아마도 내분 끝에 셋 중 하나의 신만이 살아남은 것이 아닐까. 이 세 위의 신은 역사 속에서 정말로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 까닭이 이것이라고 하면 납득되는 부분이 많이 있었다.
'단죄, 질투, 금기. 셋 중 하나 때문에, 또는 셋 모두 때문에 죽고, 누구 하나만이 살아남았다. 그런 뜻 같은데.'
그러고보니 여기 모인 세 위의 신은 협력체를 이루긴 했지만, 모두 지나치게 독선적인 개념을 대표하는 신들이었다. 우연히 내려주는 은총, 마법의 체계가 유사하다는 점 때문에 힘을 합쳤을 뿐, 본질적으로는 융화되기 힘든 자들이다. 처음부터 화합이 잘 안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하트는 가부좌를 틀고 긴 생각에 잠겼다. 왜 하나의 신만이 남았는지 이해하는 것이 가장 끔찍한 일이라. 세상을 위한 선한 방향으로는 거의 쓰이지 않았지만, 그의 두뇌는 어쨌거나 십만 명 가운데서도 한 손에 꼽힐 만큼 우수했다.
그 두뇌가 수년에 걸쳐 공부한 지식을 전부 되짚으며, 논리를 만들고, 추찰한다. 이 동상의 정체가 누구일지를.
그는 눈을 번쩍 떴다.
"에단인가?"
그의 지식으로는 이런 복잡한 장치를 설계하고 즐기는 것은 에단에게 가장 걸맞은 일이었다. 에단은 금기의 신. 제멋대로 금기를 정하고, 제멋대로 금기를 어기는 신이었다. 동맹을 깨고 신을 죽인다는 금기를 그저 금기이기 때문에 범했다 하더라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리라.
"하지만 실패하면 죽게 되니까. 먼저 실험을 해야겠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17호의 목덜미를 쥐고 집어들었다. 그리고 그 손에 억지로 횃불을 들려주고, 해야 할 일을 속삭였다.
"저 동상의 손에 이 횃불을 쥐여주고, 제단에 엎드려 멜렉이라고 속삭여보거라."
두려움에 떨며 헐떡이는 17호. 하지만 그녀는 감히 나하트에게 저항할 수 없었다. 어기적거리며 동상의 손에 횃불을 쥐이고 제단 위에 엎드렸다. 나하트는 뼈로 된 창을 만들어 17호를 겨누고 서 있었다. 혹시라도 이 제단의 주인이 멜렉이 맞다면, 그 즉시 17호를 죽이고 자신이 그 자리를 빼앗기 위해서였다.
"메...멜렉... 꺄아아아악!"
그녀의 몸은 갑자기 불길에 휩싸였다. 고통스럽게 몸을 비틀며 제단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17호.
"주, 주인님, 잘못했어요, 불을, 불을 꺼 주세요...!"
"흠. 역시. 일단 멜렉은 아니었군. 다음은 8호. 너다."
17호의 가녀린 비명을 무시하고, 8호의 손에 단검을 쥐여주는 나하트. 8호는 흐릿한 눈으로 나하트의 얼굴을 지켜본다. 이미 나하트의 명을 따른 17호가 어떤 꼴이 되었는지를 확인하였기 때문에, 저항할 만도 하건만.
8호는 양순하게 그의 명을 따를 뿐이었다. 동상의 손에 단검을 쥐여 주고, 제단 위로 천천히 걸어올라가는 8호.
제단은 흑철로 만든 듯 검고 차갑고 단단했다. 제단 위에 올라서자, 얼굴 없는 동상이 정말로 살아 숨쉬는 거인처럼 보인다. 8호는 흰 손바닥이 드러나도록 손을 쫙 펴고 엎드려 절을 하기 시작했다.
"키벨레."
심장에서 뜨거운 격통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그 직후였다. 마치 심장이 화덕에 불을 지피는 풍로가 된 듯, 심장이 박동할 때 마다 몸 속에서 열기가 터져나왔다. 매캐한 살 타는 냄새가 코를 적시며 작은 육신은 새빨갛게 불타오른다.
"그르르르륵...!"
성대부터 불타버렸기 때문에 8호는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제단 위에 눌어붙은 살자국을 남기며, 바닥으로 굴러떨어진다. 동상의 바로 앞에서, 온 몸을 불태우며, 신음하는 8호. 그 귀로 나하트의 째진 웃음이 들려온다.
쨍!
동상의 손에서 칼을 빼내 바닥에 집어던진 것 같다. 바닥에 단검이 박히며 쇳소리가 울린다. 이미 죽었어도 이상할 것 없는 상태인 8호지만, 데몬스폰의 후예라서 가지고 있는 재생력 때문에 살아 있었다. 불길에 휩싸인 흐릿한 시야로 제단을 바라보는 8호. 나하트는 책을 동상의 손에 쥐여주고, 제단에 엎드리며, 희열에 찬 목소리로 무언가를 외치고 있었다.
"금기의 에단! 이 혓바닥은 모든 말을 지껄일 준비가 되었나이다!"
이 신전의 주인이 에단이라고 확신한 듯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확신은 배신당했다.
"응? 아니? 으흐아아악!"
온 몸이 불길에 휩싸이는 나하트. 8호와 17호에게 일어난 것과 똑같은 현상이었다. 잘못된 신의 이름을 호명했을 때 받게 되는 신벌. 흡혈귀의 피를 이어 재생력을 가지고 있는 17호, 악마의 피를 받은 8호와 다르게, 그저 순수한 인간이기에 손상은 오히려 더욱 심할 터였다.
제단 위에서 온 몸을 불태우며 몸을 꿈틀거리는 나하트는 손짓을 해 간신히 무슨 마술을 완성했다. 비구름을 부르는 마술이었다. 거대한 방의 윗공간에 검은 먹구름이 나타나고, 차가운 비를 뿌린다. 하지만 불길은 잦아들 뿐 꺼지지 않고 계속해서 살을 태운다.
"뭐. 뭐야. 대체 무슨, 무슨 일이냐고!"
'검을 집어라.'
8호의 귀에 어떤 음성이 들려온 것은 그 직후였다. 얼굴 없는 거대한 동상. 그 동상의 겉면이 깨져나가더니, 그 속에서 무언가가 몸을 일으켰다. 거대한 인간의 형상이었다. 그것에는 어느새 머리가 자라나 있었다. 그 머리가 다시 한 번 읊조린다.
'검을 집어라. 어린 순례자야.'
그 말이 닿는 곳은 명확했다. 그는 8호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8호는 단검을 집어 들었다. 천천히 고개를 쳐들어서 그 거인의 형상을 바라본다. 끔찍했다.
온 몸을 박피당한 인간의 형상이었다. 시뻘건 적갈색의 근섬유와 골격 따위가 그대로 보이는, 정말로 날것 그 자체의 인간. 어깻죽지에는 익룡의 것 같은 뼈날개가 돋아 있다.
잠시 보는 것 만으로도 꿈에 나올까 무서운 모습이었다. 유일하게 피부가 조금 남아 있는 부분은, 얼굴의 한 가운데 뿐이었다. 코를 중심으로 새하얗게 남아 있는데, 오히려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섬뜩한 기분을 들게 만든다. 그 눈은 어두운 심홍색이었다. 8호의 눈과 똑 닮은 색.
그 벗겨진 입술이 새하얀 치열을 드러내며 고한다.
'세 개의 제물은 모두 받았다. 이제 피가 필요하다. 마술사의 피가. 제단을 더럽히고 있는 저 놈을 쳐죽여라.'
홀린 듯 단검을 집어 들고 나하트에게로 다가가는 8호. 데몬스폰의 피 덕분에 신벌로 몸을 불태우면서도 움직일 수 있었다. 나하트는 불길 때문에 이미 온 몸이 녹아서 간신히 숨을 헐떡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반쯤 녹은 흰자위로, 칼을 들고 다가온 8호를 바라보며, 자지러지게 웃었다.
"그런가, 그런가, 내가... 커헉. 너희들 중 하나에게 칼을 맞아 죽는다고 했지. 아아, 아지프시여..."
만일 그 때 마차에서 카드 바꿔치기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여기 있는 8호는 이미 제물로 바쳐져서 죽었겠지. 그랬다면 숨을 끊으러 다가오는 자도 없었을 것이고, 나하트는 어떻게든 몸을 추슬러 살아나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필 재생력을 가진 8호와 17호가 살아남았고, 8호가 자신의 숨통을 끊으러 왔기 때문에, 그 희망마저 없어져 버렸다. 주마등을 보면서 141호가 마지막으로 남긴 비명으로부터 이것을 불현듯 알아차린 나하트는 그래서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이윽고 눈을 크게 떴다. 8호의 뒤에 시립하듯 서 있는 그 박피된 거인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넌, 넌 뭐야? 알려줘, 내가 대체 뭘 틀린 거지?"
혀를 차는 거인. 그는 8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 가엾은 버러지에게 알려주어라.'
'이 신전에 놓인 목 베인 세 신의 공통점. 그건 마술사라는 거다. 그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 하나만 남은 이유. 그건, 내가 전부 목을 쳐서 죽여버렸기 때문이다.'
"뭐? 무, 무슨 소리야?"
'내 이름은 림. 나는 마술사 살해의 신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마술사라는 족속을 전부 쳐죽이기 위해 존재한다.'
"웃기지 마, 그딴 신이 어딨..."
콱!
나하트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 단검이 나하트의 마지막 숨을 끊어놓았다. 그와 동시에 8호와 17호를 감싸고 있던 불꽃이 마법처럼 사라졌다. 8호는 단검의 손잡이를 두 손으로 붙잡은 채, 나하트의 시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뼈가 보일 정도로 새까맣게 불탔던 살이 재생되며 하얀 새살이 돋고 있었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단검을 뽑아드는 8호. 힘을 너무 준 탓에 엉덩방아를 찧고, 그 충격에 나하트의 로브가 흔들리며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졌다.
"이건..."
무엇이 떨어졌는지 확인하려는 8호. 그 순간 림이 속삭였다.
'너희 셋이 제단에 이마를 부딪었을 때, 나는 세 명 모두의 과거를 들여다보았다.'
'어린 순례자여, 너는 마술사에게 영과 육 모두를 빼앗겼구나. 나는 그런 자를 내 사도로 원한다.'
'이 세상의 모든 마술사를 쳐죽이겠노라고 서원해라. 내가 너를 내 제사장으로 삼아 주겠다.'
멍하니 림의 끔찍한 얼굴을 바라보는 8호.
잠시 후 8호는 대답했다.
"싫어."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얼굴을 구긴 림을 내버려둔 채, 의식을 잃고 쓰러진 17호를 업고 긴 복도를 빠져나가는 8호. 부상으로부터 피가 떨어지며, 그 뒤로 길고 붉은 선을 남긴다.
그 선의 시초에는 하나의 카드가 꽂혀 있었다. 나하트의 로브로부터 떨어졌던 무언가의 정체.
그건 반쯤 불탄 바보의 카드였다. 포석의 틈 사이에 끼여서 꼿꼿이 서 있다. 정위치로.
상단에 그려져 있던 해골이 불타 버렸기 때문에, 삽화로 그려진 광대는 그저 공연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무언가의 탄생을 축하하는 공연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