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3화 (3/279)

1. 마술사 ( 1 )

북서 자치령.

림의 신전이 숨겨져 있던 늪은, 제국 북서쪽의 자치령에 있었다. 자치령. 제국의 관할이기는 하지만, 제국은 아닌 영토. 이 지방의 관습을 존중해 자치권을 부여한다는 핑계는, 사실 권리와 관리 없이 책임만을 그들에게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북서 자치령은 몇 개의 광산 말고는 농업의 소출도, 상공업도 시원치 않은 곳이었다. 아주 소규모 지역의 광산 외에는 볼 것도 없는데, 그 광산을 얻기 위해 광대한 자치령 전체의 유지 비용을 지불하기에는 정말 수지가 맞지 않는다.

그래서 제국은 민간 사업이라는 명목으로 귀족 몇을 파견해 광산의 사업권을 독점하고, 나머지는 자치라는 이름 아래 방치하는 전략을 세웠다.

그 방치의 결과, 이 땅은 생지옥이 되었다.

파견된 지방 귀족들은 주민들의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지급된 식량 구입비를 착복했다. 갓 제분한 밀가루를 구입했다고 조작하고, 보존 기한이 다 되어 폐기해야 하는 밀을 거저나 다름없이 구매해 분배했다.

오래된 밀에는 맥각이라는 것이 생긴다. 잘못 복용하면 뇌에 이상을 일으켜, 먹은 자를 환각 속에 미쳐버리게 만드는 물건이다. 그래서 자치령의 광야에는, 맥각이 붙은 밀을 먹고 각혈하며 죽은 사람들의 시체와 실성해 산마루를 떠도는 이들을 보는 게 어렵지가 않았다.

-그것은 징벌이다! 모든 밀은 멀쩡하다. 밀을 먹고 죽은 자는 사실 전부 남에게 드러나지 않은 흉악한 죄를 저지른 자들이고, 라달라리아께서 그것을 벌하기 위해 위장에 불을 일으키신 것이다!

항의하면 그들은 되레 이렇게 소리치며 죽은 자들을 모욕했다.

그래서 맥각 중독은, 라달라리아의 불꽃이라고 불렸다.

산과 들에 미친 자와 피 토한 시체가 쌓이는 만큼, 착복한 자들의 곳간에 재화가 쌓이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래서 북서 자치령은, 가장 많은 아사자가 발생하는 동시에 가장 많은 사치와 향락이 일어나는 지역이기도 했다.

자치령의 빈민들은, 귀족의 자개나 걸상을 만들 나무를 베서 하루하루의 품삯을 벌었고, 때로는 사냥의 몰이꾼이 되어 빵 한 덩이를 받았다.

귀족들은 사냥을 즐겼다. 수백의 가신과 무장한 병사들 사이에서, 호랑이나 늑대 같은 맹수가 저항 하나 못하고 허접한 활질에 쓰러져 죽는 것. 그 절대적으로 안전하다는 체험. 전능감. 그것이 그들을 재미있게 했다.

그 사냥 중, 제일 재미있는 것은 인간 사냥이었다.

몇몇은 나돌아다니는 광인을 사냥했다. 주민의 안전을 위한다는 명분에서였다. 그러나 더 횡행하는 것은, 대규모의 인간 사냥.

전쟁이었다.

자치령은, 사실상 자치령을 장악하고 있는 몇몇 귀족가문들 간의 전쟁 때문에 늘 전화(戰火) 속에 있었다. 전쟁의 속성은 늘 제한전이었다. 전투의 전에, 양 가문의 대표가 나서서 길게 뽐내며 연설을 하고, 연극조로 서로 말다툼을 한 다음, 정작 용병들이 피를 토하며 싸우는, 전쟁 놀이.

림의 신전에서 몸을 빼낸 8호와 17호는 그 전쟁 놀이의 참상이 남긴 흔적 속에 서 있었다.

"이 사람! 이 사람은 머리가 있다!"

광주리를 든 채 목적 없이 서성이는 8호를 부르는 17호. 거기에는 나무를 깎아 만든 허접한 파이크를 쥐고 쓰러져 죽은 남자의 시체가 있었다. 동원된 민병의 시체였다.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은 그 장난 같은 전쟁으로 죽은 사람이 널브러진 전쟁터였다. 17호는 싱글벙글 웃으며, 들끓는 파리를 쫓아내고 그 머릿가죽에 주머니칼을 들이댔다.

"오늘은 할당량을 빨리 채우겠어!"

서걱. 서걱.

섬뜩한 소리와 함께 머리카락이 잘려나간다. 8호는 그 끈적이는 머리터럭을 닦아내어 손으로 돌돌 만 다음, 광주리에 집어넣었다. 그 안에는 이미 여러 개의 머리터럭이 묶여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전부 전사자의 머리에서 끊어낸 것이었다. 이것은 굳은살과 핏자국이 배인 여러 손을 거쳐, 가발이 되어 귀부인의 단아한 머리에 올라가게 될 것이었다.

산소 잃어 시꺼먼 핏자국을 흘리는 머릿가죽을 반쯤 잘라낸 17호. 망념처럼 질게 달라붙은 그것을 억지로 떼어내고 나서야 안쓰럽다는 듯 말한다.

"보니까 아직 어린 아이인데. 이런 아이도 전쟁터에 끌려와서 죽는구나."

짐짓 땀을 닦는 시늉을 하는 17호. 어린 아이가 하기에는 너무 끔찍한 일이지만, 사실 이 두 사람이 지금까지 겪어온 일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주머니칼에 묻은 시꺼먼 피를 슥슥 닦아내던 17호는 문득 심통이 난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너는 진짜 그렇게 심부름만 할 거야? 누나 혼자만 일하게 놔두고?"

17호는 은근슬쩍 자기가 누나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한두 번 떠 보다가 어느 순간 확정시켜 버렸다.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8호.

"아~ 집에 가면 할머니한테 일러야겠다~ 나는 열심히 일했는데 동생은 그냥 하루종일 놀기만 했다고."

8호의 볼을 꼬집으면서 놀리듯이 말하는 17호. 8호는 또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17호는 송곳니를 드러내고 웃으며 뻐기듯이 말했다.

"그럼 나 목 마르니까, 물 좀 떠다줘. 그럼 안 이를게."

광주리를 내려놓고 종종걸음으로 근처의 샘으로 달려가는 8호. 17호는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주머니칼을 들고 머릿가죽을 서걱서걱 벗겨내기 시작했다.

샘터에 다다른 8호. 샘물은 맑고 시원했다. 가볍게 세수를 하고 두어 번 물을 떠 마신 후에, 허리춤에 찬 병을 꺼내 퐁 마개를 땄다. 물을 따르기 위해 샘으로 얼굴을 가까이 하는 순간.

물에 끔찍한 얼굴이 비친다.

'저 계집 마술사를 쳐죽여라.'

첨벙! 커다란 물소리. 놀라서 물병을 샘에 떨어뜨리고 마는 8호. 수면에 가득 떠오른 것은 림의 얼굴이었다. 슬쩍 보기만 해도 끔찍하기 그지없는 악귀 같은 얼굴.

8호는 떨리는 입꼬리를 붙잡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한다.

"저리 가."

'저건 어리지만 마술을 배운 것이다. 죽여라. 모든 마술사는 죽여 없애야 한다. 서원해라. 내가 너의 복수를 이뤄주마.'

"싫다고 했잖아."

나하트가 림의 제단에서 최후를 맞이한 후 8호는 17호를 업고 신전을 빠져나왔다. 그게 벌써 한 달 전의 일이었다. 그 제단에서, 아나테마가 되라는 림의 제안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림은 8호에게 들러붙어 계속 이렇게 자신의 신도가 되라고 종용해왔다. 혼자 있을 때만을 노려서.

불쑥!

물 속에서 몸을 일으키는 림. 거대한 해일 같은 물보라가 일어나 8호를 차게 적신다. 림은 그 커다란 상체를 구부려 8호와 얼굴을 마주하고, 시뻘건 잇몸을 일렁이며 말한다.

'마술사는 태생부터 기만하고 또 속여 빼앗는 자다. 전부 죽여 없애야만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다. 아무리 어려도 마찬가지야. 그 뱃심은 너를 속이고 착취하고 죽여 없애려는 악의로 가득하다.'

"누나는... 날 많이 도와줬어."

8호는 백치였다. 혼자서는 바지 입는 법도, 물건을 사는 법도 몰라 다 17호가 해주어야만 했다. 아지프의 실험실에서 태어나 그 속에서만 살았기 때문이다. 그와 다르게, 17호는 원래 인간 세상에서 살다가 잡혀들어왔다. 몇 개월동안 아탕칼리의 추적을 피해 몸을 숨기며 살아가기까지 했다. 그래서 눈치와 처세술이 어린아이답지 않게 매우 발달해 있었다.

8호는 17호의 그런 처세술에 많은 은혜를 받았고 또 많은 가르침도 받았다. 백치나 다름없는 8호는, 17호의 임기응변 덕분에 객사하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있었다. 8호는 정말로 17호를 자신의 누나처럼 여기고 좋아했다. 그러니 림이 아무리 경고해도 요지부동이었다.

림은 목젖을 울렁이며 크게 웃어젖혔다.

'마술사는 남을 돕지 않는다. 이용할 뿐이지. 그저 이용하기 위해서 널 데리고 있는 거야. 죽여라. 이용당하기 전에.'

8호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마주 물었다.

"당신은 뭐야?"

'응?'

"왜 그렇게 마술사를 죽이고 싶어하는 거야?"

'말했을 텐데. 나는 마술사 살해의 신이다.'

림은 심홍색 눈동자를 번뜩이며 뇌까린다.

'나는 마술사에게 사라진 모든 미덕과, 핍박받는 모든 생령을 대표한다. 광란이라고 해도 좋고 반지성이라고 해도 좋아. 마술이 쥐어짜낸 뭇 비명이 모여 신앙이 된 것. 그게 나다.'

'여기 한 달간 머무르면서, 똑똑히 보았겠지. 부모에게 팔려 칼받이로 죽는 아이들과 그 아이의 머릿가죽으로 가발을 분칠해 즐기는 이들을. 이 역시 마술사에 의해 초래된 것이다.'

'삶이 무언지 깨닫기도 전에 삶을 유린당한 것도 모자라서, 죽어서도 편히 이 벌판을 떠나지 못하는 어린 넋. 그게 할 수 있는 게 비명밖에 더 있겠느냐."

'그 어린 송장의 폐부에서 흘러나와, 이 들판을 맴도는 마술사를 죽여달라는 외침. 그 이름없는 메아리 역시 나의 일부다.'

'서원해라. 나는 네게 힘을 주겠다.'

"싫어."

8호가 거부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혀를 차고는 다시 물 속으로 몸을 숨기는 림. 사방은 조용해졌다.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된 8호는 다시 물을 뜨려고 하다가, 그제서야 자신이 물병을 물 속으로 떨어뜨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곤란해하다가 빈손으로 17호에게 돌아가는 8호.

"아! 뭐하는 거야! 누나 목말라서 쓰러질 것 같은데!"

물통을 잃어버렸다는 말을 듣자, 볼을 부풀리며 칼 손잡이로 8호의 머리를 콩콩 때린다. 17호는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다시 8호에게 건네주었다. 수통이었다. 쓰러진 병사의 품에서 슬쩍한 수통. 혹시나 떨어뜨릴 일이 없도록 손에 매다는 끈도 달려 있었다.

"다시 물 떠와!"

"저, 누나, 그럼 처음부터 이거 줬으면 되는 거 아니야?"

"네가 내 물병에 입 대게 하는 거 싫어서 그랬지! 이건 나만 쓸 거야!"

그리고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묵묵히 그 모습을 보는 8호. 나무 뒤에서 림이 다시 나타나서 속삭였다.

'죽여줄까?'

"싫다니까."

*

광주리 가득 머리터럭을 채우고 보자기를 씌우곤 돌아가는 8호와 17호. 앙상한 나뭇가지에는 태양이 뻥 뚫린 구멍처럼 희게 빛나고 있었다. 수습하는 사람 없는 시체는 벌판 가득하다. 이따금씩 두 사람의 인기척을 느낀 까마귀가 푸드덕 날아올랐다.

"거기, 꼬마들! 잠깐!"

그 길 한 가운데에서 8호와 17호를 불러세우는 사람이 있었다. 제대로 된 갑옷을 입은 위병이었다. 손에는 농민의 것과 다르게, 제대로 만든 기다란 장창이 들려 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못 보던 자매인데. 이 위험한 곳엔 무슨 일이지?"

8호는 그 여성스러운 외모 때문에 처음 보는 사람들은 백중 구십구는 여자로 생각했다.(*

한 명은 장님이다.) 그래서 두 사람이 함께 다니면 사람들은 거의 자매로 보았다.

멍하니 위병을 올려다보는 8호. 17호가 재빨리 나섰다.

"저희는 저 옆 물레방아촌 펭 할머니 밑에서 자라는 남매인데요. 얘 이름은 가인이고 저는 한나에요. 할머니 심부름을 받아서 돼지 잡고 남은 찌꺼기를 좀 받으러 옆 마을까지 다녀오는 길이에요."

늪에서 나온 8호와 17호는, 이 근처를 헤매다 한 마음 좋은 할머니에게 거두어졌다. 다리가 불편한 할머니였다. 마침 손자와 손녀를 잃어 쓸쓸하던 차였다고 하던 그 할머니는, 두 사람을 거두고 이전 손자와 손녀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 둘에게 시체의 머리카락을 잘라오라고 시켰다.

사체의 훼손은 범죄다. 어린 나이임에도 17호는 어렴풋이 그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이 위병이 아마도 그것을 단속하기 위해 나와 있을 것이라는 것도. 그래서 그녀는 태연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받았다.

"응? 무슨 소리야. 그럴 리가 없어."

"맞아요! 할머니한테 확인해보세요."

"하지만..."

복잡한 표정을 짓는 위병. 침을 적셔가며 수첩을 펼친다. 거기에는 한나라는 이름과 가인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붉은 글씨로.

"그 두 사람은 죽었는데? 너희 정체가 뭐야."

"아, 맞아요, 죽었다고 했어요, 저희는 원래 전쟁 고아 남매에요. 그런데 그 할머니가 거둬주신다고 했어요!"

그 말을 듣자 피식 웃는 위병.

"착한 할머니?"

"무슨 소리야. 그 두 꼬마는 그 할멈이 전쟁 노예로 팔아넘겨서 죽었는데."

*

위병은 인근에 주둔하고 있는 용병단 산하에서 파견된 사람이었다. 상황이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 그는, 두 사람을 인솔해 용병단 둔영지로 들어갔다.

"윽!"

둔영지에 들어가는 순간, 코가 아릿할 정도로 풍겨오는 쇳내, 기름내, 그리고 땀과 피의 냄새. 후각이 예민한 8호는 잠시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순간 어지러워서 몸을 비척이던 차에, 지나가던 행인의 가죽 갑옷에 코를 제대로 부딪혀버렸다.

"윽!"

"괜찮아? 응?"

어깨를 붙잡아주는 위병. 본능에서 나온 친절한 몸짓이었다. 8호는 빨갛게 변한 코끝을 부여잡고 자신이 부딪힌 사람에게 사과를 했다.

"재소하미다."

기분 나쁘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의외로 꽤나 어린 목소리였다. 8호, 17호와도 나이차가 크게 나지 않을 듯한, 변성기 도중의 소년의 목소리.

"칼슨, 뭐야? 이..."

검게 칠한 가죽 갑옷을 입은 14,15세 정도의 남자. 8호와 부딪힌 건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눈을 땡그랗게 뜨고, 8호를 바라본다.

"아가씨는."

8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았다. 주근깨가 박힌 어딘가 촌티 나는 얼굴이 입을 벌리고 8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매혹의 군주, 야가레알의 데몬스폰과 피를 섞은 8호는, 비인간적으로 느껴질 정도의 미색을 품고 있다. 한참 사춘기의 남자아이답게 거기에 반쯤 홀린 모양이었다. 낌새를 눈치챈 17호가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내 동생이야. 우린 그냥 이 근처 주민인데, 길을 잃어서, 칼슨 위병님이 우리를 보호해준 거야."

"그래? 아, 그렇군."

"이 녀석! 말을 높여라!"

17호의 머리를 붙잡고 강제로 숙이는 칼슨. 그리고 속삭인다.

"저 도련님은 말이지, 나이는 어려 보여도 나보다 훨씬 높은 분이라고. 여기 주둔한 용병대의 간부 후보생이란 말이야. 여기 단장한테 직접 사사받고 있는 몸이니까 조심해."

그 말에 쏜살같이 고개를 숙이는 17호. 이런 커다란 둔영을 운영할 정도의 용병단 간부가 될 몸이라면, 확실히 신분이 꽤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다,다음부턴 주의하라고. 어디, 코는 안 다쳤나?"

"괘차읍니다. 감사합니다."

17호에게 배운 대로 대응하고 칼슨의 뒤를 따라 움직이는 8호. 후보생은 둘과 헤어진 후에도 8호의 모습을 쫓아 뒤를 바라보며 앞으로 걸었다. 그러다 천막 기둥에 쿵 하고 뒤통수를 부딪히고 말았다. 17호는 그 모습을 보고 소리 죽여서 웃었다.

"남자애한테 뭐하는 거야."

"응? 왜 그래 누나?"

"저 꼬마 너한테 첫눈에 반했나 봐."

"농담하지 마. 더럽게."

8호는 시답잖은 소리를 한다는 듯 물리쳤다.

*

칼슨의 뒤를 따라 위병 초소에 도착한 두 사람.

칼슨은 척 보기에도 난잡한 서랍을 뒤져서, 어떤 자료를 꺼내 두 사람에게 보여주었다. 지금까지 칼슨이 모집한 병사의 명부였다. 여러 개로 분류되어 있었는데, '한나'라는 이름과 '가인'이라는 이름이 적힌 문서는 합법적 매매문서 묶음 사이에서 나왔다.

"확실히... 할머니의 수결이 있네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리는 17호. 칼슨은 주저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 틀릴 리가 없어. 그 두 아이를 팔고 싶다고 온 할멈을 응대한 게 내 파트너였거든. 손자를 팔다니 참 지독한 할멈도 있다고 말해서 똑똑히 기억해. 아마 다리가 없어서 의족을 쓰지?"

"네..."

칼슨은 진지하게 얘기를 계속했다.

"그 할멈은 아무래도 평소에는 인자한 인간인 척 고아를 주워서는, 온갖 자질구레한 범죄를 저질러서 돈을 긁어모으게 시키고, 그러다가 순찰하는 위병한테 낯이 익으면 팔아넘기는 걸 반복하고 있는 것 같단 말이야. 이 광주리, 열어 봐도 되겠니?"

슥, 보자기를 치우는 칼슨. 거기에는 사람의 머리에서 긁어낸 머리터럭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칼슨은 긴 한숨을 내쉰다.

"확실하군. 사체 훼손은 망령을 발생시킬 수도 있는 범죄다. 원래대로라면 나는 여기서 너희를 즉결 체포하고 감옥에 가둬야 해."

"서, 설마..."

"하지만 보통은 봐 줬지. 어린애들이 오죽하면 그럴까 싶어서 말이야. 정도를 넘지만 않으면."

칼슨은 청동제 투구를 벗고 구레나룻을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휘유. 정도, 정도라."

"저번에 끌려 왔던 그 손자 손녀들도, 자재를 빼돌린다거나 머리카락을 자른다거나. 그런 짓거리를 하다 여러 번 걸리고 여러 번 봐줬다고 해. 그러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다음에 또 걸리면 관용 없이 즉결처분하겠다고 엄포를 놨더니, 이렇게 팔려나갔다 이거지."

"어린아이가 동정을 사서 범죄를 저질러도 체포되지 않는다는 걸 이용해서, 최대한 범죄로 돈을 긁어모으다가, 이렇게 폐기 처분해버린 거야."

"미안. 너희한테는 너무 이른 얘기냐? 하지만 눈에 밟혀서, 도저히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어서 말이야."

그 할머니는 사실 착한 할머니가 아니다.

고아를 인신매매해 돈을 버는 마귀다.

에둘러 말했지만, 그런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17호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였다. 17호의 눈가에 닭똥 같은 눈물이 맺혀서 볼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갑자기 터진 눈물에 칼슨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흑...흑...허어엉...전쟁 때문에 부모님도 잃고...이젠, 있을 곳이 생겼다고, 생각, 히끅..."

"그래, 그래, 착하지. 뚝. 울지 마. 울지 마. 아저씨가 어떻게든 해결해 줄게. 해결해 주려고 여기 데리고 온 것 아니겠냐."

17호는 자신의 양 어깨를 붙잡고 바들바들 떨면서, 칼슨의 품에 와락 안겨들어서 울었다. 어쩔 줄 몰라하며 다독이는 칼슨. 하지만 8호는 그게 연기란걸 알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기 전, 고개를 숙이고 자기 눈을 찌르는 걸 옆에서 봤기 때문이다.

'대단하군. 마술사는 역시 어려도 마술사라니까?'

스윽, 그 옆에서 림이 고개를 쳐들었다. 방 사이즈에 맞게 인간 정도의 크기로 모습을 줄인 림이었다.

'이 칼슨이라는 놈이 이용해먹을 만한, 정이 많은 놈이라는 걸 알고 바로 이렇게 달려들다니. 대단한 마술사야. 쳐죽여야 해.'

'저리 가.'

8호는 입모양으로 림에게 엄포했다. 림은 히죽 웃으며 다시 사라졌다. 칼슨은 17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등을 두드려주다가, 주먹을 불끈 쥐며 선언했다.

"그 집에는 돌아가지 않아도 돼. 혹시 그 할멈이 너희를 찾으러 오면, 내가 쫓아내 줄게! 너희는 지금부터 내 밑에서 조수로 일해라."

"정말요?"

울음을 그치고 칼슨의 목에 와락 달려드는 17호. 보호욕을 일으키는 방법을 잘 알고 있기에 나오는 행동이었다. 칼슨은 17호를 번쩍 들어 의자에 앉히고, 또 무슨 서류를 찾아 뒤적이며 말했다.

"그래. 우리 용병단은 기나센 출신 용병단이라고. 용병 명가 출신답게 다들 깔끔하고 착한 사람밖에 없으니까, 너희 살기도 편할 거다. 다만, 일 가르칠 때에는 엄하게 할 거야. ...아, 찾았다!"

먼지 덮인 종이를 꺼내, 두 사람에게 건네주는 칼슨.

"조수 계약서다. 내가 너희들의 신분을 보증한다는 문서기도 하지. 서명해."

헤헹, 쉽구만. 17호는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그 문서를 받았다. 그 미소가 사라지는 데에는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문서의 상단에 그려져 있는 문양. 너무나도 익숙하고 불길한 문양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17호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고, 그것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저, 저, 아저씨, 이 해골은 뭐에요...?"

"응? 아. 해골이 무서운가 보구나? 걱정하지 마라. 이건 말이지, 아지프라는 마술사 아저씨들의 문양이야."

"그게 왜 여기에 있어요...?"

"그거야 이 용병단의 고용주가 아지프니까지."

17호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8호는 멀뚱멀뚱히 그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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