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4화 (4/279)

1. 마술사 ( 2 )

"어떡해, 어떡해, 어떡하지, 어떡해?"

칼슨이 두 사람을 위한 어린이용 장비를 찾아주겠다고 문을 나서자마자, 17호는 바닥에 주저앉아서 턱을 덜덜 떨며 중얼거렸다. 완전히 넋이 나간 모양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펑펑 울기 시작했다. 8호가 17호와 함께한 후, 처음으로 본 그녀의 어린아이다운 모습이었다.

"들킬 거야. 붙잡힐 거야. 또, 그거, 전부 당할 거야. 어떡해, 어떡해..."

"진정해."

"죄송해요, 주인님,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얌전히 있을게요, 하지 말아주세요..."

"그만."

17호 역시 아지프의 마탑에 붙들려 온갖 참혹한 실험을 당했다. 아지프의 마탑에서, 재생력을 가진 실험체에 대한 취급은 차라리 죽이는 것이 인자하다 싶을 정도로 끔찍했기 때문이다.

아직 열두어 살밖에 안 된 17호에게 그 모든 실험과 아지프는 엄청난 트라우마로 각인되어 있었다. 자신이 아지프의 세력 안에 들어와 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이렇게 발작을 일으킬 정도였다.

8호는 17호의 어깨를 꽉 붙잡고 떨림이 진정될 때까지 안아 주었다. 부들대던 몸의 떨림이 멈추고, 17호는 간신히 진정을 되찾았다. 17호는 8호에게 붙잡혀서 울음 섞인 말을 토해냈다.

"바보였어. 완전히 늑대 피하려고 호랑이 굴에 들어온 거잖아. 혹시라도 아지프의 마술사 한 명이라도 우리를 보면, 바로 눈치챌 거야. 그리고 또, 탑으로 끌려갈 거야. 빨리, 빨리 도망쳐야 해. 아예 이 땅에서 멀리 도망쳐야 해... 그, 그, 주인님이 죽은 곳이랑,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그래. 그렇게 하자."

"그,그러면, 돈이랑, 신분이랑, 이것저것 필요한데... 많이, 아주 많이..."

딸꾹질을 하며 8호에게 안긴 채로 횡설수설하는 17호. 그녀는 트라우마 때문에, 비정상적일 정도로 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8호는 냉정한 건지 무표정한건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말했다.

"충분히 할 수 있어. 누나는 똑똑하니까. 좋은 계획을 짤 수 있어."

"계획... 계획..."

흘깃, 17호의 시선이 8호의 새하얀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17호는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바로 몸을 일으켜 8호와 마주보고 무언가를 지껄인다.

"떠오른 게 있어."

*

거름으로 쓸 분뇨를 흘려보내기 위해 판 도랑.

잇단 전쟁으로 거두는 자 없어진 그 도랑에는, 오물이 녹색과 자주색의 점액질로 변해 찐덕하게 달라붙어 있다. 옆에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병이 들 것 같은 그 도랑의 옆 따라 걷는 세 사람이 있다. 칼슨과 8호, 17호였다.

17호는 계속 눈물을 훌쩍이며, 잔상처와 잔근육이 가득한 칼슨의 팔에 몸을 기대듯이 붙이고 걷고 있었다. 아지프의 심볼을 보고 찾아온 충격 덕분인지, 이 눈물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칼슨은 안쓰러운 듯 17호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긴다.

"괜찮아, 괜찮아. 이 아저씨가 그 애도 꼭 데려올 테니까. 단장님도 좋은 사람이니까, 분명히 허락해 주실 거야."

17호는 거짓말을 했다. 사실 할머니의 집에는, 자신과 8호 말고도 한 명의 아이가 더 붙잡혀 있다는 거짓말을. 이대로 자신과 8호만 종적을 감추면, 다음 번에 노예로 팔리게 될 것은 그 아이라는 말을 하며 눈물을 쏟았다. 어린이용의 가죽 갑옷과 치마로 재단할 광목 따위를 잔뜩 들고 온 칼슨은, 그 말을 듣자 호탕하게 소리쳤다.

'그 할멈의 집까지 안내해라! 내가 그 녀석도 책임져 줄 테니까.'

17호가 예상한 대로였다. 그 결과, 세 명은 한밤 중, 인적 없는 도랑을 따라 걷게 되었다. 신만이 지켜보는. 만약 누군가가 죽어 쓰러져도, 아무도 보지 못할 어두운 달밤.

"응?"

칼슨은 고개를 갸웃했다. 17호가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길로 안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7호는 그 기색을 눈치채고, 눈물을 훌쩍거리며 말했다.

"그 애는 몸이 많이 안좋아서요. 저희랑 다른 곳에서 살게 한다고 했어요. 저 숲 속이에요."

"그래?"

의심 없이 숲 그림자 아래로 발을 옮기는 칼슨. 숲 속으로 들어감에 따라 가지는 더 높이 솟고 그림자는 더 어두워지며, 잇닿은 가지는 차양을 이뤄 빛을 완전히 가리운다. 어두운 동굴에 들어서는 것처럼.

마침내 서로의 얼굴마저 구분이 안 가는 깊고 짙은 어둠 속에 다다랐을 때. 칼슨은 드디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기, 길을 잘못 든 것 같은... 으아아악!"

"캬아악!"

17호의 송곳니가 칼슨의 목덜미를 꿰뚫었다. 얼굴과 팔에는 눈알을 연상시키는 문양의 문신들이 드러나 은백색으로 반짝이고 있다.

"윽...으으윽...!"

바둥거리는 칼슨. 병장기를 휘두르며 단련한 성인 남성임에도, 목덜미를 짓누르는 17호의 이빨을 떨쳐내지 못했다. 17호가 아지프의 마탑에서 실험을 당하며 배운 마술. 신체를 강화하는 마술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목을 붙잡고 바둥거리던 칼슨은 곧 축 늘어졌다. 17호는 칼슨의 목에서 입을 떼고 가쁜 숨을 내쉰다. 그리고 이전과는 다른 이빨로 상처를 다시 물었다.

"쯔으읍...쯔으읍..."

거미가 독액을 주입하는 듯한 소리. 17호의 어금니 뒷편의 분비샘에서 찐득한 진혈이 흘러나와 칼슨의 몸으로 들어간다. 잠시 후, 칼슨은 초점 잃은 공허한 눈으로 몸을 일으켰다. 피부는 연회색으로 변색되어 생기를 잃은 채였다.

좀비화. 인간을 좀비로 만드는 흡혈귀들의 기술.

아지프의 마탑에서 실험을 위해 배운 것이다. 막 죽은 인간에게 써먹어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빨을 떼자 일어났던 좀비는 다시 뒤로 무너진다. 17호는 황급히 목에 달라붙어 재차 이빨을 꽂아넣는다. 너무 서툴러서, 몇 번이나 도전한 끝에 간신히 끝마칠 수 있었다.

"하악...하아악... 됐나?"

칼슨의 좀비화가 완전히 끝난 것을 확인하고, 17호는 기력을 잃고 뒤로 발랑 쓰러졌다.

"뭔가... 느낌이 다른데."

아지프의 마탑에서 17호는 썩어가는 시체의 목을 깨물어 좀비로 만드는 일을 하도록 강요받은 적이 있었다. 그 때 만들었던 좀비와 칼슨의 좀비를 비교하면, 정확히 지적할 순 없지만 어딘가가 께름칙했다.

"방금 전까지 살아 있던 인간을 써서 그런가?"

가슴팍을 더듬어 좀비화가 제대로 끝났는지 확인하던 것을 마치고, 색색 가쁜 숨을 내쉰다.

"어쨌든... 됐어... 일단 절반은 성공이야."

8호는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늘 그렇듯 정물화처럼 무감정해 보이는 눈동자로. 17호는 홱 고개를 돌려 그 시선을 외면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가자. 빨리 끝마쳐야 해. 어차피 너도 공범이야."

이 작은 살인자는 종종걸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목표는 할머니의 집이었다.

*

오두막집. 밤이 깊었음에도 불은 꺼지지 않았다.

"오오, 한나, 가인, 어서 오너라, 늦게 와서 걱정했단다."

17호가 칼슨의 좀비를 시켜 문을 두드리자, 의족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몇 번 들린 후 문이 열렸다. 얼굴에 가득한 주름을 자글자글하게 만들며 웃는 낯은 칼슨의 얼굴을 발견하자마자 딱딱하게 굳었다.

나무 뒤에서 몰래 그걸 지켜보고 있던 17호는 다시 온 몸에 문신을 띄우고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좀비를 조종하는 마술을 쓰는 중이었다. 성대를 움직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때문에, 칼슨의 목소리는 어색하고 괴이쩍었다.

"크르륵..나는... 위병이다..."

"알고 있습니다. 위병이 여기는 웬 일이오?"

"크르르르륵...집에...넣어줘라..."

"싫다면?"

"네 아이를, 맡고 있다..."

"이 늙은이한테는 아이가 없소만."

표독스런 표정으로 딱 잘라 말하는 할머니. 평소에 지어보이던 인자한 표정과는 판이하게 다른 표정이었다. 17호 곁에서 멀찍이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8호는, 한 사람의 표정이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구나 감탄할 정도였다.

동시에 확신했다. 칼슨이 했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17호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손을 여지껏 없을 정도로 현란하게 움직였다.

"그르르륵... 네가, 시체를 잘라 내다 파는 일을 시키는... 걸 알고 있다. 증언도 있다. 그르르륵...안 들여보내면, 체포다."

"무슨 소리인지 영문을 모르겠구려. 그래도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들어오시오."

칼슨이 그렇게 말하자,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서는 칼슨을 들여보내는 할머니. 탁. 문이 닫히자, 17호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등에는 땀이 흥건했다. 마탑에서 조종술을 몇 번 써 봤지만 이렇게 힘든 건 처음이었다.

17호는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눈도 질끈 감았다. 이제부터는 자신이 조종하는 칼슨의 시야로 자신의 시각 중추를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정신을 집중하자, 흐릿한 시야로 익숙한 풍경이 보인다. 어제까지 자신과 8호가 몸을 뉘였던 집 안이었다.

"우선 날도 추운데 밤길 걷느라 고생하셨소. 좀 들고 몸이라도 덥히시오."

쪼르르륵, 흰 김이 나는 뜨거운 차를 한 잔 따라 주는 할머니. 그리고 자신이 홀짝 한 모금 들이킨다. 17호는 물끄러미 그 차에 시선을 집중했다. 역한 향기가 풍겨온다. 투구꽃의 뿌리를 갈아서 넣은 게 틀림없었다. 그건 맹독이었다.

"좋아. 증거물도 생겼다."

17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칼슨의 몸을 일으키고 단검을 뽑아들도록 시켰다. 당황하는 할머니. 칼슨은 무시하고 단검을 크게 휘두른다.

"이, 무슨..."

할머니는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단검에 목을 꿰뚫려 절명했다. 선혈이 치솟으며, 핏줄기가 칼슨의 얼굴을 적신다.

17호의 계획이란 칼슨이 할머니를 죽이고, 할머니가 칼슨을 죽여서 두 사람 모두 죽은 것처럼 보이게 위장하는 것이었다. 8호와 17호의 사정을 알고 있는 것은 칼슨밖에 없으니, 흉계를 꾸미던 할머니만 칼슨의 손으로 죽이고 칼슨도 죽게 만들면 후환이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후, 할머니가 지금까지 가발과 인신매매를 통해 벌었을 돈을 모두 훔쳐 도피자금으로 써서 달아나면 계획 성공이다.

물론 번듯한 용병단의 일원이 죽었으니 조사가 들어오겠지만, 정황만 잘 만들어놓으면 할머니가 의심을 받으면 받았지 고아 두 명이 의심을 받을리는 없을 것이다. 그런 계산에서였다.

"아, 어지러워."

마술을 너무 많이 썼기 때문일까. 간신히 일어서서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17호는, 잠시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8호가 황급히 그 쓰러지려는 몸을 붙잡았다. 17호의 얼굴에는 핏기가 싹 가셔 있었다.

"괜찮아, 누나?"

"괜찮아, 괜찮으니까, 빨리, 처리하자. 빨리..."

부축을 받으며 움직이는 17호. 문이 열리고, 코 가득 차오르는 철분의 향내. 시야엔 참상이 드러난다. 동맥이 잘리면서 분출된 혈류로 범벅이 된 방, 온 몸에 피칠갑을 하고 멍하니 서 있는 칼슨, 쓰러진 할머니. 17호는 아랑곳앉고 바닥을 더듬기 시작했다. 잠시 후, 덜걱거리는 널빤지 하나를 찾아서 들어올렸다.

"와."

거기에는 비밀 금고가 숨겨져 있었다. 열어보니 큼지막한 계란만한 크기의 녹옥 하나와 자수정 두어 개가 나왔다. 그 외에도 5루덴 동전이 가득 든 자루 하나를 발견한다. 17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부모님을 잃고 도피생활을 하면서 쓰레기통에 버려진 귀리빵까지 긁어먹어 본 적이 있는 17호는, 이게 어느 정도의 가치인지 알고 있었다.

"이 정도면, 어디 집을 사서 평생 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누나!"

8호의 목소리가 들리자 17호는 반사적으로 그 자루를 품 속에 숨겼다. 그리고 널빤지 위로 기어올라간다. 투덜거리면서였다.

"쳇, 생각보다 그렇게 건질 게 많지는 않은데. 여비나 간신히 나오겠어. 근데 왜?"

"이리 와서, 들어봐."

8호는 손짓을 하더니 칼슨의 가슴을 가리켰다. 심장이 있는 곳이었다. 17호는 눈썹을 찌푸리며, 칼슨에게 다가가서 가슴팍에 귀를 기울였다. 희미하게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17호는 눈을 감고 그 소리에 정신을 집중했다.

"이 아저씨, 아직 살아 있는 것 같은데."

쿵, 쿵. 분명히, 고동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번쩍, 눈을 뜬 17호는, 흰자만 보이는 눈알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칼슨과 눈이 마주쳤다. 명백히 시선의 위치가 달라져 있었다.

"히이익?"

놀라서 뒤로 자빠져 엉덩방아를 찧는 17호. 8호는 고개를 갸웃하고 있다. 17호는 그제서야 자신이 느낀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17호가 칼슨의 좀비화를 진행할 때, 칼슨은 아직 죽지 않았던 것이다. 가사상태일 뿐.

아직 살아있는 사람을 좀비로 만들려고 했으니 이질감이 느껴지고 조종하는 게 엄청나게 힘든 게 당연했다. 그리고 그 가사상태가 끝난 지금. 칼슨은 천천히 소생하려고 하고 있었다.

"죽여! 빨리, 빨리 죽여야 돼!"

힘이 빠져서 소리지르는 17호. 8호는 언제나 그랬듯 무표정한 얼굴로 그런 17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17호에게는 그 무색의 눈초리가 어쩐지 힐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17호는 울컥해서 소리질렀다.

"뭐? 우리한테 잘 대해준 사람이니까 죽이기 싫다는 거야? 나는 이러고 싶었던 줄 알아? 넌 아무 것도 안 했잖아! 다, 다 내가 했잖아! 나는 안 돌아갈 거야, 절대로 그 실험실로 안 돌아갈 거야! 넌 다시 끌려가서, 그 괴물들한테, 그, 그거 다 당하는 게 좋아?"

발악하듯 소리지르는 17호. 8호는 계속 물끄러미 그걸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17호는 찢어지듯 비명을 질렀다.

"죽여! 죽여버리라고! 저 녀석이 깨어나서 우릴 죽이기 전에!"

"누나."

8호는 그 말을 듣고 칼슨의 손에서 단검을 빼앗았다. 하지만 그걸 휘두르지는 않았다.

"왜! 네 손은 더럽히기 싫다는 거야?! 나만 나쁜 놈으로 만들려는 거야?"

"그냥, 이대로 두고 도망치자. 죽일 필요까지는 없잖아."

8호의 말에 이를 까드득 악무는 17호. 간신히 몸을 일으켜서는 8호의 뺨을 후려쳤다. 8호의 흰 피부에 손자국이 빨갛게 남는다. 17호는 8호의 손에서 단검을 빼앗아선, 혼신의 힘을 다해 찔러넣었다. 칼슨의 심장으로.

낭자한 선혈. 쓰러지는 몸뚱이. 그 시체 위에 올라타 17호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 후, 표독스러운 얼굴로 8호를 노려보았다. 방금 전 할머니가 지었던 표정과 너무나 닮은 표정이었다. 입에는 흡혈귀라는 증거, 송곳니를 날카롭게 드러낸 채다. 8호는 뇌까리듯이 말했다.

"칼로 찔러서 죽여버렸네."

"그래! 뭐, 나한테 실망했어? 난 다 죽일거야! 엄마도, 아빠도, 이렇게 죽었단 말이야!"

"아니. 하지만, 할머니는 칼을 못 쓰잖아."

17호는 아연했다. 시체의 가슴팍에 올라탄 채로, 자신이 박아넣은 칼자루를 바라본다. 이미 깊게 검상이 남아 있다. 의족을 쓰는 늙은이가 남겼다고 하기엔 너무 말이 안 되는 상처였다. 분명히 위화감을 느끼고, 이상하다고 생각하겠지. 그리고 추적할지도 모른다.

"아,아,아아..."

얼굴을 붙잡고 신음을 흘리는 17호. 당황해서 패닉에 빠진 나머지, 계획에서 벗어난 짓을 저질러버렸다. 두 손을 펼쳐서 얼굴을 감싸쥐고는, 사시나무처럼 덜덜 떤다. 난 왜 항상 이럴까. 붙잡힐 때도, 이렇게 실수해서 붙잡혔는데. 전부 다 들켰다. 아탕칼리가 추적할 거야. 어쩌지, 어쩌면 좋아... 그 사람들은, 절대로 안 놔주는데. 절망에 빠져 여러 생각을 하는 17호. 8호는 그 옆에 다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빨리 여기서 달아나자. 이 아저씨는 새벽에도 순찰을 돌거라고 했어. 그때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이상하게 생각해서 찾는 사람이 나올 거야."

달아난다고? 어떻게? 넌 안 당해봐서 모르는 거야. 그 사람들한테선 달아날 수 없어, 범인이 잡히기 전에는... 속으로 웅얼거리던 17호의 귀에 8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17호는 눈을 번쩍 떴다.

손가락 틈 사이로, 8호를 흘긋 바라보는 17호. 그리고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휘청해서 바닥에 쓰러지는 17호. 8호는 걱정스럽다는 듯 자신도 몸을 굽힌다.

"괜찮아?"

"미안, 힘, 힘이 너무 빠진 것 같아. 좀, 업어줄 수 있어? 미안해, 화내서 미안해. 너무 무서워서 그랬어..."

가냘픈 목소리. 정말로 몸을 가눌 힘도 없어진 것 같았다. 8호는 몸을 움직여 17호를 업어들었다. 비쩍 마른 17호는, 마찬가지로 어린 8호라도 쉽게 업어들 수 있었다. 8호는 두 손으로 17호의 엉덩이를 받쳐들고 피로 물든 빨간 발자국을 남기며 집을 나섰다. 혈향으로 가득한 집을 나서자, 맑은 공기와 함께 흐붓한 달빛이 두 아이를 비춘다.

17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의 앞을 바라보았다. 시야를 가득 메운 것은 하얀 빛. 달빛 아래로 희게 빛나는 8호의 목덜미. 토끼처럼 새하얀 목덜미.

너무나도 무방비한.

"미안, 미안해."

윽!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17호의 송곳니는 무방비한 상태인 8호의 목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흐려가는 의식 속에서 8호는 멍하니 자신의 귀에 메아리치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건 계속 읊조리고 있었다. 사과의 말을.

*

식도가 말라붙는 듯한 갈증.

그 목마름 속에서 8호는 눈을 떴다. 눈에 들어온 것은 사막이었다. 화산재처럼 시꺼먼 빛의 모래로 가득한 사막. 입을 열자, 입 속에 들어온 모래가 우수수 쏟아진다. 몇 번 쿨럭이며 모래를 토해내고 입을 닦은 8호는 우뚝 서서 사방을 바라보았다.

초승달 모양의 사구가 아득할 정도로 가득 솟아 있는 사막이었다. 잇달아 불어오는 모래바람이 그 사구를 이리저리 옮겨대고 있었기 때문에, 방향을 가늠하기도 쉽지 않다. 올려다본 하늘은 새까맣기만 하고. 그 검은 하늘로부터 부슬비처럼 쏟아지는, 모래, 모래, 그리고 모래.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던 8호는, 천천히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처 없이, 서쪽으로.

"아."

얼마나 걸었을까. 체감상으로는 일 년이라도 지난 것 같았다. 목과 내장을 조여오는 타는 목마름을 견디며, 드디어 사막의 끝에 다다른 8호. 저 멀리, 듬성듬성 돋은 푸른 풀잎 사이로 시냇물이 흐르는 초원이 눈에 들어왔다.

8호는 무거운 발을 움직여 달렸다. 작은 발이 푹푹 빠지며 깊은 발자국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 질주는 무언가에 부딪혀 막혔다.

"윽!"

머리를 감싸쥐고 자신을 가로막은 것을 살펴보는 8호. 그건 투명한 유리였다. 아주 두껍고 투명한 유리. 그것이 사막과 초원을 갈라놓고 있었다. 이게 뭐지? 더듬거리던 8호는, 그 유리에 이미 무수한 손자국이 남아 있는 걸 발견한다.

그 순간, 세상이 전부 거꾸로 뒤집히기 시작했다.

사막에 가득한 모래가 뒤집히며, 바닥에 붙들린 공허를 향해 쏟아진다. 돌부리를 붙잡고 매달려 간신히 떨어지지 않은 8호는 불현듯 깨닫는다. 이것이 거대한 모래시계라는 것을. 자신이 거대한 모래시계 속에 갇혀 있었다는 것을.

그것을 깨닫자마자, 갈증이 걷잡을 수 없이 심해지며, 온 몸이 말라서 바스라지기 시작했다. 손가락 끝이 검게 괴사하며, 사막을 가득 메운 모래와 같은 검회색의 먼지로 부서져 흩어진다. 바위를 붙들고 있는 손이 다 사라지면 저 밑으로 떨어지겠지. 그리고 나도 한 줌의 모래가 될 거야.

아무래도 이 사막을 이루는 모든 모래는 다 한때는 8호와 같은 인간이었던 모양이었다.

8호는 수만 개의 조각으로 바스라지며 멍하니 바닥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 때였다.

"미안, 미안해."

작은 음성. 여자의 것. 어떤 여자가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8호의 뒤에 서서, 흩어져가는 8호를 끌어안고 있었다.

"윽!"

그 여자가 끌어안자 온 몸이 부서지는 것이 멈췄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찾아왔다. 8호는 몸부림쳤다. 강한 압박감. 그리고 견디기 힘든 편두통이 뇌를 쑤신다.

고개를 돌려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등골에서 올라오는 차가운 감각 그리고 구토감이 그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그것은 자신을 껴안은 채 계속 미안하다는 말을 주절거리고 있었다. 8호는 발버둥치며 간신히 그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허우적거리다, 돌부리를 놓치고 떨어지기 시작했다. 끝없는 어둠 속으로.

쿵!

"이 새끼는 언제까지 퍼질러 자고 있는 거야? 당장 일어나!"

커다란 충격.

그와 함께, 8호는 잠에서 깨어났다.

차가운 돌바닥에서.

*

코가 부러졌다고 생각했다. 아니, 부러졌을 것이다. 금시에 아물었을 뿐.

8호의 작은 머리를 전부 움켜쥘 정도로 커다랗고 두툼한 손이, 8호의 머리를 붙잡고 돌바닥에 세게 쳐박아 잠을 깨웠다. 아직까지도 모래시계의 악몽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8호는, 코를 감싸쥐고 고개를 들었다.

칠이 벗겨져 붉은 녹이 번들거리는 쇠창살, 그리고 돌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8호의 양 다리에는 철구가 달린 족쇄와 사슬이 매여 있다.

"이봐, 잰슨, 아무리 그래도 어린애한테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진정하라고."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단장!"

또 한 번 두꺼운 힘이 8호의 머리를 짓눌렀다. 8호는 또 돌바닥에 머리를 크게 짓찧었다. 이번엔 앞니가 후들거리는 게 느껴졌다. 머리가 멍하니 울려서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코를 훌쩍이자, 코에서 선혈이 한 줄기 흘러내려 턱에 방울졌다. 피가 보이자, 8호의 머리채를 붙잡은 남자, 잰슨도 조금 분이 가라앉는 모양이었다.

밤색 턱수염이 구레나룻까지 이어진 사내다운 풍채의 남자였다. 투구를 쓰고 다닌 탓에 얼굴의 일부에만 햇살을 심하게 받은 듯, 얼굴의 일부만 타서 피부 톤이 침색되어 있다.

8호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여긴 어디죠?"

"네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이다, 이 개자식아!"

그래도 알아듣지 못하는 기색이자, 잰슨은 8호의 얼굴을 붙잡고 고함쳤다.

"모르는 척 해? 여긴 레이븐사이드 용병단 둔영 지하에 설치된 자치구 감옥이다. 네놈은 2건의 살인 및 절도 현행범으로 우리에게 체포되었다!"

"살인?"

"그래. 발뺌하지 마! 네놈이 이 칼로... 내 전우, 칼슨을 죽인 건 명백하게 드러나 있으니까!"

쨍그렁.

검날이 돌바닥에 부딪혀 바닥을 구른다. 눈에 익은 칼이었다. 17호가, 좀비화가 풀려 소생하려던 칼슨의 심장을 꿰뚫으며 썼던 바로 그 단검이다. 8호가 그것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약이 오른 듯 잰슨은 8호의 머리를 다시 한 번 창살에 쳐박았다.

"개자식! 그 녀석이 병신같이 순해빠진 걸 이용해서, 속여서 죽이고 돈을 훔쳐 달아나려고 해?"

8호는 아직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정확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늘 그렇듯이 백치 같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의 귓가에 거슬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칠판을 긁는 듯한 소리.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건 림의 웃음이었다. 등을 구부정하게 굽히고 천천히 8호의 귓가로 걸어온 림은, 씁쓸한 숨을 토해내며 속삭였다.

'그 마술사 계집이 너를 팔았다.'

'네 목을 물어서 네 정신을 빼앗고는, 네가 그 늙은이와 가엾은 위병의 시체를 난도질하도록 만들었어. 그리고 쪽지를 던져 저 남자를 오두막으로 불러내고, 도망쳤지.'

'너한테 죄를 전부 덮어씌우기 위해서 말이야.'

8호는 눈을 찡그렸다. 불쾌한 기억이 머리에 물밀듯이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림의 말대로였다. 17호에게 조종당할 때의 기억이 흐릿하게 뇌 속에 남아 있었다.

"그만. 슬픔은 이해하지만, 이제 그만하자구. 그런다고 해서 그 녀석이 살아돌아오는 것도 아니잖아. 정해진 통고만 하고 돌아가자. 하지만 나는... 여전히 믿기지가 않는군."

단장이라고 불린 여자. 아무렇게나 자른, 색이 옅은 검은색의 단발을 한 여자가 무릎을 낮추고 쭈그려앉아 시선을 맞추고 8호에게 물었다.

"얘. 꼬마야. 정말로 네가 그 모든 일을 한 거니?"

눈썹이 짙은 강인한 인상의 여자였다. 나이는 서른 즈음 되었을까. 뺨에 길게 남아 눈두덩까지 이어진 하얀 흉터가 눈에 띄었다. 목에는 장식물 없이 목줄만 있는 목걸이를 끼고 있다.

8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지긋이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두 사람이 아무말 없이 대치하고 있자, 림이 날개를 퍼덕이며 다가왔다. 연기처럼 감옥의 창살을 통과해 단장의 뒤에 선 림은, 이런 지혜를 속삭였다.

'이 인간 계집은 네게 연민을 느끼는 모양이구나. 이건 기회다.'

'뭐 해. 네가 한 짓이 아니라고 항변하라고. 어차피 그 마술사 년도 멀리 가지 못했을 거야. 잡아 오라고 해. 아, 거기에 그 년은 흡혈귀의 새끼이기도 하지. 전부 그 마귀의 새끼가 저지른 일이라고 말해. 그 년의 그 정체가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가 될 거야. 그 년을 붙잡아 아가리를 벌리는 순간, 너의 결백은 증명될 테다.'

동시에, 어떤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미안, 미안해.'

등에 업혀있던 17호가 남긴 마지막 숨소리였다. 입을 살짝 벌리고, 무언가를 말하려던 8호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수긍이었다.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인정.

"그래, 그렇구나."

단장이라고 불린 여자는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8호의 머리가 다시 바닥에 쳐박힌 것은 그와 동시였다. 잰슨은 이번엔 어떤 목걸이를 꺼내 8호의 목에 채웠다.

"네가 이제부터 받을 처벌을 알려주지. 너는 지금부터 우리의 전쟁 노예로 용병단에 복무하게 될 거다. 사람을 죽이는 걸 좋아하지? 전쟁터에서 네 특기를 실컷 발휘해보라고. 할 수 있으면 말이야. 언제까지냐면, 음, 2주면 되지 않을까?"

철컥. 목걸이의 자물쇠를 잠그며 그는 덧붙였다.

"범죄로 노예가 된 놈의 복무 기한은 뒈질 때까지인데, 보통 신입 노예는 2주면 뒤지거든."

뻥!

목걸이를 다 채운 그는 8호의 배를 걷어찼다. 목에 매인 목걸이는, 방 한 가운데에 박힌 쇠말뚝과 이어져 있었다. 사슬을 쩔렁거리며 벽면까지 날아간 8호는, 아픈 배를 감싸안고 쓰러져 색색 신음을 흘렸다.

쿵! 남자는 문을 닫고 감방을 나섰다. 단장이라고 불린 여자도 함께였다. 순식간에 어둡고 좁은 감방 안에는 신음을 토하는 8호 혼자 남았다. 정확히는 둘이 남았다. 8호와, 림.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림은 재미있다는 듯 웃어젖히고는, 나동그라진 8호의 귀에 속삭였다.

'그래, 이제 좀 후회하나? 내 말을 따르지 그랬나. 내 말대로지 않나?'

림은 그 샘터에서 했던 말을 다시 읊조린다.

'마술사는 남을 돕지 않는다. 이용할 뿐이지. 그저 이용하기 위해서 널 데리고 있는 거야. 죽여라. 이용당하기 전에.'

"조용히...해..."

너무 많이 얻어맞았기 때문일까. 서서히 희미해가는 의식 속에서, 8호는 폐부를 쥐어짜 간신히 말했다. 림은 그런 8호를 보며 다시 한 번 거슬리는 쇳소리로 웃어제꼈다. 하지만 8호의 귀에는 그것보다 또렷한 한 마디가 메아리치고 있었다.

'미안, 미안해.'

어떤 여자의, 미안하다는 속삭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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