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5화 (5/279)

2. Famous last words ( 1 )

전쟁을 막기 위한 노력과 그 실패의 결과물.

역사서란 그 다종다양한 노력과 실패를 씨실과 날실처럼 엮어 직조되어 있다.

그리고 이 곳 북서 자치령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들은, 그 모든 전쟁 가운데서도 가장 추잡하고 가치없는 것이었다. 이곳에서는 전쟁이 조작되고 있었다.

"자, 자, 서로 적당히 죽었나? 전사자 300명 채웠어?"

"예! 어디 보자... 확실합니다!"

"좋아, 그럼 철수하자! 북을 울려라!"

임시로 설치한 망루 위에서 전황을 살펴보던 지휘관. 그는 귀를 파며 대충 외쳤다. 코끼리의 트림처럼 기운 없고 커다랗기만 한 북소리가 울린다. 그와 동시에 나무젓가락 같은 병장기를 허우적거리던 병사 노예들이 엉거주춤 퇴각을 시작했다. 지휘관 옆에서 칠판에 무언가를 메모하던 부관이 물었다.

"그런데 이번엔 누구 승리로 기록됩니까?"

"보합세! 치열하게 다투었지만 보합세인걸로 하기로 했어. 저 쪽이 카나기 쪽 세력이잖아? 아지프보단 못하지만 어쨌든 2인자고, 돈 낭비를 안 하니 곳간은 오히려 아지프보다 넉넉해서 예산 인심은 거기가 더 후하다는 것 같던데. 거기 예산 편성이 요번 달이라고. 예산 많이 짜내려면 치열한 걸로 해줘야지."

"과연. 생각이 깊으십니다."

"우리한테도 1할은 떼준다고 하니까. 허리띠 풀어놓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아, 그리고 좀 씻고. 아가씨들은 더러운 거 싫어해."

"더러운 거 싫어하는 아가씨들이 창녀짓을 합니까?"

"어허! 고상하게 노류장화라고 해!"

왁자한 웃음이 터진다. 부관은 흥이 올라서 열심히 전투 일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거짓말만 가득한 일지를.

이 땅에서 전쟁이랍시고 하는 짓거리는 현지에서 노예를 징발해 서로 허우적대며 죽게 만드는 것 뿐이었다. 어떤 철학의 충돌도, 어떤 가치의 충돌도 아닌, 그저 전쟁의 흉내. 그러나 그 흉내를 낼 때마다 지휘관에게는 승전의 기록이 추가되고, 본가에서는 예산이 떨어지며, 아지프의 마도사들은 되살릴 장난감을 얻는다.

아무도 발딛고 싶어하지 않는 동떨어진 변방이기 때문에 감시가 허술하다는 것을 노린 짓거리였다. 그리고 이들은 거기에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아무런 쓸모 없는, 기껏해야 나무꾼이나 부랑자나 될 자치령민들을 최대한으로 유효활용하는 것 뿐이다. 그게 이들의 공통 인식이었다.

"아니다. 넌 안 씻는 게 낫겠다."

"예?"

"넌 물건이 너무 쬐끄매서 서도 아가씨들이 선 줄도 모르는 수준이잖아? 조금이라도 커 보이려면 밥이라도 잔뜩 붙어있어야지. 안 그래?"

웃음이 터져나온다. 부관은 얼굴이 빨개져서 머쓱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들 중 웃지 않는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 얼굴에 흰 흉터가 남은 검은 머리의 여자. 여기 모인 사람들 중 유일한 여성. 레이븐사이드의 단장이었다.

그녀는 얼굴을 딱딱하게 한 채로 퇴각하는 노예들을 바라보고 있다. 전쟁 노예들은 뒤통수에 날아오는 투창과 화살을 맞고, 하나둘씩 쓰러지고 있었다.

꼴에 여자라고 이런 게 싫은 건가? 그래도 용병으로 굴러먹었으면 어울려줄 만도 한데. 지휘관은 눈살을 찌푸렸다. 유명한 용병 국가, 기나센의 정예 용병단인 레이븐사이드. 자치령의 생리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몰랐던 아지프의 마탑에서 정말로 전투가 격화된 줄 알고 고용해 파견해버린 이들이었다.

'같이 칼밥 먹고 사는 주제에, 사사건건 유난 떤단 말이지.'

다른 용병단에게 이들은 골칫거리였다. 지금까지 외부에서 파견되었던 모든 용병단은 이 곳의 실체를 깨닫게 되는 즉시, 이들과 영합해 급료와 뇌물을 받아먹으며 매수됐다. 용병 입장에서도 손해볼 것이 없는 장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달랐다. 기나센에서 온 사람들답다고 할까. 그저 사상자를 만들어 전투 흉내를 내기 위해 노예를 차출해 싸우게 한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그 단장은 불같이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고, 결국 여기에 끌려와서도 하루종일 마뜩찮은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혹시 나중에 어디 고발해버리는 거 아니야?'

그게 모두의 가장 큰 걱정이었다. 지휘관은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단장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자, 자, 들으셨다시피, 다음 주쯤 예상치 못했던 부수입이 생겨서 파티를 열 작정인데, 혹시 참가해주실 수 있으신지? 그 유명한 기나센 출신이 무용담을 좀 들려주면 파티가 참 달아오를 것 같은데 말이지요."

"저건 뭐죠?"

없는 말재주로 쥐어짜낸 권유의 말을 무시하고 바닥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단장. 지휘관은 얼굴을 확 구겼지만, 어쩔 수 없이 단장을 따라 바닥을 바라보았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난 모래판. 그 위에서 한 명이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었다. 투창을 맞은 듯 등에는 기다란 창대가 꽂혀서 발걸음을 따라 대롱대롱 흔들린다. 지휘관은 혀를 차고 말했다.

"생존자군. 근데 곧 죽겠어."

"문을 두드리고 있는데요? 열어줘야 하지 않습니까?"

"어차피 곧 죽을텐데. 쓸모없는 일이죠."

"그래도 동료 아닙니까! 죽어도 우리 막사 안에서 죽게 해 줘야죠!"

주먹을 쥐고 소리치는 단장. 지휘관은 귀엽다는 듯 미소를 짓고 말한다.

"동료? 전쟁 노예가 말입니까?"

"그럼 동료가 아닙니까?"

대들 듯 고개를 쳐드는 단장. 지휘관은 빙글빙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좋아요. 문을 열어서 저 녀석을 받아들이라고 말하죠. 단, 조건이 있습니다."

"뭡니까?"

"다음 주 열릴 파티에 참석하십시오."

"그런 게 조건입니까? 알았어요."

짙은 눈썹을 찌푸리며 대답하자마자 지휘관은 문을 열라는 손짓을 했다. 문을 지키던 문지기들이 새끼줄을 잡아당기고, 굳게 닫힌 문이 열린다. 등에 창을 꽂힌 전쟁노예는 느긋하게 보일 정도로 태평한 움직임으로 그것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바닥에 푹 쓰러졌다.

"잠깐!"

단장은 망루에서 바로 바닥을 향해 뛰어내렸다. 5m가 넘는 망루에서 그냥 떨어진다고? 주변에선 다들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단장은 고양이같은 가벼운 발놀림으로 안전하게 착지했다. 그리고 바로 그 노예에게 달려간다. 그 노예의 머리색은 표백한 것처럼 희디 흰 백색이었다. 아직 어린아이인 듯 몸피는 작고 가냘펐다.

"괜찮니?"

머리를 붙들고 들어올리는 단장. 대답을 기대하고 한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너무나도 평온한 목소리의 대답이 돌아왔다.

"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아무 일 없다는 듯 등에 꽂힌 창을 뽑아 집어던졌다. 빼내기 힘들도록 마름모꼴로 깎은 창끝에는 살점이 잔뜩 달라붙어 있는데도 무슨 손가락에 낀 생선가시라도 빼내는 듯 태연한 몸짓이었다. 단장은 당황한 얼굴로 그 노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는 얼굴이었다. 지하 감옥에 있던 그 녀석. 8호였다.

"너... 아직 살아 있었구나?"

그 날로부터 벌써 3개월이 지났다. 어린 전쟁 노예는 대부분 2주도 가지 않아 죽어버리기 때문에, 벌써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8호는 살아남았다. 늘 혼자서.

8호는 참 이상한 질문을 한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고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네."

*

"어머. 잘못 봤던 건가? 상처가 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소독약을 들고 8호의 등을 어루만지던 단장은 매끈한 등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투창 때문에 생긴 창상은 이미 아문 지 오래였다. 하지만, 8호에게 재생력이 있다는 걸 알 리 없는 단장은 그저 사실 부러진 창대가 살짝 끼어 있던 것 뿐이라든지, 뭐 그런 걸 자신이 잘못 본 거라고만 생각했다.

"좀 뜨거울 수 있지만 참아."

촤악!

단장은 김이 날 정도로 달군 물을 8호의 머리에 끼얹었다. 너절한 수건 한 장만 두른 8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래야 이랑 서캐가 죽으니까. 그래도 여자애인데, 머리 정도는 잘 간수해야지."

늘 그렇듯 단장 역시 8호를 여자로 오해하고 있었다. 8호는 입을 열어 부정하려다가, 무슨 쓸모일까 싶어 그만두었다. 물에 젖어 축 늘어진 머리카락이 등에 달라붙는다. 단장은 능숙한 솜씨로 길게 자란 8호의 긴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머리를 감겨주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 했다.

"안 뜨겁니?"

"뜨거워요."

"참을성이 좋구나. 내 동생은, 어렸을 때 머리 감겨줄 때마다 비명이란 비명은 다 질렀는데."

내화성을 실험한다고 인두로 가죽을 지져질 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손가락 끝이 두피를 말랑말랑하게 어루만져줘서 기분이 좋기까지 했다. 단장은 다시 한 번 물을 끼얹고, 머리카락을 말아올리며 조용히 말했다.

"내가 원망스럽지 않니?"

"왜요?"

"너희처럼 어린 애들을 전쟁터에 몰아넣고, 뒤에서 지켜보고만 있으니까."

8호는 눈을 껌뻑거렸다. 충분히 가능한 생각이긴 한데. 워낙 윤리관이 비정상적인 인간들 사이에서 비정상적인 일만 겪고 살아왔다 보니, 이런 정상적인 감각에서 비롯된 죄책감이 오히려 낯설고 생경했다. 동시에 8호는 왜 이 사람이 갑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친절을 베푸는지도 이해했다. 그런 죄책감이 너무 쌓인 탓에 그걸 해소할 대상이 필요한 거겠지.

"이런 일인 줄 알았더라면, 애초에 의뢰를 받지 않는 건데..."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 물기를 털어주는 단장. 8호는 막 목욕한 강아지처럼 머리를 흔들었다. 수분을 머금어 촉촉해진 피부가 눈부시도록 하얗게 빛난다. 긴 머리카락에 감겨 새빨간 눈을 깜빡이는 8호는, 요정처럼 아름다웠다. 단장은 잠시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보다 옷을 입혀주었다. 얌전히 기지개를 켜서 통옷을 입는 8호.

"잠깐 앉아보렴."

8호를 붙잡고 자신의 무릎에 앉힌 단장은, 8호의 머리를 붙잡고 새끼줄처럼 땋기 시작했다.

"이것도 동생한테 자주 해 줬던 건데."

잠시 후. 8호는 두 갈래의 땋은 머리를 늘어뜨리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앉아 있었다. 원래도 그랬지만 그 모습은 영락없는 여자아이였다. 하나둘씩 옷을 입혀주는 단장. 마지막으로, 가장 께름칙한 물건만이 남았다. 둥근 족쇄.

잠시 망설이던 단장은 8호의 하얀 종아리에 족쇄를 채웠다. 족쇄에 계속 부딪혔을 복사뼈가 붉게 달아올라 있는 게 보였다. 아이의 발에 붙어있기엔 너무 무거운 철구가 쩔렁이며 움직인다.

"감사합니다."

8호는 고개를 숙여 꾸벅 인사했다. 17호에게 배운대로였다.

"잠깐!"

목욕탕을 빠져나가려는 8호의 뒤를 단장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8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단장을 바라보았다. 단장은 처음 보았을때 마주했던 그 진지한 얼굴로, 또박또박 물어보았다.

"정말로 네가 칼슨을 죽인 게 맞니?"

8호는 멍하니 그 얼굴을 지켜보다,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목욕탕을 빠져나갔다.

*

목욕탕을 빠져나와, 막사로 돌아가는 길.

얼굴이 드러나지 않도록 고개를 푹 숙이고 걷는 8호의 옆에서, 림은 계속 달라붙어 속삭였다.

'아주 대단한 순애보로군. 왜 이번에도 네가 한 일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은 게냐? 저 인간 계집은 아주 순진해빠져서, 울면서 살려달라고 빌면 살려줄 것 같은데 말이야.'

"시끄러."

'그런 건가? 넌 아직도 네 뒤통수를 후려갈긴 그 마술사 계집을 걱정하고 있는 거냐? 사실이 밝혀지면, 그 년을 잡기 위한 추적대가 편성될까봐? 오, 하긴. 어린 나이에 벌써 인간을 홀릴 줄 아는 흡혈귀의 새끼라니. 거기에 교활하고 잔인하기까지 하다니! 바로 모가지에 현상금이 걸려도 이상하지 않겠지.'

"누나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정신 좀 차리거라, 이 멍청하도록 착해 빠진 순례자야. 백치라는 단어는 널 위해 준비된 단어 같구나. 그 년은 애초에 네 누나도 아니잖아? 왜 아직도 누나라고 부르는 거야?'

"시끄럽다니까...악!"

8호는 엉덩방아를 찧었다. 림에게 신경을 쓰면서 걷느라, 앞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해서 누군가와 부딪히고 말았다. 코를 제대로 부딪혀서 얼굴이 쨍하니 울렸다. 8호는 코를 움켜쥐고 사과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소하미다."

"응?"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같은 사람이었다. 얼굴에 주근깨가 자잘하게 박힌 소년. 이 용병단의 간부 후보생이었나 뭐였나라고 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8호의 얼굴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몸이 달아올라서 황급하게 외쳤다.

"아! 너, 너, 그 그때 그 녀석이구나!"

"재소하미다."

"아냐, 그건 됐고. 아직도 여기에 있는지는 몰랐는데? 아, 네 언니는 어디에 있나?"

반가운 기색으로 8호의 모습을 훝어보던 남자. 그러나 그의 표정이 곧 딱딱하게 굳었다.

8호의 발에 걸린 족쇄. 전쟁 노예의 표식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건 뭐야? 왜 이걸 차고 있는 거야? 어디 나쁜 도적놈한테 붙잡혀왔나?"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어, 저기!"

8호는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남자를 지나쳐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

곳곳이 상해서, 비도 바람도 막지 못하는 천막.

이 좁디좁은 천막에는 무려 12명이 모여 생활했었다. 모두 전쟁노예였다. 밤에는 좁아서 잠을 잘 수가 없는 지경이었는데 지금은 넓기만 하다. 그 열두 명 중 단 한 명. 8호만이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8호는 좀먹은 진녹색 거적을 덮고 몸을 뒤척이다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찢어진 천막 틈 사이로 초승달이 보였다. 평소에는 눈을 감기만 하면 바로 잠이 드는 8호였지만, 오늘따라 쉽사리 잠을 못 이루고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다.

림은 그 옆에 턱을 괴고 누워서는 빙글빙글 웃으며 무언가를 속삭였다. 이 불길하고 할 일 없는 신은, 8호에게 들러붙어 8호를 놀리는 게 유일한 낙이 되어버린 모양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아무것도."

'내가 맞춰 볼까? 너는 아마도 낮에 만난 그 인간 여자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있겠지.'

"대단하네. 맞췄다."

림에게 얼굴이 보이지 않게, 몸을 뒤척이는 8호.

"다른 사람이 머리를 만져 주니까, 뭔가 되게 좋았어. 따뜻했어. 신기한 느낌이었어."

'전에는 그런 적이 없었나?'

"응. 아. 무슨 기계에 붙들려서, 머리를 이렇게 팍! 하고 절개당한 적은 있었어."

'그래?'

"응. 내 머릿속을 봐야 되는데, 자꾸 재생해서 붙어버리니까, 무슨 고리로 고정하고 불로 지지면서 못 붙게 막고..."

스스로 얘기하다 그 때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어깨를 붙잡고 부르르 떠는 8호. 림은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 다음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맞춰볼까? 넌 후회하고 있겠지.'

"후회? 무슨?"

'역시 그 때, 내가 그 놈을 죽이지 않았다고 말할 걸 그랬다는 후회 말이야.'

"아니야."

'거짓말하지 말거라, 어린 순례자여. 나는 이래뵈도 신이야. 너처럼 콩알만한 녀석의 머릿속이야, 절개하지 않아도 들여다보듯이 알고 있지.'

"아니라니까!"

빽 소리를 지르는 8호. 8호가 감정을 드러내는 건 아주 드문 일이었다. 정곡을 찔렸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그런 식으로 생각을 했던 건 아니었다. 그냥 한 번 더 머리를 감아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의 저간에, 본인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희미한 후회가 싹트고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만약 그때 내가 죽이지 않았다고 말하면, 어쩌면 한 번 더 머리를 만져줄 지도 몰랐었는데, 하고.

씩씩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8호. 마구잡이로 주먹도 휘둘렀다. 하지만 주먹은 허무하게 림을 통과할 뿐이었다. 쿵! 주먹이 바닥을 후려친다. 동시에 비명이 울렸다. 림의 것이 아니었다. 천막 저쪽에서 들려오는 비명이었다.

"히이익! 죄, 죄송합니다!"

"응?"

천막 안에 혼자만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8호는 몸을 일으켜서 비명이 들린 곳을 향해 걸어갔다. 거기에는 8호보다도 작은 아이 한 명이, 거적에 몸을 말아 숨기고 벌벌 떨고 있었다.

"넌 뭐야?"

"오, 오늘, 여기 새로 온, 사람인데요... 분명히, 이 천막 쓰던 사람은 다 주,죽어서, 아무도 없을 거라고 했는데..."

관리자는 아마도 8호가 단장에게 붙들려 돌아오지 않으니까, 죽었다고 생각해버린 것 같았다. 이 아이는 8호를 보고 덜덜 떨더니 거적을 번쩍 들어 얼굴을 가렸다.

"히이익! 그러니까 제발 저승으로 돌아가 주세요!"

"뭐?"

8호는 그제서야 이 아이가 왜이렇게 자신을 무서워하는지 깨달았다. 이 아이는 8호를 유령이라고 생각하던 모양이었다. 8호는 두 손을 들고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해보았다.

"왁."

"히이이이이익!"

깜짝 놀라 자지러지는 아이. 8호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음을 지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