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6화 (6/279)

2. Famous last words ( 2 )

노예의 찬은 초라했다.

"다음!"

꾀죄죄한 앞치마를 두른 남자가 8호가 든 바가지에 국자를 휘둘러 무언가를 퍼담고는 소리쳤다. 8호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허물어진 돌담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가지에 담긴 것은 콩깻묵과 도토리가루를 섞은 것이었다. 둘의 공통점은 돼지 사료라는 것. 이것이 8호와 같은 사람들의 주식이었다.

돌담 옆에 야트막하게 패인 그림자에 몸을 숨긴 8호. 무릎을 맞대 그 위에 바가지를 올려놓고서는, 손가락으로 콩깻묵에 도토리가루를 발라 입에 옮긴다. 형체도 없는 반죽 같은 것을 오물오물 씹으며 멍하니 배식조를 바라본다. 땡볕이 바싹 내리쬐이는 한낮, 8호보다도 자그마한 아이가 발을 딛어 간신히 배식을 받는 게 보였다.

"응?"

그리고, 그 아이는 이 쪽으로 다가왔다. 아는 얼굴이다. 얼마 전부터 같은 천막을 사용하게 된, 새로 끌려온 아이였다. 이름은 이본이라고 했다. 불안한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던 이본은 웅크리고 앉은 8호를 발견하고 확 얼굴을 피더니 성급히 달려오기 시작했다.

"어."

너무 성급하게 달린 나머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손에 쥔 바가지도 바닥에 쏟아졌다. 뒤에서는 왁자하게 웃음이 피어났다. 울먹이는 얼굴로 일어난 이본은, 흩어진 가루를 마구 쥐어 바가지에 쑤셔넣었다. 도토리와 함께 진흙이 들어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빠르게 사태를 정리한 이본은 바가지를 들고 8호의 옆에 다가와서, 8호와 같은 자세로 앉았다. 그리고, 8호를 따라 가루 한 움큼을 입에 집어넣었다.

"윽."

먹지 못하고 에퉤퉤 침을 뱉는 이본. 공들여 조리되지 않은 도토리는 탄닌 때문에 매우 쓰고 떫었다. 어린아이가 먹기에는 너무 힘든 맛이었다. 거기에 흙까지 들어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8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걸 보다가, 또 한 움큼 콩깻묵에 도토리가루를 발라 입에 가져갔다. 8호가 떫은 표정을 짓는 걸 기대했던 이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형은 어떻게 이걸 그렇게 잘 먹어요?"

"이것 말곤 먹을 게 없으니까."

금세 바닥을 드러내는 8호의 바가지. 이본은 그 모습을 보고 침을 꿀떡이더니 자신의 바가지에 손을 옮겼다. 그러나 또 삼키자마자 혀를 만지며 연신 침을 뱉는다. 아까 진흙이 섞여들어가며, 두터운 진흙 더미가 도토리가루 사이사이 섞여 있었다.

이본은 질색한 얼굴로 그 진흙 덩어리 하나를 집어들었다. 8호는 무릎을 끌어안고, 마지막으로 바가지 바닥에 붙은 가루를 모아 경단을 만들며 조용히 말했다.

"익숙해지는 게 좋아. 잘 먹지 않으면, 싸울 수 없으니까."

"싸워요?"

"어제 갑옷 닦는 일을 했었잖아. 그 소리는 내일이나 모레쯤에는 또 싸워야 된다는 거야. 배고파서 힘 없으면, 죽을걸."

죽는다는 말을 듣자 이본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허겁지겁 바가지를 들이키듯 먹기 시작했다. 8호는 뺨을 무릎에 댄 채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8호와 대면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이본은 8호가 무해한 인간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나아가, 의존해도 해코지를 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 날 밤부터 계속 이렇게 8호의 옆에 달라붙어서는 하나 하나 조언을 구하고 8호의 행동을 따라하려 들었다.

천성이었다. 어린아이다운 어린아이가 가진 천성. 8호는 그것이 굉장히 신기했다. 어떻게 이렇게 쉽게 다른 사람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걸까. 지금까지 8호가 보지 못했던 종류의 습성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보긴 보았으나 너무 일찍 헤어졌다. 아지프의 마탑에서는 이런 실험체일수록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다 먹었어요!"

연신 표정을 구기면서도 바가지의 바닥이 보이도록 긁어먹는 이본. 확인하라는 듯 바가지 바닥을 보여준다. 칭찬해 달라는 건가?

"잘했네."

"정말 먹기 힘든데 다 먹었어요!"

"그래. 근데 궁금한 게 있어."

"뭔가요?"

"흙은 왜 먹은 거야?"

눈을 땡그랗게 뜨는 이본. 그리고 당황해서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하지만... 아까... 형이 다 먹으라고..."

"난 흙은 먹으라고 한 적 없는데."

"네?"

"더럽잖아. 벌레나 똥 같은게 들어 있을 수도 있고."

8호는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이본은 사색이 되어서는 혓바닥에 잔뜩 묻은 뭔가를 퉤퉤 침을 뱉으며 털어내기 시작했다. 뒤에서 커다란 웃음이 터졌다. 8호를 감싸듯 앉아서는 둘이 노는 걸 지켜보는 림의 웃음이었다. 간신히 흙을 게워낸 이본은 침을 닦으며 헥헥거렸다.

"어쨌든... 형이 하는 말 잘 들었어요..."

"잘했네."

"그럼 저, 켈록, 살 수 있어요? 형처럼?"

"글쎄. 아마 죽지 않을까."

"네?"

울 듯한 표정이 되어 눈을 땡그랗게 뜨는 이본. 8호는 무릎을 끌어안은 채로 뺨을 무릎에 깊게 기대고 이본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처럼 어린 아이들이 제일 먼저 표적이 되던데. 십 분도 못 가서 다 귀를 잘렸어."

"히이이익!"

이본은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림은 그 모습이 우스웠는지, 아예 배를 잡고 우렁차게 웃어젖혔다.

*

초라하고 짧은 식사 끝에 찾아오는 것은 노역이었다. 채찍을 든 감독관의 통제를 따라, 철구를 매단 크고 작고 어리고 늙은 노예들이 한 줄로 모여 노역장으로의 길을 걷는다. 한가득 울리는 쩔그렁 소리. 손에는 한 아름의 대나무와 칡넝쿨을 들고 있다.

오늘 할 일은 내다 팔 광주리를 짜는 것이었다. 이본은 혹시라도 8호에게서 떨어질까봐, 한가득 짐을 끌어안고도 필사적으로 아둥바둥하며 8호의 무심한 발걸음을 뒤따랐다.

"저기 봐."

"저 놈, 또 혼자 살아 돌아왔어."

아궁이를 지날 무렵. 불을 지피던 노예들이 8호를 보고 수근거렸다. 유난히 눈에 띄는 겉모습 때문에 8호는 상당한 주목을 받고 있었다. 처음에는 안타까움이었다면, 이젠 경악과 두려움의 주목을.

전장에서 창 한 자루 제대로 휘두르기 힘들어하는 어린아이들은 가장 먹음직한 표적이었다. 이 땅에서 치러지는 전쟁이 이런 가짜 전쟁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전투용으로 차출되지도 않았을 정도로 무력한 것이 소년병이다. 그런데 그런 소년병이 3개월간 7번의 전투를 치르면서 계속 혼자 살아돌아왔다.

"귀신이나 괴물인가?"

"저 놈 눈깔을 봐봐. 분명히 어떤 마귀의 새끼라니까."

"병신, 마귀의 새끼가 이런 데 붙들려서 노역질이나 하고 있겠냐."

이런 소문이 돌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8호는 고개를 홱 돌려 자신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와 동시에 앞으로 움직이라고 독려하는 감독관의 외침이 울렸다.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고 앞 사람의 등을 따라 움직이는 8호.

"저 꼬맹이가 그 놈이야?"

"주변의 운을 빨아들이는 놈일지도 몰라. 저 놈이랑 같이 나간 애들은 항상 다 죽었대잖아."

"이 쪽 본다. 보지 마! 재수없으니까."

퉤! 침을 뱉는다. 이런 식으로, 8호가 지나가는 곳마다 수군거림은 끊이질 않았다. 8호는 묵묵히 행렬을 따라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

"1인당 할당량은 10개다! 저녁까지 10개를 못 만들면 내일 점심은 없을 줄 알아라! 신입이 있다면 앞 사람이 가르쳐주도록! 신입이 만들지 못하면 앞 사람도 연대책임이다!"

우렁찬 목소리였다. 감독관은 끝이 아홉 개로 갈라진 채찍으로 바닥을 후려쳐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 말에 맞춰 사람들은 부산스레 움직인다. 이본은 침을 꿀떡이며, 넝쿨을 움켜쥐고 곤란해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의미 없이 몇 번 까끌까끌한 넝쿨 자락을 매만지던 이본은, 곧 8호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8호는 이빨로 덩굴을 잘근잘근 씹어 끊고는, 능숙한 솜씨로 8자로 만들어 손가락에 걸고 넝쿨을 얽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얼른 입으로 넝쿨을 가져가는 이본. 하지만 아직 젖니도 빠지지 않은 어린아이의 치악력으로 질긴 넝쿨을 끊는 건 무리였다. 침이 흥건하게 흘러내릴 뿐, 넝쿨은 잘려나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으우윽..."

울상이 되어 신음을 흘리는 이본. 막 광주리 하나를 완성하고 대나무 심을 끼워넣던 8호는 그제야 이본을 발견하곤 고개를 돌렸다. 다른 사람들이 다 한 두어개의 광주리를 만들 동안, 이본은 시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8호가 손을 뻗어 도움을 주려는 순간, 열심히 넝쿨을 씹고 있는 이본에게서 누군가가 넝쿨을 빼앗았다.

"넌 이걸 먹기라도 하려는 거냐? 아무리 배가 고파도 이런 걸 먹으려고 하면 안 돼."

겨울 잔디처럼 짧게 친 백발의 중년이었다. 고생을 많이 한 듯 이마에 자글자글한 주름과 화상 자국이 있다. 그는 우물쭈물하는 이본에게서 넝쿨을 빼앗곤, 작은 칼을 꺼내 몇 개로 토막내어 돌려주었다.

"어."

8호는 눈을 크게 떴다. 여러 우려 때문에 노예는 날붙이를 소지하는 게 금지되어 있었다. 중년은 8호의 시선의 의미를 눈치채고는 코웃음을 쳤다.

"왜? 고자질이라도 할 거냐?"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8호. 이본은 중년이 잘라준 넝쿨을 잔뜩 품에 안고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저, 감사합니다."

"이 동네 아이가 아니지?"

"네?"

"이 좆같은 땅에서 굴러먹는 놈들은 말이야. 다섯 살 짜리도 광주리니 짚신이니 새끼니 다 꼴 줄 알더라고. 그 때부터 밥벌이를 해야 되니까 말이야. 어디 다른 데서 팔려왔냐?"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이는 이본. 중년은 그러나 그 모습을 보지도 않고 대나무를 다듬으며 말했다.

"머리털에 물들인 흔적이 있구나. 도시 아이냐?"

"네? 네..."

"그럼 웨스벤 출신이겠군."

"어? 어떻게 아셨어요?"

"나 정도 나이를 먹으면 웬만한 건 알기 싫어도 알게 된단 말이지."

마술이라도 본 듯 눈이 휘둥그레지는 이본. 대나무 심을 꼬아 네 개째의 광주리를 만든 중년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자치령 근처에 도시라고는 거기밖에 없으니 당연한 거 아니냐. 대충 쓰다 칼받이로 버릴 꼬맹이를 먼 곳에서 먹이고 재우고 입혀가며 끌고 올리도 없고."

이본은 코를 훌쩍였다. 중년은 무심하게 다른 넝쿨을 집어들어 작업을 시작하며 계속 말을 중얼거렸다. 그저 심심풀이로 입을 놀리기 위해 아무 말이나 하는 듯한 인상이었다.

"그래도 거기는 소금광산 때문에 나름 윤택하게 살던 곳인데 말이야. 거기도 인심이 말이 아니게 된 모양이군. 부모가 이런... 젖니도 안 빠진 꼬맹이까지 팔아먹다니."

"부모가 아니에요! 그, 저, 엄마가 아파서, 약값이 필요하대서, 근처 여관에 일하면서 품삯을 받기로 했는데, 여관 아저씨가 멋대로 한 거에요!"

"응? 꼬맹아, 너는..."

퀭하니 눈을 뜨는 중년. 너는 그렇게 믿고 싶겠지만... 갈라진 입술이 뭔가를 중얼거리려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조금은 눈치가 생긴 8호는 이 남자가 왜 그랬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는 그 후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재빠른 솜씨로 마지막 광주리를 짜는 걸 마치고는 손을 턴다.

이본은 감정이 격해진 것인지, 볼을 잔뜩 부풀리고 엉망진창으로 줄을 꼬고 있었다.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다. 다른 사람들이 슬슬 절반 이상 작업을 진행할 동안, 이본은 한 개도 제대로 끝마치지 못하고 있었다.

"받아라."

그런 이본 앞에 포갠 광주리가 던져졌다. 이본은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자기가 만든 광주리를 던져주고는, 이본의 앞에 놓인 줄기를 집어 다시 광주리를 짜기 시작했다. 이본 대신 작업을 해 줄 생각인 것 같았다.

"저, 그..."

"할당량을 못 지키면 저 연단에 끌려가서 채찍을 맞는다. 애라고 봐주지 않아. 채찍을 맞고 싶은 게냐?"

뚝 울음을 그치는 이본. 어느새 8호도 작업을 끝마쳤다. 8호 역시 이본의 앞에 놓인 넝쿨을 집어 광주리를 짜기 시작했다.

"어떻게 네가 웨스벤에서 온 걸 아느냐고 물었지? 사실은, 나도 여기 출신이 아니거든. 일 때문에 여기 들렀다가 억울하게 붙잡혀서 3년째 이짓거리를 계속하고 있지."

남자는 칼을 꺼내 줄기를 다듬으며 또 무심하게 내뱉었다.

"그러다보니 이 좆같은 땅에서 난 놈이랑 아닌 놈은, 척 보기만 해도 구분이 가. 같은 품종이어도 탱자와 귤이 쉽게 구분되는 것처럼 말이다. 예를 들면... 니가 졸졸 따라다니는 이 꼬맹이는 아마 여기 출신일 거다. 맞지?"

칼끝으로 8호를 가리키며 그렇게 말하는 남자. 8호는 고개를 갸웃하다, 부정해서 뭔 의미가 있을까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중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여기 애들은 어려서부터 감각이 돌아 있거든. 무뎌졌다고 해야 하나. 불탄 심지처럼 시꺼멓게 죽은 눈빛을 하고 있단 말야. 그러다보니 너처럼 바깥에서 온 애들은 눈에 띄는거야. 넌 여기보단... 좀 다른 곳의 애들을 닮았거든. 그래, 예를 들자면 내 고향."

"고향이요?"

"동쪽... 그러니까, 해 뜨는 곳으로 한참 가면 나오는 작은 마을인데 말야. 너무 작아서 이름도 없는 산촌이지. 손 하나 대지 않아도 사과와 배가 잔뜩 열리고, 가을이면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는 곳이야. 거기선, 너 같은 꼬마들은 이런 일 할 필요도 없이 그저 뛰어다니기만 한다고. 가끔 철쭉 꽃이 보이면, 꽃을 따서 나비마냥 꿀이나 쪽 빨아먹고 말이야."

어딘가 애수에 찬 듯한 어조로 말을 주절대는 남자. 고향이 어딘지, 고향의 이름이 무엇인지, 역사가 어떻게 되는지도 줄줄 늘어놓는다. 그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말을 받은 것은 곰곰히 생각하던 8호였다.

"꿀? 그게 뭔데요?"

남자는 눈썹을 씰룩였다.

"뭐냐. 살면서 꿀이라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거냐?"

8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 참..."

설마 그런 것도 모를 줄은 몰랐다는 듯 난처해하는 남자. 간신히 말을 찾아서 더듬더듬 설명했다.

"그러니까, 먹으면 아주 행복한 기분이 드는, 달콤한 황금빛 액체란 말이다. 꽃이 나비와 벌을 유혹하기 위해 만드는 거야."

"나비? 벌?"

"하루종일 날아다니는 곤충들인데..."

"행복? 달콤?"

"제기랄. 그것도 뭔지 모른다고 지껄이진 마라. 넌 무슨 바보 천치라도 되는 게냐?"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남자. 그는 곧 마지막 광주리를 만들어서 이본 앞에 던져주고 손을 털었다. 이본은 황급히 그걸 받아들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됐다. 심심한 김에 한 거니까."

"다, 다음에는 저도 도울게요!"

"다음? 다음은 없어. 이 빌어먹을 동네에 내가 있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라서."

어깨를 으쓱하는 중년.

"오늘 풀려나는 건 나거든."

자치령에서 일어나는 가짜 전쟁.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목적도 동기도 없으니, 처음에는 양측 다 전혀 싸우려 들지 않고 지지부진했다. 그래서 그들은 미끼를 만들었다. 적군을 무찌르고 일정 수의 귀를 잘라오면 자유를 주겠다는 약속을.

하필 귀를 징표로 삼은 이유는 간단했다. 주된 적군인 카나기의 노예 관리 방식 때문이었다. 그들은 노예들의 귓볼에 구멍을 뚫고 인식표가 달린 귀걸이를 박아넣었다. 때문에 잘린 귀 무더기를 들고 왔을 때, 그게 어느 쪽의 귀인지 식별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구멍이 뚫려 있으면 카나기의 것이고, 아니면 아지프의 것이었다.

이 제도의 효율성은 금방 입증되었다. 아지프 쪽의 전과가 두드러지게 향상되었던 것이다. 카나기도 금세 이 제도를 베껴 채택했다. 그래서 전장은 서로의 귀를 노리는 사람들과 귀 잘린 시체로 가득하게 되었다.

"이제 곧 발표를 시작하겠지. 그럼 이 군내나는 지긋지긋한 곳과도 작별이다."

매번 전투가 찾아오기 전날 밤이면, 그들은 이 제도를 통해 자유의 몸이 된 사람들을 불러 표창하고, 약간의 노자와 옷을 공개적으로 넘겨주고 풀어주었다. 사기를 향상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말대로였다. 검수가 끝나고 완성된 광주리를 거둬간 이후, 연단에 선 감독관은 우렁차게 중년의 이름을 호명했다. 사람들의 부러움 섞인 시선을 받으며, 무대 위로 걸어올라가는 남자. 감독관은 후줄근한 노예들을 오시하며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모두 주목! 여기 이 자는..."

그 말을 뒤따른 행동은 중년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짝! 채찍이 살을 찢는 소리. 감독관은 손에 든 아홉 갈래의 채찍으로 남자를 후려쳤다.

"제군이 절대로 본받아선 안 될 구더기다!"

"크악!"

끝이 갈라진 채찍이 남자의 등을 마구잡이로 난도질하고, 불의의 기습을 당한 중년은 중심을 잃고 앞으로 쓰러졌다. 짐승이 발톱으로 후려갈긴 듯 시뻘건 상처가 벌어진 등 위로, 다시 한 번 채찍이 몰아쳤다. 투구를 쓴 부관들이 중년의 겨드랑이를 붙잡고 억지로 일으켜세운다.

"이 자는 귀 스무 개를 모아 왔다... 자기가 인솔하기로 한 분대를 적군에게 팔아넘기고! 적군과 부정한 거래를 해서 이 귀 쪼가리를 받아온 것이다! 버러지 같은 자식, 너는 스스로 영리하다고 생각했겠지?"

짜악!

또 등을 후려치는 감독관. 아홉 꼬리 여우라고도 불리는 그 채찍은 무기로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고통에 몸부림치게 만들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쇳가루를 먹여 검날처럼 날카로운 채찍은, 남자의 등을 갈기갈기 찢어 하얀 뼈가 드러나보일 정도로 파먹었다. 그는 부관들에게 구속당한 중년을 마구 후려치며 씹어뱉듯이 외쳤다.

"네가! 팔아먹은! 전우! 중에서! 생존자가! 있었단 말이다! 그 자가 모든 걸 고발했다!"

응분의 대가라고 해도 잔혹했다. 장내에 가득 차오르는 피비린내. 한동안 감독관의 숨소리와 남자의 신음소리 외에는 어떠한 말도 오가지 않았다. 채찍이 한 가닥 끊어질 때까지 난도질을 한 감독관은, 가쁜 숨을 내쉬고 투구를 벗어 땀을 닦았다. 그리고 매섭게 소리쳤다.

"이 놈이 팔아먹은 전우 중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도 있었다! 제군들은 이런 비열한 방법으로는 절대 자유를 손에 넣을 수 없다는 걸 명심하도록!"

"....지랄..."

"지금 뭐라고 했나?"

"지랄맞은 소리하지 말라고 했다! 어이, 꼬맹이!"

눈을 희번득거리며 어딘지도 모르게 외치는 중년.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발음이 불분명했다. 오들오들 떨며 그 잔혹극을 지켜보던 이본은, 본능적으로 남자가 자신을 부르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딴 개소리 무시해라! 난 그냥 운이 없어서, 쿨럭, 걸린 거야! 스무 명을 죽이고 생귀 스무 개를 잘라 오라니, 옘병, 그게 씨발 가능한 소리야? 지금까지, 쿨럭! 나간 놈들은, 다 이 방법으로 나갔어!"

"이 자식이!"

망가진 채찍으로 뺨을 후려치는 감독관. 하지만 중년은 유언이라도 남기듯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질렀다.

"정말로 살고 싶다면, 이 개새끼들 말은 무시하고, 최대한 니 동료부터 팔아넘겨라!"

"입을 막아!"

찢어진 헝겊을 주워 입에 물리는 부관. 마구 몸부림치며 저항하던 중년은 곧 뒤통수를 얻어맞고 바닥에 푹 쓰러졌다. 감독관은 피로 얼룩진 뒤통수에 침을 칵 뱉고는 외쳤다.

"이 놈은 본보기로 뒤편의 망가진 물레바퀴에 묶어 굶어죽게 만들 거다! 전우를 팔아넘긴 놈의 말로가 어떤 꼬라지인지 다들 똑똑히 지켜보도록! 이상!"

해산을 요구하는 감독관의 외침.

그러나 눈 앞에서 벌어진 일에 압도당한 좌중은 누구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감독관은 투구를 바닥에 크게 내동댕이치고, 채찍을 바닥에 내려찍으며 다시 외쳤다.

"이상!"

한계를 넘도록 혹사당한 채찍은 여덟 갈래로 끊어져 흩날렸다.

*

깊은 새벽.

각지에서 모여든 용병단들이 이 지역을 점거해 둔영으로 바꾸기 한참 전부터 자리하고 있던, 낡은 물레바퀴에서는 신음이 끊이질 않았다. 사지를 바퀴에 결박당한 중년의 신음이었다. 그 앞에 두 개의 작은 그림자가 어린다. 8호와 이본이었다.

"저, 그, 괜찮아요?"

대답은 없었다. 척 보기에도 괜찮지 않은데. 괜한 말을 꺼냈다. 이본은 스스로 자책하고는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대잎에 싼 주먹밥이었다. 내일 전투가 있기에 특식으로 내려온 것. 이본은 무릎을 꿇고 조심스레 그걸 받쳐들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아, 아까, 도와주신 거, 보답이에요..."

"치워라."

두 꼬마가 앞에 나타났을 때부터, 죽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자는, 위협하듯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이본은 침을 꿀꺽 삼키고 잇달아 물었다.

"아까 그 나쁜 아저씨가 한 말, 거짓말이죠?"

"..."

"아저씨처럼 착한 사람이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쵸?"

그는 그 말을 듣더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이고 씹어뱉듯이 말했다.

"그 하얀 꼬맹이만 바보 천치가 아니었구만."

"네?"

"착한 사람? 난 원래부터 거짓말쟁이다. 아까도 거짓말밖에 안 했지. 여기 붙들린 이유도, 전혀 억울하지 않아. 쿨럭, 군수업자를 속여서 한 탕 해쳐먹으려다 병신같이 걸린 거야."

눈을 끔뻑거리는 이본.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남자는 고개를 푹 숙인채로, 고해하듯 계속 읊조렸다.

"그런 새끼한테라도 보답을 하고 싶다면, 쿨럭, 좀 다른 방법으로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뭔데요?"

"내 앞섶 안주머니에, 아까 봤던 단검이 있을 거다. 꺼내."

이본이 다가가서 간신히 단검을 꺼내자, 그는 두 글자를 덧붙였다.

"그리고 끝내."

"예?"

눈을 크게 뜨는 이본. 그 말뜻을 먼저 알아들은 것은 8호였다. 8호는 이본에게서 단검을 빼앗아서, 남자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자주 했던 일이었기 때문에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아지프의 실험실에서는 이렇게 고통만 받는 초주검 상태가 되어, 편안한 안식을 부탁하는 실험체를 보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8호가 칼을 들고 다가서자, 남자는 핏줄이 터져 피가 흘러내리는 눈을 감고 조용히 끝을 기다렸다. 그 눈을 다시 뜨게 만든 것은, 이본의 비명같은 외침이었다.

"왜요? 왜 그런 거에요?"

"고향. 죽기 직전에, 한 번이라도 고향에 돌아가보고 싶었다."

"거기가 그렇게 좋아요?! 그,그런 짓을 해서라도 가야 할 정도로 좋냐구요!"

"아니. 사실 그것도 거짓말이라고. 쿨럭, 내 고향은 그냥 다 굶어죽어가는 화전촌이야. 겨울만 오면 먹을 게 없어서, 다 같이 찬 바닥에서 굶주리고 있었지. 입을 줄이고 싶어서 열두 살에 무작정 집을 뛰쳐나왔다. 그래도..."

다시 눈을 감는 남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돌아가보고 싶었다."

콱!

8호의 손을 떠난 단검이, 남자의 심장에 꽂혔다. 이미 맥박이 느려져있었기 때문일까. 샘물처럼 느리고 천천히 퍼져나오는 진혈. 8호는 단검을 꾹 집어넣어 혹시라도 고통받지 않도록 확실히 숨을 끊어 주고는, 단검을 뽑았다.

"그건 네가 가져라."

숨이 끊어지기 전. 남자는 마지막으로 그렇게 속삭였다. 8호는 물끄러미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고 단검을 주머니에 넣었다. 이본은 계속 흐느끼고 있었다.

*

사람이 죽는 걸 처음 봤던 때가 언제였더라.

그때 나도 이렇게 울었었나?

8호는 자신의 품에 안겨서 계속 말도 못 꺼내고 흐느끼는 이본을 보며, 멍하니 그것을 생각했다. 엄마를 찾으며 웅크려 있던 이본은 울다가 제 풀에 지쳐서 잠에 빠졌다. 하지만 8호는 잠에 들 수 없었다. 뒤척이다 하늘을 보자, 천막에 뚫린 구멍 너머로 아스라히 흩뿌려진 별자국이 보인다. 조용히 그 하늘을 감상하던 8호는 곧 눈을 찌푸렸다. 누군가가 그 구멍 가득 얼굴을 들이밀었기 때문이다. 시뻘건 얼굴을.

"림. 저리 가."

'어린 순례자야, 너는 항상 내게 그 말만 하는구나.'

"모처럼 안 보여서 속시원했는데."

림의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돌아눕는 8호. 그 박피된 인간 같은 모습은 아무리 보아도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또 뭘 그렇게 고민하고 있나? 수태시키고 싶은 암컷이라도 생긴 게냐?'

"시끄러. 잘 거니까 조용히 해."

눈을 질끈 감는 8호. 하지만, 마지막으로 중년이 남긴 말이 떠올라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대화하고 싶은 욕구가 수면욕을 이겼다.

"림, 있지, 왜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살려고 하는 걸까?"

'어린 나이에 무슨 부조리 철학에라도 눈을 뜨셨나? 네가 할 질문이 아닌 것 같은데.'

8호는 간략하게 아까 있던 일을 말해주었다. 림은 빙글빙글 웃으며, 8호의 말을 듣는다.

"그 아저씨가 왜 그랬는지 이해가 안 가. 고향에 돌아가는게, 스무 명을 죽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을까."

'그 자에게는 그랬을수도 있지.'

"그게, 모르겠어."

8호는 자신의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잠자고 있는 이본을 보며 또 멍하니 중얼거렸다.

"얘는, 자기 엄마가 그렇게 보고 싶은가봐.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서 살아남아야 되겠대. 이상하지?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이유가 되는 거야?"

'이 꼬마에게는 그럴 수도 있다니까.'

"정말 모르겠어. 이 세상에는 잘 모르겠는 것 뿐이야."

8호는 중얼거렸다. 또 하나의 예시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누나는 왜 그렇게까지해서 살아야 했던 걸까. 그 표독스러운 표정과 송곳니가 뇌리에 박힌 이후로, 가슴 속을 떠나지 않는 질문이었다.

"다들 왜 그런, 별 것도 아닌 거 때문에, 무슨 추잡한 짓을 해서라도 살려고 하는 거야? 그리고 왜 다들 그게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는 거야. 살려면 무슨 나쁜 짓을 해도 된다는 거야? 난 하나도 이해가 안 가."

'오, 그럼 내가 그걸 이해하게 도와줄까.'

"어떻게?"

'서원해라. 모든 마술사를 쳐죽이겠다고. 그러면 내가 네게 사냥의 기쁨을 가르쳐주마.'

"싫다고 했잖아."

8호는 토라진 듯 픽 돌아서서 웅얼거렸다.

"잘 모르겠어. 어차피, 살아 봤자, 좋은 일도 없는데..."

'모든 인간은 삶의 기쁨과 보람을 찾아 헤매는 순례자다. 그 목적은, 어차피 이 모래시계 같은 현세에 속한 것인 한 다 모래알만큼이나 무의미한 거야. 그 무의미한 걸 의미있게 만드는 게 인간이다. 기쁨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이다. 어미가 보고 싶다, 고향이 보고 싶다, 그런 하찮은 이유를 위해 쓴 삶을 견디는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지? 거꾸로, 그런 보잘것없는 것을 가치있게 만드는 게 목적을 추구하는 인간이라는 동물이란 말이지.'

"나 열두 살이야. 그런 긴 말 못알아들어. 림은 바보야. 짧게 말해."

앙탈을 부리듯 고개를 흔들며 말하는 8호. 림은 쇠를 긁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묻는다.

'너는 진정으로 살면서 즐거웠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거냐?'

"없어."

'정말로?'

눈을 질끈 감은 8호. 그 확인의 질문을 듣자 암막처럼 드리운 눈꺼풀 뒤편의 어둠에, 어떤 기억이 어른거렸다. 너른 들판의 기억이. 막 할머니에게 거두어졌을 무렵의 일이었다. 늘 그렇듯 들판에 멍하니 서 있는 자신이 보인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 종종걸음으로 달려오는 여자아이가 보인다. 17호였다. 그 손에는 풀꽃을 뽑아 엮은 화관이 들려 있었다.

"자! 내 거 만들면서 네 것도 만들었어!"

멍하니 서 있는 8호의 머리에, 억지로 화관을 씌워 주는 17호. 그리고는 감탄사를 내지른다.

"진짜 귀엽다! 누구 동생이길래 이렇게 귀여워?"

"동생?"

8호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17호는 송곳니를 씩 드러내면서 8호의 머리를 마구 헝크러뜨렸다.

"내가 누나고! 네가 동생인 거야. 알았어?"

17호가 자기가 누나라고 주장한 건 이 때가 처음이었다. 8호는 그 울림이 나쁘지 않았다. 그저 아이들이 으레 하는 가족놀이일 뿐이라도, 가족 비슷한 걸 가져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기억이 끝나자마자, 새하얀 송곳니 위로 또 다른 표정이 오버랩된다. 단검을 든 채 칼슨의 시체 위에 올라타서 자신을 노려보던 17호의 모습이었다. 그 표정은 지독하도록 표독스럽다. 그것은 뱀처럼 혓바닥을 일렁이며 소리친다.

"그래! 뭐, 나한테 실망했어? 난 다 죽일거야! 엄마도, 아빠도, 이렇게 죽었단 말이야!"

8호는 눈을 떴다. 이제 와서는 그 가장 즐거웠던 기억마저도, 그저 8호를 슬프게 만들 뿐이었다.

"정말로 없어."

'그래, 그렇겠지.'

8호는 멍하니 이본의 뺨을 쓰다듬었다. 땟국물이 흐르는 이본의 뺨은, 아직 솜털이 벗겨지지 않아 더러운 가운데도 부드러웠다.

"내일은 나 혼자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

"어쨌든 이 꼬마가, 나보다는 돌아와야 할 이유가 많을 테니까..."

림은 그 이후로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8호는 동이 트도록 이본의 뺨을 문지르다, 간신히 얕은 잠에 빠졌다.

아주 얕은.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