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Famous last words ( 3 )
"케이스 1227L3E257. 식별명 실험체 8호. 기록 시작."
8호는 자신의 귓전에서 울리는 무뚝뚝한 여성의 음성에 눈을 떴다.
시야는 여전히 먹을 칠한 듯 시꺼먼 상태였다. 그 사무적이고 불길한 음성은, 8호가 지겹도록 많이 들었던 것이었다. 아지프의 마탑. 그 곳에서 매일같이 실험을 당할 때. 실험의 진행상황과 내용을 녹음해 기록하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등줄기에서 서늘한 소름이 솟아오른다. 여기는 그럼 아지프의 마탑인가? 설마 다시 잡혀 들어온 건가?
"실험 책임자. 나하트 칼벨레인 석좌교수. 실험자. 올셉 가니트 외 3인. 기록자. 마리아 칼벨레인."
나하트 칼벨레인. 그 이름을 듣자, 고양이를 마주한 쥐처럼 온 몸이 마비되는 8호. 뭐지? 그 사람, 죽은 게 아니었나? 분명히 내가 숨을 끊었는데.
이성과 추론 능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상황이었다면 이것이 꿈이라는 걸 쉽게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8호는 지금 과거에 겪었던 고통스러웠던 실험을 되새기는 악몽 속에 있었다. 하지만 악몽 속에서 사람들이 흔히 그러하듯, 8호는 이것이 꿈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실험 목적. 하나. 뇌하 피유량과 재생 소자간 상관관계 역분석.
둘. 두개강 내벽의 환형 세포체 검취 및 22호의 세포체와의 대조.
보조 목적. 향후 실험안 수립시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실험체 8호의 재생력에 관한 정량적 평가를 정립하는 것."
8호는 실험대 위에 엎드려 있었다. 원반 위에 놓인 네모난 실험대. 거기에는 바퀴가 달려 있어 필요할 때마다 원형으로 회전시킬 수 있다. 침대의 사방에 달려 있는 것은 섬뜩한 쇠빛으로 빛나는 갈고리. 사지를 묶기 위한 물건이다.
원래대로라면 저항과 발악 가능성이 있어 성가실 정도로 단단히 사지를 구속당해야 하지만, 8호의 경우에는 달랐다. 아무리 심한 실험이라도 그저 신음 몇 번으로 견디고 절대 저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느슨한 천으로 한 바퀴 묶었을 뿐 아무런 구속이 없었다.
"실험체의 상태. 이전 실험에서 입은 손상은 충분히 회복되어 데이터 오염 가능성 최소화되었음. 어제 정오(12시경)부터 공복 상태를 유지하도록 함. 실험 30분 전, 복강에 생리식염수와 마취제를 3회에 걸쳐 나누어 주사했음."
그 긴 읊조림이 끝나자 또 다른 익숙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만, 그만 하거라. 그만하면 됐다. 바로 천공부터 시작하자."
나하트의 음성이었다. 잠시 후, 8호는 무언가에 강하게 짓눌렸다. 아무래도 어깨를 붙잡아 고정시키고, 드릴 비슷한 물건을 이용해 두개골에 구멍을 내기 시작한 것 같았다. 여러 번 당했던 짓거리기 때문에 바로 알 수 있었다. 머리가 단단한 실험대에 크게 부딪히고, 온 몸이 덜덜덜 떨린다. 하지만 잠시 후 불만에 찬 탄식이 들린다.
"제기랄, 올셉! 좀 더 출력을 높여 봐!"
"이미 최대입니다."
"22호, 22호 대가리는 잘만 뚫었던 물건이 왜 못 뚫는다는 거야? 줘 봐!"
드르르륵! 더 강한 압력이 머리끝부터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 후, 그게 뚝 그쳤다. 머리에 구멍을 뚫는 기구, 천공기가 부러져버린 것이었다. 기록자의 음성이 조용히 그 상황을 전달했다.
"채취를 위한 시술 중, 천공기가 손상되었음."
"어쩌죠, 스승님?"
"아무래도 이 놈의 뼈는 재생될수록 더 강해지는 힘이 있나봅니다. 조직이 말도 안 되게 치밀해졌어요."
"이제 이런 외과적 방법보다는, 비강을 통해 기구를 삽입한다거나, 외용제를 사용하는 게..."
당황한 음성으로 의논을 나누는 실험자들. 8호는 죽은 듯 엎드려서 그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숨죽여 그들의 말을 청취하는 8호. 아무래도 실험이 곤란해진 모양이다. 그럼 이대로 방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걸까?
그런 실낱같은 기대로 귀를 쫑긋이 세우고 있는데, 전혀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의 소리가 아닌, 짐승의 소리였다. 그 소리는 배 밑에서부터 울리고 있다.
그 정체를 파악하려 슬쩍 몸을 일으킬 때 나하트의 노호가 울려퍼졌다.
"닥쳐, 닥치거라. 다음 학회까지는 반드시 이걸 마무리해야된단 말이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이라고 했나? 누가 너한테 하지만이라는 말을 해도 된다고 했지?"
"아닙니다!"
입을 다무는 조수. 8호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걸 느끼고 바로 몸을 납작 엎드렸다. 나하트는 소매를 걷어붙이더니 음산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말렛."
"예?"
"아디나의 말렛을 가져와라. 용의 두개골도 깼던 물건 아니냐. 그거면 이 두개골도 부숴버릴 수 있겠지."
"하지만 교수님! 그럼 이 녀석이 죽을지도 모릅니다!"
"또,또,또! 내가 토를 달지 말라고 했지!"
무언가를 집어던지는 소리. 나하트는 불이라도 내뿜는 듯이 소리지른다.
"한번만 더 하지만 같은 소리를 하면, 이 실험체 대신 네놈의 두개골을 까서 포르말린 통에 담아 제출해버리겠다! 주제, 주제를 모르게 된 심각한 두뇌 손상의 표본으로 말이야!"
사위는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말고는, 아무도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혹여라도 트집을 잡힐까봐. 그 때였다.
"응?"
나하트가 고개를 홱 돌려 엎드린 8호를 바라보았다. 8호의 배 밑에서 작은 소리가 울렸기 때문이다. 아주 희미한 소리였지만, 방 안이 너무나도 고요했기 때문에 모두에게 똑똑히 들렸다. 그는 조수 중 한 명을 돌아보며 사납게 소리쳤다.
"이게 무슨 소리야?"
"화, 확인해 보겠습니다!"
"이 되먹지 못한 자식, 실험 전에 실험체 점검도 제대로 안 했단 말이냐?"
그건 울음소리였다. 작은 새의 울음소리.
"이 자식, 뭔가 숨기고 있어!"
"일으켜! 일으켜 세워!"
8호를 우악스럽게 붙잡아 일으켜세우고 옷자락을 집어올리는 조수들. 앙상하고 하얀 배가 드러나고, 그 소리의 원인이 나타난다. 그건 새였다. 비바람을 맞아 날개를 다쳐, 8호의 방으로 날아들었던 새. 8호는 아지프의 마술사들 몰래 그 새를 돌보고 있었다.
8호가 이렇게 실험을 당하기 위해 끌려나와 있을 때, 그들은 불소 가스로 8호의 방을 가득 메워 소독을 했다. 방에 이 새를 그대로 두고 나오면 그 가스에 새가 죽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몰래 숨겨서 가지고 나왔던 것이었다. 올셉이라고 불린 남자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피식 웃는다.
"이런 걸 왜 들고 있어?"
"저녁 대신 먹을 생각이었나? 아."
입을 벌리고 새를 먹는 시늉을 하는 올셉. 그 때였다. 8호는 그 작은 몸 어디에서 그런 괴력이 나왔는지, 자신을 묶고 있던 천을 찢어발기고는 올셉에게 달려들었다. 설마 그럴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올셉은 뒤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어?어?"
"잡아!"
녹색의 실험복 자락을 나풀거리며 새를 빼앗아 무작정 달리는 8호. 망치를 가지러 조수가 내려갔던 통에 문은 열려 있었다. 눈 깜짝할 새에 실험실 안은 아수라장이 되고, 8호는 열린 문을 통해 쏜살같이 방을 빠져나갔다.
"붙잡아!"
"기록 중단. 실험 대상이 탈출하는 사고 발생."
"경보! 경보를 울려라! 마탑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아!"
두 손으로 새를 붙잡은 채, 맨발로 돌바닥 위를 달리는 8호. 나사처럼 빙글빙글 이어진 계단을 따라 달린다. 계단을 너무 빨리 밟고 올라간 탓에 몇 번이나 넘어져 얼굴이 더러워졌지만, 두 손으로 새를 붙잡은 채 계속 달린다.
"이 새끼, 대체 뭘 하려는 거야?"
"출구는 아래쪽인데? 왜 위쪽으로 가는 거지?"
"설마 탑 옥상에서 몸을 던질 생각인가?"
"막아! 저놈 하나 만들려고 얼마가 들었는지 알아? 네놈들 내장을 다 벗겨 팔아도 천분의 일도 못 채워!"
벌컥, 마지막 문이 열리고, 한 뼘만한 옥상이 드러난다. 난간도 없이 회색빛으로 황량한 옥상. 8호는 그 끝에 다가가서 무릎을 꿇고, 조용히 새를 내려놓았다. 배는 흰 빛, 등깃털은 담갈색인 이름모를 새. 딱정벌레처럼 새까만 눈을 빛내며, 8호를 바라보고 미약하게 지저귄다. 8호는 그 새와 눈을 맞대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제 날아서 여기서 도망쳐야 돼."
어조가 너무 평온했던 탓일까. 새는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정확히 인지를 하지 못한 것 같았다. 뒤에서는 추적하는 이들의 다급한 발소리가 들린다. 8호는 다시 고개를 홱 돌려 새와 눈을 맞추고 말했다.
"빨리. 힘들어도 날아가야 돼."
하얀 손이 옥상의 끝으로 새를 밀쳤다. 어느새 발소리는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새는 그래도 8호의 손에 몸을 부딪으며 필사적으로 바둥거리다가, 곧 체념하고 날개를 퍼덕이기 시작했다. 세 개의 발톱으로 갈라진 발로 땅을 부딪으며, 힘차게 날아오른다. 쫙 펼친 날개에는 긴 상처자국이 남아 있었다. 8호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벌렸다. 그 입이 땅바닥에 쳐박아진 건 그와 동시였다.
"붙잡았다!"
"이 새끼, 얌전하다고 특별대접 해줬더니 이렇게 엿을 먹여?"
8호를 뒤쫓아온 사람들이 도착한 것이다. 그들은 수갑으로 8호의 팔과 다리를 꽁꽁 묶기 시작했다. 하지만 8호는 시선은 여전히 하늘을 향한 채로, 그 새가 날개짓을 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어."
금방이라도 멀리 날아갈 것만 같았던 새는, 그러나, 어느 순간 허공에 붙잡힌 듯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고통스럽게 제자리에 떠 있는 새. 잠시 후 날개의 상처가 부욱 하고 찢어지는 게 보였다. 날개짓을 하며 날개에 가해지는 공기압을 견디지 못하고, 상처가 덧난 것이었다. 날카로운 비명 같은 울음이 터진다.
그 비명을 마지막으로, 그 새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벌로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네 골통을 다 헤집어 까주마."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두터운 안대가 씌워진 것이다.
눈 앞에 짙게 드리운 어둠 속에서도, 그 새는 한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한없이.
*
하늘에서 쏟아지는 달빛은 어쩐지 치맛자락을 닮았다.
격통과 어둠 속에서 8호는 눈을 떴다. 개구리처럼 경련하면서. 생생한 악몽 때문에 눈을 뜨고서도 어느 쪽이 현실인지 잠시 분간하지 못했다. 세 번째 숨을 내쉼과 동시에, 의식을 잃기 전의 기억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왔다.
"윽."
등에는 한 대의 투창이 꽂혀 있었다. 등줄기 가득 퍼지는 고통. 8호는 뒤로 팔을 뻗고 더듬어 창대를 붙잡았다. 그리고 잡아뽑았다.
"끄으윽..."
저번에 비슷한 자리에 투창을 맞았을 때에는, 창을 뽑고 5분도 지나지 않아서 상처가 전부 아물었는데. 이번에는 고통도, 상처도 일전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비틀대면서 간신히 창을 뽑아 던진 8호는, 황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본을 찾기 위해서였다.
"아, 여기 있구나."
멀지 않은 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본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눈을 감고 있었다. 8호는 이본을 받쳐들고 엉거주춤 일어섰다. 심호흡. 그리고 문에 다시 머리를 들이받는다. 어떻게든 열어달라는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서였다.
"응?"
"뭐야?"
네 번쯤 들이받았을 때 드디어 반응이 있었다. 문을 지키던 문지기들이 성 바닥에서 무언가가 꼬물대고 있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패잔병인가?"
"나 참. 운 좋게 안 뒈졌으면 그냥 도망치지, 뭐가 좋다고 다시 기어들어와. 어이! 열어 줘!"
"애미 씨발. 개좆같네. 누군 계집 젖 주무를 때 순번 꼬여서 보초나 서는 것도 좆같은데, 뭔 쓰잘데기없는 일거리까지..."
갑자기 생긴 일 때문에 툴툴거리면서도, 문을 열기 위한 줄을 잡아당기는 문지기들. 잠시 후, 문이 큰 소리와 함께 열리기 시작했다. 8호는 이본을 받쳐든 채로 입을 쩍 벌린 성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성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커다란 회관. 그 곳에선 불빛과 웃음, 그리고 끈적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던 8호는 갑자기 터져나오는 웃음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창으로 비치는 샛노란 불빛을 배경으로, 검은 그림자들이 뒤엉켜 술잔을 흔들고 있다. 전투가 마무리되고 지원금이 교부되는 것이 결정되어 파티를 열고 있는 모습이었다.
"가자. 천막으로 가면, 뜯어놓은 약초가 좀 있을 거야."
8호는 애써 거기서 고개를 돌리고, 이본에게 숨죽여 말했다. 아까부터 이본은 아무런 말도, 숨소리도 없이 고요했다. 거기서부터 세 발자국쯤 발을 옮겼을 때 8호는 낯익은 얼굴과 마주했다.
"어? 얘!"
어깨에서 끊어지는 짧은 검은 머리, 그리고 뺨부터 눈두덩까지 분칠한 듯 길게 이어진 흰 흉터의 여자. 단장이었다. 저번과는 다르게 속에 바지를 받쳐 입는 타입의 드레스를 입고 있다. 치맛자락이 짧아 갈색 가터벨트가 드러나보인다.
저번에 한 약속 때문에, 억지로 파티에 참가해야 했기 때문에 그렇게 어울리지 않는 차림을 한 것이었다. 술의 힘으로 억지로 버티고 있었던 단장은, 넌덜머리가 나서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회장을 빠져나오던 참이었다.
"괜찮니? 이제 막 복귀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왜 이제야 돌아오는 거야?"
그러던 중 성 밖에서 들어오던 8호와 마주친 것이었다. 8호는 고개를 들었다. 짙은 눈썹, 염려하는 듯한 눈망울. 강인함이 묻어나는 듯한 입술.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줬던 사람이다.
"저, 저, 도와주세요."
8호는 품에 쥔 이본을 내밀며 그렇게 말했다. 단장은 그제서야 8호가 안고 있던 이본에게 눈을 돌렸다.
"이번에 처음 나가서 싸운 앤데, 귀를 크게 다쳤어요. 치료를, 해 주면, 갚겠습니다..."
뒤로 갈수록 사그라드는 목소리. 어떻게? 라는 의문이 스스로의 목구멍에서 차올랐기 때문이다. 단장은 8호에게서 이본을 받아들더니 무릎을 꿇고 이본의 가슴팍에 귀를 가까이 댔다. 그리고 눈을 지긋이 감는다.
"네 친구니?"
"친구?"
친구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듯한 반문이었다. 단장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눈을 뜨더니, 다른 쪽 귀를 이본의 가슴팍에 가져다댔다. 그리고 깍지를 끼고 갈비뼈 부근에 가져다대고, 힘껏 펌프질을 몇 번 했다. 8호는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작게 읊조렸다. 이제 일어나야 해. 아주 평온한 어조였다. 언젠가 그랬듯이.
잠시 후 마지막으로 이본의 가슴에 귀를 가져다댄 단장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친구라면, 음, 안됐구나."
"네?"
"이 아이, 이미 죽었어."
"아."
8호는 입을 크게 벌렸다. 파티장에서 떠들썩한 웃음이 터져나온 것은 그와 동시였다. 8호의 눈앞에 아까 꾸었던 악몽의 마지막 장면이 스쳐지나갔다. 어둠 속으로 한없이 추락해가던 새의 모습이. 단장은 무슨 말을 건네야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8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8호는 무심결에 툭 중얼거렸다.
"또 혼자 살아남아버렸다."
"뭐?"
"어차피, 난, 살 이유도 없는데..."
누군가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한 걸까. 회장에선 또다시 떠들썩한 웃음이 터져나온다. 8호에겐 마치 그것이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멍하니 이본의 차가운 시신을 바라보던 8호는 곧 따스함이 자신을 가득 감싸는 걸 느꼈다. 단장이 자신을 와락 껴안은 것이었다.
맞닿은 얼굴에서, 술냄새가 화악 풍겨온다. 뒤통수에서 뜨거운 감촉이 느껴졌다.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슴을 맞대고 꽉 끌어안는 단장. 그렇게 안겨 있는 건 잠시였지만, 8호는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졌다. 단장은 8호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조용히 속삭였다.
"살아 있는 것에게는, 다 이유가 있기 마련이란다."
"하지만 나한테는 아무것도 없는데..."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아직 그걸 찾지 못한 것 뿐이야."
숨이 콱 조여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언젠가 비슷한 대화를 했던 것 같은데. 그때는 훨씬 더 긴 대답을 들었던 것 같다. 8호는 그 긴 대답보다 이 짧은 대답이 더 마음에 들었다.
*
"너 남자아이였구나?"
촤악!
목욕탕에서 뜨거운 물을 8호에게 끼얹은 단장은, 젖은 수건 밑을 바라보곤 놀라서 소리쳤다. 8호는 고개를 뻔히 들었다. 저번에 그랬던 것처럼, 단장은 피와 땀으로 얼룩진 8호를 목욕탕으로 데려가서 씻겨 주려고 했다. 8호는 그래서 옷을 갈아입고, 목욕용 의자에 앉아 기다리던 참이었다.
"이것 참, 술이 확 깰 정도로 놀랐네."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할 이유는 없고."
곧 정신을 차린 단장은 8호의 머리를 박박 문지르며 말했다. 8호는 눈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눈을 꼭 감고 단장이 머리를 만지도록 가만히 앉아 있었다.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물에 젖은 하얀 뺨을 반짝이는 그 모습은 누가 봐도 영락없는 여자아이였다.
이 모습을 보면 백중 구십구는 어머니가 딸을 씻겨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단장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도린이 많이 실망하겠는걸. 이미 딸 둘에 아들 하나 낳을 생각하고 이름까지 지어주고 있던데."
"도린이 누구에요?"
"아, 아직 서로 이름도 모르니? 그 있잖아, 주근깨가 코 근처에 엄청 있는 녀석. 너랑 몇 번 마주쳤다고 들었는데."
그 사람의 이름이 도린인 모양이었다. 그 간부 후보생이라던 사람. 얼마 지나지 않아 목욕이 끝나고, 단장은 8호의 머리를 쥐어짜 물기를 짜낸 후 머리카락을 빗어주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머리에 가해지는 기분좋은 촉감 때문에 8호의 몸이 노곤하게 풀어져 있을 때, 단장은 뜬금없이 질문을 꺼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질문이었다.
"그런데 말이지, 네가 칼슨을 죽인 게 맞니?"
고도의 유도술이었다. 무의식적으로 대답해버릴 뻔 했다. 풀어져 있던 8호의 몸이 바짝 곤두섰다. 단장은 그러나 8호의 머리를 매만지는 것을 멈추지 않고, 등 뒤에서 조용히 말을 계속했다.
"잰슨의 보고서에는 네가 돈을 탐내서 널 거둬준 할머니와 칼슨을 죽였다고 되어 있었지만 말이야. 나는 네가 그런 일을 했을 거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데 말이지."
8호는 침묵했다. 단장은 부드러운 어조로 날카로운 말을 계속 이어갔다. 기나센의 통령 선거권, 피선거권을 모두 가질 정도로 명문인 용병단, 레이븐사이드. 그 레이븐사이드를 여자의 몸으로 이끄는 젊은 단장의 안목은 결코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잰슨은 유능하긴 하지만 정이 많아. 그래서 칼슨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냉정하게 판단을 못 하고 보고서를 쓴 것 같아. 의문가는 점이 있어서, 개인적으로 너에 대해서 조사를 좀 했어. 놀랍더구나. 싸우는 실력도, 힘도, 모두 어린아이의 것이 아니라고들 하더군. 실제로, 몇 개월이나 이 쓰레기같은 전투에 투입되고서도 계속 살아 돌아왔어. 이건 기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8호는 돌처럼 굳어버렸다. 단장은 8호가 정신을 추스릴 틈을 주지 않았다.
"왜 그러니? 이건 칭찬하는 거야. 더구나, 그 와중에 계속 남을 도우려고도 했던데. 오늘도 말이지, 네 친구를 도와주려다 이렇게 늦은 거지? 너 혼자였다면, 충분히 몸을 빼고도 남았을 테니까. 나는,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이, 고작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일 거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아."
'이거, 잠시 눈을 뗀 사이에 매우 재미있는 일을 벌이고 있군 그래.'
창 밖에서부터 림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림은 단장이 건넨 마지막 말만을 듣고도 상황을 전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8호는 망부석처럼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너는 부정하지 않았단 말이지. 그럼 뭘까? 뭐가 네가 거짓말을 하게 만든 걸까?"
이미 단장은 8호의 자백을 거짓말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다.
"만난 지 며칠 안 된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걸 정도로, 바보스럽도록 이타적인 사람이, 목숨을 걸고 거짓말을 하게 만들 만한 존재가 뭘까?"
'호오오. 이 인간 계집은 순하지만 바보는 아니군. 머리가 좀 돌아가는 모양이구나?'
감탄했다는 듯 박수를 치는 림.
"저번에, 도린이 화가 나서 내 집무실에 쳐들어왔어. 혹시 네가 어떤 나쁜 상인한테 붙잡혀서 노예로 팔려온건 아닌가 항의하러 말이야. 그래서 기록을 보여주자, 도린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기색을 보이더군. 그리고 이런 말을 했어."
"그럼 얘 언니는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죠? 라고..."
도린은, 8호와 처음 마주쳤을 때, 17호와도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 17호는 분명히 8호를 자신의 동생이라고 소개했다. 8호의 얼굴을 인상 깊게 기억한 도린은 그것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하지? 네게 누나가 있다는 말은 잰슨의 보고서 어디에도 없었고, 네 증언 어디에도 없었는데 말이야. 왜 없었을까?"
"의도적으로 숨겼으니 없겠지."
단장은 8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8호의 눈동자는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그건 사실상의 시인이나 다름없었다. 역시. 단장은 속으로 자신의 추론이 맞았음을 확신하고는, 결정타, 즉 인정을 얻어내기 위해 말을 고르기 시작했다.
"왜 숨겼을까? 너는 왜 숨겼다고 생각하니?"
"안 숨겼어요."
"내가 그, 언니라는 사람의 인상착의를 질문하니까, 골똘히 고민하던 도린이 이런 말을 하더구나."
"그 아이는 송곳니가 이상할 정도로 뾰족하고 컸다고."
그 말을 듣자마자 림은 지금까지 없었을 정도로 크게 웃어젖히기 시작했다. 박수까지 치면서. 그리고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8호의 귀에 속삭였다.
'항복하거라. 이 여자는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있다. 그냥 너한테 마지막 기회를 주는 거야. 너한테 나쁜 얘기도 아니잖아? 빨리 그 흡혈귀 계집이 했다고 외치고 가슴팍에 달려들어서 엉엉 울라고.'
단장은 마구 떨고 있는 8호를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다 뒤에서부터 꽉 끌어안아주었다. 그리고 8호의 귀에 얼굴을 가져다대고 조용히 읊조렸다.
"너 자신을 좀 더 소중하게 여겨줬으면 해. 네 누나의 삶이 소중한 만큼, 네 삶도 소중해. 굳이 네 누나의 누명까지 네가 뒤집어쓸 필요는 없어. 진실을 말해 주렴. 그러면, 네가 이 곳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줄 것을 약속할게."
"너는 칼슨을 죽이지 않았어. 범인은 네 누나야. 애초에 어린아이가, 이미 전장을 몇 번이나 경험한 칼슨을 죽인다는 건 불가능해. 그러니, 어떤 마술적인 힘을 가진 태생이겠지. 숨겨야만 하는 태생. 그 태생적인 이유를 칼슨에게 들켰거나, 뭐 그런 이유로 네 누나가 칼슨과 할머니를 죽인 거야. 그리고 네게 그걸 덮어씌우고 도망쳤지. 누나니까, 네가 그런 꼴을 당해도 순순히 스스로를 희생하는 성격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말이야. 이게 맞니?"
"...맞다고 하면... 어떻게 돼요?"
"넌 자유를 얻게 될 거야. 내가 새로운 부모를 찾아봐 줄게. 그래, 자식한테 머릿가죽 벗기기 따위를 시키지 않는 부모로 말이야."
'그것까지 알고 있는 건가? 조사를 꽤 철저히 한 모양인데.'
"...누나는요?"
"네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네 누나의 신병이 필요해. 아마 추적대가 편성될 거야. 시간이 꽤 지났지만, 그래봐야 고작 어린아이니까. 얼마 안 가서 신병을 확보할 수 있겠지."
거의 모든 것을 진실에 가깝게 추론해낸 단장이지만 한 가지는 추론에 실패했다. 누나에게 죄를 뒤집어쓰고 온갖 고난을 겪은 8호가, 지금쯤은 누나를 싫어하고 있을 것이라는 추론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8호를 꾀어내기 위해 이런 말을 꺼낸 것이었다. 8호는 침묵했다. 이 실패한 추론 한 가지가 어긋난 방향의 대답을 이끌어냈다.
"아니에요."
"그래, 잘 말해 줬어... 뭐라고?"
"제가 죽였어요."
탄식하는 림. 단장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재차 확인했다.
"정말이니?"
8호는 침묵했다. 지금까지의 모든 망설임의 시간을 다 합친 것보다도 긴 침묵이었다. 단장은 어느새 8호의 머리에서 손을 떼고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것이 8호의 망설임을 끝내지 못하게 했다. 계속 이렇게 대답해버리면 아마 다시는 이렇게 누군가 머리를 감겨주는 일이 없겠지. 그 사실이. 하지만 결국, 8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단장은 복잡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8호는 뒤돌아 앉아 있기에 그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드르륵, 의자를 밀치고 일어나는 게 느껴진다.
"그래, 잘 알았다."
정나미가 떨어져버린 걸까. 싫다. 다른 사람들한테 미움받는 건 아무렇지 않지만, 이런 사람한테까지 미움받게 되는 건 싫은데. 하지만 8호는 고개를 푹 숙일 뿐, 더 이상 항변하지 않았다. 엄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그런 나쁜 일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겠지."
*
"자, 여기 서명해."
단장이 입혀준 옷을 입고,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단장의 집무실까지 이끌려온 8호. 그는 그 말을 듣고서야 고개를 들었다. 귀중한 문서인 걸까? 금박으로 끝이 장식된 베이지색의 종이가 눈 앞에 들이밀어졌다.
8호는 까막눈이어서 무엇이 적힌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뭔가 고급스럽다는 것만은 한 눈에 들어오는 문서였다. 이름, 생일, 출신지, 뭐 그런 것들을 적도록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이게 뭔가요."
"너한테 벌을 주기 위한 문서."
또 고개를 푹 수그리는 8호. 여기보다 더 끔찍한 곳으로 이송되게 되는 걸까. 그래도 할 수 없지. 8호가 미적거리자, 단장은 계속해서 엄한 목소리로 말을 꺼낸다.
"우리 용병단의 고향인 기나센 공화국은 말이지. 척박한 산지에 있는 용병 국가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없기 때문에, 사람이 쟁기 대신 칼을 들고 밭 대신 성첩을 갈아 곡식과 고기를 벌어오는 나라지. 그래서, 항상 사람이 모자라단 말이야. 밭은 늙어죽은 사람밖에 삼키지 않지만, 전쟁은 어린아이도 먹어버리니까."
"그래서 기나센에서 외부로 파견된 용병단의 단장은, 1년에 몇 번 뿐이지만, 외부의 아이에게 기나센 국적을 주고 자기 용병단에 데리고 있을 수 있어. 항상 사람이 모자라니까. 우수한 인재를 모집하려면 그런 일이라도 해야 한다는 거지. 그게 도린 같은 간부 후보생들이야."
그건 알겠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왜 내게 하는 거지? 8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 기나센은 말이지, 개별 용병단을 가족이라고 본단 말이지. 그래서 용병단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처벌권을 단장한테 일임해. 법은 문지방을 넘지 않는 법이니까. 그러니... 네가 이 문서에 서명해서, 우리 가족이 되면, 칼슨을 죽인 죄를 내가 면죄해줄 수 있어."
8호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자신이 잘못 들었나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단장은 여전히 서릿발처럼 엄한 표정으로 딱딱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자, 빨리 서명하렴."
"저, 저, 그럼 이건..."
"그래. 간부 후보생 등록 문서다."
8호는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사람은 분명 나한테 벌을 준다고 하지 않았나? 왜 이러는 거지? 단장은 그 망설임의 의미를 다르게 이해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만약 그렇게 되면, 네 누나를 잡으려는 추적대도 편성되지 않을 거야. 그 범인은 너인 채로, 나한테 사면받는 형태가 되니까."
"분명히 벌을 준다고..."
"난 진지한데. 난 지금 너한테 벌을 내리는 거야."
단장은, 마지막으로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앞으로 평생 우리처럼 칼밥 먹는 녀석들과 가족이 되어서 살아가야 되는데, 그게 끔찍한 벌이 아니면 뭐겠어?"
말은 그렇게 하지만 이건 분명한 온정이었다. 단장이 제시한 호의를 한 번 걷어찼는데도, 이 사람은 또 한번 최대한의 노력을 다해서 온정을 주려고 하고 있는 것이었다. 8호는 문서를 쥔 채로 부들부들 떨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만난 온정. 거기에 뒤따르는 감정은, 감사함이나 감격보다는 우선 당황스러움이었다.
차라리 냉대나 모멸이었다면 능숙하게 반응했을 텐데. 살면서 한 번도 온정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경우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너무 낯설어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8호가 선택한 것은, 도주였다.
"어? 어!"
8호는 문서를 두 손에 쥔 채로 무작정 방을 뛰쳐나갔다. 사람의 손길을 처음 만난 고양이가 달아나는 것처럼. 너무나도 예상외의 반응에 단장은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얘! 잠깐! 어딜 가는 거니?"
8호는 무시하고 계속 달렸다.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어떤 표정을 지으면 되는 건지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어서,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검과 방패가 걸린 복도를 지나, 얼굴을 숙이고 달려가는 8호. 그 엉망진창인 도주를 가로막은 것은 가죽 갑옷을 두른 가슴팍이었다. 8호는 누군가의 가슴에 부딪혀 뒤로 자빠지고 말았다.
"아야야... 뭐야?"
"재소하미다."
반사적으로 사과하고 일어서는 8호.
"어? 너, 너! 여기 와 있었구나!"
그런데 너머에서 들리는 것은 질책 대신 반가운 목소리였다. 빨갛게 부어오른 코를 붙잡고 고개를 들어보니, 거기에는 주근깨가 박힌 얼굴이 있었다. 도린이었다. 결국 8호는 도린에게 손목을 붙잡혀 다시 집무실로 끌려오게 되었다. 코가 빨갛게 부어올라 도린에게 붙잡혀 터덜터덜 걸어오는 8호를 보고, 단장은 웃음을 터뜨렸다.
"자. 보증인 란에 우선 내가 서명을 할게."
깃펜에 잉크를 찍어 보란 듯이 이름을 새겨넣는 단장. 까막눈인 8호였지만, 이름자 정도는 읽고 쓸 수 있었다. 란페이 우르드. 그게 단장의 이름이었다.
"네 이름은 뭐니?"
란페이에게 깃펜을 건네받고 공란에 펜촉을 댄 채 한참이나 멈춰 있는 8호. 아직까지 8호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8호는 그저 실험체를 분류하기 위한 식별명일 뿐, 아무도 8호에게 이름을 지어주지도 않았고, 이름을 불러주지도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8호는 마음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두 글자를 적어넣었다. 어제 이름도 듣지 못한 중년에게서 들었던, 그의 고향의 이름이었다.
"아이, 아이라. 좋은 이름이구나. 남자아이 이름으로는 좀 맞지 않지만."
"예?"
눈을 끔뻑이는 도린. 란페이는 크게 웃으면서 8호, 이제는 아이라는 이름을 받은 8호를 가리켰다.
"이 녀석, 남자아이야."
"뭐라구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끔뻑거리며 란페이와 아이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는 도린. 란페이는 그 얼굴을 보고 다시 한 번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는 계속해서 자신의 이름이 적힌 문서를 바라보고 눈을 껌뻑이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