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8화 (8/279)

3. 에페 바체 ( 1 )

첫 번째 해.

"지금 심는 나무 이름이 뭐야? 아니, 뭐에요?"

"됐어 임마. 존댓말 안 해도 되니까."

도린은 연이은 삽질 때문에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쳐내며 말했다. 그들은 땅을 파내고 있었다. 이본의 시체를 매장해 묘를 만든 곳 바로 옆이었다. 나무를 심을 구멍이었다.

며칠 동안, 밤마다 침대에서 빠져나와 묘 앞에 쭈그려 앉아 있던 아이를 달래기 위해서, 도린은 어디선가 묘목을 하나 구해와서는 심어주겠다고 했다.

그 묘목이 아이 대신 이본을 지켜봐줄 거라는 뜻에서.

"하지만... 어른한테는 존댓말 쓰는 거라고 했는데."

"어른? 나 16살이야. 무슨 어른. 정 그러면, 그냥 사형이라고만 불러."

"사형?"

"같은 스승을 둔 형이라는 뜻이야. 자. 다 됐다. 뿌리덩이째로 들어서 옮기면 돼."

조심조심 종이로 묶인 묘목의 포장을 풀어내는 두 사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본의 묘 앞에는 자그마한 관목이 하나 식재됐다. 키가 그리 크지 않은 편인 아이보다도 작은 나무였다. 아이는 무릎을 붙잡고 쪼그려 앉아, 가만히 나무를 들여다보았다. 도린은 그런 아이의 정수리에 손을 올려놓았다.

"이제 이게 너 대신 그늘을 만들어 줄 거니까. 그 꼬맹이도 편히 쉴 수 있을 거야. 이젠 밤에 나오지 마라."

"그래서 이 나무 이름이 뭐야? 사형."

"응? 어, 그러니까, 뭐라 그랬더라... 음, 어, 뭐지? 회양목? 뭐 그랬던거 같은데."

"회양목."

잊어버리지 않겠다는 듯이 나무를 응시하면서 조용히 읊조리는 아이. 도린은 솔직히 이게 회양목이 맞는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멋쩍어서는 손을 붙잡고 이끌었다.

"자. 이제 밥이나 먹으러 가자. 오늘도 흠씬 두들겨맞으려면 잘 먹어야지."

*

에페 바체.

'만년빙의 아이'라는 뜻으로, 외부에 파견된 용병단장이 외국의 고아에게 특별히 기나센 국적을 주고 자신 용병단의 간부 후보생으로 등록할 수 있게 만드는 제도. 그리고 그 제도의 수혜를 받는 아이를 아울러 일컫는 말이었다. 그 어원은 그들의 설화에서 비롯되었다.

기나센의 영산(靈山)인 아발랑센의 상층부는 흰 구름에 감싸여 언제까지나 녹지 않는 만년설로 덮여 있다. 아직까지 아무도 도달한 적이 없는 그 정상에는 한 아이가 잠을 자고 있는데, 그 아이가 눈을 뜨면 모든 산의 뿌리가 허물어져 세상이 녹아내린다. 이 세상은 그 아이가 꾸는 꿈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들의 전통 설화였다. 금기시되는 성역이 존재할 때, 성역 근처에서 흔히 보이는 종류의 이야기다. 성지가 함부로 침범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겠지.

그리고 이 제도를 만들면서, 위정자들은 설화에 추가로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 아이는 잠을 자면서 센디엘 어딘가의 어느 이름모를 아이에게 깃들어 세상을 바라보다가, 꿈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너무 끔찍하면 잠에서 깨어난다고 한다. 그렇기에 모든 기나센의 단장들은 세상을 돌아다니던 중 재능 있고 불행한 아이를 발견하면, 그 아이를 구원할 의무를 지고 있다. 그 아이가 만년빙의 아이일 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이 제도의 이름이 만년빙의 아이, 에페 바체가 된 것이다.

외국의 고아에게 국적과 높은 지위를 준다는 반발을 사기 쉬운 내용의 제도이지만, 그들의 전통 설화와 어우러져 꽤나 정합성 있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이루어 큰 호소력을 가졌기 때문에, 이 제도에 대한 기나센 국민들의 불만은 크지 않았다. 오히려 호의를 가지고 장려할 정도였다. 다만 그 호의는 어떤 '조건'에서 비롯되었다. 아주 엄한 조건.

"자, 오늘 아침은 뭐였지? 시금치 수프?"

연무장.

잰슨은 클럽을 가볍게 던졌다 받았다 하며, 위협적으로 물어보았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행이구나. 오늘은 토사물 청소하기 편하겠어. 안 그러냐?"

잰슨은 으르렁거리며 말한다. 아이는 말 없이 자신의 몫으로 주어진 방패를 집어들었다. 모양이 상궤에서 아주 벗어나 있는 방패였다. 대부분의 방패는 원형이거나, 사각이거나, 형태가 특이하더라도 모서리가 둥근 마름모 수준에서 그치지만, 이 방패는 S자에 가까운 형태다.

당연히 면적이 그렇게 넓지 못하고 직관적이지 않기 때문에, 공격을 막는 것이 일반적인 방패보다 몇 배는 힘들었다. 아이는 방패 손잡이를 두 손으로 꽉 붙잡았다.

"그럼 간다!"

달려드는 잰슨의 클럽을 황급히 방패로 막아보려 하는 아이. 하지만, 잰슨은 능숙하게 방어를 뚫고 클럽을 아이의 머리에 박아넣었다. 깡! 큰 소리가 울리고, 방패를 놓치고 뒤로 쓰러지는 아이. 잰슨은 손마디를 우둑거리며 사납게 소리쳤다.

"일어나! 정말 형편 없군. 근성도 없는 거냐? 한 방에 자빠지다니! 역시 너 같은 새끼는 다시 지하 감옥으로 돌아가야 해!"

에페 바체의 조건.

그것은 에페 바체가 되려는 아이는 매 년 엄격한 시험을 치러 합격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3년간 세 번 시험에 통과해야만 정식으로 기나센의 국적이 부여되고, 그 용병단의 소속임이 인정된다.

세 번의 시험을 마치고 난 에페 바체들은, 본국에 귀국했을 때 한데 모여서 다시 공정하고 중립적인 시험관에게 평가를 받아야 했으므로, 봐주기는 통하지 않았다. 한 용병단에 허용된 에페 바체는 세 명까지. 그리고 그 세 명은 매년 시험을 쳐서 서로 서열을 가려야 했으며, 그 서열이 기나센에서의 평가, 권리와도 연동되어 있었다.

이 시험은 매년 사망자가 나오는 것이 당연할 정도로 가혹한 것이었다. 그런 가혹한 시험을 어린 나이에 통과해야만 에페 바체가 될 수 있었기에, 생면부지의 외국인에게 높은 직위를 주는 제도임에도 국민들의 동의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이의 시험관은 잰슨이었다. 봐주기는 커녕, 아이에 대한 적개심이 가득한 남자. 그는 첫 날부터 아이에게 이 방패 하나만 던져 주고는 으름장을 놓았다.

"나는 단장님을 존경하지만, 그게 네 놈까지 받아들여야 한다는 소리는 아니지. 단장님은 쓸데없이 정이 너무 많단 말이야."

"칼슨 아저씨 때문에요?"

"무슨 생각으로 네가 그 이름을 함부로 주워섬기는 거냐!"

버럭 소리를 지르는 잰슨. 잠시 이성을 잃고 핏줄이 주먹에 드러난 잰슨은 분노를 가라앉히고 씹어뱉듯 말했다.

"그 녀석과 나는 같이 이 레이븐사이드에 입단한 동기였다. 나는 편대장으로, 그 녀석은 위병으로, 지위가 차이가 나게 되긴 했지만... 내 둘도 없는 친구였다. 유일하게 남은 동기였단 말이다! 실력은 충분했어. 그 자식도 너무 물러터져서..."

목이 멘다는 듯 헛기침을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잰슨. 아이는 물끄러미 잰슨을 바라보았다.

"본론으로 돌아가지. 내가 네 시험관이다. 에페 바체 시험의 내용은 시험관이 전적으로 자유롭게 정할 수 있지. 통과 여부도 말이야. 참고로, 나는 지난 3년간 이 시험관 역할을 하면서, 단 한 명의 아이도 통과시켜본 적이 없다."

"그리고 나는 널 통과시킬 생각이 추호도 없어. 널 떨어뜨려서 다시 감옥에 쳐박아버릴 생각이야."

"알겠어요."

평온한 아이의 대답에 다시금 눈살을 찌푸리는 잰슨. 그는 클럽을 꽉 움켜쥐고, 클럽 끝자락으로 계속 손바닥을 두들기며 시험의 내용을 설명했다.

"시험 기간은 앞으로 일주일이다. 일주일 동안, 한 번이라도 나한테 일격을 먹이거나, 5분동안 한 대도 맞지 않으면 시험 통과다. 알겠나?"

으름장과 달리 일견 쉬워 보이는 조건이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방패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이게, 방패인가요?"

"우리 레이븐사이드 특제 방패 갈가마귀라고 한다. 그 방패에서 본따서 이름을 이렇게(*

raven,  갈가마귀) 지은 거다. 그걸 다루지 못하면, 당연히 우리의 일원이 될 자격이 없다."

더 이상 말하기도 싫다는 듯 클럽을 쥐고 한 발 앞으로 다가오는 잰슨. 아이는 긴장해서 갈가마귀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첫 날부터 죽도록 두들겨맞은 끝에 그날 먹은 스튜를 전부 토하고 말았다.

그리고 오늘도 이렇게 먹은 걸 전부 토할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었다. 뇌진탕이 온 걸까, 아이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서, 다시 방패를 집어들었다.

"후욱...후우욱..."

사실 이 갈가마귀 자체가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얇은데도 더럽게 무거웠다. 일반적인 열두 살의 아이라면 이걸 집어드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런 물건을 들고, 맨주먹으로 공세에 나서는 건 더더욱 불가능이었다. 그래서 아이는 공격을 먹이는 것보다는 5분간 방어하는 것을 목표로 시험에 임하고 있었다.

"간다!"

입술을 질끈 깨물고, 쉴 틈도 없이 달려드는 잰슨을 응시하는 아이. 이번에는 갈가마귀의 끝으로 간신히 클럽을 한 차례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클럽은 뱀처럼 진로를 휘더니 아이의 옆구리를 후려치고 말았다.

"윽!"

"신음 흘릴 시간이 있으면 움직여!'

옆구리를 후려치고 찌르기로 전환해서 달려드는 클럽. 엉거주춤 움직여 그걸 피하는 아이의 상체가 열렸다. 잰슨은 노련하게 클럽을 비틀어 아이의 정수리를 내려찍었다. 아이는 방패를 놓치고 뒤로 널브러지고 말았다. 이미 사흘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아이는 단 한 번도 세 합 이상 잰슨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으로는 1분이나 될까.

이런 상태라면, 5분은 영원이나 다름없었다. 5분이나 공격을 막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얘기였다. 잰슨은 다시 한 번 엄하게 소리질렀다.

"이제 시험 시간은 30분 남았다! 너한테 자빠져 있을 시간이 있나? 일어나!"

아이는 이를 악물고 엉거주춤 일어났다. 그리고 잠시 후 아이의 볼이 부풀었다. 여러 번 머리를 얻어맞은 탓에 구토감이 올라온 것이었다. 잰슨은 피식 웃으며 클럽을 어깨 뒤로 물렸다.

"뭐냐, 또 토하는 거냐? 너는 화장실 갈 일 없어서 좋겠구나. 입으로 똥을 다 싸니까."

아이는 잰슨을 바라보다, 간신히 메스꺼움을 참아내고 볼 가득 부푼 토사물을 다시 삼켰다. 그리고 가쁜 숨을 내쉬며 갈가마귀를 힘겹게 들어올린다. 잰슨은 의외라는 듯 말했다.

"비위가 좋은 녀석이구만. 계집애처럼 생겨서."

그 때였다. 갑자기 연무장의 문이 열리고 경장을 입은 여성이 휘적휘적 걸어들어왔다. 레이븐사이드 내에 여성이라곤 한 명 밖에 없다. 란페이였다. 아이는 입안 가득한 비릿한 위액의 느낌을 참고, 고개를 돌려 란페이를 바라보았다. 잰슨은 시험 도중인데도 꾸벅 경례했다.

"오늘의 시험을 치르는 중인가?"

"예,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본 적 없던,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로 장내를 살펴보는 란페이. 그녀는 연무장의 벽 근처로 걸어가더니, 팔짱을 끼고 기댔다.

"계속하게. 시간이 남아서 참관이나 좀 할 생각이었으니까."

"알겠습니다!"

깡!

다시 세 합도 지나지 않아 클럽을 얻어맞고 고꾸라지는 아이. 이번에는 배를 얻어맞았다. 다시 토악질이 솟구쳐 역류한다. 하지만, 란페이가 지켜보는데 볼썽사납게 토하고 뒹굴고 싶진 않았다.

몸부림치면서도, 어떻게든 역류한 것을 다시 삼키고 몸을 일으키는 아이. 란페이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저 팔짱을 끼고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잰슨은 살짝 질렸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깡다구도 정상은 아니군."

결국 그 날도 아이는 단 한 번도 세 합을 넘기지 못하고 죽도록 얻어맞기만 했다.

유일한 성과는, 처음으로 토하지 않았다는 것 뿐이었다.

*

점심 식전의 일과는 구보.

태양이 가장 높이 떠오를 즈음, 하필 가장 더울 때를 골라서 하는 뜀걸음이었다. 아이는 작게 만들어진 링메일을 입고, 가죽 부츠를 신은 채, 등에는 갈가마귀를 비껴 걸고 헉헉대며 간신히 행렬을 뒤따라갔다.

몸에 걸친 쇳덩이의 무게를 다 합치면, 그것만 해도 15kg은 넘을 것이다. 몸무게의 3할보다 많은 무게를 짊어지고 뛰는 건 아무리 근력이 보통 또래보다 뛰어난 아이라고 해도 죽을만큼 힘들었다. 몇 번이나 쓰러져버릴 뻔 했지만, 간신히 마지막 바퀴까지 완주할 수 있었다. 출발 지점인 조병창이 눈에 들어온다. 그 순간 저 앞에서 우렁찬 외침이 울렸다.

"마지막으로 한바퀴 더! 마지막이므로 행진가를 부르면서 뛴다. 알겠나!"

란페이였다. 머리를 말총머리로 묶은 채, 맨 앞에서 앞장서서 뛰고 있다. 그와 동시에 모두가 우렁차게 대답한다. 하지만 아이는 힘이 빠져서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한 바퀴... 더..."

하늘이 노랗다. 이미 아침에 흠씬 두들겨맞은 몸이기 때문에 더 그런 걸지도 몰랐다. 절반쯤 뛰었을 때 이미 아이는 맨 뒤에서도 한참 뒤쳐진 상태가 되어버렸다. 어지럼증. 눈 앞의 샛노란 황톳길이 뱀처럼 구불거린다.

"괜찮아?"

그 때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도린이었다. 아이가 걸친 것보다 훨씬 촘촘한 링메일을 입고도 기운차게 뛰어가던 그는, 아이가 걱정되어 일부러 속도를 줄이고 다가왔던 것이다.

"네 보폭으로는 우리 보폭을 따라갈 수가 없는데, 억지로 속도를 맞추려고 하니까 두 배로 힘든 거야. 어차피 꼴찌니까, 네 보폭에 맞게 뛰어."

도린은 아이와 페이스를 맞추어 작게 뛰면서 옆에서 속삭였다. 확실히 그 말대로였다. 옆에서 보폭을 맞춰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한결 편안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도린의 도움 덕분에, 아이는 무사히 오늘의 구보를 마쳤다.

목표 지점에 도착하자마자, 등을 짓누르는 짐처럼 느껴지는 방패를 옆으로 치우고 대자로 쓰러지는 아이. 쓰러지고서도 한참을 헐떡이며 크게 숨을 쉬었다. 폐가 미친듯이 산소를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흉곽이 크게 부풀고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잘 했어. 난 네 나이때 이만큼 못 뛰었어."

아이의 옆에 걸터앉아 신발에 들어간 흙을 털어내며 칭찬하는 도린. 아이는 고개를 들고 어색한 듯 말했다.

"고마워, 사형."

그 때였다.

"누가 방패를 이렇게 함부로 다루라고 했나!"

진노한 음성이 들려왔다. 막 구보를 마치고 정신이 없었던 아이가, 함부로 내팽개친 방패를 보고 화가 난 것 같았다. 그 목소리는 여성의 것이었다.

"빨리 집어들어!"

란페이였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화난 얼굴로 아이에게 호통을 치고 있었다. 아이는 화들짝 놀라 방패를 들고 껴안았다.

"무기는 네 생명이야. 전장에서 팔 한쪽을 잃고 살아돌아온 사람은 많지만, 무기를 잃어버리고도 살아돌아온 사람은 없다! 팔보다 중요한 것이란 말이다. 무기를 다 잃어버리면 그 방패로 싸워야 한다! 대체 누가 자기 팔을 아무데나 내던지고 다니나? 도린 캄벨!"

"예!"

"사제를 그렇게밖에 못 가르치나?"

"아닙니다!"

아이 대신 차렷 자세를 취한 도린에게 화를 내는 란페이. 아이는 어쩔 줄 몰라서 우물거리다가, 옆구리를 쿡 찌르는 도린의 말을 따랐다.

"빨리, 죄송하다고 해."

"죄송합니다."

고개를 푹 숙여서 사과하는 아이. 란페이는 그 모습을 보더니 도린의 어깨 견장을 툭 치고 뒤돌아섰다.

"다음부터는 같은 일이 없도록 잘 지도하도록."

란페이가 떠나간 후에도 아이는 한참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잠시 후, 식사 시간. 오늘의 점심은 호밀빵의 겉을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구워 접시를 만들고, 속살을 파서 양송이 스프를 가득 담고 바질을 살짝 흩뿌린 음식이었다. 떠들썩한 식탁 끝에 앉아서, 두 손으로 빵을 뜯어 스프에 적시고는 오물오물 씹던 아이는 불쑥 중얼거렸다.

"미안해, 사형."

"응? 뭐가?"

"나 때문에, 혼나서..."

도린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얼굴로 조그맣게 빵 조각을 오물거리면서, 침울하게 말했다. 매일 시험이 있을 때마다 란페이가 연무장 한 구석에서 자신의 추태를 보았던 것이 마음에 걸려서였다.

"단장님은 내가 엄청 싫어졌나봐. 그래서, 사형한테도 불똥이 튀는 거고."

"싫어져? 왜?"

"아무것도 못하고 맨날 맞기만 하니까, 한심해서..."

"아니야, 임마. 이 자식 진짜로 아직 완전히 꼬맹이구만."

"응?"

도린은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이미 너한테 에페 바체 자격을 준 것 만으로도 엄청나게 특혜를 준 상황이니까. 혹시라도 편애했다거나, 특별 대접해서 공정성을 잃었다거나, 그런 말이 안 나오도록 일부러 더 엄하게 대하고 있는 거야."

"그래?"

"그래, 임마. 누가 봐도 그거잖아. 꼬맹이가 잰슨 씨 정도 실력자한테 찜질당하는 거야 아주 당연한 일이고. 그만한 일로 싫어질 거면 애초에 데려오지도 않았겠지."

"그래, 그렇구나. 믿을게. 사형은 똑똑하니까, 사형 말이 맞겠지."

"뭐? 똑똑해? 내가?"

"엄청 많이 알잖아. 사형은 내가 지금까지 본 사람들 중에 제일 똑똑해."

아주 자명한 사실이라는 듯이 말하는 아이의 말에 당황하는 도린. 아지프의 마탑에서 배양되다시피 자란 아이는 모든 상식이 놀라울 정도로 결여되어 있었다. 그걸 눈치챈 란페이는 도린에게 아이에게 여러 기본 상식을 가르칠 것을 명령했다. 그래서 도린에게 과외 비슷한 것을 며칠 받은 아이는, 진심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살면서 그런 소리는 처음 들어보는데..."

칭찬 한 마디에 멋쩍어서 머리 한 가닥을 붙잡고 빙글빙글 돌리는 도린. 그에 대한 주변인의 평가는, 멍청한가 똑똑한가 둘 중 무엇에 가깝냐고 묻는다면 멍청함에 더 가까웠다. 그래서 이런 칭찬이 굉장히 낯간지러웠다.

"다시 한 번 말해볼래?"

"사형은 똑똑해."

"음!"

"덧셈 뺄셈도 할 줄 알아."

"응?"

"자기 이름도 쓸 수 있어."

"아니, 뭐야..."

"대소변도 가릴 줄 알아."

"임마, 내가 무슨 강아지냐?"

아이의 머리를 살짝 쥐어박는 도린. 그리고 머리를 붙잡고 마구 헝클어뜨리며 씨익 웃고 말했다.

"아무튼 그렇게 걱정되면 말이야. 빨리 강해져서 잰슨 아저씨한테 한 방 먹여 보라고."

*

용병단 둔영 뒤편의 자그마한 숲.

이미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지만, 아이는 그 숲에서 방패를 휘두르고 있었다. 앙상하게 말라 둥치만 남은 나무를 잰슨이라고 생각하고, 피하는 훈련을 하는 중이었다. 무거운 갈가마귀를 집어들고 낑낑대며 움직이던 아이는, 발을 헛디뎌 뒤로 자빠지고 말았다.

"휴식... 잠깐 휴식할까. 아."

갈가마귀를 두고 일어나려다, 낮의 일이 생각나서 등에 짊어지고 움직이는 아이. 목이 타는 듯이 말랐다. 아이는 어기적어기적 기듯이 움직여서 물이 고여 있는 옹달샘에 도달했다. 샘에는 이미 저물어가는 석양이 주홍빛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 주홍색 물을 한 움큼 떠서 입에 가져가려는 순간, 샘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참으로 열심이구나, 어린 순례자야.'

림의 붉은 몸뚱이와 얼굴이었다. 촤아악! 림은 물을 흩뿌리며 샘에서 빠져나온다. 비슷한 상황을 워낙 자주 겪었기 때문에 아이는 더 이상 놀라지 않았다.

"좀, 정상적인 방법으로 나오면 안 돼? 이제 나오지 말라고는 안 할 테니까."

질색해서 말하는 아이. 림은 킬킬거리며 웃고, 그 말을 무시한 채 몸을 굽혀 아이의 옆에 접근할 뿐이었다. 아이는 그런 림을 무시하고 다시 방패를 짊어지고 나무 옆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훈련을 재개한다. 림은 쭈그려 앉아서 그 모습을 바라보더니, 비웃으며 말했다.

'무슨 춤 연습이라도 하는 게냐?'

"아니야! 진지한 연습이야."

'진지? 그게? 나무쪼가리 앞에서 이상한 쇳조각을 들고 난리굿을 피는게 말이냐?'

"바, 방해하지 마. 나는 진지해."

하지만 림의 말에 기운이 쭉 빠져서 갈가마귀를 내려놓는 아이. 솔직히, 아이 스스로 느끼기에도 이게 크게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림. 림은 강해?"

'음. 신이라고 자칭하던 것들 세 마리의 목을 비틀어버릴 정도로는.'

"그럼 나 좀 도와줘. 나, 강해지고 싶어."

'오오, 드디어 내 아나테마가 될 결심을 세운 거냐?'

"아니. 그건 싫어. 난 그런 거 안 할 거야."

크게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림.

'참 제멋대로구나. 내 사도는 하기 싫은데, 내가 힘은 줬으면 좋겠다?'

"어차피 너 신이라면서 하는 일도 없잖아. 맨날 나 쫓아다니면서 괴롭히면서 놀기만 하고... 그러니까, 그 놀아준 값으로 도와줘."

'너는 나를 무슨 강아지쯤으로 취급하는구나.'

"강아지? 아니야. 강아지는 귀엽잖아."

'잘못 말했다. 강아지 이하로군.'

상당히 모멸감을 느낄수도 있는 대화였지만, 림은 웃어넘길 뿐 전혀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진지한 얼굴로 물어보는 림.

'애초에, 왜 그렇게 결사적으로 내 사도가 되는 걸 거부하는 게냐?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나테마가 될 수 있다고 하면 부모 자식을 팔아서라도 되려고 할 텐데 말이야.'

"너는 누...군가를 해치기만 할 거잖아. 난 그런거 싫어."

'그래, 그래, 그것도 네 선택이겠지.'

몸을 일으켜서 림의 새빨간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미는 아이. 둘의 눈동자는, 깊고 그윽한 심홍색으로, 마치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다. 그렇게 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아이는 조용히 물었다.

"그래서, 도와 줄 거야?"

'어쩔 수 없군. 달리 할 일도 없고 말이다. 내 힘을 나눠줄 수는 없지만... 깨달음을 얻도록, 수행하는 것은 도와주지. 내 눈을 봐라.'

"이미 보고 있어."

'그래, 그렇게 나를 주시해라. 무슨 일이 있더라도, 눈을 감지 마라.'

아이는 침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눈을 크게 뜨고 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인간의 살가죽을 벗겨 진피를 드러나게 만들면 이렇게 될까. 시뻘건 근섬유 다발을 꼬아 만든 것 같은 형체.

차라리 전부 다 벗겨져 있다면 기괴함은 덜할 텐데, 얼굴의 중앙 부분만 흰 피부가 섬처럼 남아 있어 더욱 끔찍하게 보인다. 그 흰 피부 한 가운데에 박힌 두 개의 눈동자. 흰자위는 시꺼멓게 물들어 있고, 눈동자는 석류를 세공해 집어넣은 것처럼 불길한 심홍색이다.

아이는 지금까지 이렇게 길게 림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고 계속 림을 응시하자 다시 구역질과 오한이 등줄기에서 솟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눈을...떼지 마라."

조용히 읊조리는 림. 세상에는 보기만 해도 미쳐버리는 그림이 있다던데. 아마 그 그림은 림의 초상화가 아닐까. 아이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어지러움 때문에 림 주변의 포커스가 흐릿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끼 덮인 숲 속이 갑자기 널리 펼쳐진 사막으로, 갈고리에 카데바가 돼지처럼 걸려 있는 아지프의 실험실로, 사람들이 서로 귀를 자르던 전장으로 계속 모습을 바꾸는 게 보였다.

그 모든 전환의 순간마다 죽도록 무서워 눈을 떼고 싶었지만, 아이는 림의 당부대로 절대로 림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눈을 너무 오래 부릅뜨고 있었던 탓에, 눈 근육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아이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광활한 사막이었다.

그 모래시계의 악몽에서 보았던 잿빛 모래로 가득한 가없는 사막. 멀리서부터 불어오는 모래바람이 눈을 따갑게 때려댄다. 하지만 아이는 모래바람이 눈에 들어가도 눈물을 흘리지 않고 눈을 부릅뜬 채 림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좋아. 이제 눈을 감아도 좋다."

질끈! 아이는 눈을 감고, 천천히 다시 눈을 떴다. 주변의 배경은, 다시 이끼가 덮인 숲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이가 훈련을 하던 나무도 보인다. 그 어지러울 정도의 환상이 지나간 끝에 돌아온 게 원래 훈련하던 숲이라니.

"뭐야,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잖아."

아이는 실망해서 중얼거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달라진 게 있었다. 아이가 눈을 감은 사이, 림이 어딘가로 사라진 것이다.

어느새 해는 완전히 져서, 숲 속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자그마한 우산모양 버섯만이 달빛을 받아 파르스름하게 빛난다. 소슬한 바람이 잎새들을 스치고 아이를 휘감았다. 아이는 팔짱을 끼고 한 번 부르르 떤 뒤, 방패를 들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더 있어봤자, 어두워서 훈련은 못 하겠다."

숙소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 때였다. 숲 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울리더니, 한 커다란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끝에 뾰족뾰족한 침이 붙어 있는 쇠몽둥이를 든 거구의 남자. 잰슨이었다.

"도린의 말대로야, 매일 저녁 이 숲에서 혼자 수련을 하고 있다는 게 사실이었군."

"네, 이 숲을 알려준 게 사형이니까... 그런데 왜요?"

잰슨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잰슨은 이빨이 드러나도록 웃으며, 쇠몽둥이를 뽑아들고 천천히 아이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네 놈이 칼슨을 죽인 걸 절대로 잊지 않는다. 그래서 죽여버릴 생각으로 매일 두들겨패고 있는데, 그걸 눈치챈 단장님이 자꾸 들어와서 감시한단 말이야. 네 골통을 부숴버리지 못하게."

그 음색에는 어떤 종류의 광기가 깃들어 있었다. 기세에 압도된 아이는 방패를 쥔 채로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니 여기서 죽여버리겠다. 이 숲에는, 황소도 혼자 물어죽이는 시커팩 늑대가 많이 살고 있단 말이지. 이걸로 대충 찢어죽여버리고... 늑대 이빨자국 같은 상처를 남기면, 어떻게 넘어갈 수 있겠지?"

잎새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가, 잰슨의 얼굴을 시꺼멓게 가렸다. 오직 눈만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다. 입에서는 흥분해서 솟아오르는 입김이 하얗게 떠오른다.

"마지막 시험이다. 어디 내 목을 따 봐라."

잰슨은 그 말과 함께 몽둥이를 양 손으로 붙잡고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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