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에페 바체 ( 3 )
연무장.
"이 자식은 게을러빠져서 대체 언제까지 퍼자고 있을 생각..."
문을 열며 투덜대며 들어오던 잰슨은, 차가운 연무장 바닥에 고요히 앉아있는 사람을 보고 입을 멈췄다. 아이였다. 옆에는 방패를 내려놓은 채, 무릎을 꿇고 눈을 감고서는 조용히 묵상을 하고 있었다. 그 굳게 다문 입매무새는 하루만에 많이 달라져 있었다. 어떤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아침도 거르고 여기서 뭘 하고 있던 거냐?"
퉁명스럽게 말하며 클럽을 집어드는 잰슨. 가볍게 몽둥이로 손장난을 하며, 위압감을 주고 다가선다. 하지만 아이는 투명한 눈으로 잰슨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이상한 부탁을 했다.
"그거 말고, 저걸로 해 주세요."
연무장 구석의 검대. 갖가지 흉험한 병장기들 속에서도, 독보적인 존재감을 과시하는 플랜지드 메이스. 잰슨의 무기였다. 잰슨은 눈을 깜빡거리다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참 별 같잖은 수를 쓰는구나. 왜? 내가 혹시 망설이기라도 할까봐 그러는 거냐?"
고개를 젓는 아이. 무릎에 손을 짚고 천천히 일어나, 방패를 집어든다. 그리고 자세를 취하며 말한다.
"오늘 지면 죽는다는 각오로 하고 싶어요."
림과 한 환상 속의 수련에서 잰슨은 언제나 메이스를 들고 있었다. 아이는 최대한 그것과 환경을 동일하게 맞추고 싶었다. 하지만 고개를 저으며 같잖은 소리 하지 말라는 듯 일축하는 잰슨.
"됐어. 그렇게 뒈지고 싶으면 그냥 저기 강에 입수라도 하지 그래."
"아니, 하고 싶은대로 해 주게."
또렷한 음성이 들려왔다. 란페이였다. 어느새 도착한 란페이가, 문에서 쏟아지는 역광을 등지고 팔짱을 끼고선 말한 것이었다.
"예? 단장님, 하지만...."
"저만한 각오를 했다면, 성의는 보여줘야지."
냉담한 목소리. 잰슨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클럽을 내버리고 메이스를 집어들었다. 육중한 기둥 같은 메이스의 옆날이 아침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아이는 침을 꿀꺽 삼키고, 그 메이스를 바라보며, 갈가마귀를 세게 붙잡았다.
"응?"
잰슨은 아이의 자세를 보고 놀란 듯 중얼거렸다. 분명히 하루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어제와는 분명히 자세가 크게 달라져 있었다. 병장기와 병장기의 간격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취할 수 없는 자세였다.
"아무래도 허세는 아닌 것 같군."
그러고 보니 이미 전장에서 몇 달 굴러먹다 왔다고 했었지. 눈동냥을 한 게 좀 있을지도 모르겠어. 잰슨은 마음을 가다듬고, 양 손으로 플랜지드 메이스를 곧추세운다. 그리고 바로 달려들었다.
'지금!'
아이의 눈이 번쩍였다. 몇 번이나 한 상상 속의 대련에서, 잰슨은 언제나 첫 공격을 이런 돌진, 그리고 돌진으로부터 연계되는 횡(橫)베기로 시작했다. 저 둔중한 무기의 특성상, 상대가 빠르게 거리를 벌려 회피에만 집중하면 쉽게 타격할 수 없다.
그렇기에 타격 범위가 넓은 횡베기로 상대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무너뜨린 방향에 따라 공격을 전개하는 게 옳다는 것이 잰슨의 결론인 듯 싶었다.
'이번 한 번 밖에 기회가 없어!'
올바른 전개지만 이 전개는 딱 한가지의 약점이 생긴다. 첫 공격만큼은 '이렇게 온다'라고 확실하게 정해져 있기에, 그걸 알고 있다면 상대도 거기에 맞추어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는 눈 앞까지 짓쳐들어오는 메이스의 철추에 맞서, 오히려 앞으로 달려들었다.
"응?"
잰슨의 얼굴에 당황의 빛이 보인다. 이런 대응은 상대해 본 적이 없었다. 아이와 잰슨의 신장차가 엄청나기 때문에 가능한 대응이었다. 아이는 거의 엎드리듯이 고개를 홱 숙여 철추의 횡격을 피하고, 갈가마귀의 결합부에 있는 손잡이를 세게 쥐어잡았다.
그리고 젖먹던 힘까지 쥐어짜내 갈가마귀를 위로 올려쳤다. 마치 풍차를 돌리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뭐, 뭐야?"
예상치 못한 두 단계의 반격에 깜짝 놀라는 잰슨. 그러나 현실의 잰슨은 환상 속의 잰슨보다 더 민활했다. 이미 아이의 모습이 달라진 걸 보고 긴장을 늦추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잰슨은 아이가 반격을 시도하자, 바로 메이스를 내던지고 고개를 한껏 쳐든 채 뒤로 물러섰던 것이다.
"윽!"
아까는 도움이 되었던 신장 차이가 이번에는 해가 되었다. 아이가 아무리 한껏 팔을 내뻗어 방패를 올려쳐도, 턱을 위로 쳐든 잰슨에게 닿을 수는 없었다. 무거운 갈가마귀를 휘두른 대가로 잠시 경직에 빠져 있는 사이,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잰슨이었다. 잰슨은 발을 내뻗어 갈가마귀 위로 아이를 강하게 밀어찼다.
"악!"
짧은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구르는 아이. 그렇게 구르서도 갈가마귀의 손잡이는 놓치지 않고 붙잡은 채였다. 아이는 벌떡 일어나 바로 방패를 쳐들었다. 입에서는 가쁜 숨을 토하며. 그 위를 잰슨의 노호가 덮쳤다.
"이 자식, 어디서 윈드밀을 배운 거야? 누가 가르쳐준 거냐?"
"윈, 윈드밀? 그게 뭐에요?"
"시치미 뗼 셈이냐? 아, 네 사형이 너를 꽤 귀여워하는 것 같던데, 혹시 사형한테 배운 거냐? 홀랑 넘어가서 도를 모르고! 에페 바체 시험자한테 개입하는 건 금지되어 있는데!"
갈가마귀를 이용한 절체절명 상황에서의 최후의 반격. 그 기술의 이름이 윈드밀이었다. 혹시라도 바깥에 유출되면 최후의 일격으로써의 가치를 상실하기 때문에, 절대로 남에게 대놓고 가르치지 않는 기술이었다. 아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말했다.
"그냥, 혼자서 연습하다가 이렇게도 되지 않을까 해서 해봤어요."
"거짓말하지 마라! 네가 무슨 불세출의 천재라도 된단 말이냐?"
"저 아이의 말은 진실이다."
한 발짝 앞으로 나서는 란페이. 흥분하자 도린에게도 막말을 하는 잰슨이었지만 란페이에게는 뭐라하지 못했다.
"도린은 어제 하루 종일 내 밑에서 회계장부 필사를 하고 있었어. 저 아이를 돌볼 시간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단장님, 그걸 믿으란 말입니까? 이런 덜떨어진 꼬마가 혼자서 이런 완벽한 윈드밀을 깨달았다구요?"
항변하듯 말하다가 더 이상 말하는 게 의미 없다는 걸 깨달은 잰슨. 아이는 그 모습을 보며 그저 갈가마귀를 붙잡고 다시 한 번 재전을 준비할 뿐이었다. 왼다리를 접질린 건지, 아까부터 그 쪽이 참을 수 없이 시큰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절대로 볼품없이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믿기 힘들면, 한 번 더 보여드릴게요. 와 보세요."
답지 않게 도발을 시도하는 아이. 이 다리로 먼저 움직이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아까처럼 잰슨이 달려들기를 유도해야만 했다. 이번에는 턱이 아니라 목을 노려야지. 재빠르게 전술을 수정하고 노릴 위치를 바라본다.
그 나이대의 아이의 판단이라고는 보기 힘들만큼 능숙한 임기응변이었다. 아지프의 마탑에 붙들려 배양되다시피 길러진 탓에, 세상의 상식과 처세술에 대해서는 놀라우리만큼 무지한 아이였지만, 전투 경험과 동물적인 감각만큼은 또래를 월등히 앞서고 있었다.
"오냐. 이번에는 아까처럼은 못 할 거다."
무기를 놓친 것만으로도 치욕스러웠던 잰슨. 그는 플랜지드 메이스를 붙들고 흥분해 숨을 토하며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이는 삐걱대는 왼발이 제대로 말을 들어주기만을 기도하며, 갈가마귀를 세차게 쥐어잡았다. 그걸 멈춘 것은 란페이의 음성이었다.
"아니, 시험은 끝났다."
"단장, 감싸시는 겁니까? 아까는 각오를 했으면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홱 고개를 돌리는 잰슨. 그러나 란페이는 말없이 자신의 턱 아래를 툭툭 건드릴 뿐이었다. 잰슨은 무의식적으로 란페이를 따라 목 밑을 만졌다. 그 손바닥에는, 희미하게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아까 아이가 진심을 다해 갈긴 반격. 그 반격이 아슬아슬하게 턱 밑에 작은 생채기를 남겼던 것이었다. 맞은 본인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작은 상처였지만, 란페이는 그걸 놓치지 않고 잡아냈다.
"분명 시험 통과 조건은 5분간 버티거나, 아니면 상처를 입히거나였지? 그건 분명히 상처로 보이는데."
부들부들 떠는 잰슨. 하지만 더 이상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합격! 합격이다! 제기랄!"
쾅! 메이스를 내던지듯 검대에 돌려놓고 연무장을 빠져나가는 잰슨. 아이는 그 말을 듣고, 온 몸에 힘이 빠져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극도로 긴장했던 몸이 이완되며 온 몸이 산소를 요구했다. 쓰러진 아이 위로 새까만 그림자가 드리운다.
"합격했구나. 축하한다. 이제 우리 용병단에 머무를 수 있게 됐어."
역광 때문에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란페이는 엄한 어조로 말을 끝맺었다.
"하지만 자만하지 말거라. 내년, 그리고 내후년. 두 번 더 이 시험을 통과하고 본국에 귀국해야 진짜 기나센 국적을 받을 수 있으니까. 방심하지 말고 앞으로 1년 더 정진하도록. 알겠나?"
그렇게 말하고 홱 돌아서는 란페이. 하지만 아이는 분명히 보았다. 그 입꼬리는, 떨리는 웃음을 참지 못해서 실룩이고 있었다.
'축하한다. 어린 순례자야. 명줄이 길어졌구나.'
또 다른 축하 인사. 이번에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 얼굴이었다. 어디에서 보고 있었던 건지, 림이 새빨간 면상을 들이대며 나타났다. 아이는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며 조용히 말했다.
"림..."
'뭐냐. 감사 인사라도 하려는 게냐?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줬으면 좋겠구나. 내 사도가...'
"배고프다. 날아가서 오늘 점심 뭔지 알려줘."
'너는 나를 대체 뭐로 보는 거냐?'
연무장 전체에 울려퍼지는 꼬르륵 소리. 긴장으로 아침을 거른 탓에 공복이 극에 달해 있던 것이다. 질색하면서도 순순히 말을 따르는 림. 림이 다시 돌아왔을 때, 아이는 그대로 쓰러져 곤히 잠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이불을 가져온 란페이가 그 위에 이불을 덮어주고 있다. 그녀는 자그맣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귀에 대고 속삭였다.
"참 잘했어. 생일 축하한다."
그 날은, 아이의 생일이었다.
첫 번째 해는 이렇게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