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11화 (11/279)

4. 괴물 ( 1 )

두 번째 해.

"제기랄, 준비한 게 이것밖에 없단 말이냐! 표범 고기와 무화과는 어디에 있어?"

"저, 그것이, 수소문했지만 도저히 구할 길이 없어서..."

레이븐사이드를 비롯, 아지프가 가짜 전쟁을 위해 고용한 여러 용병단이 거점으로 삼고 있는 성채. 그 성채의 입구 근처에 세워진 연회장에서 아침부터 고성이 쏟아지고 있다. 고성을 내지르는 사람은 로브를 입고 허리끈을 맨 남자. 아지프의 마도사였다. 허리끈에 매듭이 세 개 매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3위계의 마도사다.

가늘고 긴 수염과 이상하리만치 툭 튀어나온 입 때문에 들쥐 같은 인상을 주는 그 남자는 이 곳에 주재하며 용병단을 감독하도록 명령받은 아지프의 마술사였다. 이름은 랑벨로.

일찍이 3위계에서 막혀 3위계인 채로 중년에 가깝도록 늙어버린 이 자는, 본래 맡은 감독역을 수행하는 대신 이들과 영합해 생전 누려본적 없는 호사를 누리며 희희낙락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전에 없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조리사를 닦달하고 있다.

"그래. 이런 깡촌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지. 어쩐다. 대접이 시원치 않으면 우리 모두 목이 달아날 거야."

"예? 대, 대체 누가 내방하길래 그렇게 난리십니까?"

"본단! 수도 마탑에서 귀한 분이 오신다고 한다. 무려..."

손가락을 펴 보이는 랑벨로. 그 손가락은 6개였다.

"6위계! 6위계의 대마도사께서 이 곳에 찾아오신다고!"

그 말을 듣자 덩달아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조리사. 눈 앞에 있는 3위계의 마술사인 랑벨로만 하더라도, 그에게는 이미 하늘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보다 세 단계 위라니? 이제야 그는 랑벨로가 왜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 것인지 이해했다. 그 사람이 와서 거슬린다는 손짓 하나만 해도 자신의 목은 달아나 버릴 것이다.

"아지프의 전통에는, 표범 고기가 없으면 제대로 대접을 받은 걸로 치지 않는데..."

"어떻게 할까요, 나가서 어디 낚시라도 해 올까요?"

"표범이 물고기냐? 무슨 헛소리야?"

"아니면 이거, 이건 어떻습니까."

"개? 개를 집어들고 뭐 어쩌자는 거야."

"여기 줄무늬 대충 그으면 표범처럼 보이지 않을까요?"

"그만! 당황해서 헛소리좀 그만 지껄이거라."

일축하는 랑벨로. 둥글게 원을 그리며 계속 주절댄다.

"그래, 어차피 폐허나 다름없는 동네니까. 그 정도는 이해를 해 줄거야. 음식을 구하려고 해봤자 제대로 된 게 구해질 리가 없지. 다른, 다른 측면에서 유흥을 구하자꾸나."

"다른 측면이라 함은..."

"여기도 인간은 많지 않느냐. 이 인근 영지든 도시든 농촌이든 돌아다니면서 반반한 계집이 있으면 잡아와라. 마침 곧 사육제가 있으니 계집들도 잘 꾸미고 돌아다니겠지. 일단 나부터 수소문해보겠다."

손을 털며 일어나는 랑벨로. 누군가가 급하게 문을 열어젖힌 것은 그와 동시였다.

"손님! 문 앞에 손님이 오셨습니다. 마술사님을 찾고 계십니다!"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가겠다고 해라!"

"저, 저, 그, 유령마가 이끄는 마차를 타고 오신 분입니다!"

"뭐? 유령마?"

화들짝 놀라는 랑벨로. 유령마는, 5위계가 넘어가는 마술사만이 사역할 수 있는 시종마였다. 그 말 뜻은...

"무슨 전갈을 보내고 하루만에 온단 말이야! 제기랄, 빨리 , 빨리 준비해! 나는 최대한 시간을 끌어 보겠다!"

랑벨로는 자리를 박차고 빠져나갔다.

*

성문 앞.

한 명의 중년이 성벽을 쓰다듬고 있다. 짧게 쳐낸 머리카락은 상당히 억센지 기름을 발라 세운 것처럼 빳빳이 서 있고 남자다운 구레나룻이 날카로운 얼굴선을 따라 자라나 있다.

새치가 드문드문 섞여있는 털빛으로 보아 꽤나 나이가 있을 텐데도, 어지간한 젊은이보다 더 야성적이고 공격적으로 보인다. 진회색의 로브를 입고 여섯 개의 매듭이 묶인 하얀 허리띠를 두른 자.

"아이고, 오셨습니까, 그, 저, 길 아잘록 서방 학술총의 최고회의 위원장님!"

"그냥 위원장이라고 부르게."

그는 이 곳에 시찰을 나온 6위계의 마도사, 길 아잘록이었다. 그의 어깨에는 날개가 네 개 달린 귀조(鬼鳥)가 앉아 새빨간 부리를 매만지고 있다. 길은 헐레벌떡 달려와 고개를 숙이는 랑벨로를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더니, 성벽을 어루만지던 손을 멈추었다.

"저, 저,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수도에 있던 시절, 위원장님의 강의를 한번이라도 청강해보는 게 필생의 꿈이었습니다."

"그래? 내 주전공이 뭔가?"

"예? 저...독초? 독초학?"

"필생의 꿈인데 그것도 모른단 말인가?"

피식 웃는 길. 그는 비굴하게 허리를 굽힌 랑벨로를 무시하고 성문을 향해 걸어들어가며 말했다.

"자네는 참 꿈이 많나보군."

"아니, 아닙니다! 저, 저를 따라오시죠. 안쪽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랑벨로는 계속 죄인처럼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저, 저 여기는 조병창입니다. 이 곳에서, 노예들을 동원해 전쟁에 쓸 화살과 날붙이 따위를 만들고 있습니다."

"무기를 만들어?"

"예. 하도 격전이 잦아서, 화살과 투창 같은 소모품은 써도 써도 모자라니까요. 노예의 일손이라도 빌리지 않으면 보급이 불가능해서 말입니다."

"자네가... 랑벨로 미르슬로프 군, 이었지."

"제, 제 이름을 기억해 주시다니, 삼생의 영광입니다."

"아깐 필생이더니 이젠 삼생인가? 아니, 기억하는 게 당연하지. 자네가 수도에 올린 보고서를 전부 읽어봤으니 말이야."

그 말을 듣자 고개를 숙인 채로 얼어붙는 랑벨로. 길은 무심한 눈길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화살 따위의 기타보급품 부족을 명목으로 예산 지원을 17번이나 자네 이름으로 요청했던데, 같은 이름을 17번이나 보면 아무래도 외우게 되지 않겠나."

그렇게 지원받고도 부족했단 말이냐? 이 말은 간접적으로 그렇게 힐난하는거나 다름 없었다. 랑벨로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런 온갖 명목으로 예산을 타내고는, 다른 곳에 유용해왔기 때문이었다.

"저, 저, 워낙 격전이어서 말입니다. 그렇게 보충받고도 부족해서...손을..."

"그래? 상대는 무슨 용군단이라도 이끌고 오나?"

"예?...예?"

"그 17번 편성된 특별예산으로 화살을 제대로 샀다면 말이야, 1년당 오백 수레 어치는 화살을 샀을 텐데 말이야. 오백 수레나 화살을 쏟아붓고도 부족하다면 상대는 필경 하늘을 나는 용군단이라도 되는 거겠지. 이런, 카나기의 최정예가 여기 전부 모여 있었군."

대놓고 비꼬는 어조로 돌아선 길. 길의 어깨에 앉은 귀조가, 주인의 적의를 읽었는지 랑벨로를 보고 끼이익 울었다. 그 귀신의 흐느낌 같은 목소리에 놀란 랑벨로는 히익 소리를 내뱉으며 움츠러들었다.

그는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벌벌 떨고 있다. 아, 드디어 꼬리가 잡혔구나. 알면서도 묵인해주는 게 아니었나? 이 사람이 파견된 이유는, 그럼...

"죄,죄,죄송합니다."

"뭐가 말인가?"

"사, 사실, 다른 이유로 이런저런 예산이 필요했는데, 그러면 결재가 쉽게 떨어지지 않아서, 편의상 보급품 지원을 이유로 보고서를... 죄송합니다! 하지만 결단코, 횡,횡령은 없었습니다. 공성이 워낙 심해서, 이런 저런 소모가 많았던 것 뿐입니다."

"횡령이라니, 누가 자네가 횡령했다고 하기라도 했나, 랑벨로 군?"

어깨에 손을 짚어주는 길. 그 손길은 따뜻했다. 랑벨로는 그제서야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길은 홱 돌아서더니 앞장서서 움직인다.

"가세. 나는 그, 고용된 용병단이 모여 있는 둔영엘 먼저 가 보고 싶군."

"예, 예, 알겠습니다!"

환하게 웃으면서 따라붙는 랑벨로. 하지만 길은,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혼잣말하듯 툭 중얼거렸다.

"공성이 심했단 말이지."

"예?"

"아까 성벽을 살펴봤는데 말이야. 세로로 긴 홈이 파여 있더군. 그게 무슨 뜻인지 아나?"

"모, 모르겠습니다."

"빗물이 흘러내려서 성벽에 홈을 냈다는 거야. 그 소리는, 물이 돌을 파먹는 그 긴 세월 동안, 한 번도 성벽 보수를 안 했다는 거지. 공성이 격렬했다라..."

랑벨로의 얼굴이 누렇게 말라죽었다. 길은 그 모습을 보고 또 피식 웃더니 돌아섰다. 이렇게 랑벨로를 들었다 놓는 걸 즐기는 모양이었다.

"퍽도 격렬했겠군."

*

어떻게든 만회해야 한다.

랑벨로의 뇌리를 채운 생각은 이것 뿐이었다. 지금까지 북서 자치령이 방만하게 운영되었던 것은, 아지프 일부에는 북서 자치령의 실태가 알려져있음에도 그들이 묵인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이 곳에서 그들은 시체를 얻을 수 있었고, 워 메이지가 되고자 하는 이들은 승전의 공적을 얻을 수 있었으며, 어린 견습 마술사들이 훈련장으로 이용할 수도 있었다. 그것이 묵인의 이유였다.

그 기류가 변했다. 그런 것을 묵인하지 않는, 원칙주의로 유명한 수도 마탑에서 사람이 파견된 것이 그 증거였다. 그리고, 그 기류가 변하면, 가장 먼저 본보기로 목이 날아가게 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다.

"저, 존경하는 위원장님. 진지는 자시고 오셨는지...?"

"아니. 나는 소식하는 편이라서. 그렇게 신경쓰지 않아도 좋아."

접대라도 잘 해서 돌려보내야 한다. 랑벨로의 머릿속은 그 생각으로 가득 찼다. 휘적휘적 걷는 길의 발걸음을 간신히 뒤쫓아가는 랑벨로. 두 사람은 곧 둔영의 한 가운데에 이르렀다. 한때는 마을이었으나 철거되어 그 텅 빈 울타리를 휘감고 잡풀이 무성히 자란 곳.

"응?"

거기에는 한 명의 사람이 무릎을 잡고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노인이라고 생각하게 만들 정도로 새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작은 관목이었다. 옆에는 물이 담긴 물뿌리개가 놓여 있다. 아무래도 그 관목에 물을 주던 중이었던 것 같았다.

"끼루루룩!"

길의 어깨를 횃대처럼 붙잡고 앉아 있던 귀조가 괴성을 내지르며 날아올랐다. 관목을 향해서였다. 그 나무의 야트막한 가지 위에서는 작은 참새 한마리가 고개를 쳐들고 찍찍대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 자는 물을 주려다, 참새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날개가 젖을까봐 물뿌리개를 멈춘 모양이었다. 귀조는 쏜살같이 날아들어 그 참새를 한 입에 삼켜버렸다.

"어."

화들짝 놀라서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랑벨로의 동공도 크게 확장됐다. 그, 아니 그녀의 용모에 크게 놀랐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피부라기보다는 석고 조각상의 그것 같은, 티 하나 없는 매끄러운 흰 피부. 그 위로 새겨진 이목구비도 흠 하나 없다. 양산처럼 기품 있게 구부러진 긴 속눈썹이, 보석 같은 붉은 눈에 그윽함을 더한다.

랑벨로는 침을 꿀꺽 삼키고 그 얼굴을 핥듯이 살펴보며 품평을 시작했다. 나이는, 갓 성인식을 치른 정도일까? 열일곱, 열여덟 정도 될 것 같다. 마을에 나가면 얼굴만 비춰도 여럿의 방심을 흔들어놓고 다닐 것이다. 이런 촌동네에 있을 만한 미모가 아니었다. 아마 수도의 고급 춘희들 중에도 이런 여자는 몇 없을 것이다.

'이거다!'

여기에 있는 한 아무래도 누군가의 딸이거나 첩이거나, 그런 비슷한 것이겠지. 그럼 취해도 된다. 이걸 붙잡아다 바치면 훌륭한 접대가 되겠다. 랑벨로는 구렁텅이 속에서 동아줄을 발견한 심정으로 그녀의 팔을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먼저 나선 것은 길이었다. 그는 번개같은 몸놀림으로 그녀의 앞까지 다가가더니, 검지와 엄지로 그 턱을 붙잡았다. 그 표정은 아주 심각했다.

"너... 혹시 나를 알고 있느냐?"

갑자기 일어난 일에 당황한 건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여자. 잠시 그렇게 침묵이 계속됐다. 역시 아무리 고위의 마술사라고 해도 회가 동하는 건 어쩔 수 없군. 랑벨로는 실실 웃으며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자, 자, 어린 계집아이야. 이 분이 누구신지 감히 알고 그렇게 빳빳이 고개를 쳐들고 있느냐? 이 분은 손짓 하나로 이 성의 모든 생명을 뼈만 남겨버릴 수도 있는, 위대한 분이시다. 아무래도 사죄가 필요할 것 같구나, 밤에 내관으로..."

"랑벨로 군, 닥치게."

그러나 길은 짜증난다는 듯 랑벨로에게 말했다. 그리고 턱을 붙잡고 그 여자의 얼굴을 더욱 자기 가까이 끌고가더니, 무언가 알 수 없는 주문을 중얼거렸다. 그 주문을 듣자, 귀조가 날개를 펼쳐, 여자의 목을 목도리처럼 감싸고는 끼룩거린다.

랑벨로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그걸 바라보았다. 자신이 알아볼 수 없는 어떤 고위의 마술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묻겠다. 너, 혹시 나를 본 적이 있느냐?"

"없어요."

"진실이냐?"

"예."

말을 마치고 귀조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길. 귀조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좋다. 사람을 잘못 본 모양이구나. 가라."

팔을 풀어주자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여자.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물뿌리개를 집어들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 당황한 랑벨로는 그 여자의 손을 확 붙잡았다. 안 돼, 어떻게든 이 년을 붙잡아서 침실에 집어넣어야 되는데!

"아, 아니, 잠시만...! 이 자식, 불경하다!"

"제 사제에게 무슨 볼 일이 있으십니까?"

"사형!"

멀리서 또 다른 음성이 들렸다. 묵직한 남성의 것이었다. 한 손에는 커다란 기형의 방패를 들고 빈틈없이 갑옷을 입은 채 걸어온다. 이 자는 면식이 있었다. 기나센의 간부 후보생인 도린 어쩌구라는 놈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먼저 랑벨로의 귀에 들어온 것은, 사형이라는 단어였다. 사형? 놀라서 그녀, 아니 그의 목을 바라보는 랑벨로. 확실히 희미하게나마 목젖이 부풀어 있는 게 보였다.

"뭐하나, 랑벨로 군. 자네 혹시 비역질 취미도 있었나?"

질겁하며 손을 떼는 랑벨로. 아지프를 비롯한 일곱 학파에서, 남색은 파문 위원회에 회부될 수도 있는 중죄였다. 도린은 먼저 길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한 뒤 흰 머리의 아이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호출이 있어서 말입니다. 혹시라도 폐가 되지 않는다면, 제 사제를 데려가도록 하겠습니다."

"그,그래, 데려가도록 해라."

"랑벨로 군. 난 이제 이 둔영의 책임자를 접견하고 싶네. 안내하게."

"알겠습니다!"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황급히 뒤돌아서는 랑벨로. 그가 여자로 착각하고 붙잡은 사람은 이제 열네 살을 맞이한 아이였다. 일생 처음으로, 충분한 영양과 운동 그리고 보살핌을 받은 아이는 일년 사이에 정말 몰라보게 자라나 있었다. 랑벨로가 아이를 성인 여성으로 착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도린은 억세게 아이의 손을 붙잡고, 아지프의 두 마도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움직였다. 아이는 살짝 입을 벌리고 조용히 말했다.

"형... 아니, 사형, 고마워."

그러나 도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느새 창고 뒤쪽까지 다다른 두 사람. 도린은 그제서야 손을 놓고, 혹시나 마술사가 따라붙지는 않았나 살펴보았다. 그리고 휙 뒤돌아섰다. 아이는 그런 도린의 소매를 붙잡고 말했다.

"저, 그, 사형. 오랜만에 같이 밥 먹을까? 나 이제 젓가락질도 잘 하는데..."

그러나 도린은 조용히 손을 떨쳐내더니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아이는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

긴 복도.

"책임자는 여러 명이 있습니다만, 어떤 책임자한테 안내할까요?"

"란페이... 우르드. 기나센에서 온 여자일 거야. 그녀에게 안내하게."

그 말에 따라 란페이의 집무실로 길을 이끌고 가는 랑벨로. 검과 그림, 방패 따위가 걸려 있는 복도를 따라 성큼성큼 움직인다. 그 모습은 마치 점령군처럼 거침이 없었다. 복도의 거의 끝에 다다랐을 때, 바구니 가득 세탁물을 들고 방문을 나서는 하녀와 마주쳤다. 그녀는 두 사람을 보고 당황해서 소리친다.

"어, 저,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지금 주인아씨께서는 막 목욕을 마친..."

그러나 그 말을 끝맺기도 전에 길은 이미 집무실의 문을 열고 있었다. 쾅! 문이 닫힌다. 깔끔하게 정돈된 방 안에는, 막 목욕을 마치고 흰 셔츠 하나만 걸친 여성이 당황한 얼굴로 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 무슨..."

"앉게. 나눠야 할 대화가 많고 시간은 모자라니."

배꼽부터 가슴께까지, 란페이의 흰 나신이 전부 적나라하게 보이는데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의자에 앉는 길 아잘록. 랑벨로는 그 모습을 보고, 또 멋대로 판단을 내렸다.

"아, 그렇군요. 그럼 편안히 즐기시길 바라겠습니다. 억센 계집이 또 안는 맛이 있지요. 그럼."

"랑벨로 미르슬로프 군. 자네도 와서 앉게."

짜증스럽다는 듯 말하는 길. 랑벨로가 두려움에 떨며 그 옆에 다가오자, 그는 아까 아이에게 했던 것처럼 검지와 엄지로 랑벨로의 턱을 붙잡고 치켜들었다.

"아까부터 참고 넘기려고 했지만, 짜증나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랑벨로 군, 자네는 말이야, 계집질을 참 좋아하는 모양이군."

"예? 저, 아니, 아닙니다."

"내 강의를 듣는 게 필생의 소원이라고 했나? 좋아, 짧은 강의 하나 해 주지. 물어라."

"끄아아아악!"

아까 아이에게 그랬던 것처럼, 날개를 펼치고 랑벨로를 감싸안는 귀조. 그 닿은 부분이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뜨겁게 시큰거렸다. 뭐지, 아까 그 녀석은 이런 고통을 받고도 내색 하나 안 했단 말인가? 랑벨로가 그러거나 말거나, 길은 흔들림 없는 눈으로 랑벨로를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내 주전공은 영혼이다. 인간의 영이 가진 마술적 속성을 분석하고 활용하며, 그 영을 어떻게 희생해야 외계의 존재들을 이 땅에 효율적으로 불러올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그들은 말이야, 항상 인간의 영혼에 굶주려 있지. 왜인지 아나?"

"배...배움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그 하나하나가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을 가진, 주관적 관측자이기 때문이야. 인간이라는 해석자가 세계를 관측하고 해석함으로써 세계는 비로소 존재하기 때문이지. 이건 신도 악마도 할 수 없는 일이야. 왜냐면 그들은 방향성에 있어서 다소 차이는 있으나... 완전하고 무오하기 때문이다. 무오하기 때문에 그들은 늘 공리밖에는 받아들일 수 없으며, 그들의 세계는 해석이 고정된 하나밖에 없는 거야. 모래시계 속의 센디엘은 천 년동안 천변만화했으나, 천상도 지옥도 모두 태초부터 억겁의 시간이 지나도록 같은 모습인 이유도 그거다.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불완전한 인간이니까, 세계를 완전히 알지 못해서, 자신만의 세계를 가질 수 있다. 그게 인간의 영혼에 풍미를 불어넣는 거지."

"그래, 완전한 것은 불완전할 수 없기 때문에 불완전하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에게 매료되는 것이다."

"배...배움이 필요합니다."

"정말로? 아니, 내 눈에 자네는 배움이 필요해보이지 않아. 자네에게는 학구열도 지식욕도 없어. 있는 건 육욕뿐이지. 아지프는 자네의 육욕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않나, 그렇지?"

"아... 아닙니다...으아아아악!"

"세네터에게 물린 채로 거짓을 말하지 마라. 이 녀석은 거짓말을 먹는다. 거짓말을 할 때마다 넌 영혼을 뜯어먹히게 될 거야. 영혼을 다 뜯어먹히면, 세네터와 같은 귀조가 된다."

세네터. 귀조의 이름은 그것이었다. 귀조의 날개에 감싸여 고문이라도 받는 것처럼 몸을 뒤트는 랑벨로.

"인간은 불완전하단 말이지... 인간은 언어가 없으면 서로 소통할 수 없어. 언어를 사용한 소통마저도, 실제로는 소통이 아니라 그저 소통의 흉내다. 그 본질을 파고들어가면, 사실 그 모든 건 자신과의 대화나 다름없단 말이야.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나라면 어떻게 느낄까? 무의식적으로 스스로 그런 질문을 던진 끝에 상대에게 대화를 건네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나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랑벨로 군, 자네는 나를 무슨 육욕에 미친 포악한 권력자인 것처럼 대하더구나. 그렇지 않느냐?"

"아,아닙..맞습니다! 맞습니다..."

"그 모습은, 네가 마음속에 그리는, 권력을 가졌을 때의 너의 모습이다. 그렇지 않느냐?"

"맞습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중앙에서 일부러 이런 한적한 곳으로 와서, 그 알량한 힘으로 아지프의 위세를 팔아 골목대장 놀이라도 하려고 한 거겠지. 학우들이 피와 등뼈를 깎아 벌어들인... 소중한 지원금을... 착복하면서 말이야."

"아..아닙...끄아아아아아악!"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벌레처럼 몸을 뒤틀며 바닥을 나뒹구는 랑벨로. 길은 만족스러운 듯 그 모습을 바라보더니, 세네터를 불러들여 이번엔 다른 곳을 향하게 시켰다. 란페이에게였다. 란페이는 셔츠 하나만 걸친 채로 집무실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표정에는 당황스러움이 사라지고 진지함과 진중함만 남아 있다. 세네터는 그 하얀 목을 휘감고, 핏빛처럼 시뻘건 부리를 들이대곤 꼬리를 쳐들었다. 투툭 소리와 함께 셔츠 맨 위의 장식단추가 끊어져 책상 위를 나뒹군다.

"그리고... 란페이 우르드 군, 자네는 이 자와 영합해서 아지프의 혈금을 함께 착복했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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