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12화 (12/279)

4. 괴물 ( 2 )

"아닙니다."

길의 눈에 놀랍다는 빛이 떠올랐다. 란페이는 전혀 괴로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세네터를 목에 두른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셔츠 외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기 때문에, 아랫배와 하반신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녀의 아랫배에는 불로 지진 듯 새빨간 흉터가 커다랗게 남아 있었다. 잠시 후 그녀는 어떤 상자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거기에는 아지프에서 보낸 돈이 포장도 뜯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마도 이 곳에서 일어나는 가짜 전쟁에 대해서 이미 다 알고 오신 것이겠죠? 저 역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임금을 받을 순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건 저희의 양심을 저버릴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피를 흘려 집에 고기를 가져오던 기나센의 용병들 모두의 양심을 저버리는 행위가 될테니 말이죠. 그래서, 저희의 재정을 소모하면서 주둔했습니다. 보내주신 임금에는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호오..."

이 긴 얘기를 한 호흡에 쏟아낸다. 그 동안 세네터는 한 번도 우짖지 않았다. 그 소리는 이 말이 전부 진실이거나, 최소한 진심이라는 뜻이었다. 길은 까끌까끌한 수염을 매만지며 계속해서 말을 건넸다.

"그럼 왜 애초에 이 의뢰를 거부하지 않은 건가?"

"해골 세 개였습니다."

"이런, 그랬군."

고개를 젓는 길. 그는 팔을 내뻗어 란페이가 내민 상자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럼 이건 받아가도록 하겠네."

"모쪼록."

그리고는, 그 상자를 그대로 다시 내밀었다.

"그리고, 다시 자네를 고용하고 싶군."

"예?"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지 눈을 깜빡이는 란페이. 길은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원래는 이 성에서 주둔하고 있던 용병단을 전부 죽여버리고, 그 뼈로 군대를 일으킬 목적으로 내가 파견되었지만 말이야. 나는... 쓸모 없는 살생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거든. 쓸모 없는 살생은 비효율적이지 않나, 그렇지?"

그럼 쓸모 있는 살생은 하겠다는 건가? 섬뜩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길. 란페이는 침을 삼켰다. 눈 앞의 남자는 그 말을 허언이 아니라 진실로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였다.

아지프의 6위계 마도사는 그 일인 일인이 걸어다니는 군대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대량의 뼈를 되살려 병사로 만들거나, 그걸 제물로 바쳐 외계의 강력한 존재를 불러내는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계속되는 한 그들의 군세는 끊어지지 않는다. 시체는 계속해서 생기기 마련이므로.

"자네는 꽤 영리한 두뇌를 가진 모양이니, 어디 한 번 내가 왜 이러는지 짐작해 보게."

강의를 하는 교수라도 되는 양 말을 건네는 길. 란페이는 침을 삼키고, 조심스럽게 말을 고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혹시, 뭔가 상황이 바뀐 게 아닌가 싶습니다만..."

"맞아. 상황이 변했다. 이제 여기에서, 우리는 진짜 전쟁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어. 아, 말을 많이 하니 목이 타는군. 혹시 차라도 한 잔 내올 수 있겠나?"

란페이는 종을 흔들어 하녀를 불러들였다.

*

이 곳은 이제, 카나기와 아지프의 대리전의 전장이 된다.

길의 말을 요약하면 그것이었다. 그는 하녀가 내온 마른 과자를 차에 적셔먹으며, 특유의 만연체로 길고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학자풍의 어려운 어휘가 많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꽤나 독서를 한 편인 란페이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절반쯤 듣고 나서야 간신히 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란페이는 참지 못하고 물어보았다.

"그러니까, 황제에게 보여줄 무력 시위를 하기 위해서, 이 북서 자치령에서 카나기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야 된다, 이 말씀인가요?"

"그래! 바로 그걸세."

차를 홀짝이곤 박수를 치는 길. 그는 다시 자신이 늘어놓은 긴 말을 되새기기 시작했다.

"얼마 전 남방에서, 야만족과 싸우던 우리의 군무집정관이... 전사하는 사태가 벌어졌지. 그 야만족들은 최근 꽤나 건방진 챔피언을 얻어서 말이야, 꽤나 기세를 올리고 있거든. 그래서 우리는 복수를 위해... 마도병단을 꾸려서 그 놈들에게 빼앗긴 옥토를 향해 진군했지. 나를 포함해서 6위계의 마술사가 다섯이 포진된 구성으로 말이야. 그런데, 도착해보니 이미 그 놈들이 다 죽어 있었단 말이야. 용과 거인 밥이 되어서 말이지. 카나기의 짓이었어. 그 놈들이 우리가 복수하기도 전에 관할권을 주장하면서 먼저 야만족을 몰아내버렸던 거야."

"그래서, 폐하께선 다음 남방 군무집정관에 아지프의 마도사가 아니라 카나기의 마도사를 앉힐 생각을 했다는 것이고요?"

"그래! 애초에 그걸 노리고 우리에게 말도 없이 군세를 움직여 야만족을 쫓아낸 거란 말이지. 그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지만... 라달라리아의 계율에 따라, 제국의 영토 안에서 우리는 서로 다투는 게 금지되어 있다. 그리고... 이 자치령은, 제국이지만 제국이 아니지. 이 곳에서라면 카나기의 짐승조련사 놈들을 찢어죽여도 아무런 탈이 없다."

"그래서 이 쪽에 대규모의 군대를 파견할 생각으로, 이 쪽에 대한 회계 조사를 철저히 해봤더니 말이야. 아주 가관이더란 말이지. 쓸모 있는 놈이라곤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단 말일세. 그래서 내가 이 곳을 다 쓸어버릴 생각이었다만... 자네처럼 괜찮은 사람이 있다면, 이 쪽의 지휘를 위임해도 괜찮겠지. 그게 내 판단일세."

"저, 마술사님께서는 그럼...?"

"나는 일이 많아서 말이야. 최근 진행중인 연구가 거의 끝에 다다랐는데, 이런 고약한 일 때문에 불려나와서 아주 화가 나 있었다네. 다시 연구에 매진할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해."

거기까지 말한 길은, 갑자기 어울리지 않게 들뜬 표정이 되어 자신의 연구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냉철하고 이지적이었던 인상이 일변해서 마치 새 장난감을 선물받은 아이 같은 표정이 되었다.

말을 살짝 질질 끄는 버릇이 있는 그였는데, 이 수다를 떨때는 한 번도 끌지 않고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란페이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알아들을 수도 없는데 계속해서 자기 하고 싶은 말을 지껄이는 길의 수다를 들어줘야만 했다.

"서쪽 오데인 유적 지하에서 어떤 거대한 회백색 광석을 발견했는데 말이야, 그 광석이 광석이 아니라 뼈였단 말이지. 더 연구해보니 그건 교만의 군주, 바나펠이라는 데몬스폰의 사산한 새끼가 남긴 유골이었어. 원래 이 세상에 강림한 외계의 존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먼지로 흩어져 사라져야되는데, 어미 뱃속에 있는 채로 죽어서 이 쪽의 것도 저 쪽의 것도 아니게 되어버려서 유골이 남았단 말이야. 놀랍지 않나? 란페이 군. 이런 일이 일어날 확률이 얼마나 되겠나. 한 수억분의 일, 수조분의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그래서 말이지, 그 유골을 어떻게든 되살려서 데몬스폰의 새끼 비슷한 무언가를 만들 순 없나 연구중이었다네. 이미 진척이 꽤나 된 상황이야. 프로젝트명에 개체명도 붙였어. 헤카톤 케이레스라고 말이야. 유모 잃은 유골이란 뜻일세. 내 그 아이가 완성되기만 하면, 아마 사소필렌의 성물에 필적할 괴물이 탄생할 거야. 오오, 상상만 해도 흥분되는군, 그렇지? 아마 이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물건을 만들기 위해서는 목숨이라도 바치고 싶을 거야. 그렇지?"

"아? 네, 네. 그렇군요."

"그럼 그 다음은 질료의 문제인데 말이야. 그 뼈마디를 복제하려는 시도를 서른 여섯번이나 했는데 지금까지 다 실패했단 말이지. 그런데 말이야, 최근 아주 우연히 한 번은 복제에 성공했다네. 어떻게 성공했는지 알고 싶나?"

"네, 대단하군요. 알고 싶습니다."

"그렇지, 그렇겠지, 원래 아무한테나 안 해주는 이야기인데 말이야... 란페이 군, 자네가 이렇게 흥미를 가지니 안 해줄 수가 없군..."

흥미 가진 적 없는데요? 속으로 소리지르는 란페이. 하지만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저 감명을 받은 표정을 지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하면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렇게 란페이는 무려 한 시간이나 그 수다를 들어줘야만 했다. 셔츠 하나만 걸친 채로.

다음 날 란페이는 감기에 걸렸다.

*

"그럼 무운을. 당장 다음 달부터, 수도에서 대전략과 전술적 목표들이 하달될 걸세. 자네가 총지휘관으로서 이 땅의 전쟁을 잘 이끌어주길 빌겠네."

길은 드디어 영원 같던 수다를 끝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장된 표정으로 지루한 티도 못 내고 그 얘기를 다 듣고 있었던 란페이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랑벨로는 그 때까지도 바닥에서 뒹굴며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란페이는 난처한 표정으로 길에게 물었다.

"저 분은 어떻게 하면..."

"아직은 어딘가에 쓸모가 있을지 모르니. 목숨을 거두지는 말아야겠지. 아직은... 말이야. 아."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는 길. 무엇인가가 떠올랐다는 듯한 기색이었다. 란페이의 목에서 벗어나 길의 어깨에 앉아 있던 세네터가 다시 푸드덕대며 날아올라 란페이의 목을 휘감았다.

"아니, 별 것 아닌데 말이야. 우리에겐 아주 중요한 질문이 될 수 있어서 혹시나 해서 묻는 것이니 불쾌해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예. 말씀하시지요."

"자네 혹시... 나하트 칼벨레인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나?"

란페이는 곰곰히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아니오.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만..."

"그럼 혹시, 광대가 튀어나온 쥐 같은 수염의 노인에게서 아이를 맡아 기른 적이 있나?"

"아니오. 없습니다."

"그런 노인을 본 적은? 혹시 그런 노인이 숨어 사는 걸 본 적은 없나?"

"없는 것... 같습니다."

계속해서 이런 저런 질문을 던져 확인하는 길. 질문에 대답하면서 란페이는 어렴풋이 이 질문이 누군가를 추적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길래 이렇게까지 찾아내려 하는 걸까?

척추를 곧추세우고 식은땀을 흘리며 질문에 대답하는 란페이. 수십 가지의 질문이 오가도록 세네터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길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세네터를 다시 불러들었다.

"됐어. 됐어. 기우였던 모양이야. 그래, 그럴 리가 없지."

문을 나서기 전, 조용히 혼잣말을 하는 길.

"그 녀석에게는 분명히 인간의 영혼이 있었으니 말이야."

쾅! 문이 닫혔다.

*

힘 없는 정의는 무력하며, 정의 없는 힘은 압제이다.

고풍스러운 서체로 검면에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는 고색창연한 검. 두 사람이 떠나고, 옷을 차려입은 채 진지하게 사색에 잠겨 있던 란페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고이 숨겨두었던 그 검을 꺼내 숫돌에 가는 것이었다. 반질반질한 숫돌 위에 검을 올려놓는 순간,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도 좋아."

아이였다. 쭈뼛쭈뼛 망설이며 들어온 아이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곤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는다. 란페이는 검을 내려놓고 깍지를 꼈다.

"무슨 일이니?"

"저, 이걸 돌려드리고 싶어서 왔어요."

주섬주섬 은색 견장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는 아이. 란페이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이거 때문에, 사형이 계속 저를 피하는 거 같아서... 이거 때문에 화난 거 같으니까, 돌려주고 싶어요."

시무룩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말을 늘어놓는다. 그 은색 견장은 몇 주 전까지 도린의 어깨에 걸려 있던 물건이었다. 이 용병단에서, 에페 바체들 중 2번째 서열에 있다는 걸 나타내는 견장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지금 아이에게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아이가 도린을 쓰러뜨리고 2위의 서열을 빼앗아버렸기 때문이다.

일 년 동안 성장한 것은 아이의 신장만이 아니었다. 검의 실력 역시 일취월장했다. 생활에서 취미라는 걸 가져본 적이 없는 아이에게 검은 무엇보다도 재미있는 놀이이자, 처음으로 가져본 몰입할 대상이었다. 아이는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기교를 배워나가며, 하루의 대부분을 검을 수련하는 데 사용했다.

일반적인 아이였다면 근육이 찢어질 정도의 훈련량을 매일 소화하고, 특유의 재생력으로 회복하며, 밤에는 림과 환상 속에서 실전에 가까운 대련을 계속했다. 특히 림과 훈련하는 과정에서 죽음의 경험을 수십, 수백 번 반복하면서 백전노장도 갖기 힘들 법한 실전 경험과 실전에서의 냉정함을 획득한 것이 컸다.

일 년이 지날 무렵, 이미 대부분의 편대장은 가볍게 보고 아이와 대련했다가 한 번씩은 패배하고 말았다. 두 번째 에페 바체 시험 직전, 부단장까지 역임했던 노련한 편대장, 블레어는 아이와 싸워 보고는 놀라서 이렇게 소리쳤다.

"뭐야,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미 신기(神氣)를 완벽하게 다스리고 있는데? 누가 가르쳐 준 거냐?"

"신기?"

"그게 뭔지도 모른다고는 하지 마라. 재능 차이 때문에 자살하고 싶어지니까."

"몰라요."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블레어. 신기란 이 센디엘에서 소멸한 신들이 산산이 부서지면서 세상에 남기고 간 기운을 뜻했다. 센디엘에서, 아지프와 같은 신의 신도가 되어 신의 힘을 받는 축복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은, 공기 중에 입자처럼 퍼져 있는 그 기운을 몸에 받아들이고, 축적하며, 수련하는 것으로 힘을 얻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목적성 없는 신의 조각, 신기는 인간의 체내에 들어가면 빠져나오고 싶어 마구 몸부림을 쳤다. 그 신기를 다스려서 몸 안에 갈무리하는 데에는, 뼈를 깎는 고통이 반드시 뒤따랐다.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해 죽거나 포기하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이것을 극도로 연마하면, 아주 드물지만 신앙 없고 마력 없는 몸으로도 5위계의 마술사를 뛰어넘는 성취를 얻을 수 있었다.

"단장이 여자의 몸인데도 훌륭하게 단장직을 수행할 수 있는 것도 신기의 힘이 크지. 신기를 이렇게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건, 단장과 나를 포함해서 레이븐사이드 전체를 통틀어도 몇 명 안 된다. 열네 살에 벌써 의식하지 않고 신기를 검에 담을 줄 안다는 건 엄청난 거야."

"그래요? 근데 왜 저는 아무한테도 그걸 배운 적이 없죠?"

"위험하니까. 보통 스무 살은 되어야 그 존재를 알려주고 수련을 시작하게 되어 있어."

블레어는 간단하게 신기에 대한 설명을 하고는, 입 가득 함박웃음을 지었다.

"단장이 사람 보는 눈은 확실해. 참 대단한 걸 주워왔구만. 몇 년 후면 벌써 편대장 자리에 앉아 있을지도 모르겠어."

"저는 바보라서, 그런 거 못하는데..."

"아이구. 겸손하기도 해라. 첫째처럼 건방져지기 전에 미리 좀 귀여워해 봐야겠다."

솥뚜껑 같은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는 블레어. 아이는 정말로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혹시 림이 가르쳐줬던 그게 그 신기라는 건가? 죽도록 아파서 날 괴롭히려고 그러는 건 줄만 알았는데. 그렇게 되새길 뿐이었다.

이미 그렇게 성장한 아이에게, 에페 바체 시험을 통과하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10분도 지나지 않아, 또 시험관을 자청한 잰슨을 정교한 검격으로 몰아세우고, 합격을 받아낼 수 있었다. 기뻐하며, 제일 먼저 달려와 축하해준 것은 도린이었다. 그러나, 시험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단장, 내가 볼때는 말이야, 2차전이 필요할 것 같은데."

두 번째 에페 바체 시험은 간부 모두가 참가한 가운데 벌어졌다. 그 사이에 앉아 있던 블레어가 불쑥 이런 말을 꺼냈던 것이다. 2차전, 그건 에페 바체들 간의 서열 결정전을 뜻했다.

에페 바체들은 그 용병단 내에서 평가한 서열에 따라 본국에서의 입지가 달라진다. 그 서열을 분명히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여겨질 때, 에페 바체 시험에 이어서 서열 결정전을 개최할 수 있었다.

"블레어 씨, 그게 무슨 소립니까?"

"도린, 내가 볼 땐 너보다 저 아이가 더 강하다."

"예?"

머리가 하얗게 셀 정도로, 나이가 꽤 있는 편인 블레어는 도린에게도 마음껏 하대를 했다. 그 역시 한때는 에페 바체였기 때문이었다. 란페이는 그 모습을 보고 곰곰이 고민하더니 명령을 내렸다. 서열 결정전을 시작하라는 명령을.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으며 칼을 집어들고 아이 앞에 선 도린. 그 웃음이 경악으로 바뀌는 데에는 5분도 지나지 않았다. 5분도 지나지 않아 아이가 깔끔한 윈드밀로 도린의 검을 부러뜨려버렸기 때문이다.

"저건..."

"실력차가 현격해. 상처를 입히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무기를 노렸군."

"정말로 검을 잡은 지 일 년밖에 안 된게 맞나?"

"첫째를 능가하는 재능인 것 같은데. 허 참."

굴욕에 몸을 떠는 도린. 직접 상대한 자신은 알 수 있었다. 아이가 심지어 제 실력을 다 드러내지도 않았다는 것을. 블레어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둘 사이로 걸어와 도린의 어깨 견장을 뜯어냈다.

"자, 이제 이건 네 사제한테 넘겨줘야겠군. 수련은 안 하고 여자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니 그 꼴이 나는 거다. 아니, 이제 사제가 아니라 사형이라고 불러야 하나?"

짓궂은 말투였다. 도린은 그 때, 인근 마을의 처녀와 연애를 하고 있었다. 아이는 그 말을 듣고 블레어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해서, 깜짝 놀라서 당황하며 도린에게 다가갔다. 손을 내밀어 일어서도록 도와주려 하면서.

"사형,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괜찮아?"

얼굴이 보이지 않게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도린은 그런 아이의 손을 뿌리치고 일어나 사라져버렸다. 아이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블레어를 바라보았다.

"왜, 왜 그런 말을 하세요? 사형도 열심히 했단 말이에요."

"됐어. 다 성장통이야. 이래야 자극이 될 거 아니냐."

코를 긁적이며 억지로 견장을 채워 주는 블레어. 아이는 블레어가 견장을 달아주자마자 연무장을 뛰쳐나가 도린을 찾았다. 하지만 어디로 갔는지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그 이후로 도린은 쭉 아이와 말을 하지 않았다. 오늘까지 쭉. 식사를 거를 정도로 고민하던 아이는, 도저히 해결책을 찾을 수 없어서 이렇게 찾아온 것이다. 란페이는 빙그레 웃으며, 죽을상을 쓰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걸 돌려주면 도린이 좋아할 것 같아?"

"그렇지 않을까요? 이게 아무래도 사형한테 아주 중요한 물건인데, 제가 빼앗아버려서 저도 싫어진 거 같아요. 저는 사형한테 미움받기 싫어요."

"이리 와 보렴."

손짓하는 란페이. 아이는 그 손짓에 따라 몸을 들이밀었다. 란페이는 그런 아이의 목을 잡아채서 겨드랑이에 끼우고 머리를 쥐어박았다.

"으이구! 이 녀석아. 가끔 보면 답답해 죽겠다, 죽겠어."

"단,단장님, 왜 그러세요?"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빼는 아이. 란페이는 황당해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 녀석은 대체 어디서 굴러먹었던 건지 전투에 있어서는 천재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에 대해서는 정말 백치처럼 무지했다.

"이 칼을 보렴."

란페이의 지시에 따라, 란페이가 갈고 있던 검을 바라보는 아이. 딱 보기에도, 굉장히 좋은 소재로 만들어진 명검이었다. 그 검면에는 아름다운 서체로 글씨가 새겨져 있다. 아이는 눈쌀을 찌푸리며, 그 글을 한 글자 한 글자 읽어나갔다.

"힘 없는 정의는 무력하며... 정의 없는 힘은... 음..."

"압제. 그건 압제라고 읽는 거야."

"압제이다. 좋은 말이네요."

"그렇지?"

란페이는 그 검의 검면을 쓰다듬으며 조곤조곤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검은 블로어(Blower)라는 검이다. 레이븐사이드의 단장이 대대로 물려받는 검인데 말이야, 새 단장이 취임할 때마다 새 주인의 좌우명을 새겨넣게 되어 있어. 난 딱히 좌우명 같은 게 없어서 곤란해했는데 말이지, 내 여동생이 이게 어떠냐고 추천해줘서 이걸로 정한 거야."

"그렇군요."

"그런데, 그거 때문에 나는 며칠이나 여동생을 피했거든. 이상하지?"

"네? 왜요?"

눈을 동그랗게 뜨는 아이.

"내 여동생은... 어렸을 때부터, 기면증이라는 병이 있어서 말이야. 늘 침대랑 집 안에만 머물러 있고, 항상 보호를 필요로 하는 아이였어. 매일 앉아서 책을 읽는 것 말고는 하는 일도 없고 말이야. 그래서, 그 녀석이 이런 말을 하니 너무 낯설어 보였던 거야. 본인은 어느 유명한 사람이 한 말이라고 둘러댔지만, 아마도 자기가 지어내곤 쑥스러워서 거짓말을 한 거겠지. 그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언제까지나 어린아이인 채로, 지켜줘야만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도 하지 못한 사이에 불쑥 커 버렸으니까. 항상 봐 왔던 얼굴인데도 너무 낯설게 보이는 거 있지? 그래서 은연중에 피하게 되더라. 어떻게 대해야 할 지 가늠이 안 되더라고."

"그렇구나... 근데 그게 왜요?"

"이 정도 얘기했으면 스스로 알아들어야지!"

또 아이의 머리를 쥐어박는 란페이.

"도린도 네가 싫은 게 아니야. 내가 보증할게. 고작 견장을 빼앗긴 것 때문에 삐져서 사형제간의 의를 끊으려고 하는 녀석이었으면, 애초에 내가 데려오지도 않았어. 그 녀석은 그냥 당황하고 있는 거야. 어느새 갑자기 불쑥 커버린 네가 너무 낯설게 느껴져서, 어떻게 대해야 할 지 거리감을 못 재고 있는 거지."

"정말로 그럴까요?"

"그럼."

"정말의 정말로?"

"그렇다니까."

하지만 아이는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한숨을 내쉬고 고민하던 란페이는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곤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명령장이었다. 란페이는 깃펜으로, 그 위에 유려한 글씨체로 뭔가를 써내려갔다.

"아이, 오늘 아지프의 사람들이 다녀간 건 알지?"

"예. 아까 밖에서 봤어요."

"그 사람이 별로 좋지 못한 소식을 들고 왔단다. 앞으로 계약이 끝나기 전까지 1년간, 힘든 일이 많이 생길 거야. 그 전에 마지막으로 휴가를 주마. 사이가 틀어진 사형제를 화해시키는 것도 단장의 일이니까."

"휴가요?"

"이 근처에 있는 상업도시, 테네사에서, 곧 사육제가 있을 거다. 도린과 네게 테네사에서 이것저것 보급품을 사오라고 명령을 내리고, 그 앞뒤로 휴가를 줄 테니까, 그걸 핑계로 같이 사육제를 즐기고 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맘껏 하고. 아마도 말 몇마디만 나눠 보면 금방 풀릴 거다."

"그렇구나, 감사합니다. 단장님은 역시 똑똑해요."

그 말과 함께 명령장을 건네주는 란페이. 아이는 그걸 붙잡고 고개를 꾸벅 숙여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렇게 고개를 숙인 아이의 눈에 문득 란페이의 가슴팍이 들어왔다.

"단장님, 그거 왜 그래요? 단추 하나가 없어졌는데."

"아, 아까 일이 있었어. 별 일 아니야."

"그 장식단추, 예뻤는데..."

"너무 화려해서 부담스러웠던 참이야. 다른 걸로 수선하면 되겠지. 그럼 휴가 잘 다녀오렴."

아이는 다시 한 번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방을 나섰다.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던 란페이는, 아이가 사라지자 다시 진지하게 표정을 바꾸고 블로어를 갈았다. 검 갈기를 마친 란페이는 서랍에서 또 다른 명령장을 꺼냈다.

아까의 것보다 훨씬 고급 용지로 이루어진 명령장이었다. 란페이는 심호흡을 하고 짧은 글을 적어넣었다. 거기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긴급. 본국에서의 모든 임무를 중단하고, 이 쪽에 합류하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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