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괴물 ( 3 )
사육제.
제국 북부의 사람들에게는 전통이 있다. 전쟁을 멈추기 위해 석 달 열흘동안 단식하여 투쟁한 끝에 입적한 라달라리아의 성인, 성 아가타를 기리기 위해 일 년에 한 번 나흘동안 육식을 금하는 전통이다.
그 금식 기간에 들어가기 전, 금식을 잘 버티기 위해 6일동안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기는 축제를 사육제라고 불렀다.
"그렇대, 사형. 이 책에 적혀 있어. 사형은 알고 있었어?"
테네사를 방문하는 관광객을 위해 배포되는 책자를 소리내어 읽으며, 종종걸음으로 도린을 따라가는 아이. 붉은 천으로 감싼 조명이 거리를 붉은 빛으로 비추고, 알록달록하게 오려붙여 걸어놓은 천들이 금색으로 칠한 줄을 따라 화려하게 걸려 있다. 이미 축제가 한창이다.
사육제의 마지막 날. 두 사람은 단장이 계획한 대로 테네사에 함께 있었다. 오늘은 두 사람이 함께 테네사에 머무는 마지막 날이었다. 6일이라는 기간 중 5일이나 아이와 쭉 붙어 있었으면서도, 도린은 아이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수레편을 구하고, 어음을 결제하고, 건초와 군량을 마련하며 그저 말 없이 맡은 일을 처리할 뿐이었다. 여관의 방도 함께 쓰기로 되어 있었는데, 굳이 다른 방을 잡아 따로 잤다. 그리고 오늘, 아무런 할 일이 없는 마지막 날까지도 도린은 아이를 없는 듯 대하며, 일찍 숙소로 돌아가 잠을 자려고 할 뿐이었다.
"이 날 하루만은 신분이나 출신 따위를 신경쓰지 말고 모두 즐기라는 의미로, 축제에 참여하는 시민들은 모두 간단한 가면을 써서 얼굴을 가린다... 그렇대!"
성큼성큼 걸어가는 도린의 옆을 따라가면서, 답지 않게 계속 화제를 꺼내며 애쓰는 아이. 오늘만큼은 어떻게든 말을 붙여 보려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평소 사람과 대화를 많이 해본 적이 없는 탓에 계속 책을 읽으며 겉도는 말을 할 뿐이었다.
그렇게 따라붙던 아이의 눈에 노점이 들어왔다. 갖가지 가면을 전시하고 파는 노점이었다. 그 주인도 연한 흰 빛을 내는 상아질의 둥근 가면을 쓰고 있다. 그 주인은 아이가 관심을 가진 걸 보고 반색하며 손을 흔들었다.
"아이고, 어느 집안의 귀한 아가씨인가? 하도 고와서 빨리 얼굴 안 숨기면 마적떼가 와서 잡아가겠는데. 와서 한 번 보고 가세요. 요즘 유행하는 <11월의 비> 가면도 전부 있다우."
축제에서 쓰는 가면은 대부분 당시 유행하던 가면극에 등장하던 인물들의 가면을 그대로 재활용한 것이었다. 가면극은, 먼발치에서도 등장인물이 누군지 확실하게 알 수 있다는 장점 덕분에 무대장치가 빈약한 이 주변에서는 굉장히 인기를 끌었다.
가면이 얼마나 개성적이고, 완성도 있는가는 따라서 극의 완성도와 흥행을 좌우하는 큰 요소였고, 솜씨 좋은 장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가면을 디자인하는 게 당연시되었다. 이런 축제에서 그렇게 완성된 특색 있는 가면을 쓰며 즐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11월의 비>는 테네사의 젊은 아가씨들 사이에서 상당히 유행하는 치정극이었다. 5분마다 작중 시간으로 한 달이 지나며, 5분마다 불륜과 치정살인이 일어나서, 여주인공이 10번 약혼자를 갈아탄 끝에 11월에 칼에 찔려 죽는다는 황당한 내용이었지만, 아예 호쾌하게 개연성을 포기한 자극적인 전개 덕분에 큰 인기를 얻었다.
아이는 그 중 가면을 하나 주워들고 유심히 바라보았다. 기괴한 가면이었다. 나병 환자가 추하게 썩어들어간 얼굴을 가리기 위해 쓰는 가면. 그 가면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얼굴과 그 가면을 합쳐 또 가면에 담은, 액자식 구성이라고도 할 수 있을 법한 디자인의 가면이었다.
축제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가면이다.
어디선가 본 거 같았는데, 이거 림을 좀 닮았다. 아이가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웃었다. 주인이 또다시 말을 걸어왔다.
"아,아, 그건 제일 안 나가는 물건인데. 다른 거 사면 거저 드리겠수."
"이게 뭐에요?"
"<11월의 비>를 본 적이 없나보우? 거기 나오는 문둥이 괴물 가면인데."
"없어요."
"이런, 이런, 외지에서 온 손님이었구만."
그리고 익살스럽게 주변 지방의 언어들로 전부 인사를 건네는 주인. 아이는 그런 주인을 무시하고 다른 가면을 살펴보았다.
"음, 한 개...아니, 두 개 주세요."
"뭐로 드릴까, 이거랑 이거로 하실려우?"
흰 종이에 석고를 발라 굳히고 파란 레이스를 붙여 만든 여주인공의 가면과, 검은 가죽으로 만든 남주인공의 가면을 내미는 주인.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지갑을 꺼내며 가격을 물었다.
"얼마에요?"
"두 개 합쳐서 10루덴."
"여기요."
"비싸도 할 수 없는게, 아가씨 거는 상아를 깎아 만든 거고 이건 쇠가죽으로 만든 거라서...어?"
한껏 흥정할 밑밥을 깔고 있는데, 바로 5루덴 동전 두 개가 들어오자 놀라서 눈을 껌뻑이는 주인. 이 가면들의 적정가는 2루덴쯤이었다. 처음부터 말도 안 되게 가격을 높게 부르고, 대놓고 소재가 고급이라 거짓말한 다음 거짓말한 걸 들키면 약점을 잡혀 싸게 넘기는 척 반 깎는다고 5루덴에 넘겨주어 1루덴을 남긴다는 원대한 계획이 전부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아이는 흰 반가면을 머리에 써클릿처럼 쓰고, 검은 가면을 손에 쥔 채로 도린에게 달려갔다.
"사형! 이거 사 왔어. 이거 써 볼래?"
하지만 도린은 무반응이었다. 사육제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를 묵묵히 빠져나가고만 있다. 결국 아이는 혼자서 가면 두 개를 위아래로 겹쳐 쓰는, 엽기적인 패션을 하고 돌아다닐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저 여자 봐. 뭐야?"
"왜 저러고 다니는 거야? 정신에 문제가 있는 건가?"
그런 수군거림을 들은 도린은 숙소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한숨을 깊게 내쉬고는, 시무룩해서 뒤를 따라 걷고 있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줘 봐."
그게 두 사람이 한 달만에 처음으로 나눈 대화였다.
*
광장에선 사육제의 마지막 공식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자! 자! 이 놈으로 말할 것 같으면! 3년간 27번의 싸움에서 전부 승리했던 전설적인 싸움소입니다! 저번 달 첫 패배를 맞이해서, 드디어 안식을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놈의 안식을 도와주실 늠름한 사나이 어디 안 계십니까?"
광장 한 가운데 펼쳐진 모래판. 거기에 뒷다리의 힘줄을 잘리고 뿔을 뽑힌 검은 숫소가 묶여 있다. 그 숫소는 유일하게 멀쩡한 앞발을 구르며 콧김을 내뿜는다. 부리가 긴 새가면을 쓴 사회자는, 그 옆에 설치된 무대에 올라서 광장 가득한 사람들 사이에서 지원자를 뽑았다.
아이와 도린은 사람으로 가득한 광장에 꼼짝없이 갇혀서 이 행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사육제의 마지막 순서는, 이렇게 싸움에서 진 싸움소를 도축해 그 고기로 스튜를 끓여 모두가 나눠먹고, 금식을 다짐하는 것이었다. 이 마지막 도축은 시민 중에서 자원한 사람이 행하게 되어 있었다.
"제일 먼저 나서서 성공하시는 분께는 타네사 상인조합 가게에서 사용할 수 있는 100루덴짜리 티켓을 드리겠습니다!"
원독이 줄기줄기 솟구치는 숫소의 눈빛을 보고 께름칙해진 사람들이 아무도 나서지 않자, 상금을 올려 거는 사회자. 100루덴이면 웬만한 도시 노동자의 두 달치 임금이었다. 사방에서 웅성임이 일더니, 하나둘씩 손을 드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거기! 브리겔라 가면을 쓴 신사분! 나와주시죠."
"자기야, 힘내!"
도색하지 않은 나무 가면을 쓴, 건장한 체형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그 옆에서 여자가 환성을 내지르며 응원한다. 쑥쓰러운 듯 일어선 남자는 사회자에게서 길쭉하고 얄팍한 도축용 작살검을 받아들었다. 오직 앞 돌진만 할 수 있는 소의 공격을 피해서, 옆구리로부터 심장을 관통하기 위한 물건이었다.
"윽!"
그러나 늠름하게 나선 그 남자는 실패했다. 이 싸움소는 가죽이 유난히 두터웠다. 옆구리를 찔러들어간 작살검은, 심장은 커녕 갈비뼈도 뚫지 못하고 손잡이가 부러졌다. 싸움소는 묶인 채로 박치기를 갈겨 남자를 뒤로 자빠지게 만들어버렸다. 주변에서 왁자한 웃음이 터진다.
"자, 자, 첫 번째 도전자분은 안타깝게 실패! 실패하셨구요. 그럼 100루덴을 받을 다음 도전자는 누구십니까?"
이미 소가 좀 다쳤기 때문에 할 만해졌다는 인식이 퍼진 탓일까.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많이 손이 올라왔다. 그들은 줄을 서서 작살검을 받아들고, 소의 심장을 꿰뚫기 위해 모여들었다. 잠시 후.
"이 녀석, 확실히 스물일곱 번이나 싸움에서 이길만도 한 놈이군요. 특별히 귀빈이 많이 내방해주신 이번 사육제에 딱 맞는 귀한 제물입니다. 그 고기가 얼마나 야들야들하고 맛있을지는 상상할 필요조차 없겠군요! 여섯 번째! 여섯 번째로 도전하실 분 안 계십니까?"
벌어진 참사를 어떻게든 포장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회자. 유난히 두터운 가죽과 근육을 가진 이 숫소는, 다섯 번이나 작살검을 몸에 찔리고 온 몸으로 피를 흘리면서도 쓰러지지 않았다. 죽음이 가까워지자 오히려 힘이 솟아나는 것처럼, 계속해서 여흥으로 자신을 도축하려 덤벼드는 사람들을 쓰러뜨렸다.
방금은 큰 부상마저 입혔다. 다섯 번째로 이 소를 잡으러 올라간 청년은, 쓰러진 척하던 소의 연기를 믿고 안일하게 접근하다 발굽에 짓밟혀 늑골이 부서져 실려갔다.
"안 계십니까? 좋아요, 150루덴! 150루덴으로 상금을 올리겠습니다!"
그가 남긴 처절한 비명을 들은 사람들은 더 이상 지원하지도 않았다. 아이는 그 모습을 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냥 고기를 먹기 위한 거면, 그냥 죽이면 되잖아... 이렇게까지 해야 되는 이유가 있는 거야, 사형?"
도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을 뿐이었다. 하얀 숨결을 토하며, 또 올 테면 와 보라는 듯 발을 구르는 숫소. 아이는 일순 그 소와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계속 이렇게 몇 번이나 고통받을 거면, 그냥 내가 도와주는 게 낫겠어. 아이가 그렇게 생각하고 손을 들려고 하는 순간.
"거기! 그, 칼라오네 가면! 문둥이 가면의 신사분! 나와주시죠!"
사회자가 다른 사람을 지목했다. 운집한 군중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번쩍 손을 들고 있던 남성이었다. 그는 아까 아이가 보았던 문둥이 괴물 가면을 쓰고 있었다. 입에는 두툼한 담배가 물려 있다.
"자, 여기, 이 작살검을..."
"필요 없어."
무대에 올라선 그는, 사회자가 주는 작살검을 내던지고, 등에 비끄러맨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처음 보는 형태의 무기였다. 어떻게 등에 맸을까 싶을 정도로 엄청나게 커다랗고 만곡한 형태의 도.
"대태도(大太刀)다."
도린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아이는 고개를 홱 돌려 도린을 바라보았다.
"그게 뭔데?"
"카나기의 괴물 사냥꾼들이 쓰는 검이야. 그 놈들은 어디 절벽이나 설산 같은 데 틀어박혀서 괴물과 씨름하는게 일이니까, 인간을 잡을 때 쓰는 것보다 큰 칼이 필요한 거야."
"그럼 저 사람은, 카나기 쪽 사람이야? 적이야?"
"아니, 저걸 쓴다고 해서 다 카나기인 건 아니야. 그냥 무기 자체가 질이 좋으니까 쓰는 경우도 있다고.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도 한 명 있고."
"그렇구나. 역시 사형은 똑똑해."
아이가 으레 꺼내는 칭찬을 듣고 나서야 자기가 예전처럼 아이와 대화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도린. 그는 다시 입을 꾹 닫아버렸다.
"그래서? 그게 누군데? 사형이랑 친한 사람이야?"
아이가 애를 쓰면서 일부러 궁금하지도 않은 걸 물어보며 대화를 더 이끌어내려고 했지만, 도린은 그 다음부턴 무대응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다시 시무룩해져서 무대 위를 바라보는 아이.
그 남자는 문둥이 가면 아래로 빽빽하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그 커다란 대태도를 한 손으로 들고 숫소에게 걸어들어갔다. 숫소가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남자를 쳐다보며 돌진하려던 순간.
"우와아아아아!"
우레같은 함성이 터져나온다. 남자가 번개같은 속도로, 대태도를 휘둘러 숫소의 목을 둥글게 잘라낸 것이었다. 식칼로 무라도 자르는 것처럼 간단한 동작이었다.
"여섯 번째! 여섯 번째에 이르러서 저 숫소의 영혼은 드디어 평안한 안식을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민 분의 소감을 들어보시죠!"
"안식은 얼어죽을. 내놔."
"예?"
"돈. 내놓으라고."
"아, 예에에에... 여기 있습니다."
흉측한 문둥이 가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우자, 위압당해 벌벌 떨며 티켓을 건네주는 사회자. 그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무언가 이야기를 더 하려 애썼다.
"이 상금은 어디에 쓰실 생각이신지...?"
"창관에 갈 거다. 오늘 하루만에 다 쓰고 올 거야."
그 당당한 선언에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하는 사회자. 문둥이 가면의 남자는 그런 사회자의 볼을 툭툭 두드리더니, 무대에서 훌쩍 뛰어내려왔다. 혼란에서 깨어난 진행자들이 요리사를 투입해 소를 제대로 발골해 도축하고, 살을 발라내 스튜를 끓이기 시작할 때까지, 운집한 군중들은 그가 남긴 충격에서 빠져나가지 못했다.
*
숙소 앞.
"사형, 사형, 이제 조금 있으면 스튜랑 병아리콩 튀긴 걸 무료로 나눠준대. 음, 고수랑 병아리콩을 섞어서 튀긴 건데, 고기가 안 들어가도 감쪽같이 고기 맛을 낸다고, 앞으로의 금식을 잘 이겨내라는 의미에서 나눠주는 것. 그렇대! 이 책에 적혀 있어."
도린의 뒤를 쫄래쫄래 쫓아가며, 책을 읽어주는 아이. 도린은 갑자기 우뚝 멈춰서서 말했다.
"그래서?"
"우리도 그거 먹으러 가자. 응?"
"됐어. 오늘은 한 일이 없어서 배가 안 고파. 너 혼자 먹고 와."
"하지만... 사형... 같이 가자..."
"왜? 혼자서는 그런 것도 못 하는 거냐? 대체 몇 살까지 내가 돌봐 줘야 하는데?"
자기 옷소매를 잡는 아이의 손을 확 뿌리치고 고개를 돌리는 도린. 아이는 고개를 푹 숙였다. 가면에 가려서 얼굴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버려진 강아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을 거라는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알았어. 더 귀찮게 안 할게. 미안해."
축 늘어져서 터덜터덜 걸어 나가는 아이. 도린은 애써 그 모습을 무시하고, 자신의 방의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잠시 후 머리를 마구 쥐어뜯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씨발, 나 진짜 너무 꼴사납네."
동생처럼 여기던 사제한테 실력을 추월당한 것도 모자라서, 거기에 앙심을 품고 화풀이까지 해 버린 한심한 사형. 그래, 화풀이다.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건 그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도린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속 어딘가에서는, 자기가 이렇게 아이를 무시하는 게 전혀 바람직하지 않을 뿐더러 볼썽사나운 행동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유 없이 솟아나는 감정 때문에 몸을 추스르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계속 대화를 안 하고 있자니, 아이 쪽에서 이미 나한테 실망해서 정나미가 떨어져버리지 않았을까, 그런 두려움도 생겨 더더욱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게 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하여간 호구같이 착해빠져가지고."
호구. 그 녀석은 호구였다. 가히 호구의 천재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리라. 시장바닥을 걸어다니면서 다섯 개의 가게를 들리면 여섯 명한테 사기를 당하고 돌아오는(*
가게에 들린 손님한테도 속아서 이상한 부적을 사 왔다.) 어마어마한 재주를 가진 놈이었다.
샌드위치를 사 먹으러 갔다가 노예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와도 이상하지 않은 녀석이다. 그런데 그 놈이 지금 누구랑 있지? 혼자잖아. 어디에? 사기꾼으로 가득한 축제의 번화가에.
도린은 황급히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다. 아이를 찾기 위해서였다.
*
아이는 한 손에 책을 든 채로 음식을 나눠주는 곳을 찾아 서성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긴가?"
사방이 사람들로 가득했으므로, 길을 찾는 건 평소보다 몇 배는 어려웠다. 테네사에 처음 들린 아이에게는 곱절로 그렇다. 한 손에는 관광용의 책을 들고, 어수선하게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혼자 다니는 젊은 여자. 머리가 어깨를 덮고 늘어지는 장발인 데다가, 여주인공이 쓰는 흰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눈에 아이는 그렇게 보인다. 어떤 종류의 사람들에게는 아주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아가씨, 길을 잃어버린 겁니까?"
친절한 듯 다가오는 붉은 코 가면의 사내. 아이는 처음에는 자기한테 말한다고 생각하지 못해 지나치려다가, 손을 붙잡혀서 뒤를 돌아보았다.
"사람이 부르잖아요. 그럼 대답을 하는 게 예의죠."
"아? 네."
정말로 자기가 예의를 어겼다고 생각해서 고개를 꾸벅 숙이는 아이. 남자는 아이가 자신에게 겁을 먹어서 그렇다고 생각하고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어딜 가려고 아까부터 여길 세 바퀴나 헤매고 있습니까? 제가 도와드릴 수 있으면 도와드리죠."
"아, 여기요. 여기 가고 싶어요."
책을 펼쳐서 음식을 나누어주는 곳을 찍어 보여주는 아이. 남자는 그 책을 빼앗듯이 가져가서는, 턱을 만지며 흐음 소리를 냈다.
"제가 안내해드리죠. 따라오세요."
아이는 내심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남자가 이미 책을 빼앗은 채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기 때문에 별 수 없이 그를 따라갔다. 그 남자는 배식소와는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저기, 여기로 가는 거 맞아요?"
남자가 아이를 이끌고 간 곳은 후줄근한 노점이 늘어진 뒷골목이었다. 걸려 있는 장식물의 품질도, 팔고 있는 물건의 품질도 대로에 있는 것보다 훨씬 떨어진다. 시에서 일부러 노출되지 않게 치워버린 것이었다.
아이는 그들 앞에 도착해서야 뭔가 불길한 느낌을 받고 이렇게 물어보았다. 남자는 그 말을 무시하곤, 어떤 노점 앞으로 아이를 데려갔다.
"자, 여기서 한 번만 돈을 따면 제대로 안내해드리죠."
그 노점은 어느 컵에 공이 있는지를 맞추는 야바위로 돈을 버는 노점이다. 남자는 호객꾼이었다. 아이는 눈살을 찌푸리고 남자에게서 책을 빼앗으려 들었다.
"갈 거에요. 돌려주세요."
"어이쿠, 어이쿠, 안 닿는데."
아이보다 키가 큰 것을 이용해서 높이 손을 쳐들고는 약올리는 남자. 아이가 손을 흔들어봤지만 닿지 않았다. 주변에선 왁자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남자는 달래듯이 다시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건넨다.
"아가씨, 진짜로 사육제를 즐기려면 이런 뒷골목에 와야 되는거란 말이야. 여기 있는 사람들이 불쌍하지도 않아요? 상인 조합에 세금을 못 냈다는 이유로 이런 곳에 밀려나서 손님도 없이 굶고 있는데."
"그건...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저 아가씨 아니에요. 아가씨라고 하지 마세요."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일단 한 판만 해 줍시다. 적선한다고 치고. 딱 한판만 해주면 제대로 안내해드릴게."
별 수 없이 1루덴을 지불하고 야바위를 시작하는 아이. 시력에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으므로, 남자의 손과 컵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집중했다. 스스슥, 그다지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움직이던 남자의 손이 멈췄다.
"여기! 가운데요!"
가운데를 지목하는 아이. 그러자 야바위꾼은 천천히 가운데 컵을 집어들었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 분명히 여기 있었는데?"
"이런, 1루덴 잃으셨군. 아까워."
낚아채듯 아이가 올려놓은 1루덴을 가져가는 호객꾼. 아이는 약이 올라서 또 1루덴을 올려놓았다.
"다시! 다시 한 번 해요!"
같은 일이 세 번 반복됐다.
"이상하다... 분명히 여기 있었는데."
또 들어올린 컵 밑에 아무것도 없자 허망한 듯 중얼거리는 아이. 호객꾼과 야바위꾼은 입이 찢어져라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이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고개를 돌렸다.
"이제 그만 할래요. 돈 많이 잃었으니까, 책 돌려주세요."
"아니? 잃기만 하고 가시려구?"
"더 해봤자 더 잃을 것 같은데요."
"한 판만 더 하고 갑시다. 한 판만 더."
"됐어요. 그럼 책도 필요 없어요. 그거 아저씨가 가지고, 나는 위병한테 갈래요."
같은 상대한테 너무 우려먹었나? 속이 뜨끔해져서 아이의 어깨를 붙잡는 호객꾼. 그는 야바위꾼과 눈짓으로 합의를 하곤 또 다른 내기를 제안했다.
"아니, 아니, 이게 다 아가씨를 위하는 마음에서 권하는 거에요. 돈 잃기만 하고 가면 슬프잖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합시다. 이번에 따면, 지금까지 아가씨가 잃은 돈 전부 다 돌려줄게요. 거는 돈은 똑같이 1루덴으로 하고."
"진짜요?"
"그럼, 그리고 책도 돌려드리고 안내도 해 드릴게요."
"안내는 필요 없어요. 책만 돌려주세요."
아이는 솔깃해서 돌아섰다. 호객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컵이 놓인 탁상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붙잡고 뚫어져라 탁상을 바라보았다. 가면에 장식으로 달려 있는 푸른 레이스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다.
이것 때문에 계속 실패한 것만 같았다. 아이는 반가면을 벗어 이마로 걷어올렸다. 그러자, 가면에 가려져 있던 긴 눈꺼풀과 석류석 같은 눈동자가 확 드러나보인다. 분당을 흩뿌린 복숭아처럼, 아련한 연분홍으로 빛나는 두 뺨도 드러났다. 아이의 맨얼굴을 바로 앞에서 바라보게 된 야바위꾼은 무의식적으로 놀라서 탄성을 흘렸다.
"와."
"왜 그러세요, 아저씨? 빨리 시작하세요."
그 야바위꾼이 지금까지 보았던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인근의 고급 창관에서 하룻밤에 75루덴을 지불해야 살 수 있는 고급 창부였다. 영락한 귀족의 딸이라고 했다. 저 정도라면 하룻밤의 가치가 내 한 달 벌이보다 많아도 이해할 수 있지. 아마 저것보다 예쁜 여자는 없을 거야. 그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건 방금 막 바뀌었다. 이 여자라면, 75루덴이 아니라 100루덴, 아니 1000루덴을 낸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겠다. 야바위꾼은 컵을 붙잡고, 급히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이름,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어디에서 왔어요?"
"아저씨 같은 사람들한테 알려주기 싫어요. 빨리 시작이나 하세요."
"좋아요, 아가씨 돈은 다 돌려드릴게요. 거꾸로 내 돈 5루덴 걸테니까 내기 하나 합시다. 여기서 아가씨가 이기면 그냥 꽁돈 5루덴 먹는 거에요. 알겠어요?"
"어이, 얌, 뭐하는 거야?"
야바위꾼의 이상한 행동 때문에 호객꾼은 크게 당황했다. 야바위꾼은 그런 말을 무시하고, 황급히 아이에게 받은 루덴 동전을 전부 건네주었다. 눈이 동그래져서 그 동전을 받아 주머니에 넣는 아이.
"그럼 저는 뭐 거는데요?"
"제가 이기면, 지금부터 제가 아가씨한테 사육제와, 이 테네사의 야경을 안내하게 해 주세요. 그게 대가입니다."
뻔한 수작질이었다. 할 수 있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권하는 야바위꾼. 그런데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를 내는 바람에, 버터라도 쳐바른 것처럼 매우 느끼하게 들린다.
당황해서 다가오던 호객꾼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야바위꾼의 얼굴과, 아이의 맨얼굴을 보고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 그저 팔짱을 끼고 뒤로 물러날 뿐이었다. 아이는 갑자기 달라진 태도 때문에 어리둥절하면서도, 자신에게 나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서 내기를 받아들였다.
"자, 그럼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없었던 속도로 기운차게 손을 움직이는 야바위꾼. 컵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기운차게 움직인다. 아이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걸 바라보았다. 왼쪽, 오른쪽, 가운데, 가운데, 오른쪽, 왼쪽!
"왼쪽이요!"
"왼쪽? 자, 우리 귀여운 날개 없는 천사 양, 어디 한 번 볼까요?"
아직까지도 느끼함이 가시지 않은 역겨운 목소리로 느끼한 대사를 말하는 야바위꾼. 그는 왼쪽의 컵에 손을 가져다댔다. 그리고 들어올리려는 순간 무언가가 그 컵 위를 짓밟았다. 철판을 덧댄 군화였다.
"뭐, 뭐야!"
"닥쳐. 사기꾼아."
그리고 그 발의 주인은, 맨 왼쪽의 컵을 밟은 채로 다른 컵을 전부 들어올렸다. 다른 컵은 모두 텅 비어있었다.
"자. 그럼 왼쪽에 공이 있는 거 맞지?"
"어,어이, 고리! 이 씨발새끼 뭐야? 빨리 처리해!"
휘파람을 부는 호객꾼. 그러자 사방에서 몇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달려왔다. 손님이 돈을 잃었다고 난동을 부리면 제압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었다. 의기양양하게 달려온 그들은, 그러나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전부 바닥에 대자로 눕고 말았다. 아이는 그 발의 주인을 보고 반가운 소리를 질렀다.
"사형!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어?"
그건 아이를 찾아다니던 도린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수소문해 흰 가면의 여자가 호객꾼에게 낚여갔다는 소리를 듣고 한달음에 찾아온 것이었다. 도린은 으르렁거리며, 왼쪽 컵을 걷어찼다. 왼쪽 컵 역시 텅 비어있었다.
"탁상에 구멍을 뚫어 장치를 만들어놓고 공을 빼냈지? 10년 전부터 치던 사기인데 아직도 이 짓거리를 하는 놈이 있군. 조합에 말해서 깜빵에 쳐넣어줄까?"
"다..당신 누구야! 나야말로 당신을 폭행으로 깜빵에 쳐넣어버리겠어!"
"맘대로 해라. 나는 기나센에서 파견된 용병단, 레이븐사이드 소속의 도린 캄벨이다. 네 말이 먹히나 내 말이 먹히나 한 번 보자고."
소속과 신분을 밝히자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야바위꾼. 용병국가 기나센의 명성은, 온 센디엘에 퍼져 있었다.
"빨리 5루덴이나 내놔. 아까 5루덴 준다고 했잖아."
"여...여기 있습니다."
갑자기 공손해져서 5루덴 동전을 내미는 야바위꾼에게서 동전을 낚아채는 도린. 그 동전을 아이의 주머니에 넣어 주고는, 아이의 손을 꽉 붙잡고 골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