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15화 (15/279)

4. 괴물 ( 5 )

그는 눈과 피로 덮인 산맥에서 왔다.

제국의 지붕이라고도 불리는 하레하둔 산맥, 산맥을 이루는 산들의 평균 해발 고도가 5,000 미터에 달하는 그 산맥은 인간이 적어 신기가 풍부하다. 그 산맥에는 그 풍부한 신기로부터 태어나 신기를 먹고 자라나는 괴물들이 가득했다.

그 괴물들은 그 개체 수를 줄이지 않고 방치하면, 이따금씩 엄청나게 세력을 불려 산을 내려와 인간을 습격하는 재앙을 일으켰다. 그 재앙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하레하둔 산맥에는 한 무리의 마술사들이 상주하며 괴물을 사냥했다.

그들은 제국이 생기기 전부터 그런 일을 해왔던 전통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들을 뿌리로 태어난 마술사 집단. 카나기, 공생의 학파. 사람들은 그들을 그렇게 불렀다.

괴물의 개체수가 이상증식하면 그들은 용병을 불러모아 대사냥이라고 불리는 개체수 조절을 했다. 10년 전, 그렇게 불러모은 용병 가운데에는 레이븐사이드도 있었다. 레고르 보르지아는 그 대사냥의 도중 얼어붙은 하레하둔의 한 가운데에서 발견되었다.

발견한 자는 블레어 아델라이비치. 부단장직을 맡고 있던 당시의 블레어였다.

"허 참.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블레어가 레고르를 발견해 구조할 때, 레고르는 온 몸에 괴물의 변을 쳐바른 채 쓰러져 있었다. 그 구역에서 가장 강한 괴물, 샴루스라는 이름의 호랑이 괴물의 변이었다.

꽤 먼 거리를 기어다닌 듯 손 끝이 전부 얼어서 보랏빛으로 말라죽어 있었다. 손톱에는 흙이 가득 끼어 있는 게 보인다. 아무래도 이동하던 도중 다리가 마비되어 다리 관절을 움직일 수 없게 되니까, 기어서라도 움직였던 모양이었다.

블레어는 도대체 무슨 영문으로 이런 꼬마가 하레하둔 한 가운데에 있을 수 있는 건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뭐지? 샴루스한테 잡아먹혔다가 배를 가르고 나오기라도 했나?

구조되어 침대 위에 누워있던 레고르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바로 대뜸 물어볼 정도였다. 하지만 레고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얘기하기 싫으면 얘기하지 않아도 좋다. 너 여기 사람이냐?"

블레어는 수염을 쓸며 물었다. 합당한 추정이었다. 레고르가 입고 있던 옷은 이 근방의 복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고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아버지는 있느냐?"

"없습니다."

어린아이답지 않게 정중한 말씨. 그런데 그 말씨는 전형적인 제국 남부의 말씨였다. 하레하둔 지역의 말씨가 아니었다. 블레어는 더욱 궁금해져서 물어보았다.

"그럼 어디 갈 곳은 있느냐? 어머니는? 넌 어디에서 왔어?"

그 말을 듣자, 레고르는 입꼬리를 길게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없습니다. 고향도, 아무것도... 저는, 그냥 저 산맥에서 왔다고 해 주세요. 당신 용병단이 잡으러 온 괴물들처럼 말입니다."

"뭐?"

블레어는 크게 놀랐다. 다짜고짜 물어보느라 자신이 누구인지, 어쩌다가 레고르를 구하게 되었는지 등등 상황 설명을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도 이런 말을 꺼낸 게 놀라워서였다. 레고르는 당연하다는 듯 무심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아마도 당신은, 이 근처를 배회하는 샴루스를 잡기 위해 고용된 용병이겠죠? 그 놈은 영리하게 사람을 피하기 때문에, 커다랗게 원을 그려서 포위하는 방식으로만 사냥할 수 있다고 들었어요. 그러니 사람이 많이 투입될 것이고... 마술사는 강하지만 수가 적으니, 용병을 고용해 머리수를 채우겠죠. 그래서 샴루스로 위장했을 때 발견될 확률이 제일 높다고 생각했습니다."

"샴루스는 물을 거의 먹지 않아서 변 냄새가 엄청나게 지독하다죠. 어떤 식으로 그 놈을 추적하고 원을 구성하는가는 들은 적이 없지만, 아무래도, 추적한다면, 그 냄새를 이용해서 추적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걸고 도박을 했어요.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동안, 그 놈이 눈을 덮어 숨겨놓은 똥을 찾은 다음, 온 몸에 쳐바르고 냄새를 풍기며 돌아다녔습니다. 당신들이 찾아주길 바래서요."

"허허, 참. 이거 영물이구만."

블레어가 레고르를 발견하게 된 경위가 바로 그것이었다. 사냥개를 이용해 샴루스를 추적하던 도중, 샴루스 대신 쓰러져 있던 레고르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자신은 우연히 레고르를 발견한 게 아니라 그의 의도에 따라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그럼 내가 용병인 건 어떻게 알았느냐?"

"이 산맥에 발을 딛은 이상, 당신은 마술사 아니면 용병이겠죠. 그리고 당신은 마술사로는 보이지 않는군요."

"허 참. 당연한걸 물었구나."

"그래서... 제안이 있습니다."

레고르는 눈 하나도 깜빡이지 않고 쏟아내듯 말했다. 블레어는 등을 굽혀 그와 얼굴을 마주하고 물었다.

"무슨 제안이냐?"

"저에게 적절한 대가를 지불해 준다면, 당신들이 쫓는 샴루스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래? 대가는 뭔데?"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빨래든, 뒷간 청소든, 밤 시중이든, 뭐든 하겠습니다."

"그건 안 되겠는걸."

블레어가 고개를 젓자, 레고르는 이불 속에서 몸을 일으키며 다급하게 외쳤다.

"정보의 진위가 의심스러운 거라면, 저는 확실하게 근거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절대로 당신들에게도 나쁜 이야기가 아닐..."

"아니, 대가 같은 건 필요 없단 말이야. 우리 기나센 사람들은, 너 같은 꼬마를 거두는 데 대가를 바라지 않는단다."

"하지만...그럼..."

"됐어, 됐어, 나도 한 때 너 같았다구."

눈이 휘둥그레진 레고르의 등을 크게 후려치며 껄껄 웃는 블레어.

다음 날 레고르는 레이븐사이드의 첫 번째 에페 바체가 되었다.

*

블레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귀여운 녀석이었단 말이지, 너처럼 말이다."

당근을 먹는 토끼처럼 토스트를 붙잡고 귀퉁이를 갉아먹는 아이를 보며, 또 한 번 한숨을 내쉬는 블레어. 10년 전에 비하면, 얼굴의 주름도 머리의 새치도 훨씬 많이 늘어 있다. 아이는 식사를 하면서, 새롭게 용병단에 합류하게 된 사형. 레고르의 이야기를 듣던 중이었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성실한 척 착한 척 척이란 척은 다 하고 다녀서 예쁨받고 다니더니, 조금 대가리가 커지니까 본색이 드러나서 아이고. 맨날 술 쳐먹고 담배 빨고 맨날 창관에서 사향 냄새 묻혀와선 다 퍼뜨리고 다니고, 어떤 마귀가 저걸 낳았나 몰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블레어.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럼 첫째 사형은 나쁜 사형인가요?"

"아니, 아니. 나쁘다고 하긴 좀 그렇지. 놀건 다 쳐놀면서도 능력은 확실하거든. 저 녀석은 열다섯 살에 이미 세 번째 에페 바체 시험을 통과했단다. 뿐만 아니라, 귀국해서 치른 시험도 최단 시간 기록을 갱신하면서 통과했어."

"와."

"열여섯 살에는 이미 편대장 자리를 얻었고, 열아홉까지 쌓은 공적이 너무 화려해서 어디 보자, 킬 마크가 몇 개더라... 아무튼 다른 사람이 십 년을 쌓은 만큼 쌓았어. 머리는 좋단 말이지. 실력도 출중하고."

"그렇구나... 그럼 좋은 사형인가요?"

"그런데 그 새끼는 조금 여유만 생겼다 하면 귀신같이 빠져나가서는 담배 피고 술 쳐먹고 온갖 여자들이랑 양다리 삼다리 걸치고 다니질 않나 아이고 저런 새끼는 보통 죽을때 허무하게 뒤진단 말이야. 침대에서 여자한테 칼 찔려 뒈진단 말이지, 아무리 혼을 내도 이제 대가리 커져서 말도 안 들어가고 에잉..."

"그렇구나..."

무한반복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욕하고 칭찬하기를 반복하는 블레어의 푸념을 들으면서, 아이는 토스트를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아무튼 그래서 저 놈은 지금 단장 대리 역할을 맡고 있어. 원래는 본국에서 단장 대신 각종 결재를 하고 있었지."

"단장 대리... 그렇구나..."

"말도 탈도 많았지. 그 놈이 워낙 유능해서 뭔 신기한 의뢰를 말도 안 되는 좋은 조건으로 물어온다거나, 약점을 잡아서 타국의 용병단에게서 돈을 뜯어온다던가, 이런 짓을 해놓으니 일단 단장 대리직을 시키고는 있는데 말이야. 그만큼 반발도 커."

"왜요?"

"그 놈은 인명을 너무 가볍게 여기거든. 우리 용병단의 성원이 다섯 모이면 그중 한 명은 레고르 그 놈 때문에 희생당할 위기에 처한 적이 있을 게다. 용병이 원래 그런 빌어먹을 직종이라고는 하지만, 그놈은 좀 심해."

"그렇구나..."

"그래서 장기 주둔할 때에는 충돌이 있을 거라 생각해서 말이야. 이 임무에도 참가 안 시키려고 했던 모양인데 말이야. 이 쪽 상황이 심각해졌으니. 본국에 있던 예비대까지 전부 끌어와야 한다고 생각해서 저 놈을 불러다 여기 합류시킨 것 같구나."

그리고 이곳에 도착하기 직전, 인근에서 사육제가 있다는 말을 듣자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못 지나가듯 가면을 쓰고 참가해버린 모양이었다.

"단장님이 뭐라고 안 했나요?"

"단장은 지금 출타중이다. 이제 자주 자리를 비워야 되는 것 같아. 그래서 대리 역할을 하라고 저 놈을 불러왔더니 처음부터 한다는 짓거리가..."

쯧쯧 혀를 차고 또 긴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하는 블레어. 아이는 황급히 마지막 토스트 조각을 꿀떡 삼키고, 푸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는 저렇게 되지 마라!"

블레어가 그런 아이의 뒤통수에 장난스럽게 외쳤다.

*

뜀걸음 시간.

"안 오네."

"사형, 사형, 그렇게 꽉 조이면 아파."

"근데 안 꽉 조이면 묶어지지가 않잖아. 그러니까 좀 잘라 임마. 안 불편하냐?"

"하지만, 단장님이 모처럼 기른 거니까 자르지 말라고 그랬는데... 이렇게 묶으면 투구도 쓸 수 있고 길러도 된다고."

"이렇게 치렁치렁하게 늘어뜨리고 다니니까 맨날 여자로 오해받는 거 아냐."

"그래? 그럼 자를까? 사형이 자르라고 하면 자를게."

"야, 야, 야, 칼 내려놔! 아니 뭐 이렇게 극단적이냐? 대머리 되려고 그러냐? 됐어. 자르지 마."

칼로 갑자기 머리 전체를 밀어버리려고 하는 아이를 보고 기겁한 도린. 그 후 혼자 머리를 묶는 아이를 도와서 머리를 묶어주었다. 도린이 심심해서 아이의 길고 흰 머리를 두 갈래로 집어 돼지꼬리처럼 말아버릴 때 까지도 인솔자는 오지 않았다.

"어이, 도린! 뭐야, 네 사형 왜 안 와?"

란페이가 출타 중이었기 때문에 구보의 인솔자는 단장 대리인 레고르였다. 인솔하기로 되어 있는 레고르는 어찌된 일인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주변의 분위기가 흉흉하다. 벌써 20분 동안, 출발도 하지 못하고 뙤약볕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린은 난처한 가운데서도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뭔가 일이 있나본데요. 오늘은 그냥 뜀걸음 없는 걸로 하죠."

"젠장, 그럼 소화 안 되는데."

툴툴대면서도 흩어지는 사람들. 도린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자. 이건 그냥 넘어가면 안 되겠어."

아이는 성큼성큼 걸어가는 도린의 뒤를 따라갔다. 도린은 복도를 지나, 집무실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원래는 란페이의 자리이지만 지금은 레고르가 있어야 하는 자리다. 하지만 그 의자마저 텅 비어있었다.

"어랍쇼? 아예 출근도 안 한 거야?"

황당하다는 듯 혼잣말하는 도린. 그리고 바로 방향을 바꾸어, 레고르의 방을 향해 움직였다. 그의 방은 가장 좋은 위치에 있었다. 붉은 화관으로 장식된 문을 벌컥 열어젖히는 도린. 속으로는 험한 말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은 하나도 나오지 못했다. 방 안의 광경 때문에 머릿속이 하얘졌기 때문이었다.

"어, 뭐, 뭐야."

"당신 누구야? 문 닫아요!"

날카로운 여인의 목소리. 방 안에는, 알몸의 여자가 수건 하나만 두른 채로 거울을 보며 화장을 하고 있었다. 도린은 깜짝 놀라서 자신을 쫄래쫄래 뒤쫓아온 아이의 눈을 가렸다가 황급히 문을 닫으려고 했다. 그러나 느긋한 목소리가 제지한다.

"됐어. 무슨 일이냐, 사제야?"

그 목소리는 침대에서 들려왔다. 레고르였다. 마찬가지로 알몸을 드러내고 침대 위에 팔자 좋게 누워 있다. 도린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말했다.

"지금 이 꼬라지를 보고도 무슨 일이냐는 말이 나옵니까, 사형? 뭔 대단한 일을 하느라 안 왔나 했더니, 일과는 지켜야 할 거 아닙니까! 거기다 저 여자는 뭐에요?"

"창녀다. 하룻밤에 75루덴짜리 고급 창녀. 이 근처에선 유명하다던데. 어때, 너한테도 빌려줄까? 사형제의 연에 이어 동서의 연도 맺어 보자구."

킬킬 웃는 레고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머리를 벅벅 긁고는, 일어나자마자 담배 한 개피를 집어 불을 붙인다. 도린은 그 앞에 다가가 담배를 빼앗아선 바닥에 내던졌다.

"대체 누가 둔영에 함부로 여자를 끌어들입니까! 저 여자랑 밤새 뒹구느라 오늘 일과를 망쳐놓은 겁니까? 기강 참 볼만해지겠네요!"

"그깟 구보 한두 번 안 뛴다고 무슨 큰 일이 생기겠느냐, 사제야."

그러나 전혀 화내지 않고, 입꼬리를 말아올려 웃으면서 바닥에서 담배를 주워드는 레고르.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다시 입에 담배를 문다. 타들어간 시간만큼, 짙고 농밀한 잿빛 연기가 방 안에 차오른다.

"너처럼 무능한 놈은 이해 못 할 큰 뜻이 있어서 이러는 거니까, 여기까지만 하고 꺼지렴. 더 불만이 있으면 칼로 대화하자꾸나."

"내일도 이러면 정말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어? 사형!"

쾅! 문을 닫고 나가는 도린. 그런데 흥분한 나머지, 아이를 방에 남겨두고 문을 닫아버렸다. 이 문은 나름 귀빈실이라는 이유로 닫으면 자동으로 문이 잠기게 되어 있었다. 문에 매달려서 당황하며 문을 열려고 하고 있자니, 어떤 손길이 아이를 붙잡았다.

레고르가 창녀라고 부른 여자의 손이었다. 그녀는 문에 매달려 있는 아이의 얼굴을 붙잡더니, 무서운 얼굴로 노려보았다. 그리고 속사포처럼 따지듯이 지껄여댔다.

"이 여자도 당신이 부른 거에요? 어느 창관에서 온 아이죠? 이런 아이라면 분명 소문이 났을 텐데, 저는 처음 보는데요? 당신, 설마 날 속인 거고 이미 연인이..."

"닥쳐. 개같은 창년 주제에 질투하지 마라. 손 떼."

"예?"

"그 녀석은 내 사제다."

침대에서 일어나는 레고르. 그는 손쉽게 문을 열어젖히더니, 우스꽝스러울 만큼 정중하게 나가라는 동작을 취했다. 아이는 머뭇거리다 그 손짓을 따라 문을 빠져나갔다. 한 마디만 남기고.

"내일은 꼭 나와요, 첫째 사형."

"오냐."

피식 웃으며 대답하는 레고르.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다음 날도, 다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중간엔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

언제나처럼 머리를 말총머리로 묶고 훈련을 하던 아이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갈 때였다. 작은 뜰 옆의 건물을 지나다 그 으슥한 뒤편에서 울려퍼지는 고함을 듣고 깜짝 놀라 그 현장을 엿보았다.

"약속했잖아! 그 씨발 빌어먹을 껀수로 협박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그래. 그럼 다음 마지막은 어디보자, 빠르면 모레. 늦으면 다음주 쯤이 되겠군. 그 때 혹시라도 나에 대한 고발이 들어오거든, 무조건 내 편을 들어달라고. 그럼 그때는 정말로 그 자료를 파기해주지."

레고르였다. 그리고 그 앞에 있는 것은, 품행이 그다지 바르지 못하기로 소문난 편대장이었다. 남자인 아이에게 자꾸 필요 이상으로 추근덕대서, 아이는 그 사람을 그다지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정말로 맞선 준비를 하고 있었군. 심증이야 있었지만, 이것으로 확증이다."

담배를 뻑뻑 피면서 검은 연기를 내뿜는 레고르. 편대장은 화가 나서 레고르가 보고 있는 자료를 빼앗으려 들었다. 그리고 소리친다.

"더 이상 너한테 놀아나지 않겠다. 당장 내가, 그, 비허가 인센티브를 받은 증거를 내놔!"

"젠장, 비허가 인센티브라니, 뇌물을 참 고상하게 부르는군. 옛다."

레고르는 피식 웃으면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던졌다. 편대장은 자기가 요구하고도 이렇게 순순히 레고르가 뭔가를 내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리고 그 눈은 다시 절망으로 구겨졌다.

"그럼 다음에는 이걸로 얘기를 해 보자구. 모든 편대장은 자기 사망에 대비하여 튼실한 종자를 세 명까지 고용할 의무가 있고 지원금도 교부받지. 그런데, 어떤 병신이 그런 발상을 했다는 거 같은데. 어차피 나 뒈지면 끝인데 뭐하러 나 뒈지고 나서를 생각하나, 그냥 동네 양아치 세 명 고용하고 지원금은 반 갈라서 착복하자. 그렇지?"

"그...그런... 놈이.. 있나?"

"아. 네 얘기는 아니야. 버드나무 활을 쓰는 그 녀석 이야기다. 조만간 한 번 징계위원회라도 소집해볼까 하는데."

"그, 그거, 다행이군..."

"처신 잘 하도록."

레고르는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편대장의 어깨를 툭툭 친 다음. 검은 머리칼을 휙 휘날리며 뒤돌아섰다. 그 검은 머리카락은 먹을 잔뜩 머금은 붓처럼 주변에 검은 기운을 뿌리는 듯 보였다. 아이는 어쩐지 한기가 들어 으스스 떨다가, 살며시 고양이처럼 소리죽여 방으로 돌아갔다.

그 다음 날도, 다다음 날도 레고르는 자기 방에 틀어박혀 전혀 나오지 않았다. 밤늦도록 그 방에선 교성만이 쏟아졌다.

"기강이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졌잖아..."

심야.

곧 비를 쏟아부을 듯 무거운 먹구름 때문에 달도 얼굴을 숨겨서, 칠흑처럼 어두운 밤이었다. 아이와 함께 순찰을 돌면서 도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단장 대리라는 사람부터 저러고 있으니, 용병단 전체의 기강이 해이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일과 대부분은 취소되었으며, 란페이가 출타한 이 상황을 휴가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불침번도 순찰도 훈련도 전부 취소될 정도였다. 그 꼴을 이제는 도저히 봐줄 수가 없어서, 오늘은 블레어까지 나서서 레고르의 방에 쳐들어갈 정도였다.

"단장이 돌아오면 이 상황을 낱낱이 보고하고 엄중한 일벌백계를 요구하겠다!"

"얼마든지요."

블레어도 별 수가 없었다. 서열이 높은 그까지 나서서 길길이 날뛰었으니, 둔영 전체에 레고르의 기행이 자자하게 소문이 나는 건 당연지사였다. 위부터 저렇게 놀아제끼고 있는데 아랫사람들이 성실하게 일하고 싶을 리가 없다. 모두 질세라 풀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밤까지 성실하게 순찰을 도는 것도 아이와 도린이 유일할 정도였다. 일련의 상황을 떠올린 도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됐다, 됐어, 야, 우리도 들어가서 그냥 자자."

"어?"

그 때였다.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야음을 틈타 움직이고 있다. 아이는 배운 대로 석궁을 그 무언가에 겨누고 소리쳤다.

"누구냐! 당장 신분을 밝히지 않으면 쏘겠다!"

깜짝 놀란 도린도 함께 석궁을 겨누었다. 하지만 그는 전혀 반응하지 않고 달아날 뿐이었다. 아이는 망설임 없이 석궁을 쐈다. 아주 정확한 조준이었다.

"응?"

팅 소리와 함께 화살이 튕겨난다. 아이와 도린이 다급히 그 뒤를 쫓으며 몇 번을 더 쏘아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그 그림자는 저 멀리 녹아들듯 사라져 버렸다.

"사형, 저건 대체 뭐야?"

"제기랄, 빨리 잡아야 해! 제대로 추적할 수 있도록 우선 보고부터 하자."

"어디에? 단장님은 지금 없잖아."

단장 대신 보고를 받을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레고르였다. 못 미덥지만 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깊게 한숨을 내쉬고, 레고르가 또 여자와 뒹굴고 있을 침실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투둑, 투둑.

그런 두 사람의 뒤로 비가 한 방울씩 쏟아져 바닥을 적시기 시작했다.

*

"역시 그렇군."

또 자고 있거나 술에 곯아떨어져 있을 거라는 두 사람의 상상과는 다르게, 레고르는 자고 있지 않았다. 한달음에 전투용 경장으로 옷을 갈아입더니 등에는 예의 대태도를 차고, 랜턴을 집어든다. 그리고 성큼성큼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형, 뭡니까? 예상이라도 한 것 처럼?"

"예상이라도 한 것 처럼이 아니다, 무능한 사제야. 너는 내가 정말로 이런 촌구석에서 흘레질이나 하는 게 재밌어서 그러고 자빠졌다고 생각한 거냐?"

날카로운 목소리. 담배와 술에 취해 흐리멍덩하던 목소리와 달리, 예리하게 간 칼처럼 날이 선 목소리였다. 압도당한 도린은 입을 다물었다.

"오히려 고역이었어. 좀 정신 빠진 놈으로 보일 필요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는 3층,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층으로 올라가더니, 어떤 문 앞에 섰다. 그 문의 명패에는 '랑벨로 미르슬로프'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도린도 아는 이름이었다. 이 성채를 감독하는 아지프의 마술사의 이름이다.

"어, 잠깐, 사형! 이 방은 함부로..."

말리기도 전에 문을 열어젖히는 레고르. 그 방은 텅 비어 있었다. 급히 나간 듯 창문이 열려 있고, 방의 모든 서랍이란 서랍은 전부 헤집어져 있다. 도린은 놀라서 입을 벌렸다. 레고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랜턴의 불로 담뱃불을 붙이더니, 깊게 한 모금 빨아들였다.

"랑벨로 미르슬로프. 너희가 본 그림자의 이름은 그거다."

"뭐, 뭐지?"

"멍청한 얼굴이 더 멍청해 보이니까 얼빠진 표정 좀 짓지 말거라, 사제야. 이 놈은 계속해서 서류를 조작해서 아지프 본단에서 돈을 횡령해먹던 놈이다. 그리고 이제 그걸 들켜서 뒈질 위기에 처한 놈이지. 아지프 쪽에서 함구시켰겠지만 말이야, 단장은 알고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 일부러 이 방 경비를 잘 하라고 지침을 내렸던 걸 보면."

"그, 그걸 어떻게 안 겁니까?"

"내 방에서 봤던 75루덴짜리 창녀 기억나나? 그 날 축제 상금으로 샀던 여자인데 말이야. 그 여자 고객 명부에 저 인간 이름이 가득하더군. 여기 오기 전에, 주요 인사들의 이름은 죄다 외워놨으니 바로 알아볼 수 있었어. 아무리 아지프의 마술사라고 해도 고작 3위계 짜리가 어떻게 매주 75루덴짜리 창녀를 산단 말이야. 횡령 말고는 자금원이 없지."

후우욱. 연기를 깊게 내쉬는 레고르.

"장부를 보니 한참이나 발길이 끊겼는데, 얼마 전 갑자기 이름이 써졌다가 가로 줄 두 개를 쳐놨더군. 그러니까 무슨 뜻이겠나, 오랜만에 온 줄 알고 신나서 접수원이 이름을 썼는데, 돈이 없어서 못 사니까 지웠다는 거 아니야. 뭔가 굉장히 곤궁한 상황에 처했다는 거지. 그럼 돈도 없으면서 왜 창녀한테 기어왔을까?"

그는 담배 끝을 잘근잘근 씹으며 얘기를 계속했다.

"그래서 작은 가설을 세워서 접근했지.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그 놈은 다 늙어빠진 주제에, 그 창년이랑 자기가 사귀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더라고. 병신같지? 그냥 고객이니 잘 대해준 것 뿐인데 말이야. 돈이 없으면 바로 버려질 텐데. 아무튼 그래서 그 병신같은 놈은, 아지프한테 걸려서 목이 잘리기 전에 돈을 챙겨서 그 창년한테 도움을 받아 도피할 생각을 하고 계획을 짜고 있더라고."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요?"

"꼬셨다."

"네?"

놀라서 반문한 건 아이였다. 레고르는 아이의 머리를 세게 쓰다듬으며 귀찮다는 듯 말했다.

"그 년은 망한 귀족 집안 딸이었던 모양이야. 어떻게든 창녀 신세에서 벗어나서 예전 생활로 돌아가는 게 인생의 목표였지. 그 년한테 기나센의 에페 바체라고 밝혔더니, 그게 뭔지 알아듣고 몸이 달아서 다 말해주던데."

말을 마치고 피식 웃는 레고르. 도린은 어이가 없어서 입을 떡 벌렸다. 그러니까 장부 하나만 보고 이걸 다 알아내고, 이렇게 계획하고 행동할 수 있단 말인가? 둔영으로 그 여자를 끌어들인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신분을 확신시켜주기 위해서였다. 그 모든 걸 깨달은 도린은 자신이 한없이 왜소하게 느껴졌다.

"빨리. 너희도 제대로 무장을 챙겨서 와라. 쫓아가야 해."

두 사람의 무기를 찾으러 함께 움직이며, 레고르는 계속해서 자세한 상황 설명을 늘어놓았다.

"이 놈은 폭발 시약을 준비해서 요새 뒷쪽 성문을 무너뜨리고, 뒤쪽에 주둔중인 용병단을 떼거지로 죽인 다음 혼란을 틈타 앞쪽으로 빠져나갈 계획을 세웠더군. 그래서 그 창년이 마련한 배편을 타고 야만족의 땅으로 튄다는 계획인데 말이야."

"좆같은 건 거기부터란 말이지."

"이미 이 놈이 횡령범이라는 것도, 이 놈의 도피 계획도 다 알아놨고, 도피 루트도 다 알고 있는데, 이 새끼가 일을 저지르기 전에는 붙잡을 수가 없단 말이야. 왜냐면 상대는 어찌됐든 위대하신 아지프의 일원이니까."

아이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도린은 그게 이해가 갔던 모양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레고르는 무장을 마친 두 사람에게 따라오라고 손짓을 하며 마구간으로 이동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이 놈이 계획을 바꿔서, 그냥 혼자 탈주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 창년한테 배편의 항해 일정이 변경되었으니 빨리 나와야 한다는 편지를 쓰게 시켰지. 그리고 일부러 기강을 좆같이 해이하게 만들어서, 그 자식이 빠져나가기 쉽게 만들었다. 자, 이제 무슨 상황인지 완전히 이해가 갔나?"

"아니요."

아이가 말을 받았다. 그러자 레고르는 입꼬리를 말아올려 웃더니, 무슨 질문이 있으면 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그냥, 그런 계획을 한 걸 알았으면 바로 잡으면 안 되는 거에요? 왜 이렇게 해야 해요?"

레고르는 한숨을 내쉬고 대답했다.

"어린 사제야. 이 새끼가 일을 저지르기 전에 먼저 붙잡으면, 무슨 증거를 내놓고 무슨 소리를 지껄이던 아지프의 위신이 손상을 입게 된단다. 그럼 그 새끼들은 우리 입장을 이해하더라도 우릴 쳐죽일 수 밖에 없는 거야. 그게 체면이라는 거다. 안 그러면, 우습게 보일 테니 말이다. 집단에게 우습게 보인다는 건 죽음이나 다름없는 거야."

언뜻 이해가 갈 듯도 하고 안 갈 듯도 했다. 하지만 레고르는 이것으로 설명이 충분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래서 우리 세 명만 움직이는 거다. 우리는 어쨌든 나름 특수한 지위가 있으니, 아지프의 탈주한 마술사를 잡아 족치더라도 어떻게 좋게 넘어갈 수 있겠지. 아무런 지위가 없는 놈이 만약 아지프의 마술사를 잡으면, 그 놈도 등뼈가 뽑히게 될 걸. 가자."

레고르는 담배를 내던져 비벼 끄고는, 말 위에 올라타 선언했다.

"오늘 밤, 우리 셋은 반드시 그 놈을 추적해서 죽여야만 한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