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16화 (16/279)

4. 괴물 ( 6 )

검은 장대비.

부슬부슬 쏟아지던 비는 어느새 폭우가 되어 바닥을 적시기 시작했다. 쥐도 벌레도 비를 피해 숨어 텅 빈 광야, 그 빗속을 서둘러 달리는 유일한 사람이 있다. 랑벨로였다. 혹시라도 눈에 띌까, 자랑하던 로브도 내버리고 검은 후드로 몸을 푹 감싼 그는, 버려진 예배당에 도착해서야 등에 걸머진 커다란 행낭을 내려놓았다.

"플로에타! 내가 도착했다! 빨리 짐을 꾸리거라!"

그는 들어서자마자 황망하게 자신을 여기에 부른 창녀의 이름을 부른다. 반쯤 깨진 장식창으로 들이치는 빛 한 줄기. 그 빛이 희미하게 한 여자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랑벨로의 부름에도, 그녀는 그저 멍하니 뒤돌아선 채 서 있을 뿐이었다.

다급해진 랑벨로는 물자국을 바닥에 길게 흘리며 그녀에게 접근했다.

"플로에타! 이럴 때가 아니야. 날이 밝기 전에 빨리 움직여야..."

어깨를 붙잡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서야, 랑벨로는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플로에타의 머리는 붉은 기가 도는 밤갈색인데, 눈 앞에 서 있는 여자의 머리는 티 하나 없는 순백색이었기 때문이다.

어두움 때문에 멀리서는 눈치채지 못했다. 랑벨로가 그걸 알아채고 어깨에서 손을 떼자, 여자는 바로 뒤돌아서 팔꿈치로 랑벨로의 뺨을 후려쳤다.

"뭐, 뭐야! 넌 뭐야!"

"윽!"

그건 레고르의 지시대로 여기에 서 있었던 아이였다. 어째서인지, 분명히 뺨을 후려쳤는데도 단단한 무언가를 후려친 듯 팔꿈치가 아팠다. 랑벨로가 당황함을 수습할 새도 없이, 두 번째 공격이 날아왔다.

이번에는 뒤에서부터였다. 넓적한 천 조각이 자신의 입을 덮친 것이다. 그 옆의 긴 의자 밑에 숨어 기다리던 도린이었다. 천 조각을 밧줄처럼 팽팽하게 당겨 펼친 다음, 뒤에서 덮쳐 입과 목을 동시에 강하게 압박한 것이다.

"읍! 읍, 읍읍!"

입과 목을 동시에 조여져 저항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버둥거리는 랑벨로. 마지막 사람이 그 앞에 나타났다. 어두운 창문 위에 숨어 상황을 지켜보던 레고르였다. 그는 한 달음에 풀쩍 뛰어 랑벨로의 앞으로 다가간다.

"전부 송사리긴 했지만, 마술사는 세 명 정도 죽여본 적이 있어서 말이야. 아지프는 의외로 쉽지. 희생할 제물이 없는 곳을 골라서 유인하고, 이렇게 입을 틀어막아버리면 되니까."

"읍! 읍읍!"

"잘 가라."

두 손으로 대태도를 그러쥐고 초승달처럼 예리한 호를 그리며 칼을 휘두르는 레고르. 바웅 하는 소리가 예배당의 공기를 찢는다. 랑벨로는 읍읍 소리를 내며 미친듯이 몸을 비틀었다. 폭우가 먹먹하게 쏟아지던 바깥에선, 그 순간에 맞추어 세상이 하얗게 백열하고, 천둥이 울려퍼진다.

팅ㅡ

"응?"

놀란 듯 칼을 당겨쥐고 뒤로 물러서는 레고르. 레고르의 대태도가 랑벨로를 반으로 쪼개놓기 직전 천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방호의 주문을 영창하는 소리가 들렸다.

"제기랄, 천이 왜 찢어진 거야!"

도린은 황급히 하박과 상박을 덧대 랑벨로의 목을 조르려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히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목을 조르는 것일 텐데도, 북슬북슬한 촉감과 탄탄한 근육이 느껴졌다.

"끄아아아악!"

랑벨로는 다시 한 번 괴성을 내지르며 광란하듯 몸을 비틀어 도린의 조이기에서 빠져나갔다.

"붙잡아! 마술을 쓰려고 한다!"

레고르는 사납게 외치며 다시 칼을 휘둘렀다. 랑벨로의 손 끝에서, 새파란 불꽃이 넘실대기 시작한 것이다. 마술사라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1위계의 마술, 청옥염이었다. 손끝에서 치솟은 불길이 둥글게 터져나오기 직전, 레고르의 대태도가 그것을 갈랐다. 대태도에서는 시리도록 푸른 빛이 줄기줄기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흐아아악!"

레고르의 대태도에는 신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랑벨로의 마술과 충돌한 대태도는, 그 신기에 힘입어 마술을 산산이 깨뜨려버리고도 멈추지 않고 파죽지세로 랑벨로의 목줄기를 향해 덮쳐들었다.

랑벨로는 꼴사납게 뒤로 구르듯이 넘어져 그 공격을 간신히 피했다. 하지만, 후드는 찢어져 허공에 흩날리고 말았다. 그 순간, 다시 한 번 하얀 번개가 땅을 내려찍었다. 세상이 하얗게 빛나고, 그 찰나의 빛이 후드에서 벗어난 랑벨로의 모습을 드러냈다.

"으윽..으윽... 날 보지 마!"

그는 얼굴을 감싸쥐고 예배당 구석으로 황급히 얼굴을 숨겼다. 그러나 세 사람은 똑똑히 보았다.

"사형, 저게 뭐야?"

"나, 나도 몰라, 씨발. 이게 무슨 괴물이야?"

랑벨로의 몸 절반을, 검은 빛의 깃털이 덮고 있었다. 저번에 둔영을 방문했던 6위계의 마도사, 길 아잘록. 그가 어깨에 풀어 기르던 귀조의 것과 비슷한 털빛의 깃털이었다. 입은 괴물처럼 툭 튀어나와 붉은 빛으로 경질화되어 있다. 마치 새의 부리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저것 때문에 입을 틀어막으려던 천이 찢어진 것이었다. 그는 괴물 같은 형상으로 변이해 있었다.

귀조 세네터에게 붙들린 채로 계속해서 거짓말을 말해서, 영혼을 파먹힌 대가였다. 그 끔찍한 모습에 아이와 도린은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날... 날 보지 말아다오..."

랑벨로는 날개뼈처럼 이상하게 변형된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는, 우는 듯한 소리를 냈다.

"너희, 너희는 뭐야. 왜, 이 가엾은 늙은이를 이렇게 괴롭히는 것이냐. 이런 몰골이 되었으면, 이미 충분히 대가는 치르지 않았느냐. 내가 불쌍하지도 않느냐?"

아이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랑벨로는 얼굴을 보이기 싫다는 듯, 더욱 더 구석을 향해 움직였다. 그 충격적인 모습에 압도당해서, 두 사람은 그저 멍하니 랑벨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돈, 돈을 원하는 거라면 주겠다. 그래, 너희가 여기 있는 걸 보니, 아마도 플로에타는 이 늙은이가 꼴보기 싫어 배신한 것이겠지. 나에게는 아무 것도 안 남았다... 나는 그저 추하게나마 살고 싶었던 거란다... 순순이 따라갈 테니, 죽이지 말아다오... 나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그러면서 몸을 더욱 더 웅크려 구석으로 움직이는 랑벨로. 도린은 높이 치켜든 칼을 살짝 내렸다.

"그럼 입에 재갈을 물리고 포박할 테니 얌전히..."

그 순간 찍 소리가 울렸다. 겁에 질린 생쥐가, 폐를 쥐어짜여서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병신아, 덮쳐! 저건 지금 희생할 제물을 찾고 있는 거야!"

레고르가 다시 대태도를 붙잡고 외쳤다. 그 말대로였다. 랑벨로는, 싸움 도중 예배당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생쥐를 발견하고, 그걸 제물로 바쳐 아지프의 마술을 사용하기 위해 약한 척을 한 것이었다. 랑벨로의 손에 들려 있는 하얀 쥐를 발견하고 다급하게 달려드는 세 사람. 랑벨로는 온 힘을 다해 생쥐의 배를 꾹 눌렀다.

"제기랄, 죽어 ,죽어!"

이 쥐가 생명이 다해야 자신이 계획하던 아지프의 마술, 혈염포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쥐는 큼지막한 만큼 쓸데없이 생명력이 질겼다. 랑벨로의 손톱에 배를 뚫려 피를 흘리면서도 미친듯이 찍찍댈 뿐 죽지 않았다.

급해진 랑벨로는 자신에게 새롭게 주어진 기관을 사용하기로 했다. 생쥐를 부리처럼 튀어나온 입에 집어넣고 와그작 씹었던 것이다. 혓바닥으로는 혈염포의 술식을 전개하면서. 홱 고개를 돌리며 일어서는 랑벨로. 그의 손에는 아까 전의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농밀한 붉은 빛이 감돌고 있었다.

"젠장, 엎드려!"

도린은 그 빛을 보고 아이의 머리를 붙잡고 바닥에 쳐박았다. 쾅! 굉음과 함께, 붉은 기운이 폭포처럼 터져 예배당을 덮친다. 낡은 벽돌로 이루어진 예배당 일각은 그 일격을 견뎌내지 못하고 무너져내리고, 폭우가 무너진 공간을 타고 흘러들어온다.

"우욱..우우우욱..."

혈염포의 붉은 빛이 사라지고, 랑벨로의 신음이 들리자마자, 아이와 도린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레고르는 그 짧은 사이에 벽면을 타고 뛰어올라가 랑벨로 근처의 창문 위에 표범처럼 앉아 있었다.

"죽어라!"

먼저 일어선 도린이 이제는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듯 랑벨로의 몸을 덮쳤다. 곧은 찌르기. 하지만 그 찌르기는 철판을 찌르기라도 한 것처럼 맥없이 멈추었다. 랑벨로의 몸을 뚫지 못하고 튕겨나온 것이었다.

"뭐, 뭐야?"

"우욱..우우우우우욱!"

낌새가 이상했다. 혈염포를 쏜 랑벨로는, 여전히 부리처럼 튀어나온 입에 쥐의 반신을 문 채로, 다음 전투 행위를 하지 않고 계속 몸을 뒤틀고만 있었다. 탁 풀린 눈으로 인사불성이 되어서는, 미친 사람처럼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린다.

"잘못했습니다, 거짓말, 거짓말이 아닙니다, 불가항력, 불가항력이란 말이야!"

길 아잘록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랑벨로를 불러 세네터를 두르게 시키고, 한 가지 서약을 받았다. 다시는 아지프의 마술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서약이었다. 그리고 지금, 랑벨로는 아지프의 본격적인 마술인 희생술을 사용하고 말았다. 그것은, 즉 거짓말을 범한 것이었다.

"불,그아아아아악ㅡㅡㅡㅡㅡㅡ!!!"

세네터는 거짓말을 먹는다. 세네터에게 거짓말을 할 때마다, 그 자는 영혼을 파먹히고. 영혼을 다 파먹힌 자는, 세네터의 노예인 저급한 귀조가 된다.

방금 범한 거짓말로 마지막 영혼의 조각마저 파먹힌 랑벨로는, 그 말대로 귀조가 되고 만 것이었다. 랑벨로의 내근육 하나하나가 기괴하게 부풀어오르고, 인간의 것이었던 사지가 기이하게 뒤틀리며, 날개 네 개 달린 새의 모습으로 완전히 변모했다.

"ㅡㅡㅡㅡㅡㅡㅡㅡ!!!"

그것은 입에 물고 있던 쥐 시체를 아그작아그작 씹어 꿀떡 삼키더니, 괴성을 내질렀다.

그 부리가 노리는 것은 가장 가까이 있는 인간, 도린이었다.

"윽!"

막을 새도 없었다. 짧은 비명. 시미터처럼 예리한 귀조의 부리가 도린의 오른 가슴팍을 꿰뚫었다. 귀조는 그렇게 도린의 가슴팍을 꿰뚫은 채로, 머리를 마구 흔들어 바닥에 내려찍었다.

"안 돼!"

새된 비명. 한 손에는 갈가마귀, 한 손에는 롱소드를 들고 귀조에게 달려드는 아이. 신기를 몸에 있는대로 집중해서, 마구 목을 뒤틀고 있는 귀조의 목덜미를 향해 내려찍었다.

그러나 그것은 얕은 상처만을 남길 뿐, 어린갑처럼 귀조를 두텁게 감싸고 있는 깃털을 뚫지 못했다.

"이익, 이이익!"

칼이 효과가 없다는 걸 알자 더 중량이 커다란 갈가마귀로 미친 듯이 귀조의 목을 내려찍는 아이. 이것 역시 효과는 없었다. 그저 주의를 환기할 뿐이었다. 귀조는 부리에 꿰뚫고 있던 도린을 홱 내던지고, 시꺼먼 입천장을 드러내며 아이에게 달려들었다.

"악!"

아이는 갈가마귀도 놓치고 귀조의 육중한 몸에 짓눌려 바닥에 쳐박혔다. 아이는 간신히 그 부리를 위아래로 붙잡고, 입을 벌리지 못하게 온 힘을 다해 짓눌렀다. 조금이라도 힘이 빠지면 바로 부리를 벌려 자신의 머리를 깨물고 똑 부러뜨려버릴 것 같았다.

"이게 무슨 꼴인가."

그 때, 구원의 손길이 있었다. 레고르였다. 창문 위에서부터 떨어지면서 호쾌한 발차기로 귀조를 걷어찬 것이다. 귀조는 그 일격을 받고 옆으로 튕기듯이 쓰러졌다. 잠깐 사이에 땀 범벅이 된 아이는, 가쁜 숨을 쥐어짜며 놓아버린 검을 찾기 위해 움직였다.

레고르는 대태도를 한 손에 잡고 늘어뜨린 채로 귀조를 노려보았다. 귀조는 흉맹한 눈빛으로 부리를 벌려 레고르를 위협한다. 잠시 눈싸움을 하는 둘. 먼저 움직인 것은 귀조였다. 네 장의 날개를 활짝 펼치고 저공 비행하며 레고르에게 달려든다.

"쓰레기같군."

척, 완전히 풀려 있던 듯 싶었던 레고르의 몸이 마법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레고르는 투포환을 쏘는 것처럼 허리를 구부리더니, 폭발적인 원심력을 담아 대태도를 휘둘렀다. 칼질이라기보다는 대포같은 굉음과 속도의 일격. 그 칼날에는, 눈이 아플 정도로 빛나는 시퍼런 빛이 담겨 있다.

"ㅡㅡㅡㅡㅡㅡ!!!"

그 일격은 귀조의 가슴에 비스듬히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찐득한 검은 피가 흘러나오더니, 공기에 노출되자 기화되어 사라진다.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는 귀조. 아이는 잠시 몸을 멈추고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너무나도 완벽한 일격이었다.

신기를 다룰 줄 아는 아이에게는 그 공격의 완벽함이 더 에일 듯이 와닿았다. 첫째 사형한테 맡겨 두면 걱정 없겠다! 그렇게 판단을 내린 아이는, 또 다른 사형을 향해 달려갔다.

"사형, 사형, 괜찮아?"

"씨발, 정말 꼴사납네. 쿨럭."

"말 하지 마, 말 하지 마!"

어쩔 줄 몰라하며 가슴을 꿰뚫린 도린에게 달려가는 아이. 다행히도 심장이 있는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 가슴을 당했기 때문에, 뼈가 부러지고 출혈이 심할 뿐 살아 있었다. 아이는 어쩔 줄 몰라하며 도린의 상체를 일으키고, 응급처치를 하기 시작했다. 그 때였다.

"ㅡㅡㅡㅡㅡ!"

"으윽!"

아이는 등 전체를 덮치는 강렬한 통증에 신음을 흘렸다. 분명히 레고르가 상대중이라고 생각했던 귀조가 날개를 퍼덕이며 이 쪽으로 달려든 것이었다. 더 약한 쪽을 노려야겠다고 생각한 듯 싶었다. 불의의 일격을 당해 등짝에 발톱이 찍힌 아이.

아이는 안간힘을 다해 몸을 비틀며, 귀조의 발톱에서 등을 빼내고, 귀조의 목을 붙들어매 조이기 시작했다.

"첫째 사형, 지금이에요!"

아이와 실랑이를 하느라 귀조의 등이 완벽히 노출되어 있었다. 아까 보여줬던 그 일격을 이 등짝에 날리기만 해도, 이 놈은 반으로 쪼개져서 죽을 것이다. 그런 판단에서 한 외침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 일격은 찾아오지 않았다.

"사형?"

상황을 알고 싶어 힘든 가운데도 목을 빼내 귀조 너머를 바라보는 아이. 혹시 귀조한테 이미 당했나? 그러나, 아니었다. 레고르는 아주 평안한 자세로 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칼은 이미 등에 비끄러맨 채였다. 그는 기묘한 웃음을 지으며, 아이와 도린을 바라보더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입에 가져갔다. 담배였다.

"사형! 빨리, 빨리..."

"시끄럽구나, 어린 사제야. 뭐, 너 혼자 몸을 빼내는 거라면 도와줄 수도 있긴 한데."

틱, 불을 붙이며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하는 레고르. 그는 연기를 한 모금 뱉으며 말한다.

"피가 검은 걸 보아하니 저 새대가리는 외계의 존재다. 외계의 존재는, 특별한 조치가 없는 한 몇 시간이면 센디엘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먼지로 흩어져서 사라져. 한 세 시간 후면 알아서 죽을 놈인데, 힘을 뺄 필요가 뭐 있겠어."

"사형, 하지만, 둘째 사형이...!"

"세 시간 후에 돌아오마."

레고르는 그렇게 말하고, 귀조와 씨름하는 아이와 도린을 내버리고 예배당을 떠나 버렸다.

"사혀어어엉!"

아이는 비명 같은 외침으로 레고르를 붙잡았지만, 레고르는 무시하고 휘적휘적 문을 나설 뿐이었다. 하지만 길게 당황할 새는 없었다. 계속해서 몸을 비틀며 아이와 실랑이를 하던 귀조가 힘을 모아 한번에 아이의 배에 박치기를 갈긴 것이었다.

"끄으윽!"

내장이 다 뒤틀리는 것처럼 아프다. 귀조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머리로 받쳐 아이를 들어올리곤 바닥에 메다꽂았다. 그 다음 날개를 펼쳐 덮쳐와선, 날카로운 부리로 아이의 배를 꿰뚫었다. 그렇게 꿰뚫은 채로 아이를 다시 들어올리려 하는 귀조.

"하악...하아아악..."

하지만 아이는 배가 뚫린 상태에서, 그 연격을 허락하지 않았다.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온 귀조의 목을 붙들고 어떻게든 그걸 부러뜨리기 위해 힘씨름을 했다. 배가 끊어질 듯이 아팠지만, 실험을 당하면서 몇 번이나 겪었던 고통이다. 견뎌낼 수 있었다.

"더러운 아가리 떼, 씨발!"

"ㅡㅡㅡㅡㅡㅡ!!!"

귀조가 아이의 배에서 목을 뽑아들었다. 새빨간 부리 위에 진홍색 피가 잔뜩 묻은 게 보인다. 쓰러져 있던 줄만 알았던 도린이 가슴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일어나 귀조를 덮친 것이었다. 손에는 아까 아이가 놓쳤던 롱소드가 들려 있다.

팽팽하게 근육을 부풀리며 귀조의 몸을 난도질하기 위해 칼을 휘두르는 도린. 그러나, 얕다. 신기를 사용할 수 없는 그에게 한계는 명확했다. 귀조는 그 혼신의 일격을, 그저 성가시다는 듯한 몸통박치기 한 번으로 정면돌파해버렸다.

"윽!"

귀조에게 떠밀려 벽에 크게 부딪힌 도린. 도린이 힘을 쥐어짜내서 틈을 벌어준 덕분에, 귀조의 등이 열렸다. 아이는 황급히 도린의 칼을 주워들고 온 힘을 칼날에 집중했다.

"아까,아까 사형처럼..."

아까 레고르가 보여줬던 일격을 떠올리며, 어떻게든 검날에 신기를 밀어넣으려 애쓰는 아이. 하지만 자신의 몸을 벗어난 대상에 신기를 밀어넣어 그 기운으로 빛나게 만드는 건 몸을 강화하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 제발, 왜, 안 되는 거야? 아무런 변화가 없는 칼날을 저주하듯 노려본다. 입술을 피가 나도록 세게 씹는다.

'어린 순례자야, 이렇게 하거라.'

다음 순간, 검날에 시뻘건 빛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아이는 고개를 홱 돌려, 자신의 뒤에서 끌어안듯 검을 함께 잡아주고 있는 존재를 바라보았다. 림이었다. 도린이 흘린 피웅덩이 속에서 솟아난 림이, 자신과 함께 검을 붙잡고 검로(劍路)를 인도해주고 있었다.

"으아아아악!"

비명 같은 기합을 내지르며, 귀조의 등을 향해 달려든다. 등을 덮치는 붉디붉은 참격. 벽에 부딪힌 도린을 미친 듯 부리로 쪼아대던 귀조는, 그 일격을 받고 단말마 같은 비명을 내질렀다.

"ㅡㅡㅡㅡㅡ!!!"

부리가 한껏 벌어지며, 그 시꺼먼 입천장이 눈 가득 들어온다. 마지막으로 아이의 머리를 물어뜯으려는 것 같았다. 아이는 검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칼날을 그 입구멍 속으로 쑤셔넣었다.

푹!

근육과 깃털이 단단하기 그지없던 귀조도, 내부는 약했다. 아이의 장검은 귀조의 입을 통해 위와 내장을 꿰뚫고, 몸통 뒤편을 뚫고 나왔다. 어찌나 깊게 찔렀는지 아이의 팔뚝까지 귀조의 입에 들어가 있을 정도였다. 그 상태로 귀조는 확실하게 절명했다.

"후욱...후우욱..."

귀조의 입에서 쏟아지는 검은 피를 받으며, 뜨거운 숨을 토하는 아이. 찐득한 액체가 잔뜩 들러붙은 팔뚝을 귀조의 입에서 빼내자, 귀조의 살점과 내장 그리고 방금 쳐먹은 쥐 시체까지 칼끝에 딸려나왔다. 그 상태로 잠시 숨을 고르던 아이는, 불현듯 칼을 내버리고 달려나갔다. 도린을 향해서였다.

"사형!"

귀조가 부린 난동때문에 무너진 벽에 깔려 죽은 듯 누워있는 도린. 무너진 구멍으로 들이치는 비가 도린을 적시고 있다. 아이는 그 잔해를 치우고, 도린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위중했다.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위중했다. 귀조에게 여러 번 온 몸을 찔려 여러 구멍에서 피가 쏟아지고 있고, 배에서는 창자가 흘러내리고 있다.

"가지 마... 가지 마..."

죽는다는 단어를 꺼내는 것조차 무서웠다. 아이는 도린의 심장에 손을 깍지껴 들이대고, 미친 사람처럼 펌프질을 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심장만 뛰면 살 수 있다. 유일하게 아이가 알고 있는 응급 처치법이었다. 그렇게 몇 번이나 펌프질을 하고 있자니, 무언가가 아이의 뺨에 닿았다. 도린의 손이었다.

"쿨럭, 쿨럭..."

"사형, 사형, 괜찮아? 괜찮아. 조금만, 조금만 참아..."

도린은 한 손으로, 계속해서 미친듯 펌프질을 하고 있는 아이의 뺨을 어루만졌다. 핏물을 크게 토하더니, 무언가 말하려 입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혼자서도 잘 할 수 있겠냐?"

억지로 취하는 짓궂은 어조. 쥐어짜내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아이는 더 힘을 주어 펌프질을 하며, 뭉개진 발음으로 대답했다.

"잘 할게, 앞으로 잘 할 테니까, 가지 마..."

"미안하다. 좀 더 멋진 형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 말과 함께 도린은 마지막 힘을 다해 손을 내뻗었다. 아이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려놓고, 힘있게 쓰다듬어 주었다. 말을 마치는 순간, 그 손은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가지 마, 사형 없으면 세상에 나 미워하는 사람밖에 없어, 가지 마아아..."

'어린 순례자야. 그만 하거라.'

시리게 쏟아지는 폭우를 맞으며, 그 후로도 한참이나 펌프질을 멈추지 않는 아이. 긴 머리가 비에 젖어 피부에 착 달라붙어 있다. 그 모습을 보다못한 림이 아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이는 강하게 어깨를 비틀어 그 손을 쳐내고는, 펌프질을 계속했다.

뼛조각과 돌조각에도 아랑곳않고 계속 손바닥을 밀어 펌프질을 해댄 탓에, 손바닥이 긁혀 피가 흘러나오고 있다.

'그만 하라니까.'

"가지 마..."

'그 녀석은 이미 죽었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두려운 사실. 그 사실을 림이 들려주자, 아이는 힘이 빠져 앞으로 푹 쓰러졌다. 도린의 가슴에 아이의 귀가 닿았다. 고요하다. 그 심장은, 이미 멈춰서 있었다.

아이는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얼마나 그렇게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었을까, 콰릉 소리와 함께 세상이 하얗게 물들었다. 번개였다. 고막은 번개의 굉음으로, 시야는 눈이 멀듯한 흰 빛으로 가득하다. 모든 감각이 부서져, 세상이 정지해버린 것 같은 찰나.

아이는 그 번개가 자신에게 떨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희뿌연 연기.

담배에서 흘러나온 희뿌연 연기가 집무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불을 피운 너구리굴처럼, 눈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지러운 방. 그 방을 그렇게 만든 것은 레고르였다. 입에 담배를 문 채로 서성이던 그는, 손가락을 튕겨, 다 타들어가는 스물두 번째의 개피를 재떨이에 떨어뜨렸다.

"이런, 너무 많이 폈나."

스물세 번째 개피를 집어들다 말고 살짝 어지러움이 몰려와서, 레고르는 손바닥을 펴 이마를 감쌌다. 꼭 그래야 했을까, 아니, 무슨 의문인가.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았나. 모든 거목도 한때는 작은 씨앗이었으며 파멸 또한 그러하다. 완벽하고자 하는 자는, 파멸로 자라날 수 있는 아주 작은 위화감도 놓쳐선 안 된다. 나는 옳았다.

"윽."

어떤 기억이 치솟을 것 같아 황급히 담배에 불을 붙인다. 그의 나쁜 버릇이었다. 어떤 기억, 어떤 생각이 떠오를 것만 같으면, 술이든, 여자든, 담배든, 정신을 어지러뜨리는 걸 미친듯이 탐닉하는 것.

쓰잘데기없이 날카롭고 예민한 뇌를 어떻게든 진정시키려는 행동이었다. 평소에는 아무리 심해도 선 자리에서 다섯 개피 정도를 태우면 가라앉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리 애를 써도 가라앉기는 커녕, 더욱 아프게 뇌를 파고든다.

"후우우욱..."

책상 위에 연기를 쏟아내며 갈색 병에 담긴 독주를 꺼내드는 레고르. 오늘 찾아온 기억은 쉽게는 물러가주지 않을 것 같았다. 술의 힘까지 빌려야만 할 것 같다. 퐁, 마개를 따고, 황금색 액체를 술잔에 따르는 순간. 작은 소리가 예민해진 귀에 들려왔다.

"왔군."

벌컥! 그 다음 순간,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칼날이 레고르를 덮쳐왔다. 보통 사람이라면 반응조차 할 수 없을 완벽한 기습이었다. 그러나 레고르는 한 손에 술잔을 든 채로, 검지와 중지만을 이용해 그 칼날을 붙잡았다.

"죽어!"

그 칼날을 휘두르는 사람. 그건 아이였다. 비에 젖은 생쥐꼴이 되어 온 몸에서 빗물을 흘리면서, 으스러지도록 입술을 깨물고 검을 붙잡고 있다. 아이는 살면서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저주를 내뱉으며, 롱소드를 레고르에게 찔러넣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레고르는 한 손으로 술을 따라 마시면서, 가볍게 칼을 붙잡고 훑어볼 뿐이었다.

"음, 이건 그 무능한 사제의 칼이구나. 주인은 없고 칼만 돌아왔으니 역시 죽었겠군."

"너 때문에... 너 때문에!"

"한 시간 반만에 돌아오다니, 너는 그 놈과 달리 꽤 유능하구나. 앉으렴. 같이 그 병신같은 놈을 추모하면서 사형제간의 우애나 다지자꾸나."

이성을 잃고 칼을 난폭하게 휘두르는 아이. 하지만, 레고르에게는 닿지 않았다. 그는 허리를 뒤로 빼서 간단하게 아이의 공격을 피한 뒤, 재빨리 주먹을 날려 아이의 가슴을 가격했다. 균형을 잃은 아이는 칼을 놓치고 뒤로 쓰러졌다. 일어나려는 순간, 두꺼운 신발이 아이의 목을 짓눌렀다. 자리에서 일어난 레고르가 아이의 목을 짓밟고 선 것이다.

"그륵...그으윽..."

"이제 좀 얘기를 들을 자세가 된 것 같군. 그렇지?"

아이의 목을 짓밟은 채로, 자세를 쭈그리는 레고르. 입에는 담배를 물고 있다. 그는 아이의 분노에 찬 얼굴을 바라보았다. 폭우를 뚫고 왔기 때문에, 온 얼굴은 물로 젖어 번들거리고 있다. 그는 검지를 내밀어 아이의 눈가를 훔치더니, 혓바닥으로 가져갔다.

"역시 아무 맛도 안 나는구나."

"그으윽...그으으으윽...!!"

그러느라 잠시 목을 조인 발이 느슨해져서일까, 아이는 그런 레고르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눈으로 아이의 얼굴을 노려보는 레고르.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아까부터 찾아오던 기억이 이제 걷잡을 수 없는 파도처럼 온 몸을 덮쳤다. 레고르는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웃었다.

"여기 오기 전, 너에 대한 기록을 봤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었거나, 부모에게 팔렸거나... 뭐, 그런 이유로 누나와 함께 버려졌고. 그러다 누나한테도 버려져서 누명을 쓰고 전쟁 노예로 굴러떨어져서, 몇 개월 동안이나 소년병으로 굴러먹으면서도... 살아 돌아왔다고."

왜 갑자기 그런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어서 눈이 커지는 아이. 그러나 레고르는 계속해서 말을 늘어놓을 뿐이었다.

"그래서 조금은 더 그럴듯한 눈을 가진 놈일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 고난을 뚫고 살아남은 사람의 눈. 그런데 이게 뭐야, 완전 덜떨어진 애새끼잖아. 나는... 실망했다. 방금 전까지는 말이야."

또 다시 히죽 웃는 레고르. 잠시 후 얼굴을 찡그리며 이마를 짚는다. 잠시 그렇게 이마를 짚고 눈살을 찌푸리던 레고르는, 아이를 내버려두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술잔을 움켜쥐고, 따르던 술을 다시 따르기 시작한다.

"얘기 하나 들려줄까. 아무한테도 해준 적이 없는 얘기야. 듣기 싫으면 나가라."

그 음성에 압도당해서, 아이는 그저 몸을 일으킨 채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30도가 넘는 술 한 잔을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들이키고, 입을 닦은 후, 레고르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 어미는 창녀였다."

칼라오네, 창녀 자궁에서 왔다.

그 말을 할 때와 같은 담담한 어조로, 그것은 무언가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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