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17화 (17/279)

4. 괴물 ( 7 )

"내 어미는 창녀였다. 제국 남쪽의 작은 도시, 그 도시에서 제일 큰 창관의 간판으로 일하던 창녀였지."

"생활은 꽤 윤택했어. 열 살이 될 때까지, 나는 그 창관에서 잡일을 하며 지냈다. 뭐, 꽤 감사하며 지냈다구? 대부분의 창부들은 애를 배면 독초를 먹어서 유산을 하던가... 애를 떨어뜨릴 때까지 배를 걷어차든가,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목졸라서 죽여버리던가. 그렇게 처리해버리거든. 간판이라서 특별대접을 해 준거였지."

"그 보잘것없는 행복은 어떤 손님 때문에 깨졌다."

"제국 뭐시기 가문의 도련님이 좆대가리 함부로 놀리다 나병에 걸린 채로 이 도시에 찾아온 거야. 그리고 이 도시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창녀를 찾아갔지. 그래, 내 어미 말이야."

"권력을 가진 그 도련님을 거부하지 못하고 내 어미는 울면서 다리를 벌렸다."

"그리고 나병에 걸렸어."

"그 아름답던 얼굴이 추하게 일그러지고, 고름과 수포 그리고 악취와 진액으로 가득 찼지."

"나는 내 어미와 함께 쫓겨났다."

"그 때부터 비참한 생활이 시작됐다. 문둥이를 환영하는 곳 같은 건 어디에도 없으니까 말이야. 나는 내 어미를 산 속의 버려진 폐가에 숨겨 두고, 어미 몫까지 구걸과 동냥을 하며 먹고 살았다."

"그러다 그걸 들켜서, 병을 옮길 생각이냐며 죽도록 두들겨맞고 나무에 매달리기도 했어. 포주한테 붙잡혀서 창관에 팔릴 뻔하기도 했지. 쓰잘데기없이 생긴 것만 어미를 닮아서... 나도 어렸을땐 너 같았거든. 너 같았단 말이다. 이 흉터는 그때 생긴 거다."

"계속 그렇게 살 수는 없었으니, 내 어미는 한 가지 궁리를 했다."

"고향에 두고 온, 어렸을 적에 결혼하기로 약속한 친구가 있으니 그 사람을 찾아가 보자는 거였지. 내 어미는, 하레하둔의 사냥꾼 마을 출신이었다. 카나기의 마술사와, 그 식솔들이 몰려 사는 산촌. 거기에서 가출해서 여기까지 흘러들어 온 거였어. 이런 시골에 갇혀 살기 싫어서 그랬다나, 뭐, 참 병신같지?"

"그래서 우리 모자는, 그 멀리 떨어진 어미의 고향까지 여행을 떠났다."

"혹시라도 어미가 나병 환자인 걸 들키면 안 되니까, 옷과 가면을 마련해서 얼굴을 숨기고, 밤마다 내가 천으로 고름을 닦고... 약초랍시고 어디서 풀을 주워다가 찧어 붙여 주면서, 여행했어."

"제일 큰 난관은 하레하둔 산맥 그 자체였지. 열살 남짓한 꼬맹이와 문둥이 여자가, 괴물과 얼음밖에 없는 산맥을 2천 미터나 등반해야 했단 말이야. 모험가들도 마술사들도 떼거지로 뒈져나가는 곳을 말이지."

"그래도 난 그걸 해냈다."

"하레하둔 근처의 도시에 들러 책을 하나 훔쳐서, 괴물의 정보를 얻고. 그 생태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어떻게 몸을 숨겨야 하는지 치밀하게 계획해 움직였다. 자랑은 아니지만, 난 머리가 좋거든."

"그 모든 괴물의 영역을 지나고 나서, 가장 두려운 시간이 찾아왔다. 솔직히 난 도저히 확신할 수가 없었어."

"과연 그 결혼을 약속했다던 어린 시절의 친구가, 내 어미를 받아 줄까?"

"이미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를 애까지 가지고, 배 위에는 숱한 남자가 지나간 끝에, 병까지 걸려서 돌아온 여자를? 왜? 옛정 하나만으로?"

"그 사람의 오두막 문을 두드리면서도 난 두려움에 떨고 있었어."

"그리고 그건 기우였지."

"처음에는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우리 모자를 바라보던 그 사람은, 곧 내 어미가 누군지 알아보고는, 고름과 수포로 가득한 그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자기가 아는 마술사 중 나병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며, 이제라도 함께 살아가자고 했어."

"이제라도 돌아와줘서 고맙다고 말이야."

"그 사람은 서른이 넘도록, 어릴 적 헤어진 어미 하나만을 그리며 독신으로 살고 있었어."

"감동적이지?"

레고르는 그렇게 말하며 담배 연기를 깊게 쏟아냈다. 그리고 새 개피를 꺼내 입에 물고는, 천천히 아이에게로 다가왔다. 무릎을 꿇고 쓰러질 듯 앉아 있는 아이 옆으로 다가와 시선을 맞추는 레고르.

"행복한 미담 아닌가."

"여기까진... 말이야."

동의를 구하는 듯 투명한 눈으로 아이를 마주본다. 아이는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다음 날 새벽, 나는 설원 한 가운데서 눈을 떴다."

"나는 개썰매에 짐짝처럼 놓여 있었어. 썰매를 끌고 있는 건 그 남자였다."

"그는 괴물들의 소굴 한 가운데에 나를 내려놓고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웃으면서 이런 말을 했지."

이런, 여기 수 많은 괴물들을 잘도 피하며 여기까지 왔다만,

마지막으로 인간이라는 괴물을 조심하지 않았구나.

조심하렴, 인간 모습을 했다고 다 인간이 아니야.

가끔 그 사이에 괴물이 숨어 산단다.

"뭐, 대충 그런 말이었어. 카나기의 속담이라나?"

"나는 발악하면서 달려들었어. 나보다는, 엄마가, 아니, 어미가 더 걱정이었다."

"역시 원한을 가지고 있었구나. 겉으로만 어미를 받아주는 척 하면서, 몸을 망친 데 원한을 품고 보복하려고 이러는구나. 이런 생각이었어."

"엄마를 어떻게 했어! 뭐, 대충 그런 말을 하면서 마구 주먹을 휘둘렀지."

"그 주먹을 담담하게 맞아주던 남자는,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줬단다."

담배를 쥔 레고르의 손끝이 희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걸 숨기려 얼른 입으로 가져갔지만, 눈썰미가 있는 아이는 눈치챌 수 있었다. 담배를 문 입술도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슴에 켜켜이 응어리진 무언가를 토해내듯 연기를 토해내곤, 중얼거렸다.

"네 엄마가 널 버렸단다."

그리고는, 웃기 시작했다. 입꼬리만 올라가는 웃음이 아니었다. 정말로, 우스워서 견딜 수 없다는 듯 소리내어 웃는다.

"재미있는 농담이지? 사제야, 너도 웃어도 좋아."

"사실 당연한 거 아닌가. 나는 이 남자의 씨에서 나온 자식이 아니잖아? 누구의 씨인지도 모르는 자식이지. 망친 몸을 끌고 온 것도 무안스러운데, 그런 짐덩이까지 길러달라고 부탁할 필요가 뭐가 있겠나? 오히려 증오스럽겠지."

"나는... 내 어미의 과오의 증거물일 뿐이니까. 더러운 과거를 숨기려면, 증거는 없는 쪽이 좋잖아."

"앞으로 마을에서 내가 함께 살아가면, 자신의 수치스러운 과거와 평생 마주하고 살아야 할 것 아닌가? 마을 사람들도 비웃을 테고 말이야. 이 남자도 내 얼굴을 볼 때마다 썩 유쾌하진 않겠지. 나는.... 마을에서, 이 남자와, 함께 여생을 살아가는 데 장애가 되겠지."

"여기 도착한 순간, 나는 쓸모 없는... 증오스러운... 뭐, 그런 거였다."

"그래서 나를 죽여달라고 사주한 거야."

"오히려 이 남자는, 별로... 별로 그러고 싶지 않은 눈치였어. 그래서 설원 한 가운데 내버린다는...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는... 불확실한 방법을... 택한 거지...웃기지?"

또 웃는 레고르. 하지만 아이는 입을 벌린 채, 한 마디도 꺼낼 수 없었다. 아이에겐 그 웃음이 슬프게 들렸기 때문이다.

"웃기잖아."

그 기색을 알아챈 건지, 레고르가 허리를 굽혀 아이와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이의 눈에 어린 연민의 빛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이건 그가 원하던 반응이 전혀 아니었다.

"웃어도 좋다고 했잖아!"

레고르는 처음으로 격정적으로 화를 내며, 담배를 꺼내 그 불을 아이의 새하얀 배에 지졌다. 신음을 흘리는 아이. 불이 아이의 배에 까만 흉터를 남길 때까지, 잘근잘근 불을 지지며 레고르는 말을 이어갔다.

"그 행복에 내가 낄 자리는 원래부터 없던 거였어. 창녀의 사생아한테 그런 건... 허락되지 않는 거야. 그렇지? 그걸 깨달은 내가 어떻게 했는지 맞춰 보거라, 사제야."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레고르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스스로가 바보같아서 계속 웃었다."

"그런 간단한 사실도 눈치채지 못하고, 이제부터 나한테도 아버지가 생길 거라고 설레하며 잠들었던 내가 너무 병신같아서 웃었단 말이다."

"그 개같은 창녀한테 버려지기 전에, 내가 먼저 버렸어야 했는데 말이지."

툭, 아이의 배를 지지던 담배를 내버리는 레고르.

"그 모습을 보던 남자가, 떠나기 전에 이렇게 말하고 갔지."

너도 괴물이구나.

괴물은 울 줄 모르거든.

"그래, 나도 너한테 같은 말을 해 주고 싶구나, 사제야."

레고르는 여전히 기묘한 웃음을 지으며, 허리를 숙여 아이의 코앞에 얼굴을 가져다댔다. 그리고, 턱을 붙잡고 말했다.

"너는 나와 같은 종(種)이다. 나는 알 수 있어."

"헛소리하지 마."

항변하듯 말하는 아이. 하지만, 레고르에게 압도당한 그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레고르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아까 네 얼굴에 붙은 물을 훑어 봤다만... 짠 맛이 안 나더구나. 네 얼굴에 가득한 그 물 중에서 눈물은 단 한 방울도 없던 거지."

"그게 증거다. 봐라. 그렇게 친하다던 사제가 죽어서 애통하다면서도, 이렇게 눈물 한 방울 못 흘리고 있잖아?"

"뭐?"

큰 충격이었다. 아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레고르는 그런 아이를 내버려두고 다시 의자로 돌아가, 털썩 앉았다.

"왜 도린이 죽었나, 같은 이유지."

"그것이 인간의 것인 한, 인간의 의지에 선의는 없다."

"선의는 최고로 잘 포장된 악의일 뿐이야. 용도가 끝나면, 선의도 끝난다. 이용가치가 없으면, 인간은 인간을 아주 손쉽게 버린다."

"허, 헛소리하지 마! 그게 무슨 상관인데?"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을 내려찍는 아이. 레고르는 그러나 술을 홀짝이며 계속 말을 주절댈 뿐이었다.

"네 정신상태로 봐서 말이야, 너는 아마 단장도 신처럼 섬기고 있겠지? 혹시 한 번이라도, 그 사람한테 버려지거나 짓밟히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있나?"

"없어!"

"자랑이군. 그래, 자랑이야. 단장도 마찬가지다. 단장이 왜 우리에게 잘 대해주었을까, 이용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선의를 가장하고 있는 거지."

"닥쳐! 왜, 왜 그렇게, 모질게, 그러는 거야."

"모질다니, 나는 그냥 거짓말을 안 할 뿐이다. 그들과 다르게 말이지. 단장이 왜 그렇게 열심히 에페 바체를 긁어모으는 걸까, 그건 말이다. 후계가 불안하기 때문이다."

눈을 동그랗게 뜨는 아이. 레고르는 당연한 사실을 말한다는 듯 담담하게 얘기를 늘어놓았다.

"단장의 양친은 전부 전장에서 죽었다. 아주 오래전 일이지. 이미 단장 가문의 구성원은, 단장 본인과 병약해서 집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는 어린 여동생 그렇게 둘 밖에 안 남았어. 그 병약한 여동생이 용병질을 할 수 있을리가 없으니, 단장이 죽으면 삼백 년을 이어온 레이븐사이드의 역사도 막을 내리게 되겠지."

"그럼 만일을 대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결혼을 시켜야겠지? 여동생과 결혼해서 본가를 지키고 아이를 낳아준다면, 만일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안심일 거야. 심심하면 픽픽 쓰러지는 병약한 여동생과 결혼할 사람.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 성도 갈아서 우르드를 써야 할 거고, 거의 데릴사위가 될 테니, 아마 배경이 있는 집안에선 거부하겠지. 그러니 가문에 종속될 수 있도록 근본이 없을수록 좋겠고, 건강하고, 적당히 칼도 좀 쓸 줄 알고, 레이븐사이드에 충성심도 있고, 안면도 좀 터 둬야 될 거고... 용병질도 배워서 단장직을 물려받았을 때 적당히 운영을 할 수 있는. 그런 놈이어야 좋겠지. 봐, 딱 에페 바체로 주워온 남자아이잖아."

"자, 여기 계약서가 있다. 지금까지 단장이 썼던 에페 바체 계약서야. 무려 11명이나 에페 바체로 삼으려고 했더구나 지금 남은 건 셋... 아니, 둘밖에 안 남았지만."

피식 웃으며, 서랍에서 무슨 종이뭉치를 꺼내 보여주는 레고르. 자신이 썼던 것과 같은, 고급스러운 용지로 이뤄진 계약서 뭉치다. 그 말대로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름들이 잔뜩 적혀 있었다.

"이, 이 사람들은..."

"다 죽었다. 용병이라는게 원래 그렇지. 폐사율이 좀 높아. 그러니까 말이다... 단장은 종마를 찾고 있는 거야. 씨를 이어줄 순진하고 착하고 건강한 종마 말이다. 어때? 이제는 네가 어떻게 버려지게 될지 좀 상상이 가나?"

치이익, 새 담배에 불을 붙이는 레고르. 자욱한 연기 속에서 레고르의 눈만이 형형하게 빛난다.

"죽음을 앞둔 위기의 날에 단장은 너를 헌신짝처럼 내버릴 거다. 만약 네가 전장을 헤매다 뒈지면, 하루 정도 질질 짠 다음, 이런, 또 죽어버렸는걸, 새 종마를 찾아보자. 이러고 순진한 얼굴로 또 다른 얼빠진 고아한테 접근하겠지. 당장, 어디 보자... 에벨린? 이 에벨린이라는 애가 그런 꼴이 되었단다. 그 또 다른 얼빠진 고아는 여기 있구나."

"닥쳐! 한, 한마디만 더 하면 죽, 죽, 죽여버릴거야!"

"그래서 도린은 죽어줘야 됐던 거다. 그 놈은 말이지, 멍청하고 무능하고 병신같지만 말이야, 병신같기 때문에 가지는 재능도 있어. 너나 나는 가질 수가 없는 재능이지. 친구를 만드는 재능... 누군가에게 미움받지 않는 재능 말이야. 어떤 놈들은 그런 걸 카리스마나 리더십이라고 착각하기도 해. 그래서 말이야, 만약 여동생의 남편을 고른다면, 남편감으로 제일 좋은 건 그 놈이었다. 두 명이 선을 보게 하려는 주선도 있는 것 같던데. 그건 곤란하지. 다음 단장은 내가 되어야 되는데 말이야."

"난 효율을 너무 중시해서 말이야. 단장 대리직을 수행할 때, 그 효율을 위해 몇 명 정도 희생시킨 적이 있어서, 안팎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그닥 좋지 않거든. 공과 사를 구분 못하는 병신들 뿐이라서 말이야. 그런데 도린이 도린 우르드가 되기라도 해 봐. 도린 본인은 그런 생각이 없더라도, 그런 공사도 구분 못하는 머저리들이 도린을 무기로 날 찌를 게 뻔하지 않나. 첫째 저렇게 놔둘 겁니까, 만약 단장님이 사라지면 저 놈이 둘째와 여동생분을 놔둘 것 같습니까. 이렇게 속삭이기라도 하면 어쩌나. 버려지지 않으려면 나로서는 별 도리가 없지. 도린도 참 안타깝게 됐어."

"닥쳐! 왜, 왜 남이 죽인 것처럼 그러는 거야! 정말, 정말로 그게 다야? 사형이 네 자리를 위협할 수도 있다, 그게, 그게 이유의 다냐고!"

"네가 오늘 아침에 한 입만 먹고 버린 정어리도 너에게 같은 질문을 할 것 같구나. 고작 그것 때문에 나를 죽였느냐고 말이야. 약자의 질문이란 항상 그런 법이다."

"결국, 결국, 뭐야. 너는 단장님이 사형을 죽인 거라고 말하기라도 하려는 거야? 너잖아! 네가 죽였잖아!"

절규. 그러나, 그 절규를 들은 레고르는 지금까지 중 가장 크게 웃기 시작했다. 한참이나 그렇게 메마른 웃음을 토해내더니, 씹어뱉듯 말한다.

"참 재미있는 농담을 할 줄 아는구나. 도린 캄벨은 임무 수행 중, 명예롭게 전사한 거 아닌가?"

비꼬면서 미소를 짓는다. 그 말아올라간 입술은, 문둥병으로 비틀려 올라간 입꼬리보다도 더 흉측해보였다. 그 순간, 이 자의 얼굴에 문둥이의 가면이 겹쳐 보인다. 그리고, 아이는 깨달았다.

처음 이 자와 만났을 때, 이 자는 가면을 쓴 채로, 가명을 밝히곤 축제에서 도린을 죽이고 사라지려 했다. 만일 자신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증거가 남아 있었을까? 애초에, 정말로 유흥을 위해서 우연히 '신분을 밝히지 않아도 되는 가면 축제'에 참가했던 것이었을까?

이 자의 무기는 대태도. 주적인 카나기의 것이다. 수천 명의 앞에서, 일부러 아무도 쓰지 않는 가면을 쓰고, 황소를 굳이 대태도로 죽이면서 그것을 보여주었다. 대태도를 소지한 가면의 남자에게 도린이 죽었다고 하면, 수사하는 자들은 아마도.

아이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이의 칼이 가로막았던 숨겨진 칼날은 시험 따위가 아니라 진심의 살의였던 것이다.

도린이 죽는 쪽이 자신에게 이롭다. 그 판단을 마친 이후로, 이 자는 항상 그런 살의를 숨겨 품고 도린을 대하고 있었다. 오늘 역시 마찬가지였다. 객관적으로, 이것이 레고르의 차도살인임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는 단 하나도 남지 않았다. 자신이 귀조 밑에 깔려 도와달라고 외쳤을 때, 이 자는 그 계산을 끝마치고 담배를 물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아이가 레고르의 고살을 주장한들, 어른들은 친형 같은 사형을 잃은 아이가, 용병이라는 일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해 부리는 어리광 정도로 생각하겠지. 그리고 이해한 척 하면서 머리를 쓰다듬고 명복을 빌고 끝낼 것이다.

자신에게 이 긴 장광설을 늘어놓고 모질게 영혼을 물어뜯는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이건 모독이었다. 너 따위가 진실을 다 알게 되든, 그렇지 않든, 네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단다, 사제야. 그런 의미의.

이 자는 악의를 토해내 아이의 폐를 검게 그슬려 자신과 동류로 만들려 하고 있었다. 흡혈귀가 동족을 늘리는 방식과 같이.

다시 한 번 짙은 연기가 쏟아진다. 마치, 인간의 악의가 형체를 얻어 새어나오는 것처럼. 아이는 숨을 헐떡이며, 어떻게든 연기를 들이마시지 않으려 애썼다. 이날의 기억 때문에 아이는 앞으로 평생 담배를 죽도록 싫어하게 될 것 같았다.

레고르는 아이가 무언가 깨닫고 있는 것을 보고, 다시 기묘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저 구하지 않았을 뿐이겠지. 그리고... 구하지 않은 건 너도 마찬가지다. 네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조금만 더 현명하게 행동했더라면 그 놈도 여기서 함께 나한테 따지고 있지 않았을까?"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 돌리는 건 나쁜 버릇이란다, 사제야."

어긋난 정론이었다. 틀리다고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분노보다도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과 무력함이 밀려와서, 반박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 말이 지금까지 레고르가 토해낸 어떤 말보다도 더 싸늘한 비수가 되어, 아이의 가슴을 꿰뚫는다.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숙이고 부들부들 떨던 아이는, 한 마디를 남겼다.

"너는, 언젠가, 내가 반드시 죽여버릴 거야."

"즐겁게 기다리고 있으마."

뒤돌아서 집무실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빗속을 향해서.

*

뿌리내린 듯 서 있다.

하늘이 무너질 듯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아이는 멍하니 서 있었다. 이대로 식물이 되어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초점이 없는 흐린 눈으로 구름을 바라보면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기껏 구한 몸을 다치겠구나. 이제 그만하고 돌아가거라.'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림이었다. 림은 뼈날개를 펼쳐 아이를 가려주듯 서 있었다. 그러나 비는 여전히 아이에게 쏟아졌다. 림에게 물리적 실체는 없었으므로. 아이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림... 정말로, 나도 괴물인 걸까?"

'무슨 소리냐.'

"죽도록, 슬픈 것 같은데... 정말로, 눈물이 안 나와. 내 안엔 마음 대신 사막이 있나봐. 아무리 파내도... 물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그래서? 그거 하나 때문에 이러고 있었단 말이냐?'

비아냥대는 어조. 나름대로 위로를 하려는 것이겠지만, 신이 인간의 정서에 공감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림의 위로는 결국 어긋난 결과를 만들고 말았다.

'그 놈 말이 맞다. 그 녀석은, 그 녀석 자신이 약해서 죽은 거야. 네게 죄는 없다.'

아이의 눈썹이 분노로 일그러진다. 아이는 바닥에 쓰러지듯 엎드려서, 돌을 주워 림에게 마구 집어던졌다.

"저리 가! 저리 가란 말이야!"

'왜 그러느냐, 어린 순례자야? 네 은인에게."

"너 같은 거 정말 싫어! 저리 가..."

돌을 던지다 말고, 바닥에 엎드려 얼굴을 숨기는 아이. 빗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림, 너는 왜 계속 내 옆에 있는 거야? 다른 데로 가버리면 되잖아. 난, 난 아무런 쓸모도 없는데..."

'기도를 들어준 거라고 해 두지.'

"난 그런 기도한 적 없는걸. 기도할 자격도, 없고."

그날 밤.

아이는 오랜만에 모래시계의 악몽을 꿨다.

누군가가 계속 사과하는 꿈.

매달린 채로 얼굴도 모르는 여자에게 안겨서, 아이는 그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은 사과를 듣고만 있었다.

두 번째 해는 그렇게 지나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