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18화 (18/279)

5. 메이지 슬레이어 ( 1 )

세 번째 해.

아기 손가락처럼 하얗고 길게 꽃봉오리가 벌어진 꽃나무. 그 꽃나무 아래에 한 명의 사람이 서 있다. 손에는 오래 사용했는지 손잡이가 닳아있는 물뿌리개가 들린 채였다.

꽃나무의 뿌리 근처의 땅이 검고 축축해지도록 물을 뿌리던 그 사람은, 잠시 허리를 곧게 펴 나무와 자신의 키를 비교해보았다. 원래는 자신이 훨씬 더 컸는데, 갑자기 무럭무럭 자라서 이제 나무가 더 크게 되어버렸다.

"사형, 이거 회양목이 아니었나봐. 분명히 관목이라고 했는데... 잠깐 눈 뗀 사이, 이렇게 커버렸잖아."

쓴웃음을 짓는다. 업자에게 속았던 건가, 아니면 어떤 나무이든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건가. 처음 이 나무를 심을 때에도 그다지 확신이 없는 눈치이긴 했었다. 두 팔을 벌려 잠시 나무둥치를 끌어안고 뺨을 댄다. 그런 그의 귀에, 귀가 찢어지도록 큰 여자의 외침이 들렸다.

"팍팍 힘좀 써봐! 사내가 밥 세끼 먹고 그것도 못하나!"

휙, 고개를 돌려 바라본다. 둔영으로 들어서는 입구에서 한 대의 마차가 진창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간밤 내리고 지나간 소나기 때문에, 마차 위에서는 보이지 않는 진창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 옆에선 외팔의 사내가 한 팔로 어떻게든 마차 바퀴를 꺼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자, 셋 둘 하나 하고 동시에 들어올린다. 셋,"

"거들게요."

둘. 이라고 말하는 순간, 깊이 박혀 있던 바퀴가 뽑혀나오고, 마차를 끌던 말은 잽싸게 그 밖으로 마차를 끌어낸다. 외팔의 남자, 잰슨은 졸지에 헛힘을 써서 뒤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어이구, 이제 저런 꼬마보다도 힘이 딸리는 거냐? 이거 혹시 나한테도 지는 거 아니야?"

소매를 걷고 얼굴에는 진흙을 묻힌 채, 놀리듯 말하는 단발의 여자. 반 년 전부터 레이븐사이드와 보급품을 거래하고 있는 상인, 타니아였다. 그녀는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는 잰슨의 팔을 붙잡아 일으킨 다음 엉덩이를 팍 때렸다.

"야, 야, 작작 쳐!"

"흙 털어주는 거잖아, 임마."

그 동안 함께 수레를 빼내려 애쓰던 또 다른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아이 씨, 오늘은 계셨군요! 가, 감사합니다."

붉은 머리와 녹색 눈, 코 근처에 박힌 주근깨가 특징적인 얌전해보이는 여자였다. 타니아의 조수로 상행을 따라다니는 레나라는 여자였다. 마차가 다시 진창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뒤를 봐주던 사람, 아이는 눈이 동그래져서 고개를 돌리고 반문했다.

"어, 제 이름을 기억하고 계셨네요?"

"그그그그러네요? 그럼 아아아안되는 건가요? 기,기기밀이라던가... "

마차가 완전히 빠져나간 걸 확인하고 아이는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요즘엔, 이름보단 다른 걸로 불리는 일이 많아서... 이름 들어본 지가 참 오래되었거든요. 그래서 그냥 신기했어요. 마음껏 부르셔도 돼요."

"그그그럼, 아이 오빠라고 부르면 될까요?"

그러자 뒤에서 폭소가 터졌다. 타니아였다. 레나는 영문을 몰라서,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타니아를 돌아보았다.

"레나, 네가 몇 살이지?"

"열일곱...인데요..."

"쟤 열다섯이다. 그렇지?"

잰슨의 어깨를 치며 그렇게 물어보는 타니아. 잰슨은 잠시 아이와 얼굴을 마주치더니, 고개를 홱 돌리고 사라져버렸다. 레나는 깜짝 놀라서, 아이를 올려다보며 못 믿겠다는 듯 물었다.

"네? 열다섯? 그런데 벌써 그 휘장을 달고 계신 거에요? 저, 적어도 스,스무 살은 될 거라고..."

"맞아요. 누나가 저보다 나이가 더 많으니까, 누나라고 부를게요."

잘 부탁드립니다, 하고 고개를 꾸벅 숙이는 아이. 레나는 또 얼굴을 홍당무처럼 새빨갛게 물들이더니 간신히 고개를 숙이고 마차 뒤로 숨어버렸다.

아이의 어깨에 매달린 은색 견장, 거기에는 편대장과 같은 대우임을 드러내는 휘장이 붙어 있었다. 그 휘장에는, 특등 수색자임을 알리는 검은 매 그림이 그려져 있다.

특등 수색자, 그건 개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직위 중 하나였다. 고작 열다섯 살, 약관도 되지 않아 이 직위를 얻은 건 레이븐사이드 역사는 물론 기나센 역사를 통틀어 살펴봐도 아이가 유일했다.

도린의 죽음으로부터 일 년 후.

아이는 그렇게 성장해 있었다.

*

상인의 마차가 도착한 날.

그 날은 항상 우울하고 긴장되기만 한 둔영에 유일하게 활기가 찾아오는 날이었다. 앞다투어 개인적으로 부탁했던 물건을 찾아가고, 몇 명은 마차로부터 짐을 하역하는 걸 돕는다. 아이도 소매를 걷어붙이고, 식자재와 소모품 따위를 하역해 창고로 나르는 걸 돕고 있었다.

"제기랄, 이거 뭘 넣었길래 이렇게 무거워?"

불평하면서도 한 손과 어깨로 어떻게든 짐을 나르는 잰슨. 그 옆에서 항아리를 나르던 아이는 빨리 항아리를 내려놓고 잰슨에게 다가갔다.

"잰슨 아저씨, 그거 제가 날라도 돼요. 저 주세요."

"꺼져."

"네."

여러 번 있었던 일이라, 고개를 숙이고 바로 옆으로 피하는 아이. 칼슨의 죽음으로부터 어느새 삼 년이 흘렀는데도, 잰슨은 아직도 아이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목숨을 구함 받았어도.

카나기와 아지프의 전쟁은 일년 전부터 말도 안 될 정도로 격화되었다. 수 많은 피가 흘렀고, 정예가 모인 레이븐사이드 내에서도 사상자가 나왔다. 세 개의 요새가 점령되고 탈환되기를 반복했고, 지금은 아지프의 약우세로 대치가 이어지는 상황이었다.

그 사상자 중에 잰슨도 있었다. 2개월 전 있었던 마지막 요새 공방전에서 잰슨은 한쪽 팔을 잃었다.

"끄아아악!"

한낮의 눈부신 태양빛 때문에 잠시 시야를 잃어버린 사이, 두 발로 뛰어다니는 거대 도마뱀 형상의 괴물, 벨루스에게 한쪽 팔을 먹히고 말았던 것이다. 그 충격으로 말에서 굴러떨어지자, 벨루스는 잰슨의 몸통을 집어든 채 달아나기 시작했다.

카나기, 공생의 학파는, 괴물을 사냥할 뿐만 아니라 다루고 조련하는 법을 연구해 자신의 힘으로 삼는 학파였다. 이 벨루스라는 괴물을 타고 다니는 벨루스 라이더는, 카나기의 기동력을 담당하는 핵심 병종중 하나다. 그 벨루스에게 팔을 뜯어먹힌 순간 잰슨은 곧바로 죽음을 각오했다.

그런 잰슨을 구해낸 건 때마침 근처에서 그 광경을 목격하고 추적을 시작한 아이였다.

벨루스를 쫓아 본대에서 이탈해서, 라이더 몰래 인육을 포식하려던 벨루스를 무찌르고, 부상 상태인 잰슨을 데리고 무려 3일이나 적지를 헤맨 끝에 기적적으로 두 사람 모두 생환했다.

물이 모자라 자신의 오줌을 마시고, 썩은 나무둥치를 파내 하늘소 애벌레를 씹어 먹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힘든 빛 하나 없이 훌륭히 버텨내고 복귀했던 것이다. 레이븐사이드에서는 이미 두 사람의 약식 장례가 치러지고 있었다. 때문에 장례식 도중 당사자들이 나타난다는 웃지 못할 희극이 벌어지고 말았다.

"아이 수색자, 일류 수색자의 미덕은 뭐라고 했지?"

장례식 다음 날 레이븐사이드의 총원이 모인 자리에서, 란페이는 아이를 불러 그 사이에 세웠다. 엄한 란페이의 목소리. 잰슨이 벨루스에게 끌려가는 순간 란페이는 포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이는 그 명령을 무시하고 잰슨을 구하러 달려들었다. 결과가 좋았다 한들, 항명을 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아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했다.

"설사 가족이나 친지의 생명이 걸려 있더라도... 명령을 우선하는 것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래. 그리고 귀 수색자는 그걸 어겼지?"

"죄송합니다. 처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그럼, 그건 일류 이상이라는 뜻이겠지."

란페이는 빙그레 웃으며, 아이의 견장에 검은 매가 그려진 휘장을 채워주었다. 특등 수색자, 언제든 자신의 판단으로 수색을 개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직위였다.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잰슨은 달라지지 않았다. 자신이 아니라 칼슨의 원한이기 때문일까. 잰슨은 여전히 아이를 데면데면하게 대했다. 아이 역시 그걸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상자를 나르던 중, 갑자기 누군가가 아이를 멈춰세웠다.

"잠깐."

아이를 멈춰세우고 아이가 들고 있는 상자를 멋대로 개봉해버리더니, 그 속을 뒤적여서 붉은 갑을 꺼냈다. 고급스럽게 치장된 그 붉은 갑 안에는, 금박을 씌운 담배가 가득 들어 있었다.

"금이 썩어나는 살레니움이라 그런가. 연금술로 만들어낸 싸구려 금이겠지만, 이딴데도 금을 쓰는군."

치이익, 불을 붙이고 담배를 입에 가져가는 사람. 그 자는 레고르였다. 아이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말했다.

"사형, 다른 사람들이 일 하는거 안 보여요? 도와요."

"이런, 나도 최선을 다해서 돕고 있지 않느냐."

아이가 들고 있는 상자를 또 뒤적거려 개인적인 보급품을 꺼내는 레고르. 아이는 상자를 쾅 내려놓고 뒤돌아섰다. 그 때였다.

"어! 임마! 너 요즘 왜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어!"

입에 담배를 물고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는 레고르에게 달려들어, 머리를 마구 헝클어놓는 사람. 타니아였다. 레고르는 그러나 잠시 후 짜증난다는 듯 그 손을 쳐냈다.

"치워."

"나 참, 좀 출세했다고 이제 모르는 척 하는 거야? 옛날엔 맨날 내 치맛자락 잡고 누님 누님 하고 쫓아다녀놓고?"

"기억의 왜곡 및 관계망상. 심각한 치매 증세가 있는 것 같군. 젊은 나이에 안 됐어."

입에서 금빛 연기를 토하고는 뒤돌아서는 레고르. 이 담배는 사소필렌의 성지 살레니움에서 만든 특주품이었다. 타니아는 사소필렌과 연을 터서 상점을 열고, 그 쪽으로부터 보급품을 유통하는 상인이다. 이 담배는 레고르가 타니아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구해달라고 한 물건이었다.

"야, 야, 어딜 도망가?"

무시하고 빨리 발걸음을 옮기는 레고르. 더 있으면 성가셔지니 피해야겠다는 의지가 말 없어도 팍팍 느껴져왔다. 타니아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소리질렀다.

"임마! 대금은 주고 가야지!"

"이미 넣어뒀다."

홱, 고개를 돌려 아이가 들고 있던 상자를 보는 타니아. 그 안에는 루덴 동전이 가득 든 자루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걸 집어들어 동전을 세면서, 타니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옛날에는 귀여웠는데, 왜 저렇게 되어버린 거냐구. 전장이 잘못한 건지, 뭔지..."

액수가 맞고 팁으로 10루덴까지 더 들어있다는 걸 확인하는 타니아. 주머니를 주섬주섬 집어넣으면서, 아이를 돌아보았다.

"얘, 너는 저렇게 되면 안 된단...다?"

그리고, 기세에 압도당해 말 끝을 흐렸다. 아이는 평소의 맹한 표정과는 대비되는, 살기가 넘치는 눈으로 레고르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

연회장.

보급이 도착한 날에는, 기한이 다 되어가는 식재료를 그나마 신선한 상태에서 처리하기 위해 그럴듯한 요리가 나왔다. 오늘 배급된 것은 T본 스테이크. 소의 척추뼈를 T 형태로 잘라, 안심과 등심을 하나의 뼈에 붙도록 정육해 굽는 호사스러운 요리다.

"왜 이렇게 질기냐."

칼이 잘 들어가지 않자 뼈를 손으로 붙잡고 이빨로 고기를 뜯는 타니아. 오래 전, 막 에페 바체로 주워졌던 아이가 하던 것과 비슷한 행동이었다. 아이는 그 때가 생각나서 풋 웃고는 타니아의 고기를 접시에 올려놓고 대신 썰어주었다.

"이거, 밀어 썰게 되어 있는 칼이라서요. 이렇게 썰어야 잘 썰려요."

"어이구, 야물딱져라, 뭘 먹고 그렇게 야물딱지니?"

아이의 볼을 붙잡고 마구 문지르는 타니아. 누군가가 그 손을 붙잡아 제지했다. 잰슨이었다. 그는 자기 앞에 나온 고기에 손도 대지 않고 식탁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럼 이제 슬슬 물건 좀 꺼내 주지?"

그 말에 따라 의자 밑에 깔아두고 있던 꾸러미를 꺼내는 타니아. 허름한 꾸러미 안에서, 눈이 아플 정도로 샛노란 황금빛의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의수였다. 센디엘의 다른 지역과 비교했을 때 몇 세대 정도의 격차로 기술이 발전해 있는 이들, 사소필렌. 또 다른 이름은, 혁신의 학파.

이번에 타니아는 계약 갱신 문제로 그 연금술사들의 가장 번성한 도시인 살레니움에 들렀다. 그 김에 잰슨의 잘려나간 팔을 대체할 의수를 구해 온 것이다.

"아니 미친, 이거 전부 황금이야?"

"자다가 도둑 들어오면 팔부터 뜯겨나가겠다, 그렇지?"

마법으로 제작된 황금, 연성금은 금광에서 캐낸 금보다는 교환가치가 훨씬 떨어졌다. 하지만 실용적인 가치는 그것에 진배없었다. 그리고 살레니움은 그런 연성금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술도 조건도 가장 발달한 곳이다. 그래서 살레니움에서 만들어진 물건은 금이 소재로 활용된 것이 정말 많았다.

"이렇게 끼는 건가?"

나이프로 손을 따 엷게 피를 만들어내고, 그 피를 의수의 결합부에 바른다. 그리고 의수를 절단면에 가져다대자 마치 접착제를 바른 것처럼 팔이 달라붙었다. 눈 깜빡할 사이였다.

"허 참, 이게 가능해?"

말로만 듣던 사소필렌의 기술을 목도하고 입이 떡 벌어지는 잰슨. 새로 생긴 팔의 손가락을 움직여본다. 아주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시험으로, 나이프를 집어 T본 스테이크를 한 조각 잘라 포크로 찍는다. 이 복잡하고 세밀한 행동 역시 수행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 잘라낸 고기를 우물우물 먹으며, 잰슨은 감사를 표했다.

"고맙다. 네 인맥이 없었으면 이런 건 절대 못 구했을 거야."

"아이, 뭐. 다 돈 받고 하는 일인데 감사는. 고마우면 고마운 만큼 돈이나 더 내놔."

솔직한 감사가 익숙하지 않아서, 코를 쓰다듬어 쑥쓰러움을 감추는 타니아. 드물게 좋은 분위기였다.

"이런저런 사용상의 주의점을 들었는데, 기능은 몰라도 감각을 재현하는 건 무리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손상되었을 수 있으니 월말마다 뽑아서 점검하래. 그리고 가끔 있지도 않은 팔이 심하게 가려운 증상이 있을 수 있는데 그건 어쩔 수 없으니까 참아야 된대고."

"확실히 감각은 없네. 없는 쪽이 더 나을 수도 있고, 뭐."

"그치. 아, 그럼 그동안 진짜 궁금한 거 있었는데, 질문해도 되냐?"

"얼마든지. 대답할 수 있는 거면 대답해줄게."

레이븐사이드의 운영에 관련된 얘기일 줄 알고 진지하게 대답하는 잰슨. 새로 얻은 의수로는, 주먹을 쥐고 손을 펼치는 일을 반복하면서 기능을 시험하고 있었다. 물컵을 집어들어 입으로 가져간다.

"너 그동안 팔 없는데 딸은 어떻게 쳤냐?"

"풋. 쿨럭, 쿨럭."

예상을 한참 벗어난 질문 때문에 사레가 들려버린 잰슨. 옆에서 조용히 감자 샐러드를 먹고 있던 레나의 얼굴도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타니아는 정말로 궁금하기 그지없다는 듯 순수한 얼굴로 질문을 계속했다.

"왼손으로 쳤냐? 근데 왼손으로 치면 자지 휘잖아. 너 그런거 존나 신경 쓰니까 안 쳤을 거고. 아 설마 바닥딸로 쳤냐? 그거 자주하면 불알 망가진다."

"미친년아, 애들도 다 듣는데 말 좀 가려서 해! 남사스럽게 뭐라는 거야!"

빽 소리를 지르는 잰슨. 하지만 타니아는 짓궂은 표정으로 계속 말을 이어갈 뿐이었다.

"사내새끼가 뭐 이런걸로 부끄러워하고 그러냐. 총각딱지 못 뗀 티 내는것도 아니고."

그리고는 오른팔로 마구 뭔가 붙잡고 흔드는 흉내를 냈다.

"그거 있잖아, 그 의수. 의수로 딸치면 감각이 없어서 남이 대신 쳐주는 느낌이 난다는 소문이 있어. 한번 해보고 후기좀 알려줘봐. 진짜 그런 느낌이면 나도 팔 자르고 의수로 대체할까 하니까."

"미친년, 그런 소문은 대체 어디 가면 들을 수 있는데? 전국 외팔이 협회라도 다녀왔냐?"

"이게 걱정해주니까 자꾸 미친년이래. 죽을래?"

"걱정 두 번 받았다간 쪽팔려서 자살하겠다! 그러니까 네가 시집을 못 가는 거야!"

"뭐 임마?"

다 먹은 T본 스테이크의 고기뼈가 부메랑처럼 날아서 잰슨의 코를 가격했다. 방금 전까지 흐르던 훈훈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살벌하게 싸우는 두 사람. 혹시라도 말려들지 않도록 아이는 레나의 의자를 빼서 옆으로 치웠다.

레나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앉아 있었다. 연회장 전체에 쩌렁쩌렁 비속어와 음어를 섞어가며 싸우고 있자니, 누군가가 나타나 두 사람을 말렸다.

"그만, 그만 좀 해라. 애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느냐? 어째 너희들은 나이를 거꾸로 먹는 것 같구나."

블레어였다. 목을 붙잡힌 채로 버둥거리는 타니아는, 블레어에게 얼굴을 홱 돌리고 말한다.

"아빠! 이 녀석이 당신의 딸을 모욕했어!"

"모욕은 개뿔. 그보다 더 정확한 말 찾기도 힘든 정설이구만. 언제 철들려고 그러니, 대체."

타니아의 목을 붙잡고 쾅 자리에 주저앉히는 블레어. 타니아의 정확한 이름은 타니아 아델라이비치. 그녀는 블레어의 딸이었다. 어려서 일찍 어머니를 병으로 잃고, 남자들만 가득한 환경에서 자란 그녀는 웬만한 남자 용병들보다도 입이 걸걸했다.

검에는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블레어가 극구 반대했기 때문에 상인이 되었지만, 그 자의식으로는 사실 레이븐사이드의 일원이나 다름없었다.

"자네도 앉아. 자꾸 그러면 얘 자네한테 시집보내버린다."

"원, 끔찍한 말씀을."

"끔찍한 말 하지 마! 누가 이런, 이런, 외팔이한테..."

그러다 갑자기 감정이 북받쳤는지 눈물을 보이는 타니아. 갑자기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한다. 잰슨은 어쩔 줄 모르다가, 자기 가슴을 두들기는 타니아의 팔을 의수로 붙잡았다.

"병신아, 잘난 척은 다 하고 다니더니 어디서 팔도 날려먹고... 그걸로 미친 노처녀 때려서 좋냐! 그걸로 평생 딸딸이나 쳐라!"

"그만, 그만해. 내가 잘못했다. 미안해."

나름대로는 팔을 잃은 잰슨을 배려해서 유쾌하게 농담으로 넘기려고 했던 것 같았다. 그 내용이 너무 막나갔을 뿐. 두 사람은 동갑내기 소꿉친구 사이였다.

"애들 앞에서 울다니 부끄럽지도 않나, 참."

블레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의자를 끌어당겨 아이 옆에 앉았다. 두 사람과 다르게 아이는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그 머리를 자연스럽게 쓰다듬는 블레어.

"딱 얘만큼만 자랐으면 좋았을 텐데."

블레어가 유독 어린 시절의 레고르나 아이처럼 여성적인 외모의 아이들을 예뻐했던 이유에는, 이런 이유도 있었다. 자기도 좀 얌전한 딸을 가지고 싶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싸움을 구경하려고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왁자하게 웃으며 한 마디씩 거들었다.

"편대장, 걔한테 걔'만큼만'이라고 하는 건 너무 양심 없는 거 아닙니까?"

"최연소 특등 휘장인데."

"나도 우리 집 꼬맹이가 쟤처럼만 됐으면 소원이 없겠네요. 아, 나는 언제 은퇴하나."

"그렇게 자꾸 도박장에 다 꼴고 다녀선 평생 은퇴 못 할걸?"

칭찬이 낯간지러워진 아이는 당황스러워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그, 음, 아무튼 아니에요."

"됐다, 됐어. 지나치게 겸손한 것도 안 좋단다. 아 맞아, 마침 타니아도 여기 있는 김에 그거 꺼내보거라. 여기 있어봤자 썩을 뿐일 테니 이 기회에 팔아넘기는게 낫겠지."

사실 정말로 거래가 목적이라기보다는, 손자에게 자랑거리를 가져오라고 시키는 할아버지 같은 느낌이다.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그거요?"

"그 왜 저번에 같이 피 빼고 박제한 거 있잖아."

"아!"

그 말을 듣고, 사람의 포위에서 살짝 발을 빼서 방에 다녀오는 아이. 곧, 나무판에 박힌 커다란 머리박제를 들고 왔다. 벨루스의 머리 박제였다. 들고 오자 사방에서 탄성이 터졌다.

"와, 말도 안 돼. 이게 뭐야?"

언제 울었냐는 듯 눈을 빛내며 박제를 살피는 타니아. 특히 절단면과 뒷면을 유심히 보고 있다. 여러 번 손댄 흔적 없이 매우 깔끔했다.

"솜씨나 소재나 특급 박제인데? 어떻게 구한 거야?"

"저, 음, 그러니까..."

우물쭈물 말하는 아이 대신 블레어가 호탕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이 녀석이 구해온 거다. 카나기 놈들이 벨루스를 민가에 풀어서 약탈을 시키는 건 알고 있지? 그 때 잡혀먹힐 뻔한 민간인을 구출하고 그 벨루스의 목을 잘라서 가져왔다."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연회장 전체에 퍼져나갔다. 여기에 관심을 갖지 않고 그저 식사를 하던, 다른 지역의 용병단들도 그 말에 아이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를 보며 수군수군 얘기를 나눈다. 저 계집애같은 놈이 요즘 맨날 소문에 나오는 그 녀석이야? 기나센은 대체 유망주를 어떻게 기르길래 매 년 저런게 나오지. 등등. 얼핏 듣기에도 대부분이 찬사와 칭찬이었다.

"브,블레어 할아버지, 그렇게 크게 말하면, 부끄러워요..."

"거기다 겸손하기까지 하지! 누구랑 다르게 말이야!'

느릿하게 홍차를 홀짝이고 있는 레고르가 들으라는 듯 말하는 블레어. 레고르는 흘깃 이 쪽을 보더니,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다시 페이지를 넘길 뿐이었다. 손에는 살레니움에서 구한 가죽 장정의 책이 들려 있었다.

"그래서, 이거 팔 거야? 음, 꼭 팔아 줬으면 좋겠는데. 이번에 살레니움에 가서 여기저기 영업 다니면서, 인테리어에 관심 많은 부자 마술사 여러 명 봤단 말이지. 벨루스 머리 박제... 그것도 이렇게 죽이자마자 피 빼서 박제한 최고급품이면, 진짜 다들 돈 싸들고 사겠다고 달려들걸? 와,이거 봐. 눈동자도 샛노랗게 살아 있어."

벨루스의 흉측한 얼굴을 사랑스럽다는 듯 쓰다듬는 타니아. 그녀에겐 지금 이게 같은 무게의 황금으로 보였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드릴게요."

"좋았으, 꽁으로 돌아가나 했는데 대박 하나 건졌네! 그런데, 이렇게 비싼 거 대금을 지금 당장은 줄 수가 없는데... 팔리면 그 값을 나누는 걸로 해도 괜찮겠니? 계약서와 증명서는 무조건 보여줄 테니까."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타니아. 그 소리는 즉 자신을 믿고 일단 공짜로 물건을 넘기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블레어는 엄한 목소리로 말한다.

"용병이 아니라 상인이 되었다 해도, 이(利)를 위해 의(義)를 저버리진 말거라. 반드시 매익의 7할은 이 녀석에게 보장해라."

"당연하지. 당신 딸을 뭘로 보는 거야?"

"아니요, 그냥 드릴게요."

아니라는 말을 듣고 상심한 빛을 하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벨루스 박제에서 손을 떼는 타니아.

"그래, 어쩔 수 없지. 다음에 올 때 대출을 받아서라도 현금을 챙겨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뭐라고 했니?"

"그냥 드릴게요. 어차피, 저 돈 있어도 별로 쓸 데도 없고."

주변에서 놀라움의 탄성이 터져나왔다. 타니아는 눈을 껌뻑거렸다.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아서였다.

"꼬맹아. 헛소리 하지 말고 받아. 이런 건 가까운 사이일수록 확실하게 해야 하는 거야. 너 그따위로 살면 나이 먹고 후회한다."

"그래, 내가 말하기도 뭐하지만, 이번 한 번 거래하고 끝날 것도 아닌데 이런 걸 덥석 받기는 나도 부담스러운데."

조용히 스테이크를 썰던 잰슨이 툭 말을 던졌다. 타니아도 동조했다. 하지만, 아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음, 그런 이유만으로 그러는 건 아니에요. 단장님이 얘기하는 거 들었는데, 타니아 누나한테 참 고맙다고 그랬어요. 사소필렌 쪽에서 여기까지 보급품 거래하러 오는 게 힘들고 돈도 별로 안 남는 일인데, 의리 때문에 뭐더라, 기회비용? 그거 만들면서 오고 있다고. 그러면서 내색도 안해서 참 미안하다고. 그러니까, 저도 고마워서 보답을 하고 싶어요."

일년 전의 아이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길고 정연한 말이었다. 타니아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박제를 끌어안았다.

"그런 이유면 받아 줄 수 있지! 정말 뭘 먹고 이렇게 야물딱지니?"

아이의 볼을 마구 꼬집는 타니아. 겉으로 보았을 때는, 키가 180에 가까워져 어른 티가 나는 아이였지만, 나이가 많지 않기 때문에 볼살은 아직도 말랑말랑했다.

"누구 가르침인지, 실력 뿐만 아니라 마음도 잘 성장했구나."

"그런가요?"

"으이구, 그럴땐 그런가요가 아니라 블레어 할아버지 덕분이에요 이래야 네 뒤에서 나잇값 못하고 씰룩대는 저 팔불출이 더 좋아하지!"

"이 놈!"

호통, 그리고 웃음이 터졌다. 아이도 생긋 웃었다. 일 년 사이, 가장 달라진 건 웃음이었다. 어느새 아이는 진심으로 활짝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 미소를 몽롱한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자기 앞에 놓인 스테이크에는 손도 대지 않고 빨간 얼굴로 아이를 바라보고 있는 레나였다. 그걸 발견한 타니아는, 아이의 볼을 주물대다 말고 짓궂게 말했다.

"이대로 기나센에 돌아가면 돌아가는 즉시 청혼이 몇 개나 올까, 열 개? 스무 개?"

"청, 청혼이요?"

"청혼 아니라도 사귀자는 말은 정말 무수하게 올걸. 인기가 완전 대폭발해버릴거야. 그러면 밤새서 편지 쓴다고 열 통 넘게 끄적대다 다 찢어버린 어떤 아가씨는 아, 역시 그 때 용기내서 보내볼 걸 하고 베갯잇을 눈물로..."

"언니!"

이번엔 레나가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연회장 가득 웃음이 터진다. 그 웃음을 끝낸 건, 갑자기 들려온 성난 문 닫는 소리였다. 레고르였다. 마시다 만 홍차를 놔두고 연회장을 나서 버린 것이었다.

"시끄러워서 화났나?"

툴툴대는 타니아. 아이는 딱딱한 눈길로 그가 사라져 간 문을 바라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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