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19화 (19/279)

5. 메이지 슬레이어 ( 2 )

"이 녀석, 이거 뜯어먹지 말라고 했지."

갸르릉대며, 여린 풀잎을 뜯어먹는 고양이를 떼어내는 아이. 잡종인지, 얼룩덜룩 여러 색이 섞인 고양이였다. 손으로 밀치자 고양이는 달아나기는커녕 오히려 아이의 손을 타고 품으로 달려들었다.

"알았어, 알았어, 대신 이거 줄 테니까. 먹지 마."

군량으로 쓰고 기한이 거의 다 된 페미컨을 조금 떼어서 건네주는 아이. 고양이는 순식간에 그걸 받아서 핥아먹더니 또 달라고 애교를 떨었다. 이거, 많이 주면 안 된다는데... 고민하면서도, 결국 또 한 꼬집 떼어서 건네주고 말았다.

그 고양이는 이제는 더 달라고 하지 않고 받은 걸 얌전히 핥아 먹는다. 아이는 집게손가락으로 그런 고양이의 등을 가볍게 긁어주었다.

"아, 아이 씨. 여기 있었군요!"

그러고 있는 아이를 누군가가 불렀다. 레나였다. 여기저기 헤매고 다닌 듯 숨이 거칠다.

"여기 가 보면 있을 거라고 사람들이 알려줬는데, 진짜였네요."

"네. 여기에 있는 걸 좋아해요."

흐드러지게 핀 흰 꽃을 보며 그렇게 대답하는 아이. 레나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말을 고르다, 꽃으로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목련이다. 신기하네요. 지금 피는 계절이 아닌데, 참 잘 돌보셨나 보네요?"

"목련?"

"아,아아아아닌 건가요? 꽃이, 딱 목련꽃처럼, 그렇게 생겼는데."

"그렇구나. 이거 이름은 목련이었구나."

정말로 몰랐다는 기색이었다. 무심코 레나는 쿡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뭐야, 그럼 무슨 나무인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열심히 돌본 거였어요?"

"음, 이건 사형이랑 같이 심은 나무라서... 이름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요. 그냥, 잘 자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사형이라면, 그, 레고르 씨 말하는 건가요?"

참 의외의 일면도 있다고 생각하며 물어보는 레나. 그런데,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다른 사형이에요."

"다른 사형이 있었구나... 지금 어디에 계세요?"

"죽었어요. 제가 바보라서."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는 레나. 명백하게 실례했다. 혹시나 아이가 기분이 엄청 나빠졌을까 봐, 안절부절 못하면서 기색을 살핀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하는 아이는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잠시 침묵이 계속되자, 아이는 조용히 페미컨을 핥아 먹고 있는 고양이를 안아 들어 레나에게 보여주었다.

"이 녀석, 귀엽죠?"

"네? 아 네,네네네!"

"여기서 풀을 뜯어먹는 척하면 내가 먹을 걸 준다는 걸 아니까, 이 시간만 되면 여기 와서 풀을 뜯는 척하면서 협박을 해요. 그래서 떼어내고 보면, 사실은 잎 하나도 안 먹었어요. 그래서 귀여워요."

"그, 그게 귀여운 건가요?"

"귀엽죠. 제가 해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는 거니까, 그런 건 좋아해요."

"아,아이 씨는, 동물을 참 좋아하는군요."

아까부터 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읽은 로맨스 소설이 몇십 권이 넘어가고, 그중 쓸만한 대사라며 메모해둔 것도 한 권 분량은 될 텐데, 그런데 꺼낸 말이 '동물을 참 좋아하는군요'라니. 레나는 스스로의 말주변 없음을 저주했다. 하지만 아이는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의외로 괜찮은 반응을 보여주었다.

"네. 좋아해요. 동물들은 아무 말도 안 하니까..."

"좋,좋,좋아."

자기에게 한 말이 아닌 걸 아는데도, 좋아한다는 말을 듣자 또 얼굴이 새빨개지는 레나. 아이는 고양이를 몇 번 더 쓰다듬더니, 이제 품에서 벗어나려고 바둥거리는 고양이를 풀어주었다. 이번에는 아이가 먼저 레나에게 질문을 한다.

"여자 둘이서 이렇게 먼 거리를 왔다 갔다 하면서 상행하는 거, 어렵지 않아요?"

"아니요. 언니는 이미 이골이 나서, 어느 길로 가야 편하고 안전한지 다 알고 있구요. 사소필렌과 연이 있는 상단 소속이니까, 산적들도 알아서 피해가고, 믿을 만한 숙소도 쉽게 구해지고. 그렇게 위험하진 않아요. 그리고 저도 이렇게 보여도 사소필렌의 1위계 마술사라구요? 쓸 수 있는 마술은 거의 없지만..."

"거짓말. 아까 마차를 밀 때 봤는데, 마차에 화살 자국이 있었는데요. 산적한테 한 번... 아니, 최소 두 번 습격당했죠?"

"어,어어어어, 어떻게 그걸 안 거에요? 아니, 거,거짓말 아니에요."

"화살촉 종류가 반월형이랑 마름모꼴 두 개가 섞여 있었고, 오래 된 거랑 새로 난 게 있었으니까... 아마도 산길에서 화살을 쏟아붓는 산적질을 당한 거겠죠. 말도 하나 죽었을 거에요. 나머지는 다 갈색 짐말인데, 한 마리만 노새였으니까. 오기 전에 마방에 들러서 급하게 노새를 하나 산 거죠? 먼저 화살을 막 쏜다음, 죽으면 가서 뺏고, 안 죽으면 얼굴을 들키기 전에 도망치고. 그런 종류의 산적이 있다고 하더라구요."

입을 떡 벌리는 레나. 그 말대로였다. 정식으로 소속이 있다 한들, 여자 둘이서 무탈하게 다닐 수 있을 만큼 북서 자치령은 만만한 땅이 아니었다.

"맨날 무기만 만지고 있으면, 알기 싫어도 알게 되는 게 있답니다."

고개를 푹 숙이는 레나.

"그래도 그런 거짓말은 좋아해요."

그리고 다음 말에 고개를 들었다.

"많이 힘들었을 텐데, 내색도 안 했잖아요. 그렇게 위험했다고 말해서 걱정 받기 싫나보다. 그럼, 모르는 척 하고 아까 그 박제라도 줘야겠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 그렇구나..."

"아까 고맙다고 한 거, 그러니까 레나 누나한테도 한 말이에요. 고맙습니다."

생긋 웃으면서 고개를 숙이는 아이. 레나는 또 멍하니 그 미소를 바라보았다. 레나의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지금이다. 무조건 지금이다. 지금 말 안 꺼내면 답도 없겠다.

"저...저기... 동물 좋아하시면, 그그근처에, 웨웨스벤에, 서커스단이 왔다는데..."

눈을 질끈 감고 말을 내질렀다.

"고고고곰도 있고, 사사사자도 있다는데, 가,가가같이..."

"고고고곰? 곰이랑 다른 건가요?"

"고고고곰은, 고고고고고고곰인데..."

"고고고곰도 있고 고고고고고고곰도 있는 건가요? 다 다른 동물인가?"

정말로 무슨 말인지 몰라서 고개를 갸웃하는 아이. 이대로는 끝이 없을 것 같았다. 레나는 말을 잘 듣지 않는 자기 입을 다물고, 주머니에서 꾸깃꾸깃 접힌 티켓 두 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다음 주 수요일의 서커스 티켓이었다. 그 티켓을 받아들고, 쭉 펼쳐보며, 아이는 드디어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아."

"대,대답은..."

아이는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티켓을 돌려주었다.

"미안해요."

"아."

맥이 탁 풀려서 얼굴을 숙이는 레나. 이렇게, 별로 예쁘지도 않으면서 말도 제대로 못 하는데. 수락해줄 리가 없겠지. 이런 소설 주인공 같은 사람이. 예쁜 것도 이 사람이 더 예쁜걸. 갑자기 콧날이 시큰해졌다. 여기서 울기까지 하면 정말로 꼴불견이 될 것 같아서 힘껏 눈물을 참고 있는데, 아이가 조용히 말을 덧붙였다.

"누나가 싫은 게 아니라, 그 날은 안 돼요."

"네?"

"그 날은,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요."

"중요한...일인가요."

패앵! 코를 풀다 눈에 고인 눈물이 한 방울 떨어지는 레나. 아이는 검지로 그 눈물을 닦아주면서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 아주."

*

"무슨 일이냐? 네가 먼저 집무실에 접견을 요청하다니."

반가운 듯 말하는 란페이. 딱딱한 표정으로 란페이의 집무실에 다가온 레고르는, 란페이의 책상에 놓여 있는 달력을 말 없이 집어들었다. 다음 주 수요일, 거기에는 붉은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다. 이 날 일과를 비우겠다는 뜻이었다.

"참관하실 생각이었나 보죠?"

"뭘 말이니?"

"그 녀석의 마지막 에페 바체 시험 말입니다."

그 날은, 세 번째의 에페 바체 시험날이었다.

그리고 아이는 친한 간부들에게 한 가지를 요구하고 있었다.

에페 바체 시험이 끝나고 나면,

반드시 레고르와 결투할 서열 결정전을 열어줄 것을.

*

날이 갈려 나가는 소리.

천으로 검면을 닦아내자 새까만 철분이 묻어나온다. 이미 세 개의 천이 그렇게 더럽혀졌다. 조심스럽게 검의 예기(銳氣)를 확인하던 아이는 다시 검을 갈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숫돌로 날을 갈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V자 형태의 예각으로 고정된 숫돌. 샤프너라고 한다. 검의 수명을 깎아 날카로움을 깎아내는 물건이었다. 아이가 사용하고 있는 것은 그중에서도 특수한 용도로 쓰이고 있는 샤프너였다.

망가진 칼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쓸 수 있게, 내구를 희생해서라도 극도로 예리하고 날카롭게 갈리도록 설정된 샤프너. 이렇게 갈아버리면, 단 한 번 사용하면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갈고 있는 것은, 도린이 남기고 간 검이었다.

"끝났다. 더 갈면, 부러져버릴 거야."

서슬이 푸른 롱소드가 완성되었다. 랑벨로가 변이한 귀조의 목줄기를 꿰뚫으면서, 그 위액에 상해 한 번은 망가졌던 검.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정돈된 예기를 발하고 있다.

지난 일 년 동안, 아이의 방에 걸려 언제나 함께한 물건이었다. 아이는 그 검의 검면을 이마에 대고 잠시 눈을 감았다. 서늘한 감촉이 달아오른 머리를 식게 해 준다.

"사형, 가자."

그 말을 하는 순간, 더럭 겁이 찾아왔다. 일 년 전, 그 버려진 예배당에서의 밤. 그리고 담배 연기 가득했던 방에서의 밤이 떠올라 온 몸이 차갑게 끓어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손이 떨리기 시작한다. 아이는 칼을 내려놓고, 스스로의 어깨를 붙잡으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누군가를 불렀다.

"림, 림, 림? 있어?"

'왜 그러느냐, 어린 순례자야.'

뒤에서 불쑥 몸을 드러내는 림. 아이는 수치스럽다는 듯 고개를 홱 돌린 채로, 두 팔을 벌리며 림에게 다가갔다.

"한 번만 안아줘."

'나 참. 신으로 오래 살다 보니 참 팔자에 없는 유모 일까지 하게 되는군. 너는 대체 내가 좋은 거냐, 싫은 거냐?'

림은 피식 웃으며 아이를 앞에서부터 감싸주었다. 입술을 앙다물고 고개를 돌리면서도, 꽉 림의 붉은 육체를 부둥켜안는 아이. 등에 손자국이 남을 정도로 강하게 끌어안는다.

"몰라. 나도 잘 모르겠어. 그런데, 너무 외로울 때... 이러면 좀 안정이 돼."

'그래, 알겠다. 네 망설임과 주저함까지 베어넘기거라.'

지난 일 년간, 아이가 그 날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했던 행동이었다. 잠시 그렇게 림을 꼭 붙잡고 있던 아이는 먼저 림의 가슴팍을 두 손바닥으로 밀어냈다.

"이제 저리 가."

'참 제멋대로군. 나한테만 제멋대로야.'

그 말에 아이도 피식 웃으며 떨어뜨렸던 검을 집어들었다. 그 날은 수요일. 에페 바체 시험날, 그리고 레고르와의 승부가 있는 날이었다. 어느새 떨림은 가라앉아 있었다.

이번이 세 번째였다. 이 세 번째의 에페 바체 시험을 통과하게 되면, 무적자였던 아이는 정식으로 기나센의 국민이 되고, 에페 바체의 자격을 부여받는다. 시험관은 지난 두 번과 마찬가지로 잰슨이었다.

팔을 잃었으니 좀 쉬라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억척스럽게 자기가 시험관을 맡겠다고 했다고 한다. 어떻게든 가로막아주겠다는 것처럼. 아이는 그 심정이 아프게 이해가 갔다. 내가 첫째 사형을 용서하지 못하듯이 나한테도 그러는 거겠지.

그러나 아이의 실력을 아는 사람들은, 더 이상 그 시험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 다음에 있을 서열 결정전이었다. 오늘 여기서 레고르를 쓰러뜨린다. 그리고, 첫 번째 에페 바체 서열을 빼앗아서, 단장 대리직도 잃게 만든다. 그게 아이의 진짜 목표였다.

어느새 연무장 앞에 도착했다. 심호흡을 하고 연무장의 문을 열어젖히는 아이. 이 안은, 참관하기로 한 간부들로 가득해야 했다.

"어?"

그런데 그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자그마한 의자에 한 명의 사람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아이는 표정을 딱딱하게 바꿨다. 레고르였다.

"뭡니까, 사형? 사형이 왜 여기 있어요?"

"숙소에 냄새가 밴다고 해서, 여기서 연초를 좀 태우고 있었다."

입에는 살레니움에서 공수한 금빛 담배를 문 채, 책 페이지를 넘기고 있는 레고르. 아이는 더 성난 목소리로 물었다.

"그거야 자유지만, 비켜 주실래요? 오늘 여기서 제 시험을 치러야 하니까."

"시험? 무슨 시험 말이냐."

책을 탁 덮으면서 일어나는 레고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더니 선언한다.

"이미 네 시험은 연기되었다. 단장님한테 듣지 못했던 거냐?"

"예?"

눈을 껌뻑이는 아이. 레고르는 당연한 얘기를 한다는 듯 물었다.

"곧 우리와 아지프의 계약도 끝난다. 그 전에 한 번의 커다란 공성전이 예비되어 있지. 이미 적의 작전 결행 날짜까지 입수한 상태고, 적도 숨길 생각도 없이 공공연하게 짓쳐들어오는 중이다. 그런데 그 전에 몸을 다칠 수도 있는, 위험한 시험을 치를 생각이었나? 당연히 연기해야지, 특등. 피차 귀한 몸 아닌가."

검은 매 휘장을 톡톡 건드리며 신경을 긁는 레고르. 아이는 입을 열어 반론하려고 했지만, 이 정론에 뭔가 반박할 말을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단장 대리 권한으로 연기했다. 뭐, 빨리 기나센 국적을 받고 싶어서 몸이 달아 있는 건 이해하겠지만 말이야. 어차피 3년 기다린 김에 몇 달 더 기다리라고. 아니면 뭐냐? 자신이 없어서, 잰슨이 아직 의수를 다루는 게 미숙한 팔병신일 때 빨리 해치우고 싶었던 거냐?"

부들부들 떠는 아이. 하지만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반론은 뒤에서 들려왔다.

"도망치는 거니?"

란페이였다. 반쯤 열린 문에 비스듬히 기대서 팔짱을 끼고 이 쪽을 바라보고 있다. 레고르는 천연덕스럽게 담배를 한 모금 더 빨아들일 뿐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넌 본국으로 안 돌아가고 다른 곳으로 도망쳐서, 에페 바체 시험 다음에 있을 서열 결정전을 피할 셈이잖아. 곧바로 다음 파견 의뢰를 받아 뒀던데."

아이는 고개를 홱 들어 레고르를 노려보았다. 레고르는 어깨를 으쓱했다.

"가치 없는 일에 리스크를 굳이 지고 싶지 않은 것 뿐입니다. 이미 그런 짓은, 멍청한 사람들이 잔뜩 해주고 있으니 말입니다."

사실상의 인정이었다.

"멍청한 사람들?"

"뭐, 예를 들면, 자길 원수처럼 미워하는 인간을 구하겠다고 폭주하는 벨루스를 추적하는 멍청이 같은 거 말입니다. 어찌 남은 행운이 있어서 돌아왔습니다만... 앞으로 평생 그런 짓을 하다간, 금세 행운을 다 쓰고 죽어버리겠죠."

"레고르 보르지아! 당장 사과하도록 해!"

"이런, 미안하구나."

엄하게 소리치는 란페이. 그러나 레고르는 피식 웃으며 유들유들 아이의 볼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손대지 마."

"왜? 네 볼따귀는 거의 공공재인 것 같더구만. 이 사형은 안 되는 게냐? 슬프군."

"치워!"

레고르의 손을 쳐내는 아이. 두 사람의 대립에 할 말을 찾던 란페이의 목소리는, 기운을 잃어버렸다. 란페이는 안타깝다는 듯 묻는다.

"왜 이런 아이가 되어버린 거니? 내가 뭘 잘못한 거야?"

대답 없이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다시 책을 펼쳐드는 레고르. 란페이는 마지막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나는 너를 아들처럼 길렀다고 생각했는데..."

그러자 레고르의 표정이 딱딱하게 일그러졌다. 다 타들어 가는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비벼 끄면서, 이를 악물고 대답한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뭘 길렀다는 말입니까?"

한 켠에 놓아두었던 대태도를 집어들며, 씹어뱉듯이 말하는 레고르.

"나는,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닿는 무언가를 망가뜨리는 형태로 완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검처럼 말입니다."

그 분노에 찬 냉담한 선언은 불붙은 심지처럼 끊이질 않았다.

"부모든, 당신이든, 그 누구든. 개입할 여지란 전혀 없었죠. 내 운명은 오롯이 나의 것입니다."

"내가 앞으로 어떤 죄행을 행하더라도 그건 전부 나의 죄업이고, 내가 어떤 도탄을 구르더라도 그건 전부 나의 죗값이겠죠.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뭘 어떻게 해주었더라면 그런 길로 빠지지 않았을 거다? 헛소리입니다. 멋대로 책임감을 느끼는 일은, 접어두시길 바랍니다. 나 같은 종류의 인간한테 그런 책임감을 느껴봤자, 스스로의 몸만 상할 테니 말입니다."

"제가 당신에 의해서 뭔가 바뀌었을 거다, 바뀔 수 있을 거다, 그렇게 믿는 건 당신의 착각일 뿐입니다."

그 선언에 충격을 받은 듯 표정이 어두워지는 란페이. 이윽고 뒤돌아서서 나가버렸다. 조용히 문이 닫힌다. 아이는 그런 레고르를 보며 칼을 뽑아들었다.

"자세를 취해."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특등? 오늘 시험은 없다고 했잖나."

"닥쳐. 이미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그런 건 다 명분이야. 자세를 취해! 안 그러면 기습한다."

"참, 별 희한한 기습도 다 있군."

피식 웃는 레고르. 아이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움켜쥔 롱소드에 시뻘건 빛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일년 전과 달리, 엄청나게 능숙하게 무기에 신기를 밀어넣고 있는 것이었다. 레고르는 그 모습을 보고 대태도를 움켜쥐었다.

잠시 후, 아이는 기합을 내지르며 깔끔한 중단세의 참격을 날렸다. 레고르 역시 주특기인 투포환 같은 참격으로 그 칼을 막아섰다. 레고르의 대태도는 시퍼런 빛을 뿌리고 있었다.

쨍ㅡ

그 일 합 만에 승부는 났다. 아이의 검이, 유리처럼 잔금이 가서 부서진 것이었다. 극도로 얇게 갈아낸 검은 대태도의 무거운 중량을 이겨내지 못했다. 레고르는 피식 웃으며, 대태도를 납도했다.

"다음엔 좀 제대로 된 무기를 가져오너라."

부서진 칼자루만 움켜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아이를 놔두고, 연무장을 떠나며 덧붙인다.

"다음이라는 게, 있다면 말이다만."

*

그 날 밤.

아이는 침대에 누워서, 부서진 칼자루를 어떻게든 닦아내면서,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림, 림, 림. 있어?"

'세 번 씩이나 부르지 않아도 곁에 있단다, 어린 순례자야.'

달그림자에서 불쑥 얼굴을 내미는 림. 아이는 옅게 웃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대로 무기를 바꿔서 계속 싸웠으면, 네가 볼 땐 누가 이겼을 것 같아?"

'아마 그놈이겠지. 그 녀석은, 천 년 전의 기준으로 봐도 꽤 강하다. 너도 또래치고는 제법, 아니 어쩌면 가장 강하다만... 아직 그놈에겐 미치지 못해.'

"역시 그렇겠지? 근데 그럼 왜 싸움을 피하려고 한 걸까?"

뒤척이며 칼자루를 내려놓는 아이. 그리고 조용히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이제 와서 하는 생각인데, 혹시 첫째 사형은... 둘째 사형을 죽게 내버려두면, 내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한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

'뭐? 그게 무슨 소리냐.'

"자기 기준으로는, 뭐지, 왜 경쟁자를 줄여 줬는데 나한테 이러는 거지? 이 멍청아, 너는 도린이 결혼하고 나면, 후계를 안정시키기 위해 어디 오지에 좌천되거나 뭐 그런 식으로 버려질 거였단 말이야. 고마워할 줄 알았는데. 멍청이. 똥이나 먹어라. 뭐 이렇게 생각하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는 거지. 자꾸... 친한 척 하려고 한단 말이야. 속상한 거 같기도 해. 아닌가?"

'바보스러운 생각이구나. 신인 나도 이제는 그 정도는 판별할 줄 안다. 그렇게 감정을 못 읽는 인간이 어디에 있겠느냐.'

"그렇지? 이딴 식으로 생각했다면, 진짜 바보 멍청이 천치일 거야. 인정하긴 싫지만, 그 사람은 머리는 좋은 모양이니까."

다시 몸을 뒤척이며 칼자루를 걸어놓는 아이.

"이기고 싶었는데. 아직 난 많이 약한가봐. 네가 많이 도와줬는데."

일 년 동안, 이렇게 아이가 크게 성장하게 도와준 일등 공신은 림이었다. 매일 림이 보여준 환상 속에서 실전을 방불케하는 수련을 했다. 림이 곁에 머물면서 신기를 몸 속에 저장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칼을 휘두르는 자세를 교정해줬고, 천년 전 번성했으나 실전되어버린 검술도 가르쳤다. 아이의 성장은 거의 전적으로 림에게 힘입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한 가지 해결법이 있다. 들어 보거라.'

그 모든 수련의 마지막마다 림이 덧붙였던 말이 있었다.

'어린 순례자야. 내 사도가 되어라.'

"어린 순례자야. 내 사도가 되어라."

림의 기괴하게 울리는 목소리를 우스꽝스럽게 따라하며, 같은 어조로 말하는 아이. 그리고 소리내어 웃었다.

"싫어. 싫다고 했잖아."

'역시 그렇군.'

"림은 마술사 살해의 신인가, 뭐 그렇다고 했지? 마술사를 세상에서 다 죽여버리는 게 목표라고. 분명히, 마술사 중 나쁜 사람이 엄청, 엄청 많은 건 맞지만... 그래도 다 죽여버리고 싶진 않아."

베개를 끌어안으며 처음으로 자신이 그걸 거부하는 이유를 제대로 말하는 아이.

"잰슨 아저씨가 팔을 잃어버린 걸 낫게 해 준 것도 마술사잖아. 사소필렌의 마술사들이 의수를 만들어내지 못했으면, 쭉 팔 없이 살아야만 했겠지. 나쁜 사람이 많은 집단이어도, 조금은 좋은 사람이 있어. 나쁜 사람도 가끔은 좋은 일을 해. 그러니까, 다 죽이는 건 안 된다고 생각해."

'그래, 그렇군. 네 생각은 잘 알았다.'

갑자기 뼈날개를 펼치며, 창가로 다가가는 림. 아이는 깜짝 놀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뭐야, 림, 어디 가? 산책 가?"

'아니. 네 말을 따르려고 한다.'

"내, 내 말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갈 생각이란다. 너한테는 이제 내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 같으니 말이다.'

그런 말을 하며 창 밖으로 훌쩍 날아간다. 아이는 황급히 창가로 달려들었다. 림은 아직 건물에서 멀어지지 않고, 조용히 날갯짓을 하며 창문 근처를 부유하고 있었다. 아이는 기묘한 심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동안, 림이 있는 게 너무 익숙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갑자기 떠나버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마음 한 켠에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감정이 솟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상실감이었다.

"저, 저, 림, 음. 내일은 맛있는 게 나온다는데, 음..."

림은 피식 웃으면서 아이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끔찍하게 불탄 화상 환자 같은, 박피된 얼굴이 아이의 앞에 나타난다.

'왜 그러느냐? 혹시 날 붙잡고 싶은 거냐?'

"아니거든!"

'뭐, 그렇게 너 만한 아이가 쉽게 찾아질 리도 없으니. 혹시라도 내가 애타게 보고 싶거든, 간절하게 내 이름을 불러 보거라. 그럼 돌아와줄 수도 있다.'

아이는 홱 돌아섰다.

"웃기는 소리하지 마. 네 그 이상한 얼굴 안 보게 되니까,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거 보고 안 놀라도 되니까... 속이 다 시원하다. 저리 가."

'그럼 작별이구나. 잘 있거라.'

림이 충분히 멀어진 걸 확인하고 아이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잘 가."

림은 뼈날개를 퍼덕이며, 세차게 쏟아지는 달빛을 이지러뜨리며 정말로 멀리 날아가 버렸다. 아이는 림이 떠나간 밤하늘을 멍하니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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