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메이지 슬레이어 ( 3 )
심야.
하나의 불빛만이 반짝이고 있다. 림이 떠나가고, 기분이 싱숭생숭해져 밤 산책을 하던 아이는 주황색 불빛을 보고 홀린 듯 그 쪽으로 걸어갔다. 그 불빛은 란페이의 집무실의 불빛이었다. 집무실의 문을 두들기자 들어오라는 대답이 들린다. 아무래도 란페이는 깨어 있던 모양이었다.
"왜 아직도 안 자고 계세요?"
끼이익, 문을 열고 들어가 닫으며 물어보는 아이. 주홍빛 촛불 아래서, 란페이는 무언가를 바라보며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 아이는 그 책상 앞에 놓인 의자에 조용히 앉는다.
"혼자 술 마시는 거, 안 좋은 버릇이래요."
"그럼 네가 같이 마셔줄 거니?"
빙긋 웃으며 새 술잔을 꺼내는 란페이. 아이의 잔에 사과주를 얕게 따라주었다. 도수가 낮아서 무리없이 마실 수 있는 술이었다. 몇 번 정도 두 사람은 이렇게 대작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앞에서 그냥 물을 따라 마셨지만, 아이가 열다섯이 되고 나서부터는 이렇게 사과주를 마시게 되었다.
"알고 계셨군요."
홀짝, 잔 바닥에서 찰랑거리는 사과주를 마시고 조용히 말하는 아이. 그 눈은 란페이가 들고 있는 어떤 문서에 가 있었다. 도린의 에페 바체 계약서.
그 날은 도린의 기일이었다. 달력의 오늘에 쳐진 동그라미는 에페 바체 시험을 위해서가 아니라, 도린의 기일을 지내기 위해서 쳐진 것이었다.
"그럼, 당연히 기억해야지."
아픈 웃음을 띄우며 도린의 계약서를 보여주는 란페이. 거기에는 아이의 것에는 없는 조항이 하나 적혀 있었다.
"이거 봐. 이건 어릴 때 그 녀석이 마구 떼를 쓰면서 추가한 조항이란다. 글씨 참 못썼지?"
"그러네요. 무슨 내용인데요?"
"동생 넷한테 밥을 먹여 주고, 꼭 반드시 학교에 보내 줄 것. 그 녀석은 동생 넷의 맏형이었어. 그런 소년가장이었거든. 그 녀석 동생 중 한 명이, 우리 단원 주머니를 털다 걸려서 붙잡혔는데... 자기가 시킨 거라면서 제 발로 찾아왔었어."
처음 듣는 얘기였다. 어쩐지, 자신에게 이것 저것을 가르쳐주고 어린아이를 다루는 게 굉장히 능숙하다고 생각은 했었다.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아이.
"별다른 재능이 없어 보여서 밥이나 먹이고 돌려보내자고 결론이 났는데, 내가 억지를 써서 에페 바체 시험을 보게 됐었단다. 우리는 용병 중에서는 풍족한 편이라 마음에 인정이 남아 있지만, 다른 용병한테도 이러다 걸렸다간 바로 손목을 잘릴 게 뻔해보였거든.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었어. 그래서 계약서를 쓰게 시켰더니 마구 억지를 쓰면서 이건 꼭 넣어야 된다고 그러더라고. 동생들이 학교에 꼭 가고싶어 했다나봐. 너는? 그러니까, 나는 안 가도 된대. 어차피 멍청해서 못 알아듣는다나."
"어..."
"사실 학교 가기 싫은 거지! 이랬더니, 독심술도 할 줄 아냐면서 경악하더라."
피식 웃는 란페이.
"그 녀석은 내가 거둔 아이들 중 가장 평범한 아이였어."
"음, 어... 그거 칭찬인가요?"
"칭찬이지. 그 녀석은 강도한테 어머니를 잃고, 노역으로 아버지를 잃고서도, 동생 넷을 지키면서 꿋꿋하게 구김살 없이 살아가고 있었어.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평범한 아이들처럼 말이야. 그건 위대한 재능이란다."
다시 조용히 술을 홀짝이던 란페이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너한테는 보여준 적이 없었지? 한 번 보렴."
아이는 본 적이 있었다. 일년 전, 레고르가 멋대로 꺼내서 보여주었던 계약서 뭉치였다.
"내가 단장직을 맡고 나서, 받으려고 했던 아이들의 계약서야. 조금만 재능이 있어 보이면, 어떻게든 데려오려고 했는데... 그랬더니, 몇 년 전부터 잰슨이 시험관을 맡겠다고 나서서는, 아주 엄하게 시험봐서 다 잘라버리더구나. 그 녀석 나름대로의 자비였겠지. 왜냐면..."
"...다 죽었군요. 저랑, 사형만 빼고."
"그래, 맞아. 어쩌면, 내가 죽게 만든 걸지도 모르지. 눈치가 많이 늘었구나, 어떻게 알았니?"
이미 들어서 알았어요, 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다. 란페이는 계약서를 꺼내 하나하나 아이에게 보여주기 시작했다. 모두의 이름도, 어떤 아이였는지도, 어떻게 만났는지도, 눈동자 색까지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란페이는 한참을 그렇게 지나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했다.
또르륵, 마지막 잔을 따라 들이키며 회한을 중얼거린다. 유리에 맺힌 빗자국처럼, 슬픔이 알알히 배여 있는 어조였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아이를 구해주고 싶었어. 있을 곳을, 가족을 선물해주고 싶었어. 그런데 용병이라는 일 자체가, 그렇게 선물이라고 할 만큼 좋은 운명이 아니었나봐. 애초에 나는, 그렇게 무언가를 줄 수 있을 만큼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 거야. 그냥, 주제넘는 일이었지. 그 녀석 말대로."
오늘 낮 레고르가 씹어뱉듯 말한 말이 가슴에 박혀 있는 걸까. 안절부절못하는 아이를 내버려두고, 계속 회한을 말하는 란페이.
"기나센에 있는 도린의 동생들한테, 도린의 부고를 전하는 건... 내가 했어. 도린의 막내 여동생은, 큰오빠한테 주려고 장갑을 뜨고 있었는데... 벽난로에 내던지고, 말없이, 울면서 나를 쳐다보더구나. 입장 때문에 말할 순 없어서 침묵했겠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 수 있었어. 사무치게, 알 수 있었어. 그냥 거기에 놔뒀더라면, 더 잘 살았을지도 모르잖아요. 당신이 뭔데, 왜 나서서 이렇게 만들었어요. 이런...원망... 그래, 전부 내가 짊어져야 하는 업일 테지. 그거 아니? 음..."
잠시 말하려다 머뭇거리는 란페이. 그러나 곧 한숨을 내쉬고 고해하듯 말을 이어간다.
"나는 아이를 가질 수가 없는 몸이란다."
눈을 동그랗게 뜨는 아이. 란페이는 그 말을 하고는, 담담하게 자신의 아랫배를 문지르며 말을 계속했다.
"어렸을 때 전쟁터에서 몸을 좀 다쳐서...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을 거라는 판정을 받았어. 짐승 중에는 자기 아기가 죽으면, 다른 짐승의 아기를 훔쳐서 자신의 아기로 삼는 종류의 짐승도 있다고 하더구나. 어쩌면 나도, 그냥 그런 거 아니었을까. 나 자신조차 속였던 게 아닐까. 그냥 허울이 좋았을 뿐인 추한 자기만족이었는데. 도린이 떠나고 나서, 요즘엔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
"아,아니에요."
"저번에도 어떻게든 그 녀석을 꾸짖어 보려고 했는데, 서른 넘게 나이를 먹고 아직도 가족 놀이를 하고 싶으신 겁니까. 언제 유아기를 끝낼 생각이십니까. 이런 말도 들었단다. 그 말이 너무 아프게 들렸어. 전부, 그냥, 놀이였던 걸지도... 무의미했던 걸지도 몰라."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그렇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서 남은 결과가... 이 주인 잃은 계약서들이랑, 그렇게 비뚤게 자라버린 그 녀석과, 너 뿐인걸. 너희 둘은 끝까지 살아남아줄 거니? 아니면... 너도 어쩌면, 조금만 더 나이를 먹으면 레고르처럼 되지 않을까? 그 녀석도 원래는 귀여웠었는데."
"아니에요! 저는, 저는 좋았어요."
고함치듯 얼굴을 내밀며 절박하게 달려드는 아이.
"저는 좋았어요. 저는, 음, 사형처럼 말주변이 좋지 않아서, 무슨 비유나 수사 같은 건 잘 못하겠지만... 그냥 좋았어요. 저는 단장님 덕분에 많이 바뀌었어요. 의미 없지 않았어요. 의미 없지 않았다니까요. 정말로, 진짜에요."
"알았어, 알았단다. 으이구, 이러니까 블레어가 너를 그렇게 귀여워하지."
피식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겨드랑이에 끼고 쥐어박는 란페이.
"여자 많이 울리겠구나. 조만간 있을 마지막 전투가 끝나고 기나센에 돌아가면, 너 때문에 아주 눈물의 강이 하나 새로 생기겠어."
"네?"
"너 같은 녀석들이 오히려 레고르보다 더 여자 많이 울릴 상이야. 그 놈은 딱 봐도 나쁘게 생겼으니까, 면역력이 있는 여자만 접근하겠지만, 너는 무해한 척하면서 순진한 처녀들 엄청 후리고 다닐 걸."
"아,아닌데. 저는 그런 거 관심 없어요. 아니에요."
마구 당황해서 손사래를 치는 아이. 란페이는 오늘 만난 처음으로 활짝 웃었다. 자기가 어떻게든 란페이를 웃게 만든 게 좋아서, 아이도 따라서 배시시 웃었다. 란페이는 새 술, 아까 것보다는 훨씬 가벼운 과일주를 꺼내며 지나가듯 말했다.
"그럼 약속할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을 했다면, 그 다음엔 아무리 가엾은 여자를 만나도, 백 명을 만나도, 무조건 결혼한 사람을 우선하기로. 너는 불행한 사람만 보면 무턱대고 몸을 던지니까. 그런 각오로 살지 않으면, 결국 전부 불행해질 거야."
어쩌면 자신의 깨달음이, 후회가 들어간 말일지도. 아이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할게요."
코르크 마개를 손으로 퐁 따는 란페이. 아이는 그런 란페이를 남겨두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란페이가 손을 붙잡아 잡아끌었다.
"어머, 새 술을 땄는데, 이걸 다 나 혼자 마시게 할 생각이었니?"
"어?"
"내일은 전투 전 마지막 휴일이니까. 오늘 정도는 이래도 괜찮겠지. 같이 좀 마셔주렴."
아이는 못 이기는 척 자리에 앉았다. 란페이는 계속 계약서를 보면서 지금껏 지나간 아이들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 아이는 가장 눈물이 많은 아이였단다, 이 아이는 가장 수다스러운 녀석이었어. 이렇게, 한 명 한 명의 특기를 말해주면서.
그럼 저는요? 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아이는 가장 마지막으로 들어온 에페 바체였기 때문에 순서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어, 햇살이다. 날밤을 샜네요."
커튼 사이로 들이치는 빛을 보고 놀라서 말을 꺼내는 아이. 그리고 다시 란페이 쪽을 보았을 때, 란페이는 엎드려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었다.
"이렇게 책상에서 자면, 감기 걸리는데."
아이는 쓴웃음을 지으며 겉옷을 벗어 란페이에게 덮어 주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어둡지 않은 아침을 향해 걸어나갔다.
*
검은 새들이 모여든다.
멀리까지 볼 수 있도록 높다랗게 쌓은 아성, 그 뾰족한 지붕 위에 올라선 채로, 아이는 멍하니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먼 하늘로부터 검은 새들, 까마귀와 까치가 모여드는 것이 보였다. 전투가 임박했다는 뜻이었다.
아이와 레이븐사이드가 지금 지키기 위해 배치된 성은, 아라딘폴이라고 불리는 성이다. 이 성은 북서 자치령의 심장부를 관통하고 지나가는 큰 강인 템네스 강에 연해 지어져 있다.
아주 전략적인 목적에서였다. 아라딘폴 지역은 템네스 강에 배를 띄울 수 있는 접안시설, 하역시설, 선창이 위치한 유일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즉, 이 성을 가지고 있다는 건 곧 템네스 강과 그 지류를 전부 장악하고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엄청 모여들고 있다. 이 정도면, 인근 야산에 있는 까마귀랑 까치는 다 모인 수준이겠는걸."
눈을 가늘게 뜨고, 원무를 추고 있는 검은 새 무리의 수효를 파악하는 아이. 그 말대로였다. 지금 이 아라딘폴은 이 북서 자치령에서 있었던 어떤 전투보다도 커다란 전투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나기와 아지프의 전쟁은 지난 일 년 동안, 걷잡을 수 없이 격화되었다. 4위계 마술사 중에서도 사상자가 나오고, 일반 민초의 희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소모하는 재원의 양 역시 수도 마탑들이 가볍게 여길 수 없는 큰 액수로 불어났다.
처음에는 그저 대리전이 목적이었는데. 아무도 이런 거대한 전쟁을 원하지 않았는데, 한 번 불붙은 전쟁은 서로가 서로의 불씨를 파먹으며 계속 몸을 불려 이제 제국으로 불붙을 수도 있는 거대한 염화로 자라나 있었다.
아지프와 카나기의 내정에 개입하는 게 될까봐 몸을 사리던 다른 학파들도 이제 두고만 볼 수 없게 되었다. 제일 먼저 나선 것은 라달라리아였다. 천여 명의 율사들이 모여 당장 전쟁을 중지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북서 자치령의 가엾은 생령들이 죽는 것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내심 누군가가 그만두라고 말해주기만을 바라던 아지프와 카나기의 지도부도, 겉으로는 격앙된 반응을 보이고 서로에게 턱없는 요구를 하면서도 뒤로는 감사의 사절을 보냈다.
결국 두 학파는 라달라리아의 선의지와 법치를 존중한다는 핑계를 대고 어떻게든 좋은 모습으로 전쟁의 막을 내리는 데 합의했다. 이 전쟁으로 제일 득을 본 것은 사실 라달라리아였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전쟁을 멈췄다는 명예를 얻은 것이었다.
제일 먼저 전쟁 중지 성명을 발의한 라달라리아의 6위계 율사, 호노레 블뢰유는 황제에게 성인의 직위를 받아 성 호노레가 되었다. 사실 그 성명이 없었어도, 이 전쟁은 어떻게든 막을 내렸을 것이다. 그녀는 그저 연극을 도와줬을 뿐이었다. 라달라리아에 대해 퍼져 있는 신화라는 게 속을 뒤집어까보면 대개 이러했다.
곧 북서 자치령에서 모든 전쟁행위를 금지한다는 칙령이 반포되었다. 효력 발생 일자는 6월 5일부터. 뒤집어 말하면, 6월 5일까지는 전쟁을 해도 된다는 소리였다. 지금까지 북서 자치령에서의 대리전은, 아지프의 약우세라고 평가되고 있었다.
카나기는 6월 5일이 찾아오기 직전, 먹음직스러운 목표물을 탈취함으로써 그 평가를 반전할 계획을 세웠다.
카나기가 목표물을 탈취하고 며칠 안 가 전쟁 금지 칙령이 떨어질 것이므로, 카나기의 계획이 성공한다면 아지프는 만회의 기회조차 받지 못하고 전쟁의 종막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었다.
점령은 원래 점령 지역의 안정화와 사후 방어까지를 포함해서 점령이다. 때로 이것은 점령 그 자체보다도 어려울 때가 있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그냥 뺏기만 하면 사후작업 없이도 점령했다는 군공을 얻을 수가 있는 먹음직스러운 상황인 것이다. 카나기 입장에서는 군사를 일으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북서 자치령에서 그렇게 상징적인 목표물이 될 만한 곳은 한정적이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아라딘폴 성이었다.
카나기의 병력의 동태를 감지하던 사람들은, 곧 하나의 결론을 보내왔다. 모든 군세의 목표 지점이 한 곳으로 집중된다. 이 자들은 아라딘폴을 빼앗고 전쟁을 마무리지으려 한다. 그 첩보가 온 것이 벌써 이 주 전이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돌아가고 나니, 아지프에게서 받은 자기 관할구역을 란페이에게 위임하고 자기 연구를 하러 갔던 길 아잘록도 그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얼마 전 그는 하나의 서신을 보내왔다. 자신이 전투 도중 원군으로 합류하겠다는 서신이었다.
아지프의 대마도사들이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전투가 한창 일어나는 중간, 기습적으로 갑자기 전장에 합류하여, 충분히 쌓여있는 시체를 폭발시키고 망자의 군대를 일으켜 전쟁 전체를 뒤집어엎어버리는 것.
수행하는 자가 홀몸이기에 추적도, 합류 시기 예측도 힘들어 방법을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는 전술이었다. 6위계 이상의 아지프 마술사, 그들은 그래서 일인 군단이라고 불렸다.
'아주 재미있는 것을 구경시켜 주겠네, 란페이 우르드 군. 자네에게는 특별히 일등석을 마련해 주지.'
서신은 그런 문장으로 끝맺고 있었다.
따라서 레이븐사이드를 비롯한 아라딘폴 수성 측의 승리조건은 매우 명확해졌다.
"아지프의 일인 군단! 길 아잘록 서방 학술총의 최고회의 위원장이 이 곳에 원군으로 온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때까지 성을 잃지 않고 버티기만 하면, 우리의 승리다!"
함성, 앙천하는 사기. 전투가 개시되기 전, 란페이는 아지프의 해골이 찍힌 그 서신을 모두가 보도록 만들어, 사기를 끝까지 끌어올림과 동시에 모두에게 목표를 각인시켰다. 뛰어난 용병술이었다.
공개할 시기를 고르고 골라, 불안이 절정에 달한 지금 공개된 그 서신은 일종의 최면적인 효과마저 주며 모두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지금, 그래서 아라딘폴의 총원은 어느 때보다도 죽음에 가까운 전투를 앞두고서도 오히려 자신감과 생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동안 아이는 그 고양되어가는 생기로부터 멀리 떨어져, 냉정함을 찾으려고 하기라도 하는 듯이, 아성의 첨탑을 기어올랐다. 까치와 까마귀를 더 가까이서 관찰하고 싶어서였다.
"옛날에는, 저 녀석들은 뭐가 그렇게 즐거워서, 전쟁터의 하늘에서만... 저렇게 빙글빙글 춤을 추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했었지."
그 원무(圓舞)가 전장 한 가운데 쓰러져 드러누운 아이에게는 유혹하는 날갯짓으로 보였었다. 그 지옥 같은 지상을 떠나, 싸움도, 절망도 없는 하늘로 오라는 유혹.
"지금은 그게 아닌 걸 알아."
까치도 까마귀도, 인간에 준할 정도로 머리가 좋은 새였다. 새 중에서는 으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그들은 병장기를 그러쥐고 모인 인간을 발견하면, 자신의 무리로 날아가 인간이 모여있음을 알린다.
모인 인간이 하는 일은, 전쟁밖에 없으므로, 곧 시체 즉 먹이가 쏟아진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모인 인간 머리 위의 하늘로 쏟아지는 까마귀와 까치는, 그 먹이를 차지하기 위해 그들의 전쟁을 시작한다. 공중에서의 전투는 누가 꼬리를 잡느냐에 따라 승리하는 선회전이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들은 빙글빙글 돌면서, 싸우고 있던 것이었다. 그건 전혀 춤이 아니었다.
삶의 한중간에 춤을 출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로운 생물은 인간, 그 중에서도 일부밖에 없다. 숨과 피를 가진 모든 것은, 자신의 삶을 그토록 치열하게 살아간다.
"즉, 저렇게 까치가 모여드는 건... 근처에 인간의 무리가 있다는 거지."
아성에서 훌쩍 뛰어내리는 아이. 엄청나게 높은 높이를 뛰어내렸는데도, 신기로 몸을 강화했기에 아무런 충격이 없었다.
"어이! 아이! 어디 가냐! 싸움 직전에 탈영이냐?"
"색적 임무를 하고 오겠습니다!"
특등 수색자. 아이는 언제든 자신의 판단으로 수색을 개시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말을 꺼낸 잰슨도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빨리 다녀와, 이 새끼야! 시작하고도 안 오면 탈영으로 찔러버릴 테니까."
아이는 손을 흔들어 거기에 답하고, 검은 새가 모여든 땅을 향해 빠르게 뛰어가기 시작했다.
*
적의 흔적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차라리 발자국을 안 지우려고 하는 게 나았을텐데. 뭐야 이거, 위장이 너무 어설퍼서 벨루스가 지나간 게 다 보이잖아."
피식 웃는 아이. 벨루스의 뾰족한 발자국을 지우고 말발굽을 마구 찍어놨는데, 너무 대충 찍어놔서 군사적 목적으로 위조한 것임이 너무 명백하게 보였다.
"지금까지 본 메뉴얼로는 이 놈들은 식사를 하기 전에 일률적으로 이 짓을 하게 되어 있어. 발자국이 선명하고, 위에 어떤 이물질도 안 떨어진 걸 보니까... 생긴지 얼마 안 된 거고. 그러니 지금쯤은 최후의 만찬을 즐기는 중이겠네."
그러면 언제 공성을 시작할 것인지 벌써 대충 윤곽이 잡혔다. 식사를 마치고 병사를 추슬러 움직이려면 아무리 빨라도 세 시간 후. 그렇게 만족한 아이가 돌아서려고 할 때, 문득 이상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
지금까지 일 년 동안 수색자로서 교육받고 실전에 나서며 수없이 카나기의 흔적을 찾아왔지만, 이런 흔적은 처음이었다. 그건 아주 거대한 변이었다. 너무 거대해서, 처음에는 생물의 분변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흘러내린 토사의 잔해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게, 뭐야?"
아이는 장갑을 꺼내 끼고 손을 그 속에 밀어넣으려다 놀라서 손을 뗐다. 장갑이 녹아들어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생물은, 어떤 것이든 소화시킬 수 있는 위장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분변마저 강한 산이었기 때문이다. 나뭇가지로 헤집어 어떻게든 그 변을 살펴보던 아이는, 곧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뼈다. 이거, 벨루스의 두개골이야."
아이의 혼란은 절정에 달했다. 벨루스가 들어 있으니 이건 아무래도 카나기와 관련된 생물의 변이겠지. 카나기는 괴물 사냥꾼이자 조련사니까, 이런 똥을 싸는 생물을 가져온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다.
그런데 벨루스를 먹는다니, 벨루스는 그 가치가 아무리 싸게 잡아도 몇천 루덴은 되는 비싼 생물이다. 그런 걸 그냥 먹는다고?
아니, 애초에 벨루스를 이렇게 두개골째로 먹을 수 있는 생물이 있기는 한 건가? 벨루스 역시 자연에서는 포식자에 속하는 생물이다. 포식자를 이렇게 가볍게 포식할 수 있는 생물이라는 게, 아이에게는 정말 어떤 형상이어야 그게 가능할 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런 소리를 내는 생물이라면, 그게 가능할 지도.
아이가 수색하던 숲 전체를 떨쳐 울리는 거대한 굉음이 울렸다. 산새가, 개구리가, 벌레가 모두 몸을 크게 떨며 패닉에 빠져 다른 곳으로 도망친다. 아이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그 굉음의 진원지를 향해 몸을 움직였다. 혹시라도 들키지 않도록, 높이 솟은 나뭇가지를 타고 뛰어가면서.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곧, 그 소리의 진원을 찾을 수 있었다. 아이는 나뭇가지의 무성한 나뭇잎에 몸을 숨기고, 그 사이를 통해 카나기의 군세가 모여 있는 곳을 엿보았다.
"이 자식, 보르프고프! 그만 해, 그만 해! 벌써 세 마리 째 처먹고 있잖아! 여기 먹이 있는데 왜 그렇게 벨루스를 쳐먹으려고 하는 거야. 차라리 인간을 먹어, 사망보상금이 더 싸게 먹히겠다, 제기랄!"
"아니, 마술사님... 저는 집에 처자식이 있습니다..."
"닥치게, 칸네. 말이 그렇다는 거지, 뭐 내가 자네를 육회로 채썰어서 바치기라도 하나? 아, 이자식, 내려놓으라니까!"
로브를 두른 사람. 행색으로 보아, 카나기의 마도사다. 그가 지팡이와 글라도바키아를 들고 어쩔 줄 모르며 난리법석을 피고 있었다. 그 앞에 있는 것은 아주 거대한 거인이었다. 산 전체를 조각해서 거인상을 만들면 이렇게 될까?
바위처럼 딱딱해보이는 피부, 네 개의 눈, 배는 아주 산만큼 솟아 있는데 그 배 한복판은 둥글게 도려낸 것처럼 뚫려 있었다. 그 거인의 손에는, 벨루스 한 마리가 기다란 꼬리를 붙잡힌 채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그만! 그것도 쳐먹으면, 한 끼 식사에 만 루덴을 넘게 쓰는 거야! 아, 학장님, 대체 왜 이 망할 놈을 쓰라고 하셨습니까!"
글라도바키아를 펼치며 무슨 주문을 외우는 마술사. 잠시 후, 거인은 고통스러운 듯 머리를 붙잡고 울부짖더니, 얌전한 상태로 변했다.
"그래, 그래. 휴, 오늘 전투만 끝나면, 나는 다시는 잔'크낫츠 통제관 같은 건 안 해먹을 거다. 제기랄!"
*
"잔'크낫츠? 제기랄, 미친 새끼들. 믿는 구석이 있었군!"
쾅! 탁자를 내려찍는 레고르. 지도를 펼쳐놓고 방어 전략을 점검하던 그는, 아이가 전해온 소식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게, 뭔데요? 일단 무지막지한 놈인 건, 분위기만 봐도 알겠지만..."
"공성 거인이다. 하룻밤 사이에 성을 쌓을 수도, 성을 무너뜨릴 수도 있는 신화적인 놈들이지. 카나기가 통제하는 괴물들 중 가장 무서운 축에 속하지만, 가장 말을 안 들어쳐먹는 놈들이기에 중요한 전장에만 투입되는 놈들이다."
담배 한 모금을 빨고 말하는 레고르. 여기에는 각 용병단에서 나온 참모들이 모여 있었다. 참모들은 두런두런 새로운 정보에 따른 추론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왜 갑자기 그런 게 여기 나타났을까요?"
"이 놈들도 무서운 거죠. 아지프의 마도사를 상대하려는 상징이 필요한 거에요."
"보급, 보급을 끊으려는 건 아닐까?"
레고르는 선언하듯 일축했다.
"아니, 이 놈들의 목표는 학살이다."
"예?"
참모들 모두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해 눈을 깜빡거렸다. 그들 사이에는 블레어도 있었다. 레고르는 특유의 그 저능아를 깔보는 눈으로 다른 사람을 쳐다보더니, 담배를 깊게 빨고 얘기하기 시작했다.
"이 녀석들은 어차피 템네스 강이고 지랄이고, 이 성의 기능이 필요한 게 아니라 '점령했다'라는 상징이 필요한 거니까. 잔'크낫츠를 왕창 동원해서, 길 아잘록인가 하는 그 아지프의 마도사가 도착하기 전 성을 다 철거해버리고 학살을 잔뜩 저지른 다음 도망칠 생각인 거야. 인간이라는 생물은 참 대단하군. 대단해."
듣고 보니 올바른 추정이었다. 틀림없이 정답이겠지. 오히려, 그 정답을 듣고 나니 다른 방식으로는 어떻게 추론해야할 지 의문이 들 정도로 명확한 정답이었다. 아이가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그 거인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학살까지 연결이 되는 사형의 정신상태가... 정상이 아닌 거겠죠."
인정은 해야 하나 인정하기 싫어 꺼낸 말. 레고르는 피식 웃으며 되받았다.
"뭐?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특등. 병기의 속성과 적의 전략목표를 제대로 숙지하기만 해도, 당연히 내려야 하는 판단이겠지. 오히려 이런 판단은 못 내리는 게 병신이다."
사실상 너희들은 전부 병신이니까 내 말을 듣고 따르기나 해라, 그런 의미의 선언이었다. 참모들 사이에 불편한 기운이 감돈다. 블레어가 엄한 목소리로 장내의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레고르, 잘난 척은 그만 하고 세부 지침이나 마련해봐라."
아이가 먼저 나서서 질문을 했다. 레고르가 싫더라도 임무에 임함에 있어 사적 감정을 드러내는 건 금물이었다.
"그런 대단한 놈들인데 왜 안 쓸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놈을 쓰려면, 4위계 이상의 마도사가 그 놈 옆에 바짝 달라붙어서 온 마력을 소모해 통제해야 한다. 4위계 이상이면 매우 고급 인력인데, 그 고급 인력을 소모해도 온전히 통제가 될지 안 될지도 몰라. 거기에 폭주한 잔'크낫츠가 마도사를 죽이는 경우도 아주 잦지. 그러니 가급적이면 쓰지 않으려는 거다."
자신이 알고 있는 이런 저런 정보를 풀어놓는 레고르. 잠시 후 질문도 잦아들었다. 사실상 질문을 할 만한 지식조차 다들 갖고 있지 않다는 게 확인되었기 때문이었다. 레고르는 피식 웃더니, 담배의 마지막 숨을 빨아들이곤 선언했다.
"그럼 전술을 바꿔야겠군. 외성은, 여차하면 포기한다. 잔'크낫츠가 동원되었는데 피해 없이 막으려는 건 오만이야. 피해 없이 막으려다간 전부 잃게 된다. 인원의 절반은 죽을 각오를 해라. 그렇지 않으면, 전멸할 테니까."
그 순간 바깥에서 괴성이 울려퍼졌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아까 숲에서 들었던 그 온 세상을 떨쳐울리는 외침.
적이 도착했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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