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메이지 슬레이어 ( 4 )
살이 익는 냄새.
몇 번을 맡아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냄새다. 전장을 가득 지배하는 냄새는 비릿한 철의 냄새, 화약의 냄새, 피의 냄새보다도 우선 살이 익는 냄새가 되기 마련이었다. 불만큼 빠르게, 값싸게, 고통스럽게 인간을 죽일 수 있는 것이 없었으므로.
"27번 구역에서 적이 도성 시도 중! 끓는 기름을 가져와!"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 그에 따라 몇 명의 사람들이 기름이 끓는 가마솥을 들고 움직인다. 목표는 적군이 기다란 갈고리 밧줄을 매달아 성벽을 기어오르고 있는 지역. 하나의 가느다란 줄에 매달려, 몇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성벽을 기어오르고 있다. 그 줄의 바닥에는 건초더미가 깔려 있다. 혹시라도 떨어지게 될 때, 낙하의 충격을 줄이고자 깔아놓은 것이었다.
"부어! 다 바삭바삭하게 만들어버려!"
줄을 잘라보았자 저 건초더미에 힘입어 다시 살아나서 다른 벽에서 기어오를 것이 분명했으므로. 이렇게 기름을 부어 전부 튀겨버리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대응법이었다.
아이는 얼른 그 가마솥을 나르는 이들에게 다가가 어깨를 대 운반을 돕고, 누렇게 끓어오르는 기름을 밑에 쏟아부었다.
"끄아아아악!"
"버려, 버려! 들켰다, 피해!"
줄을 놓치고 바닥으로 떨어지려 하는 적병. 한 명은 위치가 좋지 않았다. 기껏 깔아놓은 건초를 피해 떨어지는 바람에, 보기도 끔찍한 참혹한 형태가 되어 뭉개져버린 것이다.
"셋, 둘, 하나, 방사!"
다음 순간, 뒤에서 일제히 흰 주머니가 날아올랐다. 그 안에는 생석회가 가득 들어 있다. 공중에서 끈이 풀려 폭죽처럼 터지는 흰 주머니들은 적군이 잔뜩 몰려 있는 곳에 석회가루를 눈처럼 쏟아부었다.
생석회, 산화칼슘은, 물과 만나면 수화반응을 일으키며 순간적으로 매우 높은 온도로 끓어오른다. 즉 인간의 눈, 입술과 같은 점막에 만나면 하얀 불의 독이 되어 그 인간을 불태운다는 뜻이었다. 또 한번 인간의 살 익는 냄새가 끓어오른다.
"뚫렸다! 19, 19번이 뚫렸다! 지원! 지워어어어언!"
19번은 분명 공성탑이 접근하던 구역이었다. 아이는 숨돌릴 새도 없이 바로 19번을 향해 달려갔다. 아이의 임무는 즉응, 성벽을 원형으로 순찰하며 지원이 필요한 곳에 즉시 손을 빌려주는 역할이었다.
"제기랄, 저 칼은 대체 뭐야!"
"화살! 화살로 대응하는 게 낫겠다!"
공성탑의 끝에 올라선 세 명의 중갑 검사들이 성벽에 상륙해서, 다음 적군들이 올라올 길을 트기 위해 구역을 형성하려 시도하고 있었다. 그들이 들고 있는 검은 아주 특이했다. 길이가 2미터는 되어보이는, 만곡한 날의 큰 칼.
아이에겐 무엇보다 익숙한 검이었다. 레고르가 쓰는 것과 같은 대태도였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쓰기에는 너무 거대한 그 칼을 상대해 본 적이 없는 병사들은, 어떻게 대응해야할 지 몰라 우왕좌왕하며 속수무책으로 길을 열어주고 있었다.
"비켜요!"
아이는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치는 한 병사의 어깨를 디딤대로 밟고 도약해, 모든 힘을 담아 세로로 내려찍는 검격을 날렸다. 속도 때문에 일순 활처럼 굽어 보이는 아이의 장검에서는, 새빨간 빛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쫘자작-
그 검격이 끝났을 때, 그 불의의 기습에 대응하지 못한 불운한 검사는 투구째로 머리가 반으로 쪼개져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 처참한 죽음을 본 적의 기세가 꺾였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설표, 설표다! 기나센의 눈표범이 이곳에 왔다!"
일어나는 함성. 그 전에 있었던 몇 번의 활약 때문에, 아이는 주변의 용병단에게서 눈표범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처음에는, 순전히 외모 때문에 얻은 암고양이라는 별명이었는데, 거듭된 격전에서 무훈을 쌓아올림에 따라 변화한 것이었다.
낯부끄러운 별명이라고 생각했지만, 사기를 끌어올리는 데 이용될 수 있다면 그것도 좋다고 생각했기에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 전설과 허명도 실질적인 힘이 되는 곳이 전장이기에, 전장은 언제나 전설과 신화의 탄생지가 되기 마련이었다. 실제로 그 말을 들은 이 구역의 병사들은 크게 용기를 얻어 다시 포위망을 조여들기 시작했다.
"네가 그 기나센의 뭐시기냐? 이름은 익히 들었다. 서로 검사로서의 자존심을 걸고, 여기서 제대로 결투를..."
"시간 끌지 마."
능청스럽게 시간을 끌려고 하는 적병의 수작을 무시하고, 문답 무용으로 달려드는 아이. 한껏 낮춘 자세에서 번개처럼 칼을 올려쳐 적의 대태도를 후려치고, 적의 자세가 무너지자마자 찌르기로 전환. 가느다랗게 뚫린 투구의 눈구멍을 놓치지 않고 세차게 검을 꽂아넣었다.
푹, 붉은 빛이 넘실대는 검날은 코를, 목구멍을, 뒤통수와 투구마저 가르고 뒤로 빠져나왔다. 그 자는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절명했다. 순식간에 공성탑의 선봉에 선 두 명의 정예 무사를 쓰러뜨린 것이다. 그러나, 너무 세차게 박아버렸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아이는 빈 손이 되었다.
"으아아아아압!"
적도 날카로웠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어디로 피하든 덮치겠다는 의지로 크게 날아드는 일격. 어설프게 피하려 했다간 꼼짝없이 허리를 범해지고 마는 묵직하고 넓은 일격이었다. 아이는 재빨리 바닥에서 이 남자가 떨어뜨린 대태도를 주워들고, 적의 일격을 받아치기 위해 자세를 취했다. 마치 투포환 선수와 같은 자세였다.
"아니? 이 자식, 대체 어떻게 그걸..."
순간적으로 상대의 얼굴에 당혹함이 떠오른다. 무시하고, 아이는 림과 함께한 환상 속에서 수없이 보았던 일격을 따라해 휘둘렀다. 츠츠츠, 대태도의 날을 타고 차오르는 붉은 빛. 서로 검이 부딪혔을 때, 형편없이 부서진 것은 적의 대태도였다.
아이가 쥔 대태도는 칼을 깨부순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 남자마저 비스듬히 베어 넘겨버렸다.
"한 번 썼는데 날이 상했네."
숨을 몇 번 내쉬고, 대태도의 상태를 확인한 다음 내버리는 아이. 대태도를 쥔 김에 레고르의 기술을 따라 해보았지만, 그렇게 잘 되지는 않았다. 검의 각을 잡고 유지하는 노련함이 모자란 듯 싶었다.
"역시 나는 이게 나아."
남자의 얼굴을 꿰뚫고 바닥에 처박힌 장검을 뽑아드는 아이. 그 검날은 멀쩡했다. 그렇게 칼을 뽑아드는 순간 세상이 터질 듯한 함성이 울렸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이길 수 있어, 이길 수 있다고!"
"수간이 취미인 카나기 졸개 새끼들아, 빨리 가서 개 자지나 빨아라! 우리한테는 기나센도, 아지프의 대마도사도 있다!"
미친 듯이 터지는 함성, 야유, 조롱. 공성탑의 맨 위에 올라서서, 선봉으로 성벽을 공략하는 일은 보통 정예 중의 정예가 맡게 되어 있었다. 아이에게 쓰러진 검사 세 명 모두, 일반적인 병사가 적이었다면 10대 1도 거뜬했을 정예들이었을 것이다. 그 셋을 차 한 잔 마실 시간에 전부 해치워버렸으니, 사기가 치솟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적은 반대로 사기가 꺾였다. 금방이라도 병사를 쏟아낼 듯 성벽에 달라붙어 있던 공성탑이 천천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정예병을 보충해서 다시 들이치겠다는 심산이었다.
"물린다! 저 자식들, 공성탑을 물리고 있어!"
"안 돼! 잠깐, 이것 좀 빌릴게요!"
횃불과 기름 주머니를 잡아채고, 크게 도약해 공성탑 위로 올라타는 아이. 공성탑 맨 위에 남아 있던 병사들은 기겁했다. 방금 아이가 중갑의 정예병 세 명을 어렵지 않게 베어넘기는 걸 눈 앞에서 목도했기 때문이다.
"아, 안 돼, 저리 가!"
패닉에 빠진 그들은 당황해서 허우적거리더니 탑에서 뛰어내렸다. 차라리 그게 더 살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 듯 했다. 아이는 공성탑의 중앙으로 접근해,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공성탑은 불이 쉽게 붙지 않도록, 무두질하지 않은 짐승의 생가죽으로 촘촘히 덮여 있었다.
주머니칼을 꺼내서 그 가죽을 찢는다. 십자로 몇 번 칼질을 하자, 가죽이 다 찣겨나가고, 목재 재질이 뼈처럼 드러난다. 아이는 거기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였다.
"이만하면 충분히 잘 타오르겠지."
그 말대로였다. 위에서 시작된 불길은 공성탑 내부에 번지며 순식간에 골조를 사르기 시작했다. 잠시 후면 공성탑 전체가 불타 무너질 것이었다. 그렇게 되기 전, 다시 도약해 성벽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공기를 찢어발기는 괴성.
가장 두려워하던 것이 도착했다는 신호였다. 동시에 아이가 올라타 있던 공성탑이 천천히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공성탑 전체를 밑에서 붙잡고, 수수깡처럼 들어올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게 가능한 존재는 이 전장에 단 하나밖에 없었다.
"잔'크낫츠, 그게 도착했다!"
다시 한 번 괴성이 터진다. 자칫 떨어질 뻔한 아이는 어떻게든 공성탑에 매달려 그 위로 올라타고 성벽에 소리쳤다.
"피해요! 이제 이 구역은 버려요!"
"뭐? 아, 아니 그게 무슨..."
"이 놈은 괴물이에요! 이놈 상대로 어설프게 저항해봤자 희생만 늘어나요! 이놈이 도착한 구역은 지연전도 펼치지 말고 그냥 깔끔하게 포기하라는 지침이 있었어요!"
"그럼 당신은?!"
"어떻게든 살아 볼게요!"
그 말을 듣고 바로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병사들. 잔'크낫츠는, 공성탑을 하늘 끝까지 들어올렸다. 마치 검도의 상단세와 같은 자세였다. 아이는 그 동안 공성탑에 매달려 어떻게든 잔'크낫츠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아까 보았던 것과 거의 같은 모습이었는데, 다른 점이 있다면 커다란 철갑옷으로 배에 뚫려 있는 구멍을 가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
끝까지 들어올린 공성탑을 성벽에 내려찍는다. 장난감처럼 부서지는 공성탑. 그러나 그 사이에 아이는 없었다. 그 동안 아이는 불타는 공성탑을 타고 달려가 잔'크낫츠의 어깨에 도착했다.
"하아아아압!"
기합을 내지르며 장검을 꽂아넣으려 애쓰는 아이. 그러나 신기를 담아 내려찍은 일격인데도 흠집 하나 가지 않았다. 말도 안 돼, 라고 탄식할 시간조차 없이, 다음 일격이 몰아쳤다. 어깨에 무언가가 달라붙은 걸 눈치챈 잔'크낫츠가 손으로 어깨를 짓누른 것이다.
"끅..끄으으윽...."
자신을 파리처럼 찍어누르려는 잔'크낫츠와 힘 싸움을 하던 아이는, 간신히 틈을 타 바닥에 떨어지는 방식으로 거기서 벗어날 수 있었다. 턱, 철갑옷의 리벳 부분에 한 손을 붙잡고 매달려 떨어져 죽는 걸 면했다.
"이... 갑옷... 분명히, 아까는 없던 거지."
그럼 왜 갑옷을 둘렀을까. 둘러야 하는 이유가 있으니 두른 것일 거다. 아이는 잔'크낫츠의 난동을 견디며 어떻게든 갑옷에 들러붙었다.
"응?"
갑옷 중간에 무언가가 이질적인 비늘들이 있는 게 보였다. 그 모인 것들은 마치 문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는 온몸을 강화해 그 문에 몸을 들이받았다. 텅! 커다란 소리와 함께 갑옷이 뚫리고, 내부의 공간이 나타난다.
"이, 이 자식, 넌 뭐야! 바깥 놈들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당황한 목소리가 들린다. 들었던 목소리였다. 아까 잔'크낫츠가 말을 듣지 않아 화를 내던 카나기의 마도사의 목소리다. 아이는 순식간에 이게 무언지 눈치챌 수 있었다.
잔'크낫츠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4위계 이상의 마도사가 달라붙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놈의 배에 뚫려 있던 구멍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마도사가 올라타 이 놈을 통제하기 위한 일종의 조종석이었다.
"흡!"
생각은 길었지만 판단은 빨랐다. 너무 거리가 짧아 장검은 오히려 무기가 되지 못했다. 단도를 꺼내 마술사의 목을 찌르러 짓쳐드는 아이. 금방이라도 마술사의 목을 꿰뚫고 피분수를 토하게 만들 것 같았던 단검은, 그러나 보이지 않는 힘에 막혔다.
"죽어!"
4위계 이상의 마술사가, 갑옷처럼 온몸에 두르고 있는 마술 방벽이었다. 마치 끈적한 벌집에 붙들린 것처럼 단도는 그 마술 방벽에 붙잡혀 움직이질 못했다. 간신히 팔을 뽑아내자, 이번엔 칼날 같은 기류가 아이의 뺨을 덮쳐왔다.
좁은 가운데서도 겨우 몸을 비틀어 피했으나 뺨에 긴 상흔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이는 마술사가 다음 공격을 시작하기 전 달라붙어 박치기를 갈겼다.
"윽!"
중량이 큰 것은 힘겹게나마 마술 방벽을 뚫을 수 있었다. 아이의 단단하기 그지없는 머리가 마술사의 코를 뭉갰다. 다시 한 번 머리를 들이 찧고, 마술사의 머리를 붙잡아 어떻게든 벽, 즉 잔'크낫츠의 배에 들이받으려는 순간.
잔'크낫츠가 움직였다.
"ㅡㅡㅡㅡㅡㅡㅡㅡ!!!"
거대한 손이 갑옷을 부수고 자신의 배를 더듬었다. 그러나 그 손은 마술사와 아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두터운 손이 마술사를 짓이기려 짓쳐든다. 어쩌면, 이 거인에게 있어서 더 증오스러운 적은 마술사일지도 몰랐다. 마술사는 사색이 되어 다시 글라도바키아를 붙잡았다.
"아냐, 이 자식아, 아니라고!"
다시 한 번 굉음이 울리고, 손이 움직여 배의 조종석에서 빠져나갔다. 그 틈을 타서, 아이는 등에 차고 있던 갈가마귀를 꺼내들었다. 앞 결합부를 더듬어 숨겨진 손잡이를 붙잡는다. 단검은 중량이 낮아 실패했지만, 이거라면 가능하다!
바웅ㅡ
둔탁하고 무거운 파공음. 아이는 마술사의 목을 쪼개놓기 위해 깔끔한 윈드밀을 시전했다. 3위계 이하의 마술사라면 여지없이 턱이 쪼개져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위의 마술사는 달랐다. 그는 한 손에는 글라도바키아를 들고 잔'크낫츠가 폭주하지 않도록 통제하면서도, 입으로는 또 다른 저주를 완성했다. 결박의 저주였다.
"큭!"
아이의 몸은 마치 뱀에게 묶인 것처럼 갈가마귀를 쳐든 채로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아무리 몸을 뒤흔들어도 그 저주를 깰 수가 없었다.
"젠장, 어디서 이런 미친 놈이 기어든 거야? 재주는 잘 봤다만, 필부가 마술사를 이길 수는 없는 법이란다. 아무리 강한 고양이라도 사자에겐 귀여울 뿐이듯 말이다."
유들유들 웃으며 아이가 떨어뜨린 단검을 집어드는 마술사. 그는 아이의 가슴을 더듬어 심장을 찾더니, 왼쪽에서 박동이 느껴진다는 걸 확인한다.
"잘 가거라."
푸욱! 단검이 아이의 가죽갑옷을 찢고 심장에 처박혔다. 아이는 갈가마귀를 든 채로, 뒤로 털썩 고꾸라졌다. 조종석의 바깥으로 떨어져간다. 마술사는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다시 잔'크낫츠를 통제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잠시 통제를 벗어난 사이 이 놈은 때리라는 성벽은 안 때리고 인간을 집어 쳐먹고 있었다.
"내려 놔, 이 개자식아 , 내려 놔!"
뒤돌아서서 잔'크낫츠의 배를 붙잡고 마구 소리지르는 마술사. 그러느라, 바깥으로 떨어지지 않고 구멍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는 하얀 손을 보지 못했다. 다음 순간, 그 손의 주인은 번개처럼 뛰어올라 조종석에 달려들어 갈가마귀를 횡으로 크게 휘둘렀다.
"윽!"
불의의 기습에 허리를 크게 베인 마술사. 아이는 그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머리로 마술사를 마구 들이박았다. 쾅, 쾅, 쾅, 박치기라기보다는, 망치로 못을 들이박는 것 같다. 마술사의 이빨이 다 깨져 부서져내린다. 아이의 이마도 성치는 않았다. 붉은 피가 흘러내려 턱끝에 아롱졌다.
"미,미친, 넌 뭐야. 왜, 왜 심장을 찔리고 살아 있는 거야!"
비명 같은 마술사의 목소리. 그러나 아이는 대답해줄 생각이 없었다. 아이는 마지막으로 갈가마귀를 높이 쳐들어, 그 굽은 날을 마술사의 입에 쳐박았다. 퍽! 마술사의 눈동자가 희게 변하고, 뒤로 풀썩 쓰러졌다.
동시에 세상을 터뜨릴 듯한 굉음이 울려퍼졌다. 해방된 노예가 내지르는 포효.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뭐야, 뭐야아아아!"
"이 자식, 우리 편 아니야? 왜, 왜 이러는 거야!"
완전히 통제에서 풀려난 잔'크낫츠가, 성벽을 부수는 대신 카나기의 병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성까지 자재를 나르던 벨루스가 꼬리를 붙잡혀 그 입으로 사라져간다. 잔'크낫츠는 닥치는대로 주변의 무언가를 집어 쳐먹기 시작했다.
그 난리법석을 피우는 통에, 아이 역시 조종석에서 바깥으로 발사되듯 내던져졌다.
"쿨럭, 쿨럭."
간신히 신음을 내뱉으며 텅 빈 성벽을 기어올라간 아이. 잔'크낫츠는 이성을 잃고 난동을 부리고 있다. 방금 죽은 마술사를 대신할 마술사가 도착할 때까지는, 시간의 여유가 생길 것 같았다.
아이는 성벽의 그늘에 몸을 기대고, 아직도 심장에 꽂혀 있는 단검의 손잡이를 꽉 잡았다. 손잡이를 붙잡자 자신의 심장 박동이 느껴진다.
"한 번에, 한 번에... 우욱!"
아이는 심장에서 단검을 뽑아 바닥에 내던졌다. 아이가 가진 재생력 덕분에, 심장에 칼을 찔려 찢기는 순간에도 재생이 일어나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이의 목숨을 끊으려면 이렇게 수복이 쉬운 깊고 작은 상처가 아니라, 둔중하고 거대한 참격이 필요했다.
예를 들자면,
"믿을 수 없군. 너, 대체 정체가 뭐냐."
저렇게 바닥에 질질 끌리며 다가오는, 대태도의 것 같은.
"사형?"
아이는 입에서 피를 한 줄기 흘리며 고개를 쳐들어 자신에게 다가오는 자를 바라보았다. 레고르였다. 자기가 잔'크낫츠를 보면 전부 퇴각하라고 해 놓고 왜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일까. 혹시, 내가 위험하다는 소리를 듣고 구하려 온 걸까? 설마, 그럴 리가.
아이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간신히 감기려는 눈을 뜨고 레고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레고르의 눈은 지금까지 보았던 어떤 때보다도 험악했다.
"처음에는 그저 재능이 있을 뿐인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상처를 회복하는 힘, 재생력이라고 하던가? 그게 있는 걸 보곤, 약간의 마술적인 혈통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지금 보니, 이건 명백히 그 범주를 넘었다. 너, 인간이 아니군?"
싸늘한 목소리. 배제해야할 적을 발견했을 때 레고르가 내는 목소리였다. 아이는 성벽에 몸을 기대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성장 속도도 정상이 아니야. 열다섯에 이미 신기를 무기와 합일하는 법을 완전히 터득하고, 4위계의 마술사를 죽일 수 있다니... 야만인들의 땅에는, 바오밥이라는 나무가 있다지. 주변의 물과 영양을 모두 탐욕스럽게 쳐먹고 하늘을 찌를 듯 자라 자기 외엔 가문 땅밖에 남기지 않는 재앙의 나무가 말이다. 이대로 놔두면, 너도 온 센디엘을 쳐부술 재앙으로 자라겠구나. 이용할 가치가 있어 보여 살려두려 했다만, 기각이다. 여기서 싹을 잘라둬야겠군. 무기를 들어라."
또 그따위 이유로 사람을 죽이려는 건가. 아이는 비틀거리며 장검을 뽑아들었다. 입과 이마에서는 피를 흘리면서. 간신히 검을 비껴 세우고 레고르를 바라보았다. 지금의 전투의 한중간이라던가, 아군끼리 다툴 상황이 아니라던가, 그런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처음으로 진심으로 레고르가 자신을 죽이려고 하고 있는 것이었다. 레고르는 싸늘한 눈으로 최후의 선언을 마쳤다.
"그 간의 정을 생각해서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지. 너, 대체 정체가 뭐냐."
침묵. 아이는 입에 가득 고인 피를 뱉어내고 씹어뱉듯 말했다.
"인간입니다."
"뭐?"
"그냥,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인간이에요."
레고르는 차가운 웃음을 짓는다. 그 냉소가 어떤 무엇보다도 아이를 화나게 만들었다.
"그럼 사형은 뭔데요. 자기가 검이라고 착각하는 정신병자입니까?"
"뭐가 닿는 무언가를 망가뜨리는 형태로 완성됐다, 그러는 겁니까. 그럼, 망가뜨리지 못하게 되면 어쩔 건데요."
"그럼 이 쪽이 망가질 뿐이겠지. 네가 걱정할 이유는 없다."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자 빠르게 일축하는 레고르. 그것이 굉장히 비겁하게 느껴졌다. 아이는 답지 않게, 마음 속에 쌓아놓은 말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일년 전, 그 담배 연기 자욱한 방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쫓겨났을 때부터, 이런 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마음 속에 쌓아놓고 있던 말이었다.
"살아가는 건, 다 열심히 살아가요. 치열하게, 어떻게든, 주어진 환경에서 한 호흡이라도 더 숨을 영위하려고 한단 말이에요. 하얀 새도, 고양이도, 황소도, 목련도, 까마귀도, 까치도, 다 그래요. 때론 그 목표가 보잘것없어 보일 때도 있어요. 그렇게 살아가려고 하는 게 추하게 보일 때도 있어요. 갈 곳 없는 어린아이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던 사람을 죽이고... 동생한테 죄를 뒤집어씌우면서, 혼자만 도망쳤던 사람도 있었어요. 어린아이의 귀를 자르고... 동료를 팔아넘기면서, 별 볼 일 없는 고향을 보려고 발버둥치던 사람도 있었어요."
"그래도, 그래도 그 사람들은 살아 있었어요."
"검은, 살아있지 않아요."
"닿는 모든 것을 망가뜨리고 망가뜨리다 어느 날 덧없이 망가지는 것에 대체 무슨 치열함이 있습니까? 사형, 당신은 계속 현명하게 사는 척 하면서... 똑똑한 척 하면서. 그냥, 도망치고 있는 거에요. 그 날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거라구요. 버림받는 게 그렇게 무서워요? 인간의 악의라는 게, 그렇게 무섭냐구요."
"나도, 죽도록 무서워요. 미움받는 게, 너무 두려워요. 그래도, 한 번만 먼저 다가가서 인사를 해 보란 말이에요. 좋은 사람일 수도 있잖아요."
"사형은 몰랐지만, 여기에는 사형을 좋아하는, 좋아했던, 좋아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었는데."
숨을 헐떡이며 긴 말을 토해낸다. 말을 끝마친 아이는,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레고르는 그 긴 말이 끝날 때까지, 칼을 든 채로 조용히 경청하더니, 피식 웃으며 비꼬았다.
"뭐, 철 지난 생의지 예찬이라도 하고 싶은 게냐? 네 정체를 알았다. 우리 귀염둥이 사제가 이렇게 대단한 시인인 줄은 몰랐는걸."
"시집을 발간할 생각이면 꼭 한 권 사주마. 아마 한 권만 팔리겠지만 말이다."
그 말에 아이 역시 피식 웃고 말았다. 이럴 때까지 말장난인가? 하긴. 이런 말 몇 마디로 고쳐질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이렇게 되지도 않았겠지. 레고르는 신중한 자세로 대태도를 붙잡아, 어깨 위로 견착하듯 들어올리더니 말했다.
"네 몸 상태를 생각해서 첫 공격은 양보하마. 아마 그게 마지막 공격이 될 거다. 전력으로 덤벼라."
진중하게 기세를 갈무리하고 검을 바로세우는 아이. 눈을 가늘게 뜨고 레고르를 바라본다. 어디에도 틈이 없는 철벽 같은 자세. 어딜 노려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 살얼음 같은 침묵을 깬 것은, 아이도 레고르도 아니었다. 새의 울음이었다.
"끼루루루루룩!"
까마귀의 것도, 까치의 것도 아니다. 하지만 들어본 적이 있는 소리였다. 아이는 고개를 홱 돌려 그 새의 울음이 들린 곳을 바라보았다. 성벽 바로 위, 두 사람의 가운데에서, 반쯤 허물어진 성벽을 횃대처럼 붙잡고 서 있는 부리 붉은 새.
귀조(鬼鳥) 세네터. 아지프의 6위계 마술사, 길 아잘록이 어깨에 풀어 기르는 바로 그 새였다. 그것은 그 피처럼 새빨간 부리를 한껏 벌려 불길한 울음을 쏟아내고 있다.
"어, 저, 저건."
등에 갑자기 소름이 올라왔다. 오랫동안 수많은 동물을 열심히 관찰해 온 아이는, 그 새의 울음이 품은 의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환희가 섞인 적의. 그건, 먹이를 발견했을 때의 울음이었다.
"사형! 피해요!"
"뭐? 특등, 갑자기 무슨 소리..."
본능적으로 아이는 그렇게 소리치곤 칼을 내던지고 뒤로 굴렀다. 하지만, 아이의 공격을 기다리고 방어자세를 취하고 있던 레고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대가는 컸다. 아주, 컸다.
우르르릉ㅡ
성벽이 갈라지고, 무저갱으로 이어진 것 같은 검고 몽환적인 구멍이 열린다. 그 구멍으로부터 무언가의 뼈를 깎아 만든 것 같은 거대한 탑이 솟아오른다. 환골탑. 아지프의 시조, 아드마가랄리가 손쉽게 제물을 희생시키기 위해 아지프의 등뼈를 본따 만든 탑.
눈 깜짝할 사이에 그 탑이 솟아올라 레고르가 있던 자리를 덮친 것이었다.
"윽!"
짧은 비명, 그 비명을 마지막으로, 레고르는 세네터가 불러낸 거대한 환골탑에 휩싸여 갇히고 말았다. 잠시 후 그 탑은 물처럼 녹아내렸다. 그 탑이 사라진 자리에는 하얗고 거대한 광물질의 무언가만이 덩그러이 남아 있었다.
"이건... 뭐야. 뼈? 뼈인가?"
갑자기 일어난 일에 정신을 추스리지 못하고, 그것을 만져보는 아이. 잠시 후, 또 다시 불길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윽!"
방금 전까지 아이가 서 있던 자리에 또 다른 환골탑이 솟아올랐다. 아이는 몸을 굴러 겨우 그 탑을 피할 수 있었다.
"저리 꺼져!"
세네터에게 칼을 휘두르는 아이. 세네터는 그러자 푸드득 날아올라, 공중에 잠시 체공하더니 다른 곳으로 날아가버렸다. 연달아 일어난 초월적인 상황을 뇌가 받아들이지 못해 멍하니 서 있자니, 갑자기 또다른 끼루룩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아이의 근처에서 들린 소리가 아니었다. 성벽 아래를 바라보자, 수십 마리의 귀조가 날아다니고 있는 것이 보였다. 탑도 계속해서 수십 군데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이, 이건 뭐야. 이거, 아지프의, 새인데, 아지프는, 아군. 아군이, 왜? 사형은..."
머리가 어지러워 이마를 붙잡고 잠시 서 있던 아이. 잠시 후 눈을 뜬 아이는, 어딘가를 향해 달려갔다. 란페이를 비롯 레이븐사이드의 지도부가 모두 모여 있는 지휘소로였다.
그 뒤에서, 레고르였던 무언가의 뼈는,
조용히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간부들이 모여 있는 지휘소.
란페이는 그 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아라딘폴의 모든 지역에 울려퍼지는 그 울음을 듣고 있었다. 창 너머, 아라딘폴의 상공에서는 무언가가 완성되려 하고 있었다.
사방에서 흰 탑이 나타나고, 그 탑이 사라진 자리에는 거대한 뼈마디가 나타나며, 그 뼈마디는 하늘로 떠올라 어떤 형상을 그려간다. 그것은 우선 거대한 산양의 두개골 같은 무언가를 만들어내었다.
방금 그것에게 목뼈와 울대가 생겼다. 그러자 그것은 귀기 서린 울음을 내질렀다. 귀곡성. 소쩍새가 우는 것 같은 소리였다.
그것이 란페이에게는 갓 태어난 아이가 생을 신고하는 울음으로도, 유모 잃은 아이가 내지르는 울음으로도 들렸다.
"유모 잃은, 유골... 그렇군."
그 순간, 누군가가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들어왔다. 황망한 표정으로 온 몸에 피와 먼지를 묻히고 들어온 아이였다.
"단장님, 모두들, 큰일 났어요. 방금, 밖에서, 사형이..."
그리고 아이는 이 방에 모여 있는 간부들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결연한 표정이었다. 죽음을 결의한 듯한, 결기 어린 표정. 란페이는 조용히 아이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읽어보렴. 방금, 검은 새가 전해준 편지란다."
아이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그 편지를 받아 읽기 시작했다.
[ 란페이 군, 잘 있는가?
지금쯤은 내가 전술했던 좋은 구경거리가 탄생하기 시작했을 거라 믿네.
이걸 보여주게 되어 영광일세, 영광이야.
어떤가? 자네가 흥미있어 하던 그 녀석의 실물은?
실로 가엾지 않은가.
자네가 저 가엾은 아이의 유모가 되어 줬으면 좋겠군. ]
[ 위치를 사수하게.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
그 끝에는 이런 서명이 휘갈겨져 있었다.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밀랍을 녹여 찍은 해골 문양 세 개와 함께.
[ 삶을 희생의 예술로 여기는 자, 우리의 등뼈를 이루는 뼈마디가 되기를. ]
"보낸 사람, 길 아잘록..."
그 순간 산양 모양의 유골은 또 한 번 울음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