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메이지 슬레이어 ( 5 )
"이게... 이게 뭐죠? 무슨 뜻이에요?"
어렴풋이 짐작이 갔지만, 아이는 무너지는 심정을 붙잡으며 반문했다. 란페이는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담담한 어조로 대답한다.
"이 자는, 무언가 연구를 하고 있었어. 이 세상에 우연히 흔적을 남긴, 어떤 초월적인 존재를 소생시키는 연구를. 아무래도 그 연구의 완성을 위한 희생양으로 우리가 선택된 모양이야. 어쩌면, 처음 우리에게 왔을 때부터... 이럴 작정이었던 걸지도 모르지."
"우리 모두는, 저 탑에 빨려 들어가, 저놈을 완성시키는 질료가 될 거다."
아이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서신을 바닥에 내던졌다.
"왜요? 가, 같은 편이잖아요! 우리, 우리도 많이 죽고 다치면서, 열심히 했잖아요. 꾀부리지 않았잖아요!"
"우린 이곳에서, 아지프의 치부를 너무 많이 봐 버렸다. 속사정도, 그들의 전략적 약점도 많이 알게 되어 버렸지. 거기에 용병이야. 카나기가 되었든, 두냐가 되었든, 다음에 그들의 적에게 고용된다면 많이 성가셔질 거라고 생각한 걸 테지."
"무시해요! 돈 몇 푼을 받았다고 해서, 이런, 이따위 명령까지 지킬 이유는 없어요. 제가 선봉에 설게요, 탈출로를, 뚫으면..."
아이의 비명 같은 외침. 고개를 저은 것은 블레어였다.
"그건 불가능하단다. 이 서신에 찍힌 해골 세 개. 이건 아지프의 학장이 일 년에 단 한 번씩만, 기나센을 비롯한 제국의 동맹국에 사용할 수 있는 표식이야. 이 표식이 찍힌 명령서는, 그 동맹국의 국민에 한해서 황제의 칙령과 동일한 효력을 얻는단다."
"이걸 거부하면, 제국이 군사를 일으켜 기나센의 동포에게 쳐들어가도 할 말이 없어져. 그런 명분을 주는, 명령서란다..."
그러더니 껄껄껄 웃는다.
"보기 좋게 외통수에 걸렸지, 그렇지? 이거 부끄럽구만."
아이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지금부터 모두 죽게 될 거라는 데도, 모두 초연했다. 방 안에는 절망이나 슬픔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였다. 이미 죽음을 받아들인 걸까. 아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서신을 다시 주워들었다.
"알았습니다. 저도, 마지막까지 함께 싸울게요."
그 말을 가로막은 것은 잰슨이었다.
"무슨 헛소리냐?"
"네?"
"이건 기나센의 국민한테만 구속력이 있다고 했잖아. 넌 아직 에페 바체의 세 번째 시험을 통과 못 했는데? 넌 그냥 나라 없는 고아지, 우리 국민이 아니야. 꺼져."
"그, 그런, 무슨..."
"에페 바체 시험관은 나다. 난 절대로 인정 못 해."
아이는 무너지듯이 잰슨에게 달려가, 그 팔을 붙잡았다.
"여기서, 여기서 함께 싸울 수 있게 해 주세요!"
잰슨은 의수를 흔들어 그 팔을 뿌리치고, 매몰차게 소리친다.
"꺼지라니까.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너 통과 안 시켜줄 거다."
그런 건가, 그렇겠지. 아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바닥에게 얘기하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저는, 분명히... 그렇게 미움 받아도, 할 말 없지만..."
"어이, 잰슨, 뭐 이런 때까지도 말을 그렇게 하나."
뒤에서 웃음이 터졌다. 블레어의 웃음, 그리고 란페이의 웃음이었다. 블레어는 앞으로 천천히 걸어오더니, 아이의 머리를 세게 쓰다듬었다.
"여기에 널 미워하는 사람 같은 건 없단다."
그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쳐드는 아이. 잰슨의 표정을 쳐다본다. 잰슨의 얼굴에 있는 것은 혐오나 증오가 아니었다. 그는 쑥스러운 듯, 손가락으로 코 밑을 훔치고 있었다. 잠시 그렇게 뜸을 들이던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그래. 이미 용서했다. 넌, 돈 몇 푼 때문에 사람을 죽일 놈이 아니야. 사실 같이 생활하면서, 애저녁에 깨달았어. 그냥 인정하기가 싫었던 거지."
"재,잰슨, 아저씨..."
"칼슨도 이미 용서했을 거야. 그 자식은, 그런, 병신 같은 놈이었으니까..."
이번엔 란페이가 아이를 뒤에서 꽉 끌어안았다. 모든 레이븐사이드의 간부들이, 작별 인사를 하듯이, 그렇게 아이를 한 번씩 끌어안아 주었다. 마지막으로 잰슨 하나만 남았다. 그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집어 던졌다. 아이는 엉겁결에 그걸 받아들었다. 그건 무슨 메달 같은 물건이었다.
"그건 시험을 위탁한다는 증명이다. 이대로 뒤도 보지 말고 달아나서, 기나센에서 그걸 보여주고 시험을 받아라. 마지막 임무야. 할 수 있겠지, 특등?"
황망한 표정으로, 그 메달을 바라보는 아이. 잰슨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우리 모두는 이 서신을 확인하고 나서, 너는 살려 보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것까지 트집잡진 못할 거야."
"우리 모두는, 너 하나는 살려 보내기로 결의했다."
"너는 여기서 개죽음당할 필요가 없어. 너한테는 좀 더 비참하게 뒈질 자리가 있을 거야, 그렇지?"
블레어가 또 웃으며 잰슨의 말을 끊는다.
"정말 말을 예쁘게 하는 법은 아예 모르는 건가? 자네는 엄마한테도 그따위로 얘기를 하겠군. 그러니까 총각 딱지도 못 떼보고 이렇게 죽는 걸세."
"사실, 뗐습니다."
"뭐?"
"지금까지 속여서 미안합니다, 장인어른."
"뭐 이 자식아!"
잰슨의 멱살을 잡을 듯 달려드는 블레어. 터지는 왁자한 웃음. 그 웃음 속에서 아이만 고개를 숙인 채 벗어나 있었다. 아이가 죽으러 가는 쪽이고, 이 사람들이 사는 쪽인 것처럼. 아이는 메달을 어떻게든 주머니에 집어넣으려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면서, 중얼거렸다. 처음으로 부려 보는 응석이었다.
"안, 안 가면 안 돼요?"
"응?"
"또, 혼자 남는 건, 싫은데..."
방 안은 온기로 가득한데, 바깥은 오히려 춥고 무섭다. 그렇게 고개를 숙인 채 떨고 있자니, 누군가가 아이를 감싸 안았다. 등에 손자국이 남을 정도로, 꽉. 그건, 지금까지 보았던 어떤 미소보다도 밝은 미소를 짓고 있는 란페이였다. 마지막 정도는, 웃는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은 걸까.
"여기 모두는, 너를 남길 수 있으니까 이렇게 당당하게 떠날 수 있는 거야. 힘들겠지만, 우리를 도와주렴."
감싸 안은 채로 뒤통수를 토닥이는 란페이. 마치 어머니가 아이를 달래는 것 같은 동작이었다. 뺨을 붙잡고, 속삭인다.
"우리 몫까지 건강하고, 행복하고, 씩씩하게 살아 줘."
목이 메어온다. 아이는 무언가 말을 꺼내려다가, 말도 꺼내지 못하고,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영원 같은 포옹이 끝나고, 뒤돌아서 문고리를 붙잡으려는 순간. 또 한번 누군가가 아이를 와락 끌어안았다.
"한 번만 더, 안아봐도 되겠니?"
뒤돌아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미안, 미안해."
"이렇게 헤어질 줄 알았으면, 더 잘해 주는 건데..."
"너는 내가 만난 아이들 중에서,"
"가장 상냥한 아이였단다."
*
달려나간다.
성에서, 바깥으로.
조병창을 지나, 다리를 지나, 전장을 지나, 밖으로.
"윽, 으으으윽...."
이 사람들과 처음 만나, 생활했던 지난 3년을 거스르듯이, 그렇게, 달려나간다.
'미안, 미안해.'
머릿속에서는 계속 그 음성만이 고장 난 것처럼 울려퍼지고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사과, 그 모래시계 속에서의 악몽. 지금 눈 뜬 현실이, 마치 깨기 힘든 꿈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사과가 머릿속에서 계속 울려 퍼진다. 그게, 무엇보다도 아이를 힘들게 했다.
머리가 쪼개질 듯이 아프다.
"다른, 다른 생각을, 해 보자."
떠오른다. 처음 만났을 때가. 누나에게 버려져서, 아무런 목적 없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때. 머리를 감겨 줬던 일. 처음 받아본 호의가 너무 무서워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 도저히 알 수가 없어서, 달아나던 나를 붙잡아줬던 일, 웃으면서, 받아들여줬던 일.
'미안, 미안해.'
"으으윽, 으으으윽..."
시험을 통과했으면 해서, 몰래 도와주었던 일. 매일 밤, 방에 숨어들어와 상처에 약을 발라주었던 일. 쓰러진 나를 위해 이불을 덮어주었던 일. 떠오르는 건 다 그런 것들뿐이어서, 이제 그것에 보답할 수도 없게 되었다는 것이 같이 떠올라버려서, 생각을 하면 할수록 더욱 사무치게 괴로웠다.
"사형, 알, 알겠어? 사형은 멍청해. 어쩌면, 나보다도... 사형은 전혀, 똑똑하지 않아. 단장님은, 마지막까지, 결혼 같은 얘기는 하지도 않았단, 않았단, 말야."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려 애쓰는 아이. 란페이는, 마지막까지 여동생이나 결혼의 일 같은 건 꺼내지도 않았다. 그저, 건강하고, 행복하고, 씩씩하게 살아달라고만 했다.
"윽, 으윽..."
또다시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사과, 모래시계의 악몽. 춥다. 너무 추워서, 이 자리에서 쓰러져 주저앉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춥다.
이 우주에, 이제 그 모든 걸 아는 사람이 나 말고 아무도 없다는 것이. 고독. 이제 다시 혼자로 돌아갔다는 사실. 그 모든 게, 죽도록 무서웠다.
"아."
앞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달리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비켜!"
피난민일까, 성에서 달아나던 사람 한 명이 그런 아이의 손을 으스러지도록 세게 짓밟고 지나갔다. 아이는 작은 신음을 흘리고, 몸을 일으켜, 그들의 길을 막지 않도록 숲 속으로 비척이며 걸어갔다. 아까부터 들려오는 사과의 말 때문에, 머리가 쪼개지도록 아팠다.
이대로는 도저히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나무만이 가득한 숲, 그 숲에서 나무둥치 하나를 붙잡고 기대어 서서, 아이는 간신히 중얼거렸다. 다시는, 부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이름을.
"림, 림, 림... 있어? 와줘... 이제, 아무도, 없어..."
'세 번 씩이나 부르지 않아도, 곁에 있단다. 어린 순례자야.'
떠난다고 해 놓고, 사실 떠나지 않았던 걸까. 대답은 금세 돌아왔다. 한때 늘 그랬던 것처럼, 붉게 벗겨진 팔이 아이를 뒤에서부터 꽉 끌어안아주었다. 가쁜 숨을 내쉬고, 온 몸을 떨던 아이의 몸의 떨림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림...이, 이 악몽은 뭐야? 누가, 자꾸, 사과를 해. 나는, 사과받을만한 일 한 적이 없는데. 알려줘. 너는, 알고 있지? 림은, 신이니까..."
침묵. 아이를 뒤에서부터 끌어안은 채로, 림은 뭔가를 망설이고 있는 듯했다. 작은 한숨. 림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주 긴 이야기를.
아이와 처음 만났던, 그 날의 진실을.
'그 날, 어두운 석실에서, 나는 내 제단에 머리를 조아린 세 명의 사람을 보았다.'
*
그 날, 어두운 석실에서. 나는 내 제단에 머리를 조아린 세 명의 사람을 보았다.
그들은 모두 그릇된 이름을 부르며, 내 아래 이마를 부딪었지.
나는 희미하게 눈을 뜬 채로, 그들의 영혼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들의 영혼을 헤집어, 과거를 들여다보기 위해서였다.
그들에게 과연 내 사도로 삼을 가치가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
우선 계집아이의 과거를 보았다.
말뚝에 심장을 뚫려 매달린 어버이를 보고 울부짖으며, 진창과 수렁을 헤매는 것을 보았다.
처형대에 올라서서도 그 부모는 그저 딸을 걱정할 뿐이었지.
그 어미는, 아마도 자신의 말을 듣고 있을 딸을 향해서, 마지막으로, 달아나라고 외쳤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살아달라고.
그게 이 여자아이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그날 밤, 이 아이는 허름한 교회에서 그 어두운 교훈을 실천했다.
진심으로 그 여자아이를 연민해, 수녀로 길러 주겠다는 신부의 말을 믿지 못하고, 밤에 그 목줄기를 물어뜯고서는 돈을 훔쳐 달아났다.
살아남을 확률이 가장 높은 선택은, 분명 그것이었으므로.
이제 이것은 자신의 비극적인 삶을 근거로 독버섯처럼 세상에 비극을 퍼뜨려나가겠지.
거기서 나는 흥미를 잃었다.
이런 것을 사도로 삼을 바에야, 그저 석실에 계속 갇혀 있는 게 낫다고 생각했지.
나는 그 어린 마술사의 몸에 불을 일으켰다.
나는 또 보았다.
악마와 인간이 귀접(鬼接)해 낳은 부정한 잡종이, 머리를 비벼 내 제단을 더럽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매우 크게 노했지. 신격에게 악마는, 오물보다도 혐오스러운 것이다. 어떤 신도 그런 것 따위를 신도로 삼고 싶어 하지 않을 거야.
그래도 그것의 반은 인간이었으므로, 나는 구역질을 참고 그 과거를 들여다보았다. 조금이라도 삿된 짓을 했으면, 바로 불태워 정화할 생각으로 말이다.
끔찍했어.
이것의 삶에는 학대와 학대, 그리고 학대밖에 없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작은 방에 갇혀 실험실로 불려 나가기를 반복하며, 매일 죽음보다 더한 고통과 마주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보는 나조차 질려버릴 것 같은 인간의 악의를, 그 작은 몸으로 받아내는 것. 그 아이가 살아오며 한 건 이것밖에 없었어. 그 아이에게 '삶'이란 단어는 고통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어느 날엔 배를 갈리고, 어느 날엔 안구를 적출당하며, 어느 날은 간염 환자의 분변을 먹고, 어느 날은 페스트균을 주사 당했다.
그게 아닌 모든 날에는, 발가벗은 채로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있었지. 어두운 방에 홀로.
그 어둠 속에서, 부족한 영양과 고독에 허덕이면서, 오직 살아남기 위해서.
그 아이의 뇌는 슬픈 진화를 시작했다.
사랑받는 법, 사랑하는 법, 신뢰하는 법, 기대하는 법, 대화하는 법, 그런 모든 것들은, 아마도 이 아이의 삶에선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영양의, 낭비일 뿐이라고. 그 모든 방법을 지워버린 것이다.
지워진 것들의 목록에는 우는 법도 있었어. 아무리 울어도, 구원은 없었으므로.
그렇게 하나의 인형이 완성됐다.
내 앞에 머리 숙이고 있는 이 아이는 이미 마음이 죽어버린, 텅 빈 껍데기나 마찬가지였어.
이 아이는, 이미 이성의 껍질을 쓴 악의 아래 완전히 파괴당해서... 어떤 수를 쓰더라도, 되살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건 신에게도 불가능해 보였어.
나는 조용히 그 몸에 불을 일으켰지.
자비였다.
이런 삶은, 차라리 여기서 끝내주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
나는 또 보았다.
노욕과 광기에 물든 마술사가 지식을 맹종한 끝에, 그의 신을 저버리는 걸 보았다.
그 얼굴은 무엇보다도 추했지.
종이와 펜으로 인간의 얼굴 대신 숫자를 덧쓰길 반복하면서, 자신이 신이라도 된 양 착각한 채 늙어버린 그 얼굴을...
그 주름과 주름 사이마다, 코가 떨어져나갈 것 같은 악취가 배여 있었어.
희생자들이 저주하며 남기고 간 비명, 그 비명에 배인 악취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십오 년 전, 그자는 실험을 하고 있었지.
그건 인간과 악마의 잡종을 만들어내려고 하고 있었어. 하지만 번번이 실패했지.
돈으로 암컷 씨받이를 사와서, 아지프의 지하에 있는 데몬스폰과 강제로 교잡시켜 애를 잉태하도록 만들고는, 그 씨를 받는다는 짓을 했거든.
이건 인간을 다루는 인간의 방식이 아니야.
이건 가축을 다루는 농부의 방식이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태어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래처럼 말라 사라졌다.
그것은 외계에 속하는 존재였으므로.
그걸 지상에 붙들기 위해서는 인간의 넋과 육이 필요했다.
모친의 태반을 받았으니 육이야 있겠지만, 넋이 없었다.
그 넋을 주기 위해서는 어머니의 모성애가 필요했어.
영혼의 문제에 인간이 개입할 수 있는 건 없어.
이건 강압으로 어떻게 되는 게 아니야.
모친이 진정으로 아이의 생을 기원하며, 자신의 넋을 불어넣고, 스스로를 희생하는 것을 택했을 때, 인간과 악마의 잡종은 이 땅에서도 발붙일 살과 넋을 얻고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결론을 내린 건 우습게도 나하트 본인이야.
본인인데도 계속 돈으로 씨받이를 수태시키는 짓을 계속했단 말이야.
왜 그런지 아나? 이 자들은 아무도 사랑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어.
희생의 학파. 이들은 서로를 희생시킬 대상이자 희생을 바칠 대상으로밖에 보지 않았으므로.
아무도! 아무도 그걸 제지하지 않았던 거야.
이들에게 그건 그저 확률과 숫자의 문제였어.
모성애, 그런 유심적인 요소라면, 그냥 백 명을, 그게 안 되면 천 명을, 그게 안 되면 만 명을 들이부으면 언젠가, 돈에 팔려와 악마에게 강간당해 낳은 새끼에게도 애정을 주는 씨받이가 있을 수도 있겠지.
그게 이들의 방식이었단 말이다.
그래서 이 자들은, 인간이었던 모래를 부어 사막을 만드는 게 목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계속해서 가엾은 처녀를 사 와서는 들이부었다.
그렇게 만여 명의 여인이 화장터의 재로, 만여 명의 아이가 모래로 흩어져 사라질 무렵.
한 여인이 발을 들이밀었다.
볼품없지만, 눈만은 아주 특이했지.
석류를 박아넣은 듯한 심홍색이었어.
그녀는 마름병 때문에 기근이 든 마을을 위해 보리 몇 수레와 몸을 맞바꾸어 여기에 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지나왔던 모두가 그랬던 것처럼 씨를 받았고, 열 달이 지났다.
난산이었어.
아무리 진통이 계속되어도 아이가 나오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여인의 배를 갈랐다.
그 속에서 나온 것은, 어미의 것을 똑 닮은 눈동자를 가진 아이였어.
그 아이는 마치 자기 운명을 예감이라도 한 듯이, 울지 않았다.
갈린 배로, 피를 흘리면서, 산모는 아이를 노려보았다.
나를 이런 꼴이 되도록 만든 네가 원망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이.
그 모습을 보고, 출산을 돕던 아지프의 마도사들은 모두 방을 떠났지.
지금까지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아이의 몸이 검게 말라죽어 모래로 변하고 있었거든.
그렇게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이 전부 흩날려질 즈음.
기적이 일어났다.
배가 갈라진 채로, 피를 흘리면서도, 그건 아이를 끌어안고 속삭였던 것이다.
미안하다고.
"미안, 미안해."
"이런 곳에서, 이런 운명으로 태어나게 해서, 정말 미안해."
"하지만 그래도, 엄마는 네가 살아 줬으면 하니까..."
잠깐은, 원망했으나, 그래도 태어난 것에게 죄는 없다고.
그건 용서하고 사랑한 것이다.
고통을 참으며, 아기의 양수로 젖은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여인의 몸이 대신 흩어져 사라지기 시작했지.
넋이 들어갔으니까.
살아 주었으면 한다는 사과의 말.
그래, 네게 사과한 사람들은, 전부 같은 심정이었던 거야.
모든 것을 주고도, 더 주지 못해서 미안한...
그 사과의 말은, 입맞춤을 받은 육체에 영혼을 불어넣었다.
때론 바보스럽게 보일 정도로, 상냥하고 따뜻한 영혼을.
그 영혼은 그 육체에 작지만 위대한 힘을 주었어.
어떤 좌절도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상처로부터 새살을 돋게 하는 힘을.
아이 대신 모래로 흩어지면서,
그 여자는 손과 입마저 흩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기도를 올렸다.
"신님, 부디 이 아이가 행복해질 수 있도록, 굽어 지켜봐 주시기를..."
그게 유언이었다.
무엇에게 기도한 걸까?
악마와 씨받이의 잡종.
그런 걸 위한 신 같은 건 없는데.
바다 위를 표류하는 조각배처럼, 닿을 곳 없는 기도.
그러나, 그 덧없는, 아주 작은 기도는,
"어떤 신에게 닿았다."
나는 석상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죽은 듯 누워 있는 아이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검을 집어라,
어린 순례자야.
"아,아,아아아..."
마지막으로, 나는 또 보았다.
"알았어, 이제, 알았어..."
그 아이가, 다른 아이를 업고 석실을 빠져나가는 것을.
자기보다 작은 아이를 구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 것을.
한때 누나라고 믿었던 자를 지키려 누명을 받아들이는 것을.
몸이 부서지도록, 검을 수련하며, 기대에 부응하려 노력하는 것을.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아파하며,
서투르기 그지없어도.
힘껏 노력하며,
살아가는 것을.
"알, 알았어. 그만, 그만해. 고마워, 림, 항상 내 곁을 지켜 줘서, 고마워..."
"그 여자는, 그러니까."
"내 어머니였던 거구나."
그건 악몽이 아니었다.
삶의 가장 어두운 길목에서, 벽에 부딪혀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단 한 번 들었던 따뜻한 격려. 어머니의 살아주었으면 한다는 바람. 그걸 되새기고자 하는 본능이 보여준, 세상에 지지 마, 그런 응원의 꿈이었다.
*
'아니?'
림은 놀라서 혀를 찼다. 뒷모습만으로도, 뚜렷이 알 수 있었다. 아이의 두 뺨에는, 새하얀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렇구나, 그래, 그랬구나..."
중얼거리던 아이는, 곧 흐느끼기 시작했다. 림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아이를 지켜보기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흘리는 눈물이었다.
피가 나오도록 깊이 파내도 물 한 방울 내어주지 못하는, 황량하고 메마른 사막. 그 같았던 그것은, 어느새 이토록 아름다운 강을 품을 수 있는 싱그러운 초원으로 변해 있었다.
림은 아이를 끌어안은 채로 조용히 속삭였다.
"네 어미는, 네가 행복했으면 한다고 빌었지. 그래, 살면서 즐거웠던 순간이 있었나?"
언젠가 했던 같은 질문.
하지만, 대답은 달랐다.
아이는 눈물을 흘리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있었어. 이젠, 확실히 있었다. 나는, 행복했어."
"나처럼, 부모도, 형도, 이름도, 아무것도 없는 아이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걸, 평범한 사람들처럼, 사람의 곁에서 웃고 떠들며 살아갈 수 있다는 걸, 가르쳐 줬어."
'정말로?'
"응, 그런데, 그런데, 왜, 그걸 또 앗아가는, 거야?"
"끼루루루루루룩!"
마음을 추스르고, 나무에서 떨어진 아이의 귀에 또다시 귀조의 울음이 들렸다. 어둠이 열리고, 뼈의 탑이 솟아오른다. 그 뼈의 탑은 짐을 움켜쥐고 달려가던 피난민 노인을 먹어치웠다.
"뭐, 뭐야!"
"여기까지 왔다! 여기까지 왔어!"
아지프, 그 마술사들은, 용병들을 전부 먹어치운 것도 모자라 피난민도 놓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아파. 가슴이, 죽도록 아파. 나는 지금 매우 슬프고, 그리고."
"화난 것 같아."
아이는 비틀거리면서도, 확실하게 장검의 손잡이를 붙잡고, 그 탑을 향해 걸어나갔다. 언젠가 들었던 말을 되새기며.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는, 다 이유가 있다고 했죠?"
또 하나의 환골탑이 솟아오른다. 이번에 먹어치운 것은,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던 여인이었다. 어머니의 손을 놓친 아이는, 바닥에 엎드려서,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없는 사람은, 아직 찾지 못한 것뿐이라고..."
그것 역시, 귀조는 놓치지 않았다. 그 앞에 다가가, 새빨간 부리를 들이민다.
"이제 찾은 것 같아요."
그 귀조가 또 한 번 탑을 불러내려는 순간, 새빨간 무언가가 그것을 반으로 자르고 지나갔다. 아이의 검이었다. 아이는 장검을 뽑아들고, 그 손잡이를 굳세게 쥔 채로, 선언했다.
누군가가 그토록 듣고 싶어 했던 선언을.
"림, 서원한다."
"내 영과 육을, 이 세상의 모든 마술사를 말살하는 데 바치겠어."
MAGE SLAYER
1권 후일담 #1. 일등석
#1. 일등석
"배움이 필요합니다!"
우렁찬 외침. 길게 늘어진 카펫의 좌우로, 빼곡하게 들어찬 로브 차림의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외친다. 그 붉은 카펫을 밟고 당당하게 맨 앞에서 걸어가는 짧게 친 잿빛 머리의 남자. 그 어깨에는 한 마리의 새가 새빨간 부리로 깃털을 고르고 있다.
그는 길 아잘록, 지금 아지프에서 가장 위세를 떨치고 있는 6위계의 마도사였다.
"오, 이게 앞으로 내 아이의 요람이 되어 줄 탑인가?"
그 형상은 거대한 알 같은, 상아질의 탑을 보며 좋아하는 길. 그의 뒤에는 두 사람의 남녀가 호위하듯 따라 걷고 있었다. 무표정한 여자의 이름은 마리아 칼벨레인, 배교로 파문된 나하트 칼벨레인의 딸. 그리고 남자는 나하트의 조수였던 올셉 가니트였다.
그들이 눈앞에 두고 있는 탑은, 아라딘폴에서 태어난 인조 데몬스폰, 헤카톤 케이레스를 보관할 탑이었다.
아라딘폴의 모든 생명을 빨아들여 탄생한 이 괴물은, 첫 전투에서 훌륭하게 그 가치를 입증해보였다. 카나기의 잔'크낫츠 셋과 맞서 싸워 그 셋을 전부 물리치고 숨을 끊어놓았던 것이다.
충인귀마용(蟲人鬼魔龍), 카나기가 괴물을 나누는 다섯 분류 중 거의 용종에 가까운 마종으로 분류될 정도로 강대한 괴물, 잔'크낫츠. 그 거인 셋을 무찌르며 이 유골이 입은 피해는 뿔과 두개골을 조금 상한 정도였다.
때문에 전쟁에서의 약열세를 우세로 전환시키려던 카나기의 계획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고, 오히려 절대 열세로 평가가 바뀌게 되었다. 그에 따라, 남부 지역의 군대 주둔 권한을 사이에 둔 다툼의 승자도 아지프로 결정되었다.
"예. 그리고, 전투에서 입은 상처를 수복시킬 제물도 여기 준비되어 있습니다. 학장님께서 손짓 한 번만 해도 바로 전부 제물로 바칠 수 있도록, 다리를 부러뜨려 구덩이에 몰아넣어두었습니다."
"그래? 필요 없는 성실함을 보여주었군. 아니, 잠깐. 내가 왜 학장인가?"
그 승전의 일등공신은 누가 뭐래도 길 아잘록이었다. 괴짜 같은 연구에 골몰해, 이토록 위대한 병기를 탄생시킨 자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지금 아지프 내부에서 그의 입지는 더 이상 빠를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굳건하게 다져지고 있었다.
"이미 되신 거나 마찬가지이지 않으십니까?"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아잘록. 그는 무릎을 굽혀, 인간 제물이 가득 들어차 있는 구덩이를 바라보았다. 그 구덩이에서는 뱀굴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은 신음이 가득 흘러나오고 있었다.
"명령대로, 전부 사형을 선고받은 중범죄자만으로 엄선했겠지?"
"예? 음, 그것이, 예. 그렇습니다."
"그럼... 질문을 하나 해 볼까. 저 여인은 대체 무슨 죄를 저질렀나?"
팔에는 푸른 반점이 있고 연신 밭은기침을 하는 여자를 보며 물어보는 길. 올셉은 우물쭈물하다, 문서를 꺼내 그 죄목을 읊어주었다.
"어디 보자, 둔기로 세 명의 남자를 고살했다고 되어 있습니다만..."
"저 여자는 어떻게 봐도 결핵 환자인데. 어떻게 둔기로 남자를 고살한단 말인가?"
그 순간 비명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어머니는 무고합니다, 존경하는 마술사님! 이, 이 사람들은, 그냥, 사람이 모자라니까 아무나 데려온 거에요!"
그 여자의 옆에 앉아 있는, 눈알이 초롱초롱한 아이의 말이었다. 올셉은 벌컥 성질을 냈다.
"이 녀석, 어느 면전이라고 거짓말을!"
"그래? 거짓말이란 말이지?"
다음 순간 올셉은 엄청나게 당황했다. 구덩이 밑을 들여다보던 길이, 풀쩍 구덩이 안으로 뛰어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아이에게 다가가더니,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시 한 번 말해보렴."
그 의중을 눈치챈 세네터가 아이의 목을 감쌌다. 그 아이는 심호흡을 하며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어머니는 무고합니다."
세네터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길은 세네터를 거두어들이고는, 구덩이 안에서 올셉을 돌아보았다. 그 눈은 책망하는 빛을 띠고 있었다.
"이보게, 어떻게 된 건가? 분명히 내가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중범죄자만을 데려오라고 하지 않았나."
"저... 그게, 행정상의 착오가 조금 있었던 모양입니다..."
"혹시 여기에, 이 아이처럼 자신 또는 친지의 무고함을 주장하고 싶은 자가 있나?"
다음 순간. 구덩이 전체가 아우성치듯 끓어올랐다. 다리가 부러져 흙바닥을 기는 그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동아줄을 부여잡듯이 길의 로브를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너무 많은 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기 때문에, 누구의 말도 들을 수 없었지만, 길은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아이의 뺨을 쓰다듬었다.
"잘 했다. 네가 여기 모두의 생명을 구했구나."
그리고 훌쩍 구덩이 바깥으로 몸을 날리고 선언했다.
"풀어주게. 늦어도 좋으니 확실한 중범죄자만을 엄선해서 다시 가져오게."
"하, 하지만, 학장님!"
"누가 학장인가. 위원장이라고 제대로 부르게."
"위원장님, 황제를 비롯해 유력자들이 전부 참관하는 개선식이 바로 다음 주입니다! 그 개선식의 가장 주요한 행사는, 저, 저 위대한 발명품을 보여주고 자랑하는 것이어야 합니다만, 흠결이 있는 상태로 보여드릴 수는..."
"전쟁터에서 입은 상처가 흠결이란 말인가? 풀어주게."
길은 단언했다.
"내가 전부 책임질 테니 풀어주게. 범죄자의 생명이라고 함부로 희생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무고한 이들은 더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나는, 이런 쓸모 없는 희생은 좋아하지 않는다네."
올셉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순간, 구덩이에서 감사의 흐느낌과 함성이 동시에 터져나왔다. 길은 빙그레 웃으며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홱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헤카톤 케이레스가 보관되어 있는 탑을 향해서였다.
거대한 산양의 유골을 감싼 탑. 그 탑에는 나선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길은 두 사람을 거느리고 그 계단을 올라갔다. 아주 태평한 발걸음이었다.
"아, 마리아 군. 저번에 내가 지시한 대로 작성했나?"
"예. 이것의 탄생에 관한 논문에서, 공저자 이름 두 개를 비워두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올셉은 얼굴을 빨갛게 상기시켰다. 이 두 사람은, 아지프를 배교한 나하트 칼벨레인의 가장 가까운 측근이었다. 그 책임을 물게 되어 숙청당할 뻔했으나, 길의 도움을 받아 이렇게 그를 보좌하는 조건으로 살아남은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나하트와 함께 수행한 연구 자료를 길에게 넘겨주는 조건으로 이렇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즉, 지난 몇 년간 그 둘은 항상 길 아잘록을 도왔다는 뜻이었다. 기여분은 충분했다.
'혹시, 우리 둘 이름을 넣어주려고 그러시는 건가?'
올셉의 가슴은 흥분으로 달아올랐다. 이런 위업에 이름을 남길 수 있다는 건, 보통 대단한 명예가 아니었다. 올셉은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조심스럽게 길에게 물어보았다.
"저, 저, 그건, 누구의 이름을 넣으시려고, 비워 두신 겁니까?"
길은 피식 웃더니 발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마리아의 뺨을 붙잡았다.
"자네의 아버지는, 솔직히 말해 천재였네. 아주... 탁월한 천재였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마리아. 길 아잘록은 계단을 휘적휘적 걸어 올라가며, 얘기를 계속했다.
"그 두 공란 중 하나는 마땅히 자네의 아버지에게 돌아가야 할 거야. 나하트 칼벨레인이라는 이름을 새겨넣게. 그는 7위계로 향하는 문을 찾아 헤매이다 지쳐 타락했지. 그런데 말이야, 사실 그는 이미 7위계로 향하는 문에 한 번은 도달했었던 게야. 너무 일찍 도달한 탓에, 설마 이게 그렇게 간단할 리 없다고 지나쳐버린 게지. 너무... 탁월했기 때문에."
헙, 숨을 들이키는 올셉. 배교자에 대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명백한 금기였다. 그러나 길은 그런 금기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계속 말을 늘어놓았다.
"내 성공은, 그가 도달했던 문에 자네들 덕분에 다다를 수 있어서 얻은 거란 말일세. 십오 년 전에, 자네의 아버지는 외계의 존재가 이 땅에 현계할 수 있는 끈으로 모성애를 지목했지. 또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그것을 입증할 샘플도 하나 만들었어. 그런데 말이야, 그 샘플을 자네들은 어떻게 다루었나?"
샘플, 모성애, 머리를 굴리던 올셉은 곧 그것이 실험체 8호를 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음, 그 재생력에 주목해서, 일부러 역질에 걸리게 만든 다음 그 역질의 백신을 개발하기 위한 실험체로 쓰는 방식으로 활용했습니다만..."
"왜 그렇게 낭비했나? 더 유효하게 활용할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는데."
"예?"
"나라면, 심장만 빼내서 재가공했을 게야."
"그, 그러면, 죽어버리지 않습니까? 본체가 죽으면, 심장도 증발..."
"심장을 빼내고 빈 곳을 괴물의 심장으로 채워 넣으면 되지 않겠는가. 낮은 심박으로도 살 수 있게 활동적인 부분은 모두 절제하고 말이야."
"그러면... 3일도 못 가서, 심장이 썩어서 망가질 텐데요?"
"3일도 못가서 썩는다면 3일마다 배를 갈라 갈아끼우면 될 것 아닌가?"
그 끔찍한 소리에 아연실색하는 올셉. 말은 되지만, 일반적인 연구윤리를 초월한 아지프의 윤리마저 또 초월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길은 아까 희생자들을 풀어줄 때와 같은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담담하게 말을 이어갈 뿐이었다. 그의 어깨에서는 세네터가 부리를 매만지고 있다.
귀조의 왕, 세네터를 사역하는 조건으로, 그는 언제나 세네터를 몸에 두르고 다녀야만 했다. 그 상태에서 거짓을 말하면 영혼을 파먹히는 것은 길 아잘록 역시 마찬가지였다. 즉 아까 희생자를 구하던 자비로운 마음도, 이런 끔찍한 수단을 언급하는 마음도, 전부 진심이었다.
마리아는 두려움으로 눈꺼풀을 가볍게 떨었다. 나하트가 가끔씩 이성이 통제되지 않은 광기를 보여주었다면, 이 자는 외과수술용 메스처럼 하나의 용도만을 위해 극도로 예리하게 정제된 광기를 품고 있었다.
쓸모 있는 희생, 진보를 위한 희생에 있어서만큼은, 이 자는 어떤 광인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거리낌이 없었다.
자신의 연구 얘기가 되자 냉소적인 인상이 일변해 어린아이처럼 들뜬 표정으로 변하는 길. 그는 신나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내가 자네 아버지와 교우가 깊지 못했다는 게 안타깝군. 그에게 영혼학에 대해 약간만 귀띔을 해줘도 다른 길을 걷지 않았을까. 그렇게 심장을 꺼내서 말이야, 어떻게 사용하냐면, 아주 우연한 기회에 얻은 어떤 종류의 유물들과 접속하는 접속점으로..."
그리고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다.
"아, 아, 이건 말하면 안 되지. 미안, 미안하네. 나도 언젠가 분명 입방정으로 신세를 망칠 거야. 함묵의 맹세를 해서 더 이상 말할 수 없다네. 아무튼, 그 모성애에 관한 연구가 내가 이 녀석을 만드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사실만은 그의 딸인 자네에게 확실히 해 두고 싶었네. 마음의 빚을 덜기 위해서 말이야."
"과찬이십니다. 이 성과는, 전부 위원장님의 덕이겠죠."
세 사람은, 어느새 계단의 거의 끝에 다다라 있었다. 산양의 유골, 그 가슴 바로 앞에서 계단은 끝나고 있다. 길은 그 끝자락에 멈추어서서 황홀경에 빠진 표정으로 산양의 일부를 어루만졌다.
"그럼, 질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하게."
"남은 공란은 어떤 이름을 채워넣으면 되겠습니까?"
그 말을 듣자 다시 고개를 번쩍 드는 올셉. 그는 아직, 공저자에 자신의 이름을 올라갔으면 좋겠다는 망상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전혀 엉뚱한 이름이었다.
"란페이 우르드. 그렇게 새겨넣게."
"알겠습니다."
"어, 하, 하지만, 위원장님."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 항변하는 올셉.
"그, 그 누구인지도 모르겠는 자가, 이 생물의 탄생에 저희보다 많이 기여했다는 말입니까?"
"많이 기여했지. 어쩌면, 나보다도 말이야."
단호한 선언. 올셉은 거기에 가로막혀 더 이상 반론하지 못하고, 마리아와 함께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갔다. 길 아잘록은 여전히 황홀경에 빠진 듯한 표정으로, 산양의 일부를 매만지고 있었다. 산양의 가슴에, 눈을 감은 채로 하나로 융합되어 있는, 어떤 여자의 얼굴을.
"어때, 일등석은 편안한가, 란페이 군?"
지고한 모성애를 품은 란페이의 영혼은, 이 유모 잃은 데몬스폰을 이 땅에 머무르게 하기 위해, 이 유골의 가슴 한 가운데에 붙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