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25화 (25/279)

1권 후일담 #3. 금기

카나기, 공생의 학파.

그 학파를 이끌며 세 번이나 재선에 성공한 절대적인 입지의 학장, 이신 아이신고르. 이미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이 된 그는, 네 개의 병풍으로 가려진 자신의 방에 앉아 있었다. 손에는 한 벌의 카드를 쥔 채. 그 앞에는 똘망똘망한 눈을 가진 한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의 손녀였다.

"할아버지, 셋 둘 하나 하면 같이 보여주자?"

"허허허, 알았다."

공개된 카드. 두 개의 그림이 드러난다. 이신의 것은 8번, 힘의 카드. 손녀의 것은 15번, 악마의 카드.

"와아! 그럼 내가 이긴 거지? 이긴 거니까 할아버지 것도 내가 먹는다?"

기뻐하며 이신의 앞에 놓인 원소병을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기는 손녀. 이신은 껄껄 웃을 뿐이었다. 그걸 제지한 것은, 아까부터 이신이 손녀와 놀아주는 바람에 본의아니게 무릎을 꿇고 이신과의 접견을 기다려야 했던 남자였다. 구스루 아이신고르. 이신의 아들이자, 카나기의 5위계 마술사였다.

"이 녀석, 아무리 꿀물이 먹고 싶어도 속임수를 쓰면 안 돼."

"무슨 소리야~ 난 바꿔치기 같은 거 안 했어~ 그치, 할아버지?"

"그래, 그래, 우리 손녀는 그런 거 안 했다."

"아니, 학장님. 아무리 손녀가 예뻐도, 교육은 제대로..."

"할아버지, 혼내 줘! 얍!"

"아니, 먹을 걸로 장난치는 건 더 안 된다!"

"얍!"

"아버지, 아니, 학장님도 그러시면 어떡합니까! 나잇값을 좀..."

원소병에 떠 있는 자그마한 떡을 마구 주워다 집어던지며 손녀와 놀아주는 이신. 그런 실갱이를 반복하며 한 시간이 지났을 때. 손녀는 할아버지의 무릎에서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그제서야 구스루는 이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을 수 있었다.

"제 딸 버릇 나빠집니다. 늘그막에 아무리 정 붙일 데가 없어도 그만 좀 예뻐하시지요."

껄껄 웃는 이신. 잉어가 그려진 장죽을 놋쇠 화로에 달구며 나지막히 대답한다.

"내가 정 붙일 데가 없겠나. 나를 스스럼없이 대해주는 사람이 없는 게지. 당장 너도 그렇지 않느냐."

침묵하는 구스루. 그 말대로였다. 눈 앞의 남자는 세 번의 학장 선거를 지나면서 천 이상의 생명을 자기 손으로 해치운 권력애의 화신이었다. 그 손으로 해치운 사람 가운데에는, 자신의 딸도 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자신의 아버지를 대하는 구스루였지만, 마음 한 구석에 남은 께름칙함마저 지우진 못하는 게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런... 천진난만한 신앙을 보면 기쁘다네. 감히 내 앞에서 속임수를 쓰는 것도, 의존하는 것도, 어린아이뿐이니 말일세. 무지한 어린아이."

충분히 달궈진 장죽을 입으로 가져가는 이신. 그는 손녀와 가지고 놀던 타로를 뒤집었다. 8번. 힘의 카드. 검은 황소가 그려진 카드였다. 그는 장죽의 끝으로 그것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인류 최초의 신앙도 그와 같았겠지. 모든 신앙은, 최초에는 이 어린아이의 것 같은 힘 숭배에서 시작한단 말이야. 곰일수도, 호랑이일수도, 황소일수도 있어. 어쩌면 그저 생식력과 장수를 이유로 성기가 큰 거북이의 형태일 수도 있지."

"그리고, 그들이 좀 더 지혜를 얻고 계몽됨에 따라, 신앙이라는 것은 그저 힘보다는 위대한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보편적인 정서에 도달하기 마련이지."

그 다음에 장죽이 두들기는 카드는 11번. 정의의 카드. 칼과 저울을 든 여신이 그려진 카드였다.

"그래서 그들은 도덕과 정의를 만들기 시작한다. 도덕과 선의의 근거가 되어줄, 영원하고, 불멸하며, 무소불위한 어떤 신을 만든다."

"그 다음엔 도덕과 힘을 결합하기 시작해. 어떤 방식으로든 날조해서 말이야. 절대자가 내려준 것이라며 수훈을 날조하고, 십계명 따위를 만들어 법이라는 이름 안에 신성을 가두기도 하지. 이 단계에서 보통 종교와 신앙이 탄생한다."

장죽의 불은 사그라들고 있었다. 이신은 그것을 깊게 한 번 빨아들이고 뱉은 다음, 장죽을 다시 화로에 처박았다.

"그 다음엔 그 신앙 역시 부서진다. 그런 일원적인 형태의 신앙은, 한 가지 의문에 절대로 답할 수가 없거든."

"전지전능하고 절대적으로 선한 신이시여, 당신이 그렇게 선하시다면, 왜 세상을 이런 절망과 악의 구렁텅이로 놔두고 계십니까? 왜 모든 인간은 결국 죽고 마는 것입니까? 인간은 그렇게 이런 도탄이 걸맞는, 본디부터 죄된 존재란 말입니까. 이런 의문 말이지."

13. 사신. 전쟁터에서 칼을 맞대고 있는 두 남자의 곁에서 으스스하게 웃고 있는, 해골 형상의 사신이 그려진 카드를 두들기며 말하는 이신. 구스루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한 마디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그래. 현세란 언제나 그렇게 악의만이 파도처럼 넘실대는 곳이기 때문에, 눈 앞의 현상을 부정하고 순선한 신의 무소불위를 주장할 수가 없어져. 그래서 신을 잘라내어 악의 근거를 만든다."

이번에 장죽이 가리키는 곳은 15번째의 아르카나, 악마였다. 이마에 육망성이 그려진, 거대한 산양의 두개골. 그것이 삽화로 그려진 악마의 카드.

"선신에 대응할 만큼 전능한 악신이 존재한다거나, 신도 제압하지 못하는 악마가 있다거나, 이런 형태의 신앙을 만들어 실존하는 악의 책임을 악마에게 지운다는 말이지. 악마도 나름대로는 억울할 게야. 그렇지?"

치이익. 뜨겁게 달궈진 장죽을 오래 대고 있던 탓에, 산양의 이마가 검붉게 타들어갔다. 이신은 천천히 그 장죽을 들어올리곤 깊이 한 모금 빨아들인다.

"그 과정에서, 어떤 종류의 신앙은 신을 너무 많이 잘라내어 너무 거대한 악을 만들고 섬기기도 해. 악의 근거로 인간의 죄된 본성을 지목하고 원죄를 주장하기도 한다. 아탕칼리의 얼간이들처럼 말이야. 아무튼, 이런 과정을 마친 인간의 신앙은 드디어 최후의 단계에 접어들지."

이신은 입에서 흰 연기를 토해내고는 장죽으로 마지막 카드를 가리켰다. 21번. 위에는 천상이, 밑판에는 지옥이 그려진 모래시계의 카드. 세계의 카드였다.

"이런 작업을 끝낸 인간은, 악과 선이 영원히 투쟁한다는 형태의 신앙을 만든다. 그것만이 선의와 악의가 공존하는 현세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신앙이기 때문이지."

푹! 화로의 잿더미 사이에 장죽을 비수처럼 꽂아넣는 이신. 그는 엎드려서 세계의 카드를 툭툭 건드리며 중얼거렸다.

"투쟁. 그래, 오직 인세의 보잘것없음을 가리기 위해 만들어진, 그 허무에 바치는 값 없는 투쟁 말이야. 이 모래시계의 모래들도 어쩌면 저들 딴에는 힘차게 투쟁하고 있는 거겠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질 땐 천상을 증오하고, 아래에서 위로 떨어질 땐 지저를 증오하며, 그걸 한 몇천 년쯤 반복하면... 어디가 위인지 아래인지도 구별하기 힘들겠지만."

"최초의 신앙은, 그저 성기가 큰 거북이나 곰가죽을 뒤집어 쓴 인간의 형상이었지. 지금 우리의 신앙은 이런, 모래시계와 같은 형태일세."

"그 다음은 어떤 형태를 띄게 될까? 난 가끔 그게 너무 궁금하다네."

그 말을 다 들은 구스루는, 곰곰히 생각하다 결국 결론을 내렸다. 그냥 외로운 늙은이의 잡담이었다고.

"그 신화학인지 비교종교학인지 모를 강의는 잘 들었습니다만, 그래서요? 저를 부르신 이유는 언제쯤 들을 수 있습니까?"

"예끼. 이 놈."

"아! 불 붙은 장죽으로 때리시면 어떡합니까! 잘못하면 머리에 불 붙어요!"

"이 놈."

그렇게 세 번 정도 구스루를 때린 이신은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요는, 위도 아래도, 그 순수한 힘은 동일하다는 말일세. 늑대와 양치기 개가 양을 두고 다투지만 사실 같은 종인 것처럼. 인간을 사이에 두고 다투는 신도 악마도 그 의지를 배제하면 육은 같다는 게야. 그들의 혐오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동족혐오일지도 몰라."

"선문답은 아까로 끝내기로..."

"이번에 우리가 잔'크낫츠 셋을 희생하며 얻은, 아지프의 새로운 병기의 샘플. 그것의 뿔 말일세. 연구원을 모아 총력을 다해 그것을 분석한 결과 한 가지 결론을 얻었다네."

갑자기 나온 실천적인 이야기에 깜짝 놀라서 경청하는 구스루. 이신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이것은 천 년 전, 어떤 신이 사산한 데몬스폰의 유골을 특이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가공하여 만든 물건이라는 게지."

"특이한 용도라면... 어떤..."

"부활."

"예?"

"어떠한 이유인지, 죽음을 매우 심하게 염려하던 그 고대의 신은, 혹여라도 자신이 소멸하더라도 부활할 수 있도록 자신의 신격 일부와 엄청난 양의 신기를 그 안에 집어넣고 깊이 숨겨두었다. 악마도 신도 그 육은 본디부터 같기 때문에, 그런 용도로도 가공이 가능했던 게지. 매우 정교한... 마술을 다루는 신이라면."

"그리고 그게 아지프의 손에 들어가서 저 꼴이 된 게야."

구스루는 눈을 파르르 떨었다.

"그럼, 그건 하나의 거대한 걸어다니는 제단이란 말입니까?"

"그래. 내 아들이라 역시 이해가 빠르군. 죽은 신을 부활시킬 수 있을 정도로 신기로 가득한 제단 말이야. 그걸 자신의 수족처럼 부리고, 그 가득한 힘의 근원에 함부로 접근할 수 있는 길 아잘록은, 사실상의 합법적인 아나테마나 다름없다는 뜻이지."

경악하는 구스루. 아나테마가 되는 것은 모든 학파의 공적이 되어도 할 말이 없는 중죄였다. 그런데 아지프는, 아주 우회적인 방법으로 은밀하게 자신의 학파 안에 아나테마를 확보하려 시도한 것이다.

"어쩌면 센디엘은, 몇 백년 만에 7위계의 탄생을 보게 될 지도 모르겠군."

"당장 고발해서 죽여야 합니다! 그, 그런데 입증할 증거는 어떻게..."

"진정하게. 진정해."

"아, 때리지 말라니까요!"

머리를 부여잡고 앉는 구스루.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아냈느냐면, 그 뿔을 갈라 보았을 때 알아낼 수 있었다네. 아마도 제일 먼저 희생의 제물로 바쳐졌을 그 뿔 안에는, 놀랍게도 사람이 들어 있었어. 정신을 잃었다는 것만 제외하면 멀쩡한 채로."

"예?"

"그 걸어다니는 제단 안에 숨어 있던 신이, 자신의 사도로 삼으려고 점찍고 가호를 주어 아지프의 마술에 용해되지 않도록 지키고 있었던 게지. 아지프의 마술에 의해 자신의 제단에서 쫓겨나 망령처럼 되어버린 신격은, 아직도 그 남자 주변을 맴돌고 있다네. 연구원들은 그 남자의 정신을 들여다보고 이 모든 사실을 알아낸 게야."

"그럼... 최고의 증거물이자, 최고의 증인은, 그 남자겠군요."

"바로 맞췄다네. 그래서 그 자는 지금 별채에 연금되어 있지."

쾅. 살짝 불타 있던 악마의 카드 위에, 다시 장죽을 내려찍는 이신. 그의 눈은, 자기 딸을 죽일 때와 마찬가지로 차갑기 그지없게 변해 있었다.

"사람 모습을 했다고 다 사람이 아니야. 가끔 그 사이에 괴물이 숨어 살지. 길 아잘록, 그 자는 어떤 변명의 여지없는 괴물일세. 그런 자와는 더불어 공생할 수 없는 법이지. 지금부터 우리의 가장 큰 목표는, 이 자를 사냥하는 것이 될 걸세. 알겠나?"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아탕칼리의 협조가 필수적이지. 그 자들은 그런 놈들을 목매달아 죽이는 종교재판의 전문가니까. 자네는 지금부터 내 사절이 되어, 아탕칼리 쪽에 다녀와야겠어."

이제야 자신이 불려온 이유를 알게 된 구스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지프 놈들은, 우리가 자신들의 범죄를 눈치챘다는 사실을 몰라. 그리고 그 모른다는 사실은 우리의 최대의 무기가 될 걸세. 그러니 자네는 최대한 은밀하게 아탕칼리 쪽에 다녀와야 해. 조만간 괜찮은 명분을 하나 마련해 주지."

"받들겠습니다."

구스루는 고개를 깊게 숙인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뒤돌아서려는 순간, 하나의 의문이 그의 발을 붙잡았다.

"그런데 말입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뭔가?"

"원래 신은 악마를 죽도록 혐오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데몬스폰의 뼛조각에 자기 정신을 심는다는 짓이 가능합니까? 아무리 소멸하는 게 무서워도..."

"그래. 그건 명백히, 금기지."

이신은 자신의 무릎에서 천사같은 얼굴로 자고 있는 손녀의 뺨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금기를 우습게 여기는 잊혀진 신이어야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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