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27화 (27/279)

6. 고행자 ( 1 )

전쟁이 끝나자 찾아온 건, 평화가 아니라 무질서였다.

처음엔 가짜 전쟁을, 그 다음엔 대리전쟁을, 마지막엔 아라딘폴 공성전으로 화려하게 끝맺은 북서 자치령의 전쟁. 그 진정한 패자는 카나기가 아니라, 북서 자치령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전쟁 금지 칙령을 악용하면서 마지막까지도 전쟁을 했던 두 학파의 추잡한 대립. 그걸 본 라달라리아는, 그 이후 악용의 여지를 완전히 없애기 위해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 카나기와 아지프의 마술사들 중 한 사람이라도 북서 자치령에 발을 들이미는 순간, 칙령 위반죄로 의율한다는 조치였다.

따라서, 모든 카나기와 아지프의 마술사는 북서 자치령에 발을 새로 들이밀 수 없게 되었고, 북서 자치령의 유력 가문을 후원한다는 형식으로 주둔해 있던 모든 카나기와 아지프의 세력 역시 빠져나갔다.

그 빈자리를 메꾼 것은 카나기와 아지프에게 쫓기던 이들이었다.

전쟁 금지 칙령으로 인해, 그들에게 있어 북서 자치령은 이제 카나기와 아지프에게서 몸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안전지대가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카나기와 아지프조차 보아 넘길 수 없는 범죄를 저질러 파문당한 자, 전쟁범죄를 저지른 자, 정치적으로 숙청당한 자, 누명을 쓴 자 등 그 사연은 다양했지만 공통점은 있다. 질이 나쁘고, 폭력에 굶주려 있으며, 제국민조차 아닌 자치령민을 벌레보다 못한 목숨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그들은 양 떼 사이에 들어간 늑대처럼 마구 학살, 강간, 약탈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압제라는 형식으로나마 무법자들을 통제하던 카나기도, 아지프도 떠났으므로, 자치령은 도저히 이 새로운 불청객들을 통제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들에 맞서 영민들을 보호해야 했을 토착의 유력 가문들은 당연히 모두 책임을 회피했다. 사실 아무도 기대하지조차 않았다.

전쟁으로 유린당하고 유린당한 끝에 이 땅은, 결국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잃은 것은 거의 모든 것. 얻은 것은, 피로 물든 붉은 강뿐이었다.

"그렇다는 말이지. 이 썩은 부대자루야."

"끄아아아아악!"

살을 뚫고 십자가에 꽂히는 쇠말뚝. 닿으면 베여버릴 것처럼 날카로운 턱을 가진 금발의 사내가, 새까만 철로 만든 말뚝을 꽂아넣으며 미소를 짓는다. 그는 소맷단을 금사로 수놓은 진홍색 법의를 입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아탕칼리의 마술사라는 뜻이었다.

북서 자치령의 혼란을 보다 못한 카나기와 아지프는, 자신들 대신 북서 자치령에 몰려든 쓰레기들을 치워줄 사람을 고용했다. 용병이 마술사를 잡는 건 희생도 크고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으므로, 당연히 마술사를 고용해야만 한다. 마술사 잡는 마술사.

그들의 이름은 아탕칼리. 정신의 학파였다.

"너는... 아마 카나기의 2위계 허섭스레기겠구나. 네 모가지를 잘라 가면 종단에서 주는 돈은 고작 300루덴. 맙소사, 밑지는 장사잖아."

또 하나의 말뚝을 꽂아넣는 아탕칼리의 마술사. 그는 손을 더듬어 다음 말뚝을 찾다가, 말뚝이 다 떨어진 걸 확인하자 고개를 돌렸다.

"새 말뚝을 다오."

그의 뒤에는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새까만 후드를 뒤집어쓰고, 한 손에는 커다란 새장을 든, 잿빛 날개의 천사가 유령처럼 떠 있었다. 그것의 이름은 새장의 천사 라그엘. 아탕칼리가 자신의 4위계 마술사에게 선사하는 종복이었다. 이 마술사가 아탕칼리의 4위계 마술사라는 뜻이었다.

라그엘은 마술사의 말을 듣자, 새장을 이루는 뾰족한 검은 철창 하나를 뚝 부러뜨려서 건네주었다. 마술사는 그것을 받자마자 사정없이 생살에 꽂아넣는다. 어느새, 그렇게 박힌 말뚝의 수는 두 자릿수를 헤아리고 있었다.

"왜, 왜, 뭐가 목적인데, 뭔가 요구라도 해!"

아무 의미 없이 계속 가해지는 폭력에 몸부림치는 카나기의 파문 마술사. 반질반질 빛나는 대머리에는 땀이 흥건하다. 그는 미칠 지경이었다. 차라리 뭔가 요구를 하려고 고문을 하는 거라면 버틸 의미라도 있겠는데, 이 미친놈은 그냥 생살을 찢는 것과 비명을 즐기려고 이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고대하던 말을 들은 마술사는, 피식 웃더니 라그엘을 십자가 앞에 남겨두고 뒤로 물러서 털썩 자리에 앉았다.

"음, 그래, 어디보자."

그의 귀에는 녹옥이 박힌 황금 십자 귀걸이가 매달려 찰랑대고 있었다. 팔에도 금색과 은색의 팔찌를 세 개나 차고 있다. 아무래도 그는 남자임에도, 치장과 사치를 매우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혹시 콜티아라는 이름의 여자를 본 적이 있나? 아지프가 뒤를 봐주는 돼지 귀족의 첩으로 팔려온 여자인데 말이야, 건방지게 짝사랑이랑 여기로 도피를 해버렸단 말이야. 사지를 잘라서 가져오면 3천 루덴을 준다는데. 생긴 건 이렇게 생겼어."

"보, 본 적 없어. 미친, 파문당한 내가 할 말은 아니다만, 너는 네 신을 보기 부끄럽지도 않은 거냐? 고작 그딴 흥신소 같은 일을 하려고, 천사와 권능을 써서..."

"찍어."

"끄아아아악!"

마술사의 명령에 이번엔 자기가 말뚝을 꽂아넣는 라그엘.

"이봐, 이봐, 내 고향에선 멋쟁이가 아니면 상대해주지 않는데, 멋쟁이가 되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단 말씀이야."

마술사는 피식 웃으며 가방에서 또 다른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철제 파일이었다. 라그엘이 명령에 따라 남자를 고문하는 동안, 남자는 그것으로 손톱을 다듬기 시작했다.

"그래서 돈을 좀 벌어야 쓰겠는데, 가진 재주라고는 이렇게 다정하게 정보를 얻어내서 추적하는 재주뿐이니. 가진 건 최대한 선용하라고 주께서도 그러셨으니 문제없겠지. 우리 주는 너그러우시거든. 자, 그럼 다음. 어떤 도둑놈이, 이런 남작관을 훔쳐서 여기로..."

한참이나 그렇게 이런저런 자료를 꺼내 질문을 하는 아탕칼리의 마술사. 안다고 했든 모른다고 했든, 대답을 하면 더 이상 고문을 가하지 않았으므로, 카나기의 마술사는 계속해서 아는 모든 사실을 대답했다. 가끔씩 대답이 나오면 흠,흠, 소리를 내며 받아적던 아탕칼리의 마술사는, 그 모든 자료를 가방에 집어넣고 일어섰다.

"그래,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럼 이제 마지막 질문이다. 너 같은 쓰레기 패잔병들이 모여있는 개미굴은 어디에 있는지 밝혀라."

"그건... 뭐?"

"네 행낭에서 나온 이걸 보자구. 방금 새로 산 빗과 남자용의 머릿기름이 있는데, 너 같은 대머리한테 그게 왜 필요하냔 말이다. 따로 소중하게 포장까지 되어 있더구나. 너는 심부름을 나온 것이겠지. 2위계의 마술사가 심부름을 한다라, 그럼 시킨 사람은 3위계 아니겠나. 아니더라도 최소한 너보다는 높은 신분일 게야. 이 버러지같은 땅에 그렇게 마술사가 다닥다닥 모여 있을 까닭이 뭐가 있을까, 응?"

"끄아아아악!"

"그리고... 이 편지를 네 번 접는 방식. 적에게 붙잡혔을 때 빠르게 삼켜서 은폐하기 위해 군대에서 가르치는 방식이지. 너는 군 생활 경력이 있겠군. 군 생활 경력이 있고, 상급자의 명령을 받으며, 이 땅에 모여 있다라. 즉, 너희는 패잔병인 것이겠지? 아지프에게 혼쭐이 나서 줄행랑을 쳤던가, 뭐 그런 병신같은 이유로 돌아가면 모가지가 잘리게 생겼으니, 여기서 가엾은 자치령민을 약탈하고 겁간하며 골목대장 노릇을 하다..."

"이 마레 델피에로를 만나 전부 비참하게 목이 날아가게 되었다, 그게 주의 지고한 뜻이라는 거지."

아탕칼리의 심문관, 4위계 마술사 마레 델피에로는 그렇게 선언했다. 카나기의 파문 마술사는 허벅지에 말뚝을 박혀 경련하면서도 씹어뱉듯 말했다. 마레는 그냥 확신 없이 떠 본 것이라는 것도, 자신의 말이 사실상의 인정이라는 것도 알지 못한 채.

"미친 새끼, 우리 본거지엔 너랑 같은 4위계도, 끄륵, 계시다. 합쳐서 열한 명이나 있어. 그걸 너 혼자 이기겠다는...끄아아악!"

"너희 같은 버러지 패잔병들이 몇 마리가 모여 있건, 나한테는 상대가 안 돼. 나에게는 주의 뜻이 함께하시니 말이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아탕칼리의 고위 마술사는, 마술사끼리 소규모 승부를 겨룰 때에는 언제나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다. 그들이 신에게 받는 권능의 속성이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눈을 마주한것만으로 바라보는 이의 정신을 환혹시킬 수 있었고, 그들의 정신에 잠입해 마음을 깨뜨려버릴 수도 있었으며, 낮은 위력의 마술 공격을 아예 무효화해버리는 힘을 가진 천사를 종복으로 받는다.

마술이 완성되기 전에 환술을 걸어버리고, 마술이 완성되면 천사를 방어막으로 세우는 게 가능한 아탕칼리는, 마술사끼리의 싸움에서는 언제나 압도적인 상성 우위를 가지고 있었다.

심문관은 그런 아탕칼리의 마술사 중에서도 전투에 재능이 있는 이들을 가려 뽑은 이들이다. 이 마레라는 자는, 4위계 마술사 중에서는 가장 강한 축에 속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빨리 말하면 자비롭게 죽여 주마."

"씨발, 살려 주는 것도 아니고 그게 뭐야? 꺼져."

마레의 얼굴에 침을 뱉는 카나기의 마술사. 마레는 고개를 틀어 그걸 피하더니, 카나기의 마술사를 노려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자비롭게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르는군. 좋아, 네게 죽음이 뭔지 가르쳐주지."

마레의 눈동자가 시뻘겋게, 흰자위는 시꺼멓게 변한다. 그는 그 상태로 중얼거렸다.

"앞으로 하루 동안, 너는 매시간 다른 죽음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처음엔 화형, 그 다음엔 책형, 그 다음엔 궁형, 그 다음엔 거열형이다. 내일 돌아오마. 그때도 대답하지 않으면, 매 30분마다로 줄이고. 또 대답하지 않으면 10분으로 줄이겠다."

마레가 씹어뱉듯 그렇게 말하고 뒤돌아서는 순간 항복 선언이 울렸다. 온몸이 불타는 환상에 사로잡힌 그가 처절하게 뱉은 외침이었다.

"말할게! 말할게... 이 불 좀 꺼 줘! 고행의 언덕, 고행의 언덕이야. 그 동상 가득한 언덕의 머리 없는 성모상 밑에, 비밀 문이 있을거야. 거기로 들어가면, 우리 아지트가 나와..."

"그래, 그렇군. 잘 말해줬다, 허섭스레기."

"아니, 꺼,꺼주기로 했잖아, 왜 그냥 가는 거야, 끄아아아악!"

그리고 마레는, 라그엘을 이끌고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움직였다. 십자가에 못박힌 남자는 온 몸을 비틀며 비참하게 비명을 내지른다. 그 비명은 까마귀를 하나둘씩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배고픈 까마귀를.

*

고행의 언덕.

이 언덕은, 인세에 소환된 지옥이나 다름없는 북서 자치령을 위해 고행을 자처한 성인들의 동상이 가득 자리한 언덕이었다. 앙상하게 마른 모습, 절을 하는 모습, 기도하는 모습. 그런 모습들이 새겨진 동상들이, 언덕을 관통하듯 하얗게 난 길 주변을 따라 끝없이 이어져 있다.

모두, 구원을 바라는 이들이 조각해 이 언덕 위에 봉납한 것이었다. 그 동상 사이를 휘적휘적 걸어 올라가며, 마레는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

'그래, 카나기의 4위계라면, 마술이 아니라 칼을 들고 덤벼들 수도 있겠지. 나는 환술로 몸을 숨기고 보조에 전념하고, 근접전은 라그엘한테 맡기는 게 더 안전하겠군. 그렇게 쉬운 싸움은 아니겠어.'

그렇게 올라가던 마레의 눈에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앙상하게 말라서, 털이 푸석푸석한 채 나무둥치 밑에서 자고 있는 개였다. 아무래도 누군가가 애완용으로 기르다, 사정이 좋지 않아 내버린 듯 했다.

"오, 개라니. 마침 잘 됐군."

미소를 지으며 개에게 다가가, 육포 한 조각을 쥔 채로 손을 내밀자, 혓바닥을 헥헥거리며 달려온다. 마레는 그 개를 그대로 집어서 라그엘의 새장 속에 집어넣어 버렸다.

"아까 철창을 좀 많이 썼는데 말이야. 이 놈의 생기를 빨아먹어서 보충하거라."

끼이잉, 그 말과 동시에 개가 신음하는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레는 아랑곳않고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리고 그 발걸음은 눈 앞에 펼쳐진 이해할 수 없는 광경 때문에 멈추었다.

"뭐지?"

마술사의 시체가 쌓여 있었다. 전부 카나기의 마술사였다. 무언가로 도려낸 듯, 심장 부분만 텅 비어 있다. 마레는 황급히 달려가, 그 자들의 복색을 살펴보았다. 그렇게 가슴이 뚫려 죽어 있는 사람 중에는, 4위계의 표식을 가진 이도 있었다.

"뭐야, 뭐냐구. 왜, 왜 마술사가 여기서 떼죽음을 당해 있는 거야?"

파르르 입술을 떠는 마레. 자신이라고 하더라도 상당히 고전해야 처리할 수 있는 마술사를, 마치 돼지를 도축하듯 전부 썰어버린 어떤 존재가 있다. 그 사실 때문에 마레는 등골이 차갑게 식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잠시 후, 마레의 눈은 곧 그 시체 더미를 향해 걸어오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어."

이 시체들을 전부 화장이라도 해 주려고 한 걸까? 손에 장작을 잔뜩 들고 있는 하얀 머리의 여자. 아니, 아주 잠깐 동안, 여자라고 생각했다. 커다란 몸집과 마른 근육이 붙은 단단한 체격 때문에 잠시 후 생각을 바꾸었다.

"림, 저것도 마술사야?"

허공을 보더니 허공에다가 말을 건다. 극도로 예민해진 마레는 라그엘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그 남자와 거리를 벌렸다. 그것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장작을 내려놓고 칼을 뽑아들었다. 새하얀 장검의 칼날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너, 네가 이걸 다 죽인 게냐? 너 대체 정체가 뭐냐?"

"저요? 저는..."

그는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인간입니다."

어이가 없어진 마레는 피식 웃고 전투의 준비를 시작했다.

"대답할 생각이 없는 거냐? 좋다. 그건 발가벗겨서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 물어보면 되겠지."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하얀 머리의 남자는 붉은 기운이 넘실거리는 검날을 밀어붙이며 짓쳐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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