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고행자 ( 2 )
내려찍는 검격.
금발로 덮인 마레의 머리를 정확히 반으로 쪼갤 기세로 내려찍어진 그 검격은, 쇠창살에 가로막혔다.
"윽!"
그 순간 검을 통해 엄청난 한기가 역류해 손잡이를 쥐어잡은 두 팔을 시리게 만들었다. 검은 새장을 때리고 공허히 빗겨났다.
가로막은 것은, 유령처럼 몸을 움직인 라그엘. 라그엘은 마치 새장을 방패처럼 사용해 검을 붙들려 하고 있었다. 아이는 빠르게 검을 뒤로 잡아뽑으며 물러서서 간격을 확보했다.
"고오오오오오...."
장례식의 곡성 같은 신음을 흘리는 라그엘. 다음 순간, 라그엘이 손에 든 검은 새장의 문이 열리더니, 큰 바람이 몰아쳤다. 새장 속으로 아이를 빨아들이려는 바람. 풍압 때문에 머리가 마구 흩날리고 눈을 뜨기도 힘들었다. 아이는 장검을 바닥에 박아넣고, 지지대로 삼아 붙잡아서 어떻게든 빨려나가지 않고 그 풍압을 견뎌냈다.
"고오오오오오...."
바람이 끝나자 라그엘은 새장 한 가운데에 손을 집어넣더니, 새장의 천장을 받치고 있는 가장 커다란 철창살을 뚝, 부러뜨려 꺼냈다. 끝이 새빨갛게 칠해진 그 창살은, 그렇게 꺼내니 훌륭한 검으로 보였다.
"응?"
아이는 그제서야 마레가 어딘가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방금 그 바람으로 아이의 주의를 흐뜨러뜨린 뒤 부지불식간에 환술을 걸어서, 환상을 덮어써 다른 무언가로 위장하고 숨어버린 것 같았다.
"꽤 싸움 경력이 많나본데."
지금까지 사냥했던 어떤 마술사보다도 깔끔한 초반의 전투 구도 설계였다. 깡! 크게 창살의 검을 휘둘러오는 라그엘. 아이는 비껴 집은 검으로 창살의 진로를 막아내고, 빙글 돌아 찌르기로 전환해 라그엘의 얼굴을 찔러갔다.
퉁!
그러자 시꺼면 무형의 방벽이 생겨나 칼을 튕겨낸다. 4위계 이상의 마술사가 호흡처럼 몸에 두르고 다니는 마술 방벽. 그것을 라그엘도 두르고 있는 것이었다.
다른 무엇보다 이것 때문에 일반적인 사람들은 아무리 신기를 수련해도 고위 마술사를 죽이기 힘들어했다. 얼마 전 림의 사도가 되지 않았을 때 카나기의 4위계 마도사를 죽인 건, 정말로 여러 천운이 겹친 결과였다.
그 마술사는 힘의 대부분을 잔'크낫츠를 통제하는 데 사용하고 있어서 마술 방벽도, 저주도 약한 상태였고, 방심까지 겹쳤기 때문에 간신히 이긴 것이었다. 지금의 아이는 그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아이의 찌르기가 방벽에 허무하게 가로막히자, 라그엘은 창살의 검을 뒤로 쭉 빼더니 매우 맹렬하게 찔러왔다. 아이는 그 공격을 옆으로 피하려다, 갑자기 등에 소름이 돋아 바닥에 납작 엎드려 피했다.
바웅ㅡ
올바른 판단이었다. 라그엘의 참격이 아이의 뒤에 있던 기도하는 고행자의 동상을 반으로 쪼개버렸다. 아이는 엎드린 몸을 일으켜 급하게 간격을 벌리며 중얼거렸다.
"환술, 환술을 이런 식으로 쓰는 구나."
숨어 있던 마레가 슬쩍 인식을 조작해 횡베기를 찌르기로 착각하도록 환술을 건 것이었다. 이건 인식을 크게 조작하는 환술이 아니기 때문에, 부담 없이 성공할 수 있으면서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는 환술이었다.
체계가 있는 전술이었다. 체계란, 수십 수백 번의 실전 끝에 탄생하기 마련이다. 이 천사와 저 수사는 정말로 피웅덩이를 밟고 살아온 모양이었다.
"고오오오오...."
아이가 라그엘로부터 물러서 간격을 벌리자, 라그엘은 다시 새장의 문을 열고 바람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숨어있는 마레를 찾아서 먼저 죽인다, 그런 것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또 바닥에 검을 꽂고 바람을 버티던 아이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검을 뽑아 부메랑처럼 크게 내던지고, 자기가 나서서 라그엘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미친?'
무언가로 변신해 숨어 있던 마레는 갑자기 자살에 가까운 행동을 하는 아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크게 떴다. 탁, 자기가 던진 검을 밟고 도움닫기를 해 3미터는 되는 라그엘보다도 높게 뛰어오른 아이는,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으면서도, 양손검의 손잡이를 붙잡은 듯한 자세를 취한다. 그리고 크게 소리질렀다.
"림! 레바테인!"
쿵!
마레는 경악으로 눈을 크게 떴다. 다음 순간, 아무 것도 없던 아이의 손에 갑자기 거대한 은백색의 쯔바이핸더가 나타나, 세상을 절단해버리겠다는 듯 거대한 참격을 날렸던 것이다. 그것이 라그엘의 몸에 닿자 검은 마술 방벽이 튀어나왔지만, 그것은 이번엔 힘없이 부서져버렸다.
그 한 번의 참격으로 승부는 끝났다. 라그엘은 반으로 쪼개진 후드만을 남긴 채, 마지막으로 고오오오오 비명을 내지르고 사라져버렸다.
'뭐, 뭐야? 저게 대체 뭐야? 저 놈도 마술사였나? 저게 마술이 아니면 뭐냐고!'
놀라서 비명이 나오려는 입을 간신히 틀어막는 마레. 아이는 그 쯔바이핸더를 집은 채로 날렵하게 고양이처럼 바닥에 착지했다. 그 한 번의 참격은 라그엘을 상하로 토막내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하얀 길의 양옆을 따라 가득 서 있던 고행자의 동상 수십 개를 한번에 절단해버렸다.
'영핵, 라그엘의 영핵이 파괴됐어. 이건 5위계 마술사도 못 한 일인데, 저 괴물은 대체 뭐냐고!'
일반적인 상식을 초월하는 강함. 그것을 눈 앞에서 목도한 마레의 머리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의 상식으로는 이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현상이었다.
마술사 잡는 마술사. 아탕칼리의 심문관인 마레는 두냐의 5위계급과 붙어서 호각으로 승부를 끝낸 적도 있을 정도로, 전투에 있어서만은 엘리트였다. 치룬 실전의 수는 세 자릿수를 헤아린다. 그런데 그 세 자릿수의 실전동안 라그엘은 단 한번도 천사의 가장 소중한 부분인 영핵을 상한 적이 없었다. 오늘이 오기 전까지는.
그런 일을 저지른 아이는 담담하게 자신이 집어든, 어딘가에서 솟아난 쯔바이핸더를 살펴보더니 마치 허공에 던져버리듯 놓았다. 마레는 또 눈을 부릅떴다. 그 쯔바이핸더가 허공에 둥둥 뜨더니, 밑에서부터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무언가가 집어삼키고 있는 것처럼.
아이는 눈을 찌푸리며 자신의 옆을 째려보았다. 림은 자신이 하사한 검을 다시 수납하기 위해 입을 크게 벌리고 검을 밑에서부터 삼키고 있었다. 그 모습이 흉물스러워서 한 마디 안 해줄 수가 없었다.
"이 검 꺼낼때마다 꼭 그렇게 해야겠어?"
'어린 순례자야. 나는 뭐 좋아서 이렇게 하는 것이겠나.'
"하긴, 그렇겠지."
참마의 대검 레바테인.
그건 '마술사 살해의 신' 림이 그 사도에게 내리는 권능의 일부였다.
림의 권능은, 자신의 사도에게 무기를 하사하는 것이었다. 그냥 무기가 아니라, 소를 도축하기 위한 정육도처럼, 마술사를 도축하는 용도로만 만들어진 특수한 무기 일곱 개를.
각 학파별로 그 학파의 마술사를 죽이기 위해 가장 적합한 특별한 마검 또는 성검을 준비하고 있다가, 아이가 호출하면 그 손에 들려주는 것이 림의 역할이었다.
특정 학파의 마술사를 죽이고 그 심장을 림에게 공양하면, 그 학파를 도살하기 위한 검의 성능이 진화한다. 그렇게 진화하는 일곱 자루의 검이 림의 뱃속에 저장되어 있었다.
레바테인은 아지프의 심장을 공양받아 그 피를 먹고 자라나는 검이었다. 참마의 대검이라는 이름 그대로, 그것에는 레바테인에 깃든 힘보다 약한 마술을 무효화시키고 베어넘겨버리는 힘이 담겨 있었다.
아라딘폴 공성전에서 달아나고 한 달간 아이는 탈주와 무법 마술사들의 난장판이 되어버린 북서 자치령에 머무르며, 계속해서 마술사를 사냥하고 있었다. 복수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도가 되었다고는 하나, 아직 마술사의 심장을 공양받지 못한 림의 권능은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북서 자치령은 세상에서 가장 마술사를 죽이기 좋은 땅이었고, 또 죽이고도 후환을 입지 않기 좋은 땅이었다.
다섯 달 후, 잰슨이 부탁한 마지막 에페 바체 시험이 시작된다. 그때까지는 기나센에 돌아가야 하며, 돌아가면 그때는 그렇게 마술사를 죽일 일이 많지 않을 것이다. 고로 그 전까지는 최대한 여기서 머무르며 최대한 마술사의 심장을 많이 공양해 권능을 강화할 생각이었다.
주된 사냥의 대상은 아지프의 파문 마술사였다. 4위계를 둘, 3위계를 열하나, 2위계와 1위계는 셀 수도 없이 베어넘겼다. 어떤 칼보다도 많은 심장을 공양받은 레바테인은 그래서, 이렇게 강력한 라그엘마저 수수깡처럼 베어낼 수 있는 강도로 강화되었던 것이었다. 레바테인을 순수한 마술로 가로막고 싶다면, 5위계의 마술사는 와야 승부가 성립이 가능했다.
그래서 아지프의 씨가 마르자, 그 다음엔 이 근처에서 지속적으로 민가를 약탈하던 카나기의 패잔병을 노렸다. 그렇게 그들을 처리해 그 심장을 공양한 뒤, 시체를 화장해 주려다가 마레와 마주쳤던 것이다.
"그럼... 이제 어디에 숨어 있는 마술사를 찾아야겠는데. 뭘로 숨었을까."
'못 찾아. 못 찾을 걸. 내 환술은 완벽하니까.'
미친듯이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어떻게든 들키지 않으려 애쓰는 마레. 아이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갑자기 이 쪽을 발견하고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망설일 필요도 없다는 듯 확신에 찬 직진이었다. 그러더니 변장한 마레 앞에 다가와 무릎을 붙잡고 고개를 숙여 얼굴을 들이민다.
"왜 하필 고행하는 동상으로 변했어요? 당신이랑 안 어울려 보이는데."
'아니야, 아니야, 떠 보는 거야. 참자, 참자...'
"처음 이 언덕에 올라왔을 때,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여기에는 고통받는 사람들의 얼굴 뿐이지만, 그 고통은... 이 북서 자치령에서 고통받는, 힘 없는 민중들을 위한 고통이니까."
"그래서 당신은, 그 미의식은 너무 눈에 띄잖아요. 여기선 그게 오히려 추한 것보다도 추한데."
"세상 어디의 고행자가 귀걸이를 끼나요."
퍽!
고행하는 동상의 머리를 붙들고 박치기를 한다. 그러자, 환술이 풀렸다. 상상 이상으로 단단한 아이의 머리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마레는, 코피를 흘리며 뒤로 쓰러져버렸다. 림은 뼈날개를 접으며 미끄러지듯 다가와 속삭였다.
'아탕칼리의 4위계라니, 진귀한 식사를 공양받겠구나. 빨리 공양하거라. 새로운 칼을 내려줄 수 있다.'
강한 심장을 공양받을수록 림이 주는 검의 질이 높아지고, 많이 공양할수록, 검을 유지할 수 있는 지속시간과 단단함 즉 양이 증가했다. 4위계 마술사의 심장이라면 정말 훌륭한 공양물이 될 것이었다.
아직 아이는 아탕칼리의 마술사를 죽여 그 심장을 공양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림은 아탕칼리의 힘을 역이용하는 칼은, 그 설계도를 가지고 있으나 하사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자의 심장을 바치면 새로운 칼을 만들어줄 수 있다.
"잠깐, 이 사람, 가방을 들고 있는데. 죽이기 전에,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이고 이름이 뭔지 정도는 알아두자."
"마술사가 되기 전에는 착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니까."
'참, 그 이해할 수 없는 고집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림. 아이는 마레가 떨어뜨린 가방을 열고, 그 내용물을 살피기 시작했다.
*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은, 주홍빛으로 불타는 나무.
"헉!"
마레는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깼다. 일어나자마자 한 일은, 자신의 심장이 아직 남아 있나 더듬거리는 것이었다. 가쁜 숨을 내쉬며 주변을 확인하는 마레. 시간은 어느새 밤이었다. 옆에선 모닥불이 타닥타닥 타오르고 있었다.
"마레 델피에로. 아탕칼리의 이단 심문관. 맞죠?"
변성기가 막 지난 듯 어딘가 희미하게 어린아이티가 남아있는 목소리가 마레의 귀를 때렸다. 타닥이는 불꽃으로 떨어지는 마른 땔감. 어둠 속에서 끓어오르는 주홍 불꽃을 얼굴에 가득 받으며,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여성적인 얼굴, 그러나 단단하고 다부진 몸매 때문에 중성적인 매력을 풍기는 남자였다.
"넌, 넌 뭔데?"
"나는... 음, 마술사를 아주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에 가까울 정도로요."
불꽃을 바라보며 단언하는 남자. 그 정취가 너무 아름다워서 마레는 잠시 넋을 잃고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쓰러진 틈에, 당신의 가방을 뒤져 봤어요. 당신은, 카나기와 아지프한테서, 여기의 나쁜 마술사들을 사냥하라는 의뢰를 받고 여기에 왔고... 그리고, 덤으로 이런 저런 온갖 추악한 의뢰를 받아서 돈을 벌고 있더군요. 여기에 도망쳐온 사람을 잡아서, 토막 내라는 것도 있었구요."
그 얼굴에 음산한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 말이 끝날 때 즈음, 정신을 차린 마레는 피식 웃으며 몸을 추슬러 앉았다. 자신의 뒤에는 회백색의 바위가 딱 앉기 좋게 놓여 있었다. 차가운 감촉이 엉덩이 가득 퍼진다.
"이런 짓을 하면, 어, 아탕칼리네 종교로는 검수지옥(劍樹地獄)인가? 거기 가는 거 아니에요?"
"검수지옥은 개뿔. 그딴 게 어디 있으며 왜 필요하단 말이야. 이미 이 센디엘이 지옥인데."
"아니, 자기 종교를 부정하는 거에요? 당신 그러고도 수도사에요? 그렇게 돈이 좋냐구요."
"그거야 어쩔 수 없지. 원래 주님은 거지를 싫어하시거든. 그것도 다 주의 뜻이다."
마지막으로 담배 한 대 정도는 괜찮겠지. 마레는 허리춤을 더듬어 가죽 케이스에 든 담뱃갑을 꺼내서, 모닥불로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거기까지 알아내고, 더 볼 것도 없겠다 싶어 심장을 꿰뚫어서 죽이려고 했는데, 가방 바닥에서 이런 게 나왔어요."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는 아이. 무슨 선고를 하려고 그러나, 궁금해하는 표정으로 앉아 있던 마레의 표정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보내주신 옷과 땔감, 쌀은 잘 받았습니다. 덕분에 이번 겨울은 따뜻하게 날 수 있게 되었어요.수사 오빠는 잘생기고 착하고 멋쟁이라서 정말 좋아요. 오빠는 우리 고아원의 최고의 멋쟁이에요."
"내 놔!"
부지불식간에 나온 고함. 입에서 담배도 떨어져 버렸다.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편지를 빼앗으러 달려드는 마레. 아이는 휙 허리를 틀어 마레를 피하고 남은 부분을 읽어나갔다.
"보답이 될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읽어보시는 것도 귀찮을지 모르겠지만, 감사하다는 편지를 꼭 보내고 싶었습니다. 하일렌 천사의 집의, 엘레나 시메오네 올림."
"이 허섭스레기 자식, 남의 편지를 함부로 훔쳐보면 검수지옥에 떨어져서 악마한테 삼지창으로 꾹꾹 당하는 거 모르냐!"
"아깐 자기가 그런거 없다고 해놓고..."
"내 놔!"
다 읽자마자 홱 편지를 빼앗아 주머니에 집어넣는 마레. 그 얼굴은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이는 투명한 눈으로 그런 마레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당신은, 그렇게 번 돈을 전부 고아원에 기부하고 있었군요. 그렇게 열세 개의 고아원이 당신 덕분에 돌아가고 있고... 부모 잃은 네 아이의 대부이기도 하다고, 되어 있던데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아이. 그 등에는 갈색 가죽가방이 들려 있었다. 떠나려고 미리 짐을 꾸려놓은 듯했다.
"이 꼬마는 보답을 주지 못했다고 했지만, 그 보답을 한 번만 제가 대신 줘 보려고 해요. 이번 한 번만 당신을 죽이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죽으면, 슬퍼할 사람이 조금은 있는 것 같으니까요."
"응?"
상상도 하지 못한 선언에 멍해진 마레. 아이는 풀어 놓은 갈가마귀도 집어서 가방 뒤에 둘러 묶었다. 그리고 흰 머리를 찰랑거리며 숲의 어둠 속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 꼬마의 편지와 당신의 선행이 이번 한 번만 당신의 목숨을 구한 거에요. 앞으로도, 그걸 잊지 말아 주세요."
"다음에 또 만났을 때 그게 달라져 있으면... 오늘의 이자까지 쳐서, 죽일 테니까요."
이게 아마 이 사람이 낼 수 있는 가장 싸늘한 목소리인 거겠지. 마레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타닥이는 불꽃을 받으며, 마레는 멍하니 서서 아이의 작아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정말로 그걸로 괜찮겠나? 나의 어린 사도야. 아탕칼리의 심문관은 특히 죽이기 까다로운 마술사다. 여기서 한번 4위계의 심장을 공양해서, 칼을 만들어 두어야 편할 텐데.'
"됐어. 한 번만이야.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주는 거야. 한 번도 자비를 안 주면, 마술사랑 똑같은 사람이 되는걸."
'언젠가는 저 녀석도 죽여야 할 텐데?'
"일단, 나쁜 마술사부터 다 죽이고... 그 다음, 덜 나쁜 순서대로 죽일 거야. 저런 사람이면, 마술사 중에서는 아무래도 후순위겠지."
'참 멍청한 판단이다만, 그래서 내 사도인 거겠지. 알았다.'
그 생떼에 가까운 논리에 피식 웃고 마는 림. 등을 구부정하게 굽히고 새로 모닥불을 피우고 있는 아이 옆에 앉았다. 아이는 반합을 퍼내서 쌀과 물을 담은 다음, 모닥불에 걸어 놓고 모포를 덮었다. 밥이 될 동안 잠시 눈을 붙일 생각이었다. 스르륵 닫히는 눈꺼풀. 그리고 눈꺼풀이 닫히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발자국 소리.
인간의 발자국 소리가, 선명하게 귀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누구야!"
숲 속에서 잿빛 연기와 함께 기분 나쁜 냄새가 풍기어왔다. 아이가 가장 싫어하는 냄새, 담배 냄새였다.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진홍색 법의를 입은 금발의 남자. 마레였다. 입에는 담배 한 개비를 물고 있다. 적의가 없다는 듯, 소매가 길게 늘어지도록 두 손을 높이 쳐들고 다가온다.
"당신, 분명히 한 번만 살려준다고 했잖아요. 숫자 하나 둘도 못 세요?"
"아, 뭐, 감사 인사를 전하러 왔다고 해 두지."
"됐어요. 내가 말을 너무 돌려서 했던 모양이네요. 또 보면 죽일 거에요. 저리 가세요."
"아니, 앞으로 네가 해줄 일에 대해서 감사 인사를 하러 온 건데. 날 지켜 줄거라서 고맙다."
"예?"
눈을 껌뻑이는 아이. 마레는 넉살 좋게 모닥불 근처의 통나무에 엉덩이를 들이밀더니, 손을 내밀어 불을 쬐기 시작했다.
"네가 내 라그엘의 영핵을 박살내버렸지 않나. 그 녀석의 정신과 감응해봤더니, 재생하는데 2개월은 걸린다더군. 부끄럽지만 내 전력의 7할은 라그엘이어서 말이야. 원한도 더럽게 많이 샀는데, 이 좆같은 무법지대에서 라그엘 없이 2개월이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그래서 말인데."
검은 재가 되어 떨어지는 담배. 마레는 한 번 연기를 깊게 내뱉고, 씩 웃으며 아이에게 말했다.
"2개월간, 네가 날 좀 지켜주면 안 되겠나? 이야, 신기한 동행이 되겠다만, 이것도 다 주의 뜻이겠지."
"결국 당신도 마술사였군요."
턱, 새파란 칼날이 마레의 목에 짓쳐들어왔다. 아이는 지금까지 마레가 보았던 것 중 가장 사나운 표정으로, 눈썹을 날카롭게 치켜들고 마레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신은, 그 아이의 편지를 믿고 여기까지 걸어와서 뻔뻔한 요구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 아이의 편지는 말이죠. 한 번 당신의 심장으로 향한 화살을 막고 부서진 부적, 그 이상의 역할을 못 한단 말입니다. 한 번과 두 번의 차이는, 한 번이 아니라는 걸 저는 이제 안단 말이에요. 두 번은 없어요. 두 번 자비를 베풀면, 세 번, 네 번도 베풀어야 할 테니 말이에요."
"워,워, 진정해, 진정해."
"마술사라는 족속들은 항상 그래요. 누가 선의를 베풀어주면, 자기의 안전이 확보된 것 같으면... 그 순간 즉시, 이용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죠. 선의를 만나면 이용하고 기만하고 착취해서 바스라지게 만들어 이 땅에서 선의란 선의는 전부 멸종하게 한 놈들이란 말이에요. 당신에게 한 번 자비를 베풀어 주니까 내가 호구로 보였습니까? 그렇게 당신 뒤치다꺼리를 2개월이나 해 줄 사람으로? 그걸 한 다음에는 또 뭘 요구할 생각인데요."
아이는 단언하듯 말했다.
"나는 이제 그렇게 바보 같은 사람이 아니에요. 당신에게는 안됐지만, 나는 정말로 마술사가 싫단 말입니다. 전부 다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래, 그렇겠지."
마레는 갑자기 아이의 칼날을 손으로 붙잡더니 그것을 자신의 심장으로 가져갔다. 칼날을 맨손으로 붙잡은 손바닥에서 피가 흐르는데도 아랑곳앉고.
"네게는 분명 그렇게 마술사를 증오할 권리가 있다, 기나센의 눈표범."
"예?"
"찔러라. 내 피가 그 분노를 한 풀 꺾이게 할 수 있다면, 뭐 그것도 주님의 뜻일 테니."
깜짝 놀란 아이. 기나센의 설표라는 별명은 분명 조금 알려져 있기야 하겠지만, 이런 처음 보는 사람이 들을 정도로 널리 퍼진 별명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기나센 고국과 북서 자치령 인근에만 조금 퍼져 있을까.
아이가 놀라서 검을 물리자, 마레는 거 봐라는 듯 자신의 손바닥에 난 피를 할짝 핥았다.
"내가 어떻게 너를 알고 있느냐고? 너뿐만 아니다, 그 란페이 우르드라는 여자도 알고 있지. 들었어. 아지프를 위해 헌신했는데, 아지프 놈들이 최후의 최후에 어이없는 뒤통수를 후려갈겨서 멸문했다고. 너는 살아있을 가능성이 있다고도 들었다."
"어, 어떻게?"
"어떻게 알았느냐고? 네가 등에 차고 있는 그 방패를 보고 알았지. 아주 눈에 딱지가 들어앉도록 그림을 봤으니 바로 알지. 그 방패를 들고, 마술사를 증오하면 뻔하지 않나. 오히려 처음에 몰랐던 이유를 궁금해해야겠지. 나는 기나센의 눈표범이 여자라고 들었었다. 원래 기나센의 암고양이인가? 그런 별명이었다고. 그런데, 오해군. 퍼질 만한 오해였어. 네가 키가 조금만 더 작고, 어깨가 조금만 더 좁았어도 나도 여자로 착각했을 거다. 그거 하나 때문에 판단이 늦었던 거지."
"무슨 소리야? 당신, 어디서 내 얘기를 들은 건데?"
앙칼지게 쏘아붙이는 아이. 마레는 피식 웃으며, 주섬주섬 자신의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의뢰주한테 들었다. 너와, 네 용병단과, 그 단장의 이야기 모두."
"의,의뢰주? 무슨 의뢰 말이에요."
"내가 언제 맨입으로 지켜달라고 했나, 분명히 대가는 치르겠다. 봐라."
마레는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의뢰서를 넘기고 넘겨 어떤 그림을 찾아냈다. 곧고, 강직한 칼날을 가진 검의 그림을.
"종단에서 내려준 보수보다도 큰 액수의 의뢰다. 북서 자치령 어딘가에 있을 이 검을, 반드시 찾아달라는 의뢰 말이다. 이걸 수락하면서 혹시라도 도움이 될지 모르니 알아두라고, 레이븐사이드의 모든 것에 대한 정보를 들었다."
의뢰서의 그림에 그려진 검의 검면에는 이런 글자가 적혀 있었다.
힘없는 정의는 무력하며 정의 없는 힘은 압제한다.
란페이의 병약한 여동생이, 검면에 새겨준, 전 세계에 단 하나밖에 없는 문구.
이건 레이븐사이드의 단장이 대대로 물려받는 검, 블로어였다.
"이, 이건, 단장님의, 검인데. 제일 소중하게 여기던... 유품인데."
"나는 이 검을 찾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심문해서 모아두었다. 앞으로 2개월간, 그 정보를 따라 이 검을 찾으러 다녀보자구. 2개월 안에 찾으면, 이 검은 그냥 너에게 주마. 어때, 거부할 수 없는 제안 아닌가?"
거부할 수 없을 뿐더러 아주 영리한 제안이었다. 아이는 멍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