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29화 (29/279)

외전. 굴종

몹쓸 시절이었다.

아이가 아라딘폴 성에서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빠져나왔던 시절. 아직 림과 함께 어떤 검도 만들지 못했던 시절. 마뜩잖지만 동행해야만 했던 붉은 수도사와 만난 때로부터, 멀지 않은 과거. 하지만 아이가 지금과는 달리, 복수심으로만 가득 차 이리저리 방황하던 시절. 이것은 그 날의 이야기다.

전쟁이 끝났으나 아직 칙령은 반포되지 않은 시기. 그 짧은 시기는, 북서 자치령에서 끓어오르던 혼돈이 절정에 달한 때였다.

비극의 색깔은 붉다고 누가 그랬던가? 그렇다면 저 지평에 내걸린 저녁놀이야말로 이 북서 자치령에 가장 어울리는 채색의 거장일 것이다. 때는 저녁. 저무는 해는 세상을 붉은 빛으로 가득 물들인다.

일몰. 석양에서 스며나온 선홍색 햇빛이 쩍 갈라진 실개울을, 눈구멍에 칼 꽂힌 채 바싹 말라가는 시체를 지나 이 평평한 지평 위에 유일하게 서 있는 것 - 보리에 닿았다.

밀밭에 어색하게 서 있는 보리. 보리의 무리. 너무 일찍 심기어 너무 일찍 매달린 탓에, 형장의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다. 밀이삭을 위한 밭에 보리가 서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군량을 확보하고 싶으나 밀이 익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던 마술사들이, 밀 대신 보리를 억지로 심게 강요했기 때문이었다.

비극과 압제의 증거. 그처럼 온몸으로 모여 선 보리밭을 헤치고.

한 명의 남자가 걷는다.

"제기랄, 이 자식들은 왜 이렇게 굼벵이처럼 느리게 따라오는 거야?"

우렁우렁한, 그러나 어쩐지 비열한 인상을 주는 목소리. 그 목소리에 딱 알맞은 갸름한 인상의 남자가 뒤를 돌아보며 불평한다.

그 말을 꺼낸 자는 기사였다. 아니, 기사였던 자였다. 그는 이 일대를 선정으로 다스리던 영주 휘하에 있던, 신기를 다룰 줄 아는 유일한 기사였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이미 명예를 저버렸기 때문이다.

얼마 전 아지프의 분대가 약탈을 위해 영주의 저택에 찾아오자, 그는 그들과 맞서 싸우는 대신 고개를 조아리고 배신했다. 그 결과로 영주 일가는 몰살당했다. 이 자는 비겁하게 살아남았다.

그 일가가 기르던 사냥개조차 죽음으로 주인을 지키려 들었다. 고로, 이 자를 기사라고 부르느니 그 사냥개를 기사라고 부르는 것이 더 사전적 정의에 부합할 것이었다.

"빨리 가자! 마술사 어르신들은 늦으면 경을 치는 거 알고서도 그러냐!"

뒤를 돌아보고 소리를 내지르는 기사. 무성하게 자란 보리 때문에, 분명 자신의 뒤를 뒤따르고 있을 하인들이 보이지 않아 내지른 소리였다. 그는 비겁하게 배신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저택을 점거한 마술사들의 종으로 살고 있었다.

지금 그는 심부름을 위해 하인 몇과 저택을 나섰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다.

내가 너무 성큼성큼 걸었나, 어쩔 수 없지. 기사는 발을 멈추었다. 그리고 칼을 빼 들었다. 하인들이 헐레벌떡 뛰어오는 척도 하지 않고,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민다면, 감히 기사를 기다리게 한 죄로 팔을 잘라놓을 생각이었다.

'이 건방진 것들이 이제 날 우습게 본단 말이지.'

그는 예민하게 침을 뱉었다. 우습게 보일 짓을 했기에 우습게 보이는 것이지만, 알량한 권위의식에 찌든 이 자는 그저 그 달라진 대접만이 화날 뿐이었다.

"왜 안 와?"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하인은 나타나지 않는다. 화가 난 비겁자는 칼을 빼든 채로, 성큼성큼 보리밭을 헤치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분이나 걷고 있자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길을 헤매기라도 했나?'

가능한 생각이었다. 그는 그래서 조금 다른 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자신이 짓밟고 걸어온 길 대신, 다른 길을 향해 쩔거덩 발을 옮기는 기사. 그리고 그 묵직한 철제 부츠가, 물컹, 무언가를 밟았다.

"뭐야, 이건?"

그 기분 나쁜 촉감 때문에 발로 그것을 걷어차는 기사. 그럴 만했다. 그건 썩어가는 시체였다. 포개어진 시체.

"나 참, 별 더러운..."

가스 때문에 살덩이가 팽창해 잘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옷 꼬라지를 보니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한 보잘것없는 늙은 도적이, 이 보리밭에서 젊은 여자를 덮쳐 겁간하려다 목에 칼을 찔리고, 도적은 최후에 그 여자의 목을 졸라 이렇게 뒤엉킨 채 죽고 또 썩어있는 모양이었다.

"씨발, 더러운 놈들. 더 강한 놈한테는 찍소리도 못하는 게, 지들끼리는..."

누구한테 한 말일까. 기사는 어쩐지 부아가 치밀어 다시 한 번 그 푸르스름한 유해를 걷어찼다. 그와 동시였다.

"크억! 컥, 커어억...!"

무언가가 자신의 목을 덮쳤다. 쩔그렁, 검을 떨어뜨린 후 목을 붙잡고 캑캑대는 기사. 실이었다. 단단하고 질긴 실이,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다. 뒤에서부터의 습격이었다.

"뭐, 뭐,케에에엑!"

"마술사의 비겁한 종. 죽어!"

그 덮친 자는 아이였다. 드물게 선정을 펼쳤던 영주, 그것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후 약탈을 시작한 마술사. 그 때문에 이 일대에는 원성과 통곡 소리가 자자했다. 막 마술사 살해의 신에게 서원한 아이는, 그 원성을 듣고 그들을 자신의 첫 번째 사냥감으로 정한 것이었다.

이 자가 가장 비겁하게 배신했다는 사실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수족을 자르려 이렇게 기습한 것이었다.

"후욱... 후우욱..."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는 축 늘어졌다. 이를 악물고 그 목을 조르던 아이도, 땀방울을 흘리며 실에서 손을 놓는다. 그의 목에는 짙은 줄자국이 남았다. 푹, 앞으로 시체가 쓰러지고, 아이는 뒤로 주저앉았다.

"윽!"

그리고 엉덩이에 느껴지는 기분 나쁜 감촉 때문에 신음한다. 아까 그 시체였다. 맞찔러 죽은 남녀의 시체. 썩어가는 것의 불쾌한 촉감이 등줄기에 소름을 쫙 돋게 했다. 그러나 아이가 느낀 것은, 불쾌함보다도 우선 미안함이었다.

"유해에, 손을 대면, 안 되는데."

비록 적의 유해라도, 죽어 떠나고 난 뒤라면 증오할 이유는 없다고.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란페이의 가르침이었다. 눈 한쪽의 살가죽이 시꺼멓게 썩어있는 시체의 얼굴. 오른편의 눈구멍이 시꺼멓게 텅 빈 채로, 이쪽을 응시하는 듯 보인다. 아이에게는 그것이 어쩐지 책망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지만 단장님, 그걸 다 지키면서.'

복수를 할 수는 없다. 아이는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기사가 흘린 검을 주워든다. 장검이다. 꽤나 쓸만해 보였다. 손잡이에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영주가 큰돈을 들여 하사한 것일 게다. 그놈들의 목은 이걸로 따 주지. 아이는 속으로 결심했다.

그리고, 옆구리에 느껴지는 화끈한 감각 때문에 신음을 흘렸다.

"크윽...!"

"어디서, 이 개 같은 도적놈이!"

기사였다. 확인사살을 게을리한 탓이다. 그는 목을 졸리고도 살아 있던 것이었다. 그가 자신의 옆구리에 단검을 찔러넣은 채로, 이를 아드득 갈고 있다.

"죽어!"

그대로 단검에 신기를 불어넣어 몸통을 양단하려 드는 기사. 그러나 실패했다. 아이가 오히려 와락 안기듯이 기사를 덮쳐, 그를 바닥에 깔아뭉갰기 때문이었다.

"윽!"

난리통에 단검에서 손을 놓쳐버린 기사. 다음 순간, 코에 팔꿈치가 날아왔다. 아이가 팔꿈치로 그 코를 후려친 것이었다.

"끄아아악!"

괴롭게 몸을 비트는 기사. 아이는 양손 깍지를 끼고, 그 얼굴을 무자비하게 내려찍었다. 우두둑, 코뼈의 연골이 부러지는 소리, 이빨이 깨지는 소리, 어느새 손에는 피가 흥건히 묻는다.

"헉, 헉, 헉...으윽!"

그리고 잠시 숨을 내쉬던 아이는,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이 자는 바닥에 깔린 상태에서도 묵직한 건틀릿으로 아이의 옆구리, 아까 자신이 단검을 찔러넣은 상처를 후려쳤기 때문이었다. 하마터면 뒤로 넘어져서 거꾸로 밑에 깔릴 뻔했다.

"죽어!"

간신히 버텨냈다. 아이는 마지막 일격을 위해, 필사적으로 흉기를 찾았다. 묵직한 돌이 보인다. 어른의 주먹 둘을 합친 크기의 돌. 그 돌을 하늘 높이 쳐들어 두개골에 내려찍자, 퍼서석 하는 흉악한 소리와 함께, 회백색으로 축축하게 흘러나오는 뇌수와 함께.

이번에야말로 기사는 숨을 거두었다.

"후우욱... 후우우욱...."

가쁜 숨. 숨을 내쉬며, 천천히 옆구리에 꽂힌 단검을 뽑아내는 아이. 상처를 벌리기 위해서인지, 낚싯바늘 같은 갈고리가 여럿 매달린 단검이라 살점이 잔뜩 딸려 나왔다.

'괜찮으냐?'

"괜찮아!"

아이는 걱정 없다는 듯 즉답한다. 열여섯 살이라곤 믿어지지 않는 강인함, 그리고 인내력이었다. 아이는 단검을 든 채로 비척비척 일어나 기사의 시체에 몸을 가까이한다. 그리고 게의 껍질을 뜯어 속살을 확인하듯, 기사의 갑옷을 잡아 뜯기 시작했다. 기사의 몸을 감싼 플레이트 메일의 이음매에 검을 꽂아넣고 그 몸에서 갑옷을 떼어낸 것이다.

푹!

얼마 안 가 그 시체는 여러 개로 토막나고, 피 묻은 플레이트 메일이 드러났다. 콧구멍이 지릿지릿할 정도로 피비린내를 풍기는. 아이는 그 플레이트 메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아이의 체격과 거의 체격이 비슷했기에 어렵잖게 입을 수 있었다.

'그 저택의 외곽은, 해골의 병사들이 지키고 있어.'

그 숫자는 수백을 헤아린다. 이 영지의 공동묘지를 파헤쳐, 뼈와 시체를 일으킨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겐 이 갑옷을 입은 자는 공격하지 마라, 그런 명령이 내려져 있는 듯 했다. 특등 수색자다운 관찰력과 조사 능력으로 확보한 정보였다.

'싸우지 않고 그 경비를 지나가려면, 이 방법밖에 없는 걸.'

마지막으로, 붉은 술 장식이 달린 투구를 써서, 얼굴을 가리고.

아이는 저녁놀 속을 살랑대는 보리밭을 헤치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저택을 향해서.

림이 하사할 수 있는 마검 중 가장 뛰어나다는 검, 참마의 대검 레바테인. 그것을 만들기 위해서.

*

-이 검은 하나의 시대를 끝낼 것이다.

참마의 대검, 레바테인. 그것을 두고 위대한 대장장이가 한 말이다.

반쯤 시체가 된 채로 아지프의 마술사에게 이용당하던, 반신(半神)으로 여겨졌던 거인. 영원히 불타오르는 산을 대장간 삼아 살아갔던 전설적인 대장장이. 그 유언은 그가 그 검을 누군가에게 넘겨주며, 먼지로 스러지며 남긴 유언이다.

그 명공이 자신이 만든 최고의 역작으로 뽑는 것이 레바테인이었다. 다른 것을 상처입히는 나뭇가지, 죄의 가지. 이런 뜻의 이름을 가진 그 검은 이름만큼이나 특이한 연마 과정을 거쳤다. 태양보다 뜨겁게 맥동하는 동생의 심장, 그것으로 담금질 되었던 것이다.

복수를 위해서였다. 동생을 병기로 만들기 위해 죽이고 그 시체를 능욕한, 아지프의 마술사에 대한 복수. 그래서 그 검에는 마술을 깨부수는 영험한 힘이 담겼다.

'가령, 그 요새에서 네가 극성으로 단련된 이 검을 들고 있었더라면. 너는 네 동료들을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그 탑을 베어버릴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림은 그렇게 말했다. 모든 마술을 베어버릴 수 있는 힘,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확실히 그 말대로 한 시대의 막을 내릴 힘을 가진 마검이었다. 어두운 시대의 막을.

'글쎄,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결국 실패했었으니 말이다. 애당초 어폐가 있는 말이지. 한 시대를 끝내고 새 시대의 막을 여는 것은, 결국 검이 아니라 인간일 테니.'

그러나 림은 담담히 그렇게 말했다. 아니, 담담한 척이었다. 그 말꼬리에는 숨기려 애써도 숨길 수 없는 희미한 회한이 감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림의 얼굴을 모르는 체 바라보던 아이는, 애써 그 회한을 무시하고 고개를 홱 돌렸다.

"됐어, 어쨌든. 아지프의 마술사를 죽이고 그 심장을 바치면 그걸 만들어준다는 거지?"

'그렇다, 어린 순례자야.'

"나한테는 그걸로 충분해."

아이는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본다.

"좋아. 이제 밤이 충분히 깊은 것 같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둠. 밤이었다. 새빨간 일몰이 끝난 자리, 희미한 손톱달은 유령처럼 떠올라 지상엔 땅거미뿐. 시간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이 정도로 어두우면, 해골 따위는 날 절대로 알아보지 못하겠지."

마술사를 죽이러 떠날 시간이.

*

메마른 밤길을 지나, 으스스한 해골의 검문을 뚫고서.

아이는 마술사의 저택에 도착했다.

"굴뚝이 고장나서, 주방 쪽은 항상 창문을 열어 둔다고... 그쪽으로 침투하는 게 좋다고 그랬었지."

기사를 죽이기 전, 먼저 만난 하인에게서 얻어낸 정보였다. 그 정보를 따르기 위해 살금살금 주방 쪽으로 향하는 아이. 밤이 꽤 깊었는데도 주방의 불은 켜져 있었다. 아이는 벽에 등을 붙이고 천천히 그 불빛 쪽으로 걸어갔다.

"후우우. 이걸로 마지막인가, 쿨럭."

쪼르륵, 찻주전자를 기울여 차를 따르는 노인. 집사의 옷을 입고 있다. 그 앞에는 간식거리가 놓인 트레이가 있었다. 이 저택을 점거한 마술사, 그들의 밤 간식을 준비하고 있는 듯했다.

무슨 독극물이라도 다루는 듯 조심조심 숙련된 솜씨로 차를 다 따른 그 노인은,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훔친다. 그리고 차에 우유를 붓기 시작했다. 그 순간, 의외의 공격이 들어왔다.

"냐아아아앙!"

고양이였다. 창문 아래 고인 그림자에 숨어 있던 고양이가, 갑자기 발톱을 곤두세우고 달려든 것이다. 그 고양이는 간식을 노리는 듯 했다. 고양이가 찻잔에 입을 대려 하자 노인은 대경실색해 저지한다.

"이 녀석, 플루토, 안 돼!"

하지만 플루토라고 불린 그 고양이는 막무가내였다. 기어이 우유가 몽실대는 찻잔에 입을 대려 머리를 숙인다. 그러자 노인은 다급하게 고양이의 등을 집어 내던졌다.

'안 된다니까!"

"미야아앙!"

벽에 부딪힌 플루토. 축 늘어져서,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 떤다. 불빛 아래에 드러나는 고양이의 얼굴. 그 얼굴에는 학대의 흔적이 가득했다. 눈알 하나가 파여 있던 것이다.

그 텅 빈 동공을 바라보고 움찔한 노인, 집사는, 그 동공에 항의하듯 다시 한 번 소리를 질렀다.

"훠이, 저리 가! 이 음식들은 네가 손대면 안 된다! 이제 너는 애완고양이가 아니야! 주인님들은 다 죽었단 말이다!"

"그렇게 된 거군요."

그렇게 소리 지르는 노인의 목에 서늘한 감촉이 닿았다. 아이의 건틀릿이었다. 그 소란을 틈타 창문으로 덮쳐들어 간 아이가, 소리를 지를 수 없도록 노인의 목을 조였던 것이다.

"읍, 흑, 크으윽!"

"저 고양이는 바뀐 주인에게 저항하다 저렇게 눈 한쪽을 파이고 버려졌고, 당신은 순종했군요. 부끄럽지 않습니까?"

"흐으으윽!"

원래부터 늙은 몸이었다. 아이의 억센 조르기를 당하자, 집사는 형편없이 발버둥치며 켁켁댄다. 아이는 싸늘한 눈으로 그 집사에게 말한다.

"아니, 켁, 저는, 큭, 열 살 때부터 이 땅의 영주를 섬겨온..."

"열 살부터 섬겼는데 하루도 못 가 배신했습니까?"

아이가 힘을 풀자 바닥에 널브러지는 집사. 두 발로 바닥을 짚고 무언가를 토해낸다. 흰 물이었다. 뒷모습이라 눈물인지 침인지 알 수 없었다.

"열 살부터... 기근으로 버려진 저를 거둬 주신... 좋은 영주님을 섬겨 온..."

어쩌면 아이의 조르기보다 말이 더 아팠던 걸지도. 이 사람도 어쩔 수 없었던 것 아닐까, 마음 한구석에서 그런 생각이 피어올라 아이의 눈꼬리를 흐려지게 했다. 하지만 아이는 고개를 저어 마음을 다잡고 강한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았다.

"뭐라 변명하든 당신은 더러운 마술사의 부역자입니다. 한 번 배신했으니 두 번은 쉽겠죠. 당신은 지금부터 내 종입니다. 나는 이 저택의 마술사를 전부 죽이러 왔습니다. 내게 따르거나, 죽거나. 고르십시오."

파르르 떨던 집사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는 곧 아이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

그를 통해 적의 수효와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다. 1위계가 하나, 3위계가 하나, 4위계가 하나. 어떤 서열의식 때문인지, 그 순서대로 3층 저택의 각 층을 아래층부터 하나씩 차지해 머물고 있었다. 아이는 우선 1위계를 죽여 레바테인을 만들기로 했다. 그걸 바탕으로, 약한 순서대로 처리하기로 한 것이다.

"윽."

그 1위계 아지프의 방으로 가는 길. 연회장을 가로지르면서, 아이는 음식 썩는 냄새 때문에 코를 붙잡았다.

"이 무슨..."

연회장에는 썩은 음식이 쌓여 있었다. 이 저택에 비축되어 있던 음식을 마구 먹어치우고, 치우지도 않고 내버려둔 듯싶었다. 검게 썩어가는 음식들 주위로 날벌레와 파리가 웅웅대며 쥐와 바퀴벌레가 웅성인다.

그 구역질이 나는 연회장을 가로질러, 작은 복도에 접어들었다. 원래는 이 저택의 딸이 머물던 방으로 향하는 복도였다. 곧 복도의 끝에 매달린 하얀 문에 도착한다.

트레이를 이끌고 간 집사는 심호흡을 하더니, 중지의 손마디로 문을 똑똑 두들겼다. 이미 2층과 3층의 마술사에게는 야식을 대접했고, 1층의 마술사에게 대접할 야식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 야식이 도착한 것으로 생각했는지, 건방진 톤의 들어오라는 소리가 울린다.

"들어와. 여기 놓고 꺼져."

그 안에는 검은 단발머리의 여마술사가 있었다. 피부병을 심하게 앓은 적이 있는지, 얼굴 반쪽에 시뻘건 흉이 진 마술사였다. 그녀는 속옷만 입은 채 작은 조각칼로, 무언가를 마구 깎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짐승의 두개골이었다.

"저, 그건..."

"말 안 듣던 그 개새끼. 죽여서 가지고 노는 중인데."

정원을 지키던 파수견이었다. 그렇게 말을 끝내자마자, 냐앙 하는 소리가 울렸다. 뒤를 따라온 플루토가 마술사에게 달려들었던 것이다.

"뭐야, 이 괭이새끼! 안 뒈졌어?"

칼을 손에 든 채 빼액 소리 지르는 여마술사. 하지만 그 고양이는 선봉에 불과했다. 이윽고 날아든 검날. 아이가 내찌른 장검이 그녀의 심장을 깨끗하게 관통한 것이다.

"크아아악! 너, 너, 무슨..."

기사의 플레이트 메일을 빼앗아 입었기 때문에, 기사가 따라 들어온 것으로 생각해 방심했었다. 울컥, 입에서 피를 토하며 아이를 노려보는 마술사. 그러나 아이는 냉혹한 얼굴로, 림에게서 들은 공양의 주문을 외울 뿐이었다.

화르륵, 검 끝에서 불길이 치솟는다. 마술사는 비틀거리다 눈을 희게 뜨고 쓰러졌다. 일격에 절명한 것이다. 집사는 그 광경을 보고 놀라서, 또 뒤로 자빠지고 말았다.

"저, 저, 이건 또 무슨 마술... 당신도 무슨..."

"조용."

아이는 집사를 조용히 시키고, 연기가 흘러들어 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심장을 공양한 연기는 제사의 향불처럼 나른하게 피어올라, 아이의 뒤에 서 있는 마술사 살해의 신. 림에게 스며들어 간다. 림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간 그 연기를 받아들이곤, 눈을 번쩍 떴다.

'제물은 받았다. 이제 검을 만들기 시작하겠다. 하지만 이 자는 1위계 중에서도 약한 축에 속하는군.'

"그래서? 설마 이거 하나로는 못 만든다는 거야?"

'아니. 하지만 오래 걸린다.'

아이를 내려다보는 림. 그리고 투명한 눈으로 묻는다.

'길어지면 완성은 내일 이루어질 수도 있다. 어쩔 테냐? 여기서 한 번 물러날 테냐? 아니면...'

아까 하인을 추궁해 얻어낸 정보에 따르면, 이 자들은 내일 제국으로 떠날 것이었다. 그러면 잡는 건 요원해진다. 아이는 입술을 앙다물고 말한다.

"아니. 됐어. 그런 것 없어도 두 마리쯤은 처리할 수 있어."

덜덜 떨고 있는 집사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고, 2층으로 향하는 아이. 집사는 힘없이 트레이를 끌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2층으로. 3위계의 마술사가 머물고 있는 곳으로.

또 침실 앞에 다다르고, 문을 두드리는 집사. 그러나 이번엔 들어오라는 말이 돌아오지 않는다.

어쩔까요? 그렇게 묻고 싶은 듯한 얼굴로 아이를 돌아보는 집사. 아까 이미 야식을 먹고 잠에 들었다고 했다. 그러면 지금은 잠을 자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물러서세요."

아이는 언제든 빼 들 수 있도록 장검에 손을 올려놓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윽!"

그리고 소리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3위계의 마술사, 그는 자고 있지 않았다. 아래층에서 1위계의 마술사가 흘린 비명, 그리고 한 번 찾아온 집사가 다시 찾아왔다는 것. 두 가지에서 미심쩍음을 느끼고 깨어나, 대비를 하고 있던 것이었다. 뱀 모양의 소환수를 방문 위에 대기시켜서.

"쉬이이잇!"

문 위에서 떨어진 검은 뱀이 아이의 목에 달려든다. 녹색 독이 뚝뚝 흐르는 이빨을 들이대며 아이를 물어뜯으려 든다.

"치워!"

아이는 얼른 그 아가리에 건틀릿 주먹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억지로 뱀을 목에서 뜯어낸다. 버티는 뱀. 이 검은 뱀은 새끼 코끼리도 졸라 죽이는 힘을 가진 놈이었다. 하지만 아이의 괴력 앞에선 속절없이 떨어질 뿐이었다.

"흡!"

"끼이이익!"

한 손으로는 머리를 붙잡고, 한 손으로는 뱀의 허리를 붙잡고선 훅 잡아당기는 아이. 빨래를 당기는 듯한 동작이었다. 그러자 검은 뱀은 몸을 뒤틀며 두 토막으로 갈라진다. 후두둑, 피가 떨어졌다. 아이의 목에는 뱀이 조인 시뻘건 자국이 남았다. 그러나 거기서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이 개자식, 넌 뭐야!"

제물을 즉사시키기 위한 단검. 그것을 든 마술사가 잠옷 바람으로 덮쳐왔기 때문이었다. 뱀에게 정신 팔려 있는 틈을 타, 플레이트 메일 그 결합부의 빈틈. 거기에 단검을 세차게 꽂아넣는다.

"윽!"

신음을 흘리는 아이. 하지만 움직임은 거침없었다. 이 자는 마술에 있어서는 전문가일지 모르나, 근접박투에 대해서는 초보였다. 고작 단검으로 한 번 일격을 가하기 위해 지나치게 접근했다, 검사에게!

쾅!

마술사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어깨에 팔을 걸고, 바로 박치기를 갈기는 아이. 놈이 쓰고 있던 외알안경을 깨부순다. 파사삭! 안경에 금이 가 부서지고 그 조각이 눈으로 들어간다.

"끄아아악!"

새된 비명을 내지르는 마술사. 하지만 봐주지 않고 바로 하복부, 명치에 주먹을 갈긴다. 다섯 대를 연속으로 얻어맞고 바닥에 나뒹구는 마술사. 아이는 뱀의 습격 때문에 떨어뜨린 장검을 집어 들고, 재빨리 달려갔다. 확인사살을 하기 위해서였다.

쿡!

정신을 잃은 듯 보이는 마술사의 가슴에 칼을 꽂아넣는 아이. 그러나 그는 정신을 잃지 않았다. 옆으로 데굴데굴 굴러 간신히 칼끝을 피하더니, 품에서 자그마한 병을 꺼냈다. 붉은 눈을 한 채로 찍찍대는 흰 쥐. 그게 담긴 병이었다.

"죽어라!"

병에 손을 집어넣는다. 손톱이 길게 자란 손으로 쥐를 쥐어짜 죽이며 외치는 마술사. 아이는 알 수 있었다. 이건 혈사포. 그때 그 랑벨로가 썼던 것과 같은 마술이었다.

콰아앙!

그 손바닥 끝에 새빨간 핏빛의 빛무리가 어리더니, 원기둥을 이루며 터져나간다. 저택의 벽 몇 겹을 뚫고 구멍을 낼 정도였다. 혈사포를 발사하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마술사.

"어디야, 어디 갔어!'

얻어맞았다면 피곤죽이 되어 있어야 할 아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대답은 위에서부터 들려왔다.

"여기다."

아이는 천장을 타고 올라가 혈사포를 피했던 것이다. 천장에서 떨어지며 검을 휘두른다. 노리는 것은 머리. 붉은 신기를 두른 장검, 그 검날은 머리를 가볍게 조각낸다. 서걱! 마술사의 머리는 잘 익은 수박처럼 시뻘겋게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후두둑 떨어지는 핏방울, 아이는 그 옆에 무릎으로 착지했다. 이윽고 마술사의 시체에서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운이, 후욱, 좋았다."

스윽 핏방울을 닦으며 말하는 아이. 말 그대로였다. 하필 이 녀석이 외알 안경을 쓰고 있어서, 또 그게 깨져 눈에 들어가서. 시야가 반으로 줄어 있었던 덕분에 승리했다. 한 눈이 마비된 덕에 포격의 각도가 빗나갔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그 심장에 장검을 꽂는다. 그리고 조용히 공양의 주문을 외웠다. 장검 끝에서 치솟는 주홍색 불길. 불꽃은 마술사의 심장을 먹어치워 연기로 만든다.

스윽, 장검을 뽑아들자 시체는 앞으로 쓰러진다. 살 타는 냄새와 연기가 자욱하다. 매캐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장검을 휘둘러 그 연기를 헤치며, 아이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 번째 층으로. 고위의 마술사인 4위계가 기다리는 곳으로.

*

4위계는 3위계와 한 위계 차이가 아니다. 고위와 하위의 차이. 그것이 둘 사이에 있었다.

4위계부터는 훨씬 강한 마술을 사용할 수 있었고, 호흡처럼 두꺼운 마술방벽을 둘러 대부분의 공격을 무시할 수 있었다. 어딜 가든 당당한 고위직으로 행세할 수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긴장, 긴장해야지."

3층, 그 4위계의 마술사가 잠자고 있는 방으로 향하는 복도. 아이는 가쁜 숨을 들이쉬며 뺨을 툭툭 쳤다. 4위계의 마술사는 그 밑과는 격이 다르다. 모르긴 몰라도, 오늘 있었던 모든 싸움을 합친 것보다도 힘든 싸움이 기다리고 있을 것임이 명백했다.

영주가 머물던 방, 그곳으로 향하는 긴 복도. 이전에 있었던 싸움과 학살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긴 카펫이 쭉 깔린 그 복도의 좌우에는, 장식용의 갑옷이 사열하듯 죽 서 있다.

아이가 입은 것과 같은 플레이트 메일로 전신을 감싸고, 투구를 쓴 갑옷이었다. 그 투구 뒤에는 질량감 있는 어둠이 고여 있다. 아이는 그것이 어쩐지 자신을 바라보는 듯해 께름칙했다.

그 기분을 억누르고, 저벅, 저벅. 발을 옮겨 조심스럽게 그 카펫의 중간에 다다랐을 때.

"ㅡㅡㅡㅡㅡ!!!"

갑자기 그 갑옷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달그락대며 움직이는 통에, 그 투구가 벗겨져 바닥을 뒹군다. 그 때문에 정체가 드러났다.

"인골귀!"

갑옷 안에는, 아지프의 희생술사들이 즐겨 부리는 뼈의 병사. 인골귀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혹시나 했더니 정말로 습격이군! 덮쳐라!"

벌컥, 복도의 끝에서 문이 열리더니 날카로운 명령이 터진다. 2층에서 있었던 소란, 혈사포가 터지는 소리와 마력의 기척. 그것을 느낀 마술사가 눈치를 채고 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복도에 병사를 잔뜩 풀어서.

고위의 마술사다운 음흉한 대책이었다.

"어딜!"

네 방향에서 날아오는 검. 갑주가 두꺼운 등 쪽은 검을 맞아도 괜찮다, 각오를 하고 세 방향에 집중한다. 휙, 장검을 날쌔게 휘둘렀다. 둥근 호를 그리며 날아든 장검이 인골귀의 검 두 개를 분지른다.

"큭!"

옆구리에 날아든 검, 그걸 건틀릿으로 붙잡아 잡아당기는 아이. 인골귀는 검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엉겁결에 찌르던 기세 그대로 아이에게 접근하고, 검을 놓쳐버렸다.

"흡!"

그 머리를 붙잡고 숙이게 만들며, 뛰어올라 무릎으로 해골 병사의 얼굴을 후려치는 아이. 텅! 둔중한 타격음과 함께, 해골의 경추가 부러져 바닥에 구른다.

"큭!"

그러나 아이도 멀쩡하진 못했다. 3면은 막았지만, 4면째. 등에 날아오는 공격은 막지 못한 탓이다. 해골 병사, 인골귀의 괴물 같은 힘을 담은 찌르기는 플레이트를 뚫고 아이의 등에 찍혔다. 간신히 몸을 틀어 피했기에 다행이었다. 척추를 찔리는 참사는 피했기 때문이었다.

"이게!"

등에 퍼지는 뜨끈한 통증. 무시하고, 바닥에 꽂힌 검을 뽑아들고 춤추듯 뒤로 회전하는 아이. 그 손에 들린 검이, 커다란 원을 그리며 인골귀를 덮쳐간다. 그 검날에선 신기가 붉게 번뜩였다.

퍼서석!

호쾌한 소리와 함께, 갑옷째로 비스듬히 베여 바닥에 쓰러지는 인골귀. 아이는 검을 거두어들이고 다시 자세를 취했다. 네 명의 인골귀가 그렇게 쓰러지자, 또다시 네 명의 인골귀가 살금슬금 아이를 포위하듯 접근했기 때문이었다.

"ㅡㅡㅡㅡ!!!"

다시 덮쳐온다. 얼마간의 박투 끝에, 또 어렵잖게 네 마리를 제압하는 아이. 하지만 또 네 마리가 감싸온다. 마치 그 목적이 아이를 쓰러뜨리는 게 아니라, 이 자리에 묶어두는 것인 것처럼.

"설마!"

홱 고개를 돌리는 아이. 역시나였다. 그 인골귀들에게 그런 지시를 내린 4위계의 아지프는, 꿈틀대는 뱀의 모가지에 제물용의 단검을 꽂아넣고 주욱 내리긋고 있었다. 혈사포, 그것을 쏘기 위한 희생의식임이 틀림없었다!

"하하하하, 죽어라!"

부웅, 뱀의 피가 뭉쳐 자그마한 마법진을 이루고, 거기서 둥근 원기둥이 터져 나온다. 붉은 피의 원기둥이. 정통으로 맞는다면 아이도 결코 무사할 수 없는 위력. 아까 전에 보았던 혈사포보다도 몇 배는 강력한 혈사포였다.

'이건 성벽도 꿰뚫었던 놈이다!'

자그마한 외벽도 깨부수고 수십 명을 핏물로 만들어버렸던, 강력한 위력의 혈사포. 아이를 한 자리에 묶어두려는 인골귀들의 공격은, 그 혈사포를 직격으로 쏘기 위한 준비작업에 불과했다.

콰아아앙!

굉음. 그리고 충격파로 천장이 무너지며 회색의 먼지가 부옇게 피어오른다.

"직격이군."

4위계의 마술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쪼그라든 뱀 시체를 내던졌다.

"자, 그럼 어디서 온 놈인지 면상이나 볼까? 면상이 남아 있다면 말이지만."

그리고 겁없는 침입자의 시체를 확인하러 저벅저벅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간에서 멈춰 서고 말았다.

"뭐, 뭐야?"

'늦지 않아서 다행이구나, 어린 순례자야. 네 첫 번째 검이 완성되었다.'

먼지가 걷힌 자리. 그 자리에는 그 침입자가 늠름하게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보는 거대한 은백색의 검, 보름달을 잘라내어 은을 바른 듯 찬란한 흰빛으로 빛나는 쯔바이핸더를 들고서.

'이 검은 레바테인. 참마의 대검이다. 아지프를 죽이기 위한 용도로 벼리어진 검이, 천 년의 시간을 넘어 네 손에 도착한 게다.'

림은 조용히 말한다. 드디어 완성된 레바테인. 혈사포에 직격당하기 직전 완성된 참마의 대검. 그 마술을 깨뜨리는 힘을 가진 검을 휘둘러, 혈사포를 박살 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검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달리기 시작한다. 마술사의 목으로.

"윽, 주, 죽어!"

달려드는 아이를 보고 깜짝 놀란 마술사. 그는 당황해서 뒤로 쓰러지고는, 품에서 또 다른 약병을 꺼냈다. 쥐 한 마리가 안에서 찍찍대는 유리병이었다. 단검으로 쥐를 찍어 제물을 바치고 약식으로 혈사포를 쏜다.

아까의 것보다는 훨씬 작은 붉은 빛무리. 그것이 또 원기둥으로 아이를 노린다.

"소용없어!"

그 빛줄기를 레바테인의 검날로 통렬하게 후려치는 아이. 그러자 그 빛줄기는 마치 달아오른 대장장이 망치에 얻어맞은 얼음처럼, 부옇게 기화되어 좌우로 흩어졌다.

그것을 뚫고 달려든 아이는, 어느새 마술사의 눈 바로 앞에 있었다.

"하아아아압!"

큰 기합. 아이는 무아지경이 되어 레바테인을 위에서 아래로 휘두른다. 자신이 검을 휘두른다기보다는, 검에 스며든 기억이 아이를 그렇게 움직이도록 암시하는 듯한. 신기한 기분이었다.

쿵!

레바테인이 떨어진다. 망나니의 도끼처럼. 당장이라도 마술사를 벌레처럼 짓뭉개 격살할 것 같던 그 검날은, 그러나 검은 방어벽에 막혔다. 둥근 방어벽이 마술사를 감싸는 구슬처럼 빛났던 것이다.

"훅, 후욱, 놀랐잖아!"

마술방벽. 그것이 활성화되었다. 제대로 정련된 레바테인은 물론 그 마술방벽도 배어낼 수 있지만, 연이어 두 번의 격전을 치르고 올라와 또 두 번의 포격을 베어내면서 아이가 힘이 조금 떨어진 상태였다. 어지럼 끼도 있었다.

"꺼져! 너 따위는 감히 마술사를 죽일 수 없다!"

비명처럼 소리지르는 마술사. 그리고 주섬주섬 또 무언가를 꺼낸다. 또 혈사포를 쏘려는 모양이었다. 입술을 짓씹어 피를 삼키고, 정신을 또렷하게 만든다. 그리고 다시 휘두른다.

쿵! 쿵! 쿵!

"히익, 미, 미친 놈아!"

3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검, 그것을 계속해서 미친 듯이 두들겨대는 아이. 그러자 마술방벽에 유리처럼 금이 쩍 가기 시작한다. 마술사는 질겁하여 몸을 떨면서도, 마지막으로 혈사포를 날리기 위해. 제물이 될 생물이 담긴 병을 꺼냈다. 커다란 털거미가 담긴 병이었다.

"내, 내 척추를 돌보는 아지프시여, 제발, 저 미친 놈을..."

그렇게 병을 꺼내든 순간, 갑자기 마술사는 쿨럭 하고 피를 크게 토했다. 독에 당하기라도 한 것 같은 행동이었다. 땀과 신음을 흘리며 레바테인을 내려찍던 아이, 그 눈에 이채가 띄었다. 하지만 멈출 시간 따윈 없었다.

"쳐먹어라!"

기합, 그리고 정수리로부터 내려찍는 커다란 일격. 그 일합으로 금이 갈대로 가 있던 마술방벽은 파사삭 소리를 내며 사탕처럼 깨져버렸다. 마술사의 상반신도 마찬가지였다.

콱, 검을 찔러넣고 공양의 주문을 왼다. 그 심장 끝에서 불이 타오르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아이는 뒤로 쓰러졌다.

"끝, 났다..."

대자로 팔을 벌리고, 중얼거린다. 눈에 들어온 것은 천장. 유리 샹들리에가 흔들거리는 천장이었다. 첫 복수, 그 날 이후 이룬 첫 복수였다.

충격에 아지랑이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는 샹들리에, 그 수백 개의 각도로 세공된 유리면에 아이의 얼굴이 비친다. 복수를 이룬 자의 얼굴이, 수백 개로 갈라져서.

"웃어야지."

응시하며, 스스로에게 명령하듯 말한다. 샹들리에가 공허히 반사하는 얼굴, 자신의 얼굴.

거기 새겨진 것은 전율이나 기쁨 따위가 아니라, 공허함 그리고 일전보다도 더욱 더 깊어진 듯한 수심이었다. 수심의 이유는 알 수 있었다.

마술사를 죽인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전장에서, 임무에서 못된 짓을 하던 마술사를 죽인 적은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그 때는, 그렇게 둔영에 돌아가면.

"잘했죠? 칭찬해 주세요."

대답은 없다. 그 중얼거림에 스스로 놀라 눈을 감았다. 아른거리는 샹들리에, 그 유리면에 어째서인지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이 아른거렸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망상이라는 걸 알아서, 눈을 뜨고 있으면 알아도 계속 보고만 있을 것 같아서.

눈을 질끈 감은 소년. 그리고 그 대답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돌아왔다.

"냐아앙!"

플루토였다. 한쪽 눈이 먼 고양이. 조심조심 뒤따라온 플루토가 아이의 뺨을 핥은 것이었다. 아이는 눈을 떠서, 자신의 뺨을 우유처럼 핥고 있는 플루토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 녀석은 아이의 얼굴에 뺨을 부비더니, 꼬리를 꼿꼿이 세우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석에 놓인 트레이로였다.

그 위에는 먹다 남은 야식이 놓여 있다. 그것을 먹으려 움직이는 모양이었다. 정말 일관적인 행동이었다. 아이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며칠 굶기라도 한 거니?"

이제 방해할 사람은 없으니 먹어도 괜찮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상반신을 일으키는데, 다시 한 번.

짝,짝,짝...

텅 빈 방에 울리는 박수소리. 한 번 더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갈채가 터졌다. 집사였다. 늙은 집사. 그가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은 위태한 발걸음으로, 박수를 치며 아이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뭐죠?"

아이는 눈꼬리를 날카롭게 세우고 집사를 노려보았다. 어떤 적의나 요구를 가진 채 다가온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적의에 예민한 아이는 알 수 있었다.

"저 녀석을 저 음식으로부터 떼어내어 주시지요."

자신에게 다가오는 집사. 그의 눈이 품고 있는 감정은 적의나 굴복 따위가 아니라, 의연함이었다. 성불한 유령의 것 같은.

그 눈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집사는 미끄러지듯 걸어와 트레이에서 플루토를 치웠다. 그리고 야식으로 올려놓은 쿠키를 하나 집더니, 입에 가져가고서는 차를 마신다. 호로록, 수염이 젖도록, 떨리는 손으로 차를 마시고는, 텅 빈 잔을 턱 내려놓는다.

"뭐 하는..."

아이의 시점에서는 그 파뿌리처럼 늙은 흰머리와 뒷모습만이 보인다. 등진 채로, 그는 조용히 말한다.

"감사의 말을 올립니다."

"예?"

"저를 비겁한 종이라고 꾸짖으셨지요. 그 말대로입니다. 저는 여러모로 저 고양이보다 못한 사람입니다."

멍하니 그 말을 듣고 있는 아이.

"평생 굴종했고, 굴종하는 것 말고는 살아가는 방법을 모르고, 굴종하지 않으면 아무도 돌아봐 주지 않는. 그건 저 녀석과 제가 가진 공통점이지요. 하지만 최소한 저 녀석은, 기개를 지킬 줄 알았습니다."

"당신!"

아이는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그 말 때문이 아니었다. 그 노인의 입에서, 한 줄기의 피. 그것이 주르륵 흘러내렸기 때문이었다. 그 피에서는 알싸한 향기가 났다.

투구꽃의 향기. 독의 향기였다.

아이는 불현듯 깨달았다. 자신이 쓰러진 마술사를 레바테인으로 마구 후려칠 때, 그는 갑자기 입에서 피를 흘려 주문을 완성하지 못했다. 그 피에서도 방금 저 투구꽃의 향기가 희미하게 났다. 그자는 아마 먹었을 것이다, 저 집사가 준비한 야식을. 그것에, 독이 들어 있었다면.

황급히 놀라 집사에게 달려가 그 등을 떠받치는 아이.

"뱉어요! 뭐, 뭐하는 짓이에요!"

알아차렸다. 대경해서 플루토가 간식을 먹지 못하게 한 이유도. 이 자는 이미, 오늘을 결행일로, 마술사들의 독살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 층의 마술사가 그토록 경계를 하고 있었던 이유. 그건 저 쿠키에 들어 있던 독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그는 조용히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얼마 전 마술사들이 쳐들어왔을 때, 은혜를 베푼 주인을 내버리고 그 마술사들에게 굴복했다는 것을. 영주가 숨은 비밀방과 비밀통로를 모두 알려준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그러나 그 사실이 도저히 잊혀지지 않아서, 목숨을 내버릴 각오로 뒤늦은 복수를 준비했다는 것마저.

"아아, 후회했습니다, 이제 나는 편안합니다. 쿨럭, 저, 한 가지 부탁을 드리자면,"

저 강 건너편의 보리밭, 영주님과 처음 만났던 곳. 그곳에 묻어주시기를.

그것을 유언으로 그는 떠났다.

아까 전의 자신, 샹들리에에 조각나 비쳤던 자신과는 다르게, 환하게 웃으며.

그 웃음을 보며 림은 중얼거렸다.

'늙고 힘 없으나 기개... 아니, 애정은 있는 자였군. 마술사들에게 굴복했으나, 그것을 후회하고 되돌릴 길을 찾고 있었나.'

그러나 그런 길은 없다. 뒤늦게 독살로 복수한다 한들, 돌아오는 것은 없을 것이다. 주인 내외는 자신의 굴종을, 비참한 배신을 바라보며 떠났다. 그것이 이 자가 이렇게 독을 마시고 쓰러지게 만든 이유인 듯싶었다.

'그럴 이유까지 있었을까, 나는 아직도 인간을 잘 모르겠군.'

림은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잘,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아이가 두 손으로 쓰러진 노인을 받쳐 든 채로, 조용히 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길게 흘러내린 눈물이 일렁이는 불빛을 받아 희게 빛난다. 그것은 하나의 동상 같은 모습이었다.

'왜? 왜 그러는 것이냐, 나의 어린 사도야?'

"내가, 비난하지 말았어야 했어. 이 사람도, 열심히 살았는데. 어쩔 수 없는 거였는데. 나쁜 말을 하지 않았으면, 격려했으면, 이러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자신의 한마디 비난. 그것이 이 사람을 죽이기라도 한 것처럼, 아이는 계속해서 그렇게 눈물을 흘렸다.

잊어버렸던 과거, 그것을 림에게서 듣고 난 후로부터. 아이는 감정이 풍부해졌다. 정확히 말하면 원래 풍부했던 것을 되찾았다. 너무나 따뜻하고 자애로웠던 본래의 품성. 어머니로부터 받은, 천사와 같은 영혼.

무정한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억눌려 있었던 그것이, 되살아났던 것이다.

"잘못했어. 격려부터, 나는 당신을 이해한다고. 당신도 선하고 싶었을 거라고, 좋은 말부터 했어야 했는데. 그랬어야, 됐는, 데."

정말로 진심으로, 한 볼품없는 노인의 죽음이 가슴 아파 계속 눈물을 흘리는 아이. 그것은 마르지 않는 샘처럼, 닦아내도 닦아내도 끝이 없었다.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나, 오만이군. 나는 내 사도조차 이해하지 못했는데 말이야. 림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아이의 뒤를 뒤따랐다.

노인의 시체를 들고 걷는 검사의 뒤로, 하나의 신. 그리고 한 마리의 고양이가 천천히 뒤따른다.

*

저택 바깥에선 해가 뜨고 있었다.

하루에 두 번, 이 슬프고 허무한 땅을 붉게 칠하는 채색의 거장. 볼품없는 하루가 또 다가왔음을 알리는 태양이 햇살을 내뻗어, 어스름을 불사르고 광막한 대지를 가로질러 - 보리밭을, 울며 보리밭을 헤치는 한 명의 소년을 적신다.

한 팔로 계속해서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다른 한 팔로는 노인의 시체를 질질 끌면서. 보리밭을 헤매듯 걷는 아이를.

"편히 쉬기를."

어지럽게 흔들리는 보리밭의 가운데에, 노인을 파묻고. 아이는 조용히 두 손 모아 기도를 올렸다. 눈을 찡그린다. 거센 햇살이 잠시 눈을 감는 것조차 힘들게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무릎 꿇은 채로 태양을 바라보았다. 지평은 붉게 차오르고 있었다.

지평에 서 있는 것이라곤 보리밖에 없다. 밀이 서 있어야 할 땅에 어색하게 서 있는 보리.

그처럼, 서야 할 대지를 잘못 고른 꽃처럼.

온 몸에 피를 칠하고 보리 사이에 무릎꿇은 아이 역시, 낯설기 그지없었다.

아아, 정말로.

몹쓸 시절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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