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첫 번째 동행 ( 3 )
축제 같은 잔치는 밤늦도록 계속됐다.
사각으로 나뭇단을 쌓고 땔감을 쌓아 만든 간이 화덕. 거기에는 돼지 한 마리가 통째로 나무 꼬챙이에 꿰뚫려서, 사과를 입에 문 채로 빙글빙글 돌아가며 연한 구릿빛으로 익어가고 있다. 돼지 껍질에서 떨어지는 육즙이 모닥불과 닿아 달큰한 향기로 그 껍질을 훈연하며 사람들의 코를 간질인다.
서걱서걱, 큰 빵칼이 그 돼지를 껍질째 잘라 먹음직스럽게 접시에 담았다. 위생모를 쓴 여인이 그것을 들고 나르려고 하는데, 어떤 자그마한 손이 그 앞을 막는다.
"줘! 그거 내가 가져다줄래!"
아까 수레의 앞에 드러누웠던 여자 꼬마였다. 접시를 들고 종종걸음으로 달려간다. 슬림하고 단단한 체형을 가진, 여인 같은 얼굴의 남자. 아이에게로였다.
"오빠! 이거 제가 제일 먼저 오빠 주려고 가져왔어요!"
무릎을 끌어안고 옆에서 벌어지는 바둑 대국을 조용히 관전하는 아이에게 달려가는 꼬마. 아이는 싱긋 웃으며 접시를 받아 내려놓고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좋다는 듯 달라붙는다. 아무래도 칭찬을 받고 싶어서 못 견디겠는 것 같았다.
"잘했어."
젖살이 하나도 빠지지 않아, 통통한 여자아이의 볼살을 만지작거리는 아이. 개의 육구보다도 말랑말랑한 촉감이었다. 이래서 사형이나 레이븐사이드의 어른들이 내 볼을 그렇게 만져댔구나. 그게 이해가 가는 촉감이다.
"이거 하나 먹어 볼래?"
유자와 레몬을 섞어 만든 필링을 크러스트로 감싼 파이. 이 꼬마가 아까 주방에서 받아서, 건네준 것이었다. 그 맛은 유명 도시에서 파는 것 못지않을 정도로 훌륭했다. 아이가 손가락으로 그 일부를 뚝 떼서 건네주자, 여자 꼬마는 모이라도 받아먹듯 받아먹었다.
그리고 배시시 웃으며,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아이의 품에 파고들듯 안겼다. 어린아이 특유의 따끈따끈한 체온이 아랫배 가득 퍼진다. 아이는 그 꼬마의 볼을 만지며, 다시 대국에 신경을 집중했다.
"젠장."
마레는 담배 연기를 깊게 내뱉고 바둑판을 노려보았다. 얼핏 보기에는 마레의 흑돌이 유리한 듯 보였지만, 중앙을 관통하는 대마가 눈치채보니 돈사 직전까지 몰려 있어 아주 불리했다. 그 앞에 있는 촌장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바둑판을 내리깔듯 보고 있다.
"한 수만 물려 주게."
두 사람은 5루덴을 걸고 내기 바둑을 두고 있었다. 촌장의 집에서 바둑판을 발견한 마레가 먼저 제안한 것이었다. 돈을 걸자고 한 것은 촌장이었다. 촌장은 그 말에 따라 돌을 물리면서도, 평온한 어조로 말한다.
"허허, 무르시려면 일곱 수는 무르셔야 합니다."
"뭐라고?"
"그 대마는 돈사한 게 아닙니다. 일곱 수 전에 가일수를 하셨어야 생로가 열립니다."
심각한 표정으로 바둑판의 빗금을 두들기는 마레. 그 말대로였다. 일곱 수 전에, 중앙의 대마는 이미 생로가 다 보이지 않게 막힌 상태였다. 마레는 담배 연기를 크게 내뿜더니, 갑자기 환술을 걸기 시작했다.
"아니, 이런, 이게 뭐지? 저쪽에 불이?"
집에 불이 났다는 말을 듣자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리는 촌장. 실제로 집이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보여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난다. 마레는 눈초리를 힐끗 하더니, 그 사이, 돌 위치를 바꾸려 손을 뻗는다.
"잠깐! 이 쓰레기야!"
"흐어어억!"
아랫배에 박치기를 맞고 옆으로 쓰러지는 마레. 박치기를 한 것은 물론 아이였다. 그 북새통에 바둑돌은 전부 쓸려나가 버렸다. 촌장에게 걸려 있던 환술도 풀리고, 무슨 연유인지 알게 된 촌장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다시 앉았다. 마레는 박치기로 얻어맞은 아랫배를 매만지면서도, 비열하게 웃으며 소리친다.
"이런, 제삼자의 예기치 못한 개입 때문에 판이 뒤엎어졌는걸. 이것도 주의 뜻이겠지. 이건 무승부로 해야겠어."
"아니죠! 비열한 술수를 쓴 당신의 패배죠! 반칙패!"
"맞아, 맞아!"
아이에게 안겨 있던 꼬마도 역성을 든다. 마레는 쯧 하고 혀를 차더니, 주머니에서 5루덴 동전을 꺼내 던져주었다.
"받게. 제기랄, 대체 무슨 깡으로 5루덴이나 걸고 내기를 하자고 하나 했더니, 당신 꽤나 고수로군."
동전을 주머니에 넣은 촌장은 이번에는 무슨 책을 꺼냈다. 예스러운 제본 방식으로, 옆을 뚫어 끈을 묶은 책이었다.
"할 게 그것밖에 없었으니 말이지요. 바둑의 본고장이 카나기의 일파라는 건 알고 계시겠지요? 이 마을은, 원래 하레하둔 근처의 선조들이 이주해서 세운 마을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명인의 기보와 행마를 기록한 이런 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저 이 책의 덕을 조금 보았을 뿐입니다."
"오, 그렇군."
"원한다면 가지셔도 괜찮습니다. 선물을 드리고 싶습니다."
"응?"
갑자기 책을 건네는 촌장. 마레는 담배를 입에 문 채로 눈을 끔뻑거렸다.
"아탕칼리의 사도님과 저 호위 분 덕분에, 얼마만에 마을에서 이렇게 웃음꽃이 피게 된 건지 가늠하기도 힘듭니다. 약소하게나마, 이런 보답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이봐. 저건 댁들이 정당하게 거래를 한 거지 우린 딱히 은혜를 베푼 게 없는데?"
"허허, 은혜를 베풀어야만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건 아니지요."
그 말에 마레도 피식 웃으며 그 책을 받았다. 후루룩 훑어 보니, 수 많은 기보와 묘수풀이 따위가 기록되어 있다. 마레는 그 책을 가방에 집어넣고, 바둑판 위에 흑돌 석 점을 깔았다.
"석 점 깔고 다시 해 보자구. 이번에도 자네가 이기면, 좀 특별한 걸 주지. 자네는 아까 빼앗아간 5루덴을 걸어."
아이는 눈을 말똥말똥 뜨고 품에 여자아이를 안은 채로, 두 사람의 대국을 바라보았다. 과거에도 몇 번 사람들이 바둑을 두는 걸 본 적은 있었다. 블레어와 란페이가 두기도 했고, 레고르가 혼자 백돌과 흑돌을 둘 다 쓰면서 두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는 제대로 바둑을 둬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는 것이라곤 네 면을 둘러싸면 죽는다, 그것 정도뿐이었다.
얼마 안 가 집 계산을 하기도 전에 바둑판은 백돌로 가득 찼다. 마레는 담배로 도너츠를 만들어 내뱉고는, 돌을 던졌다.
"제기랄, 또 졌군. 석 점이 아니라 여섯 점은 깔아야 하겠는데."
"과찬이십니다. 결과 차이야 크게 났지만, 판단 차이는 전보다 훨씬 적었습니다."
"자, 그럼 내기 대가야. 받게."
붉게 물들인 고급 용지에, 그것보다도 고급스러운 필체로 휘갈겨 쓴 문자가 가득한 문서. 그것을 펼쳐 보여준 후 흰 끈으로 한 바퀴 묶어 건네주는 마레. 촌장은 이게 무엇인지 알지 못해 눈을 껌벅거렸다.
"이건... 저..."
"이 마을의 사람들이 아탕칼리를 섬긴다는, 랭 교구 공인의 신앙 보증서다. 내 서명과 인장을 찍어 두었어. 그 징수 수레에 실려 있던 물건들 역시, 적법하게 너희에게 넘어간 것이라는 내용증명도 포함되어 있다."
"저...저...이런..."
"조디악은 아탕칼리의 본단이 특별히 신경써서 계도하는 종류의 세력이라서 말이야. 이 문서를 보여주면 감히 또 추심을 하러 기어온다거나 징수를 한다거나 하진 못할 거야. 이걸 무시했다간 놈들의 본거지까지 지랄이 날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이건 조디악으로부터의 안전 보증서나 다름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마레에게도 상당한 정치 내외적인 부담과 책임을 가할 것이 틀림 없는 문서였다. 오랜 연륜으로 쌓은 지식으로, 그걸 알고 있는 촌장은 바로 바둑판에 머리를 부딪을 듯 절을 했다. 마레는 손사래를 치며 그 감사를 일축할 뿐이었다.
"무슨 소리인가. 이건 자네가 내기로 적법하게 따낸 거 아닌가. 감사할 대상은 자기 자신, 그다음은 주님이겠지. 나는 아마 마지막이야."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작년부터, 저 녀석들에게 얼마나 시달렸는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촌장을 내버려두고, 마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어느새 자신의 품에서 여자아이가 잠이 들었다는 걸 깨닫고 그 여자아이를 받쳐 들곤 마레를 따라갔다.
마레는 돼지 통구이가 치워진 사각의 불 앞에 쭈그려앉아서, 불을 쬐기 시작했다. 아이는 여자아이를 품에 안은 채로 그 앞에 앉아 같이 불을 들여다보았다. 잠시 후, 먹지 않고 남겨둔 파이와 돼지고기 따위를 가져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렇게 멋진 요리와 멋진 축제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왜 저런 것들에게 돈을 빌렸을까요. 저 촌장 어르신도, 상당히 지혜로우신 분 같은데."
"저놈들의 수법은 나도 알아. 처음에는 조디악이 아닌 것처럼, 무슨 종교재단 비슷한 재단이 제 3의 업체로 나타나서, 선의로 곡식을 빌려주는 것처럼 다가왔겠지. 그리고, 그 제 3의 업체는 그 채권을 조디악에게 다시 팔아버렸을 거다. 그러면 최종적인 채권자는 조디악이 되는 거지."
"음, 무슨 소리죠..."
"아무튼 졸라게 복잡하게 뒤통수를 때렸다, 이런 뜻이란다."
피식 웃는 마레. 모닥불이 타닥이며 그 얼굴에 주홍색 불빛을 드리운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저 놈들은... 그리고, 권벌 아바키렌은 아탕칼리의 주적 중 하나거든."
권벌 아바키렌.
그들과 그들의 민족은, 사소필렌에게로 흘러들어가 지금처럼 콘체른이라는 형태를 취하기 이전부터 아탕칼리의 주적이었다.
"저 놈들은, 제국의 감시와 라달라리아의 법률이 미치지 않는 곳을 돌아다니며 온갖 추잡한 방식으로 돈을 벌어들이지. 저놈들이 하는 상행위 대부분은, 우리 주께서 금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저놈들과 저 레버넌트라는 것들을 십자가에 매달고 매달기를 거듭해왔지. 앞으로 들르는 마을마다 아탕칼리의 인장을 찍어 붙여둘 생각이야. 혹여라도 다시 추심하러 오지 못하도록."
"그렇게 나쁜 놈들인가요?"
의외의 반응이 돌아왔다. 마레는 고개를 가로로 저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저놈들이 처음부터 무조건 그런 절대악으로 성립해 있었느냐, 그건 또 아니거든. 권벌 아바키렌은, 원래 두냐 쪽의 짐승 숭배자들과 뿌리가 되는 족속이 같은데 말이야. 그렇다고 해서 두냐의 암살단 쪽에 입교할 정도로 피가 진하지는 않은, 그런 어중띤 유랑 민족 출신이야."
"성 끝이 키렌으로 끝나는 놈들은 다 그렇지. 그 뿌리 없는 민족의 이름을 키레넨이라고 하던가."
"그 자들은 나라가 없어서, 고향을 빼앗기고 떠돌아다니며 다른 나라에 기생해서 살아왔지. 그 때문에 굉장히 오래 차별받았고, 정치적 권력으로부터 배제당했다.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돈뿐이었을 거야."
"공직에도 진출하지 못하고, 대학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마술의 입교도 거절당하고, 가혹한 특별세와 노역 그리고 차별에 시달렸던 그들을 평등하게 대접해준 건 돈과 황금밖에 없었어."
"그 결과 돈 자루만 들고 온다면 모두에게 긍휼한 사소필렌에 입교해서, 세상에 복수하듯 돈을 벌었다."
"저자들에게는, 돈만 있으면 누구든 대접해준다는 사소필렌의 교리가 오히려 아름답고 자비롭게 여겨졌을지도 몰라."
"모르지. 어쩌면 저들은 그냥 세상이 그들에게 가르친 걸 실천하고 있는 걸지도."
그 말을 듣고 골똘히 생각하던 아이의 눈에 잠시 연민의 빛이 어렸다가, 사라졌다.
"그래도, 저놈들이 하는 짓은 그런 걸로 정당화가 안 될 것 같은데요. 거기다 당신네 주적이라면서요. 주적한테 그런 말을 해 줘도 돼요?"
"그러니까 내가 계속 이런 곳이나 떠돌고 있는 것 아니겠나. 그것도 다 주의 뜻이겠지."
마레는 담배를 하나 또 꺼내서 불을 붙이고 깊게 빨아들였다. 하늘을 바라보니, 지평의 끝부터 끝까지 가득한 별자국은 도시보다 열 배는 맑았다. 멍하니 그 아름다운 하늘을 바라보던 마레는, 툭 무언가를 던졌다.
"어쩌다보니, 나는 내 본단에선 겉도는 처지가 되어버렸단 말이지. 쓸데없는 걸 깨달아버리는 바람에."
"쓸데없는 거라면..."
"아탕칼리에서 수도사가 되려면 전공을 정해서 논문을 제출해야 하는데 말이야. 나는 수도사 자격 논문으로 이상한 걸 냈다가, 학계에서 매몰차게 쫓겨나서 이렇게 심문관이 되어버렸다."
"예? 당신 그럼 대학물 먹은 학자였어요?"
"허 참. 지금까지 이렇게 지적으로 세련된 얘기를 듣고도 눈치를 못 챘단 말이냐? 그럼 날 뭐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돈이랑 여자에 미쳐서 수도사 흉내만 내는 파계승 정도로..."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는 마레. 그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뭐, 무슨 이론이었느냐면, 보이지 않는 손이 어쩌구, 이런 내용이었는데 말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