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36화 (36/279)

8. 수탐 ( 3 )

*

"이건 자개장식이군. 이 동네에서 볼 수 있는 물건은 절대 아닌데."

검게 옻칠한 나뭇결. 나비 한 마리가 그 위에서 몽환적인 오색으로 영롱하게 빛난다. 마레는 자개장식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조개껍질을 장인이 얇게 파내서 잘 가공해 이렇게 장식으로 사용하는 건데 말이야. 이 동네의 조개로는 불가능한 일이야. 십만 종의 조개가 있으면, 이렇게 쓸 수 있는 조개는 다섯 개 종류 정도라고 하던가. 이 근방에는 한 종류도 없다. 즉 여기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뜻이겠지. 아무래도 이것은 네 칼과 연원이 같은 모양이다."

"연원이 같다면..."

"그때 그 마을의 주민들은, 카나기의 영역에서 이주해온 거라고 했었지. 그 환도도 그때 가져온 것이라고. 이 상자도 마찬가지로, 거기서 이주해온 어떤 마을이 대대로 보관하고 있던 걸 노획한 것일 것 같군."

상자를 붙들고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마레는 갑자기 손을 내밀었다.

"그 환도를 여기 대봐라."

철컥, 그러자 마술로 잠겨 있던 상자가 부드럽게 열렸다.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네 칼집에 새겨져 있는 그림은 꽃이었지. 이건 나비다. 어떻게 봐도, 연관을 지어놓은 게 분명하잖나."

"아니, 그게 어딜 봐서 분명해요...당신 같은 사람한테나 분명하겠죠."

"칭찬이냐?"

"아니거든요!"

"뭐, 됐어. 이 상자는 상자 자체로도 몇백 루덴은 우습게 할 물건이야. 조심해서 간수하라고."

상자를 열고 안에 들어있는 물건을 꺼내는 마레.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한 자루의 장도였다.원형의 흰 대나무 손잡이에, 인두로 검은 글자를 빽빽하게 새겨넣은 장도. 카나기의 문반들이 호신용으로, 그리고 생활용으로 쓰는 칼. 낙죽장도라고 불리는 물건이었다.

"예술품으로의 가치야 있겠지만, 음, 칼날은 딱히 예리하지도 마술적이지도 않아 보이는데."

휙휙, 칼을 휘둘러보던 마레의 눈에 닿은 것은 손잡이에 빼곡하게 새겨진 글자였다. 원래 이 손잡이에는 그 칼을 소유한 선비의 좌우명이나 철학 따위를 담도록 되어 있었다.

"근데 이건, 어떻게 봐도 암호문이잖아."

상자도 장도도 위장.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이 낙죽장도의 손잡이에 새겨진 이 암호문. 이것이 가리키는 무엇이야말로 정말로 귀중한 물건일 것 같았다. 마레는 장도를 쥔 채로 아이에게 허락을 구했다.

"이건 그냥 촉인데 말이야, 이 암호문을 알면 이놈들이 하는 짓이 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나한테 맡겨두지 않겠나? 대신 그 상자는 너한테 전부 넘겨주지."

"좋아요. 아니, 이 상자도 팔아서 반으로 나누던가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 마레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상자는 닫아놓고 우리가 아직 이걸 열지 못한 척하라고. 교섭재료로 쓸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교섭재료?"

"네 단장의 검은, 카나기의 잔당 중 고위직이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다. 어디까지나 확률이라 장담은 못 하겠지만."

"어, 왜요?"

"그 검은 척 보기에도 꽤나 고급스럽고 귀중해 보인단 말이야. 팔면 집 열 채는 우습게 살 수 있는 물건이겠지. 그런 물건은, 아무리 전란에 휩쓸린다 하더라도 크림이 우유 위로 떠오르듯이 떠오르게 되어있다고. 그런데 아지프의 전리품 전시에도, 카나기 쪽이 개최한 전후의 경매장에도 그게 나타나지 않았어. 그렇다면, 아직 북서 자치령에 있을 확률이 높다 이거지. 그래서 의뢰주도 나한테 이걸 의뢰한 거고."

마레는 아이의 이마를 톡톡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그럼 그게 왜 바깥으로 못 나오고 있을까. 나오지 못할 사정이 있어서겠지. 네 단장은 그 어이없는 뒤통수를 얻어맞았으면서도 마지막까지 용병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카나기의 병사들과 싸웠다더구나. 그럼 그 유품인 칼도 카나기의 잔당 손에 들어갔다가, 흘러흘러 높은 곳에 바쳐졌을 확률이 높겠지. 뭐, 그냥 어디 땅을 파면 툭 튀어나올 가능성도 있겠지만."

단장의 이야기를 하자 아이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근데 하나만 질문해도 돼요?"

"뭔데, 해 봐. 내 여자 취향만 빼고 다 말해주마."

"그딴 건 개한테나 떠들고요! 음, 대체 그 의뢰주라는 사람은 누구에요? 왜 그렇게 열심히 블로어를 찾는 거고, 어떻게 레이븐사이드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건가요. 혹시, 나 말고 레이븐사이드의 생존자라던가..."

"몰라."

"네?"

"이 의뢰는 몇 단계를 거쳐 의뢰주를 숨긴 채로 내 손에 들어왔다. 그러니 나도 알 수가 없어."

실낱같은 기대를 품었던 아이의 얼굴이 안쓰러울 정도로 침울해진다. 너무 기대를 딱 잘라버렸나? 마레는 헛기침을 하고 말을 끝마쳤다.

"그러니 어쩌면 이놈들의 보스가 그걸 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거다. 만약 그런 상황이 된다면, 교섭을 해야겠지. 그럼 교섭의 재료는 하나라도 더 있는게 좋잖아."

"그렇구나. 알겠어요."

"아니, 넌 모르고 있는데."

"예?"

"이 말을 들었으면, 당장 이놈들의 노획품을 하나라도 더 뒤져서 챙길 생각을 해야지. 뭐가 교섭재료가 될지는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아!"

손뼉을 치는 아이. 이런 식으로 아이는 알게 모르게 마레에게 처세술을 계속 배우고 있었다. 선의를 지키기 위해 거짓말로 무장하는 법을.

"이만하면 됐다. 더는 챙겨갈 게 없어 보이는군."

이들이 남긴 각종 문서, 노획품, 암호문 따위를 한 보따리 입수한 아이와 마레는, 그것을 싸들고 무너져가는 지하예배당을 나섰다. 목적지는 자치령과 제국의 경계에 있는 도시, 웨스벤이었다. 그 곳에, 이 암호문들을 해석할 줄 아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광산도시 웨스벤.

인근에 위치한 소금광산 덕분에 북서 자치령 인근의 도시치고는 꽤나 윤택한 도시. 그 도시의 한 주점에서는, 흰 머리의 남자와 금발의 심문관이 한 식탁에 둘러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문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초벌 번역이 끝났다. 그런데 번역을 한 내용조차도 암호문이 되도록 만들어놔서, 한 번 더 해독을 해야 된다나 봐. 오늘 중으로 회신을 준다고 하더군."

"음..."

"이건 어디에 집결하라는 지시문 같은데. 그들의 옛 상형문자를 암호화한 것이라 읽기는 힘들다만, 일단 지시하는 일자는 알겠다. 11일 뒤다."

"예? 당신 얘네 암호 문자 모른다면서요."

"근데 이놈들이 알게 해 줬다. 병신같이 암호화를 해 놓고는 작성 년월일을 적어뒀어."

"이 하단에 적힌 이거, 이건 어떻게 봐도 구조상 몇 년 몇 월 며칠이라는 표시겠지. 이게 정확히 언제 작성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올해일 거 아닌가. 올해가 제국력 1015년이고, 이놈들이 연도를 이렇게 적어놨으니 최소한 우리는 1,0,5 세글자는 알게 된 셈이지. 그리고 글 내용에서 계속해서 반복해서 15라는 숫자가 나오잖나?"

"이렇게 계속해서 적을 건, 작전의 결행일 정도밖엔 없을 것 같은데. 그렇게 보면 구조가 이치에 닿는 부분이 많아. 이 정보들을 바탕으로 역으로 일자를 해독해보면, 이건 4일 전에 작성된 거라는 걸 알 수 있고."

"즉 이건 11일 뒤가 뭔가의 결행일이라는 뜻이겠지"

아이는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 마레는 물컵을 홀짝 한 입 들이키고는, 뭘 그렇게 놀라냐는 듯 중얼거린다.

"아주 기초적인 암호해독이다. 너도 언젠가 이 정도는 배워둬야 할 거야."

"요,용병은 그냥 싸움만 잘하고 양심만 잘 지키면 된댔어요. 일단 나는 이름 쓰는 방법만 알면 다른 건 몰라도 된댔어요."

"어떤 머리 쓰기 싫어하는 멍청한 사람이 그랬냐?"

"단장님이요."

"이런, 위대한 단순성을 품은 현명한 말이로군. 너를 생각해서 한 말이겠지."

아이의 표정이 딱딱해지자 바로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리는 마레. 하루 꼬박 걸려 웨스벤에 도착한 마레와 아이는, 마레가 잘 알고 있는 아탕칼리의 암호해독자에게 입수한 암호문들을 맡기고, 이 주점에서 머무르며 암호가 해독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머무른 지 벌써 이틀이 되었는데도, 온갖 방법을 총동원해 만든 카나기의 암호문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강제적으로 여기 머무르고 있었다. 마레는 푸념하듯 말했다.

"대체 무슨 비밀스러운 짓거리를 하길래 이렇게까지 보안을 하는 건지, 원."

"그러게요. 이러고 별거 아니면 오히려 화날 것 같아요."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마레는 촌장에게서 선물 받은 바둑책을 펼쳐 살펴보고 있었다. 간이 바둑판을 꺼내, 혼자서 바둑돌을 두며 기보를 따라 한다. 갑자기 장난기가 동한 아이는, 그 바둑돌 하나를 주워다 다른 곳으로 옮겨버렸다.

"이놈."

자기가 뒀던 흑돌이 없어진 걸 깨닫자, 마레는 피식 웃으며 바둑돌을 검지로 튕겨 아이에게 발사했다. 쏜살같이 날아간 바둑돌은 아이의 이마를 때리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뭐하는 짓이에요?"

"너야말로 열여섯이나 먹고 그게 뭐 하는 장난질이냐."

"나는 다른 사람한테 피해는 안 주잖아요! 그러다 다른 사람 맞으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그래서, 주변에서 수군대고 있잖아요."

"아니, 수군대는 건 다른 이유 같은데."

두 사람이 여관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을 때부터 주변은 이 두 사람을 주목하고 있었다. 아탕칼리의 진홍색 법의도 눈에 띄었고, 두 사람의 용모 역시 달과 태양을 띄워놓은 것처럼 빛났기 때문이다. 특히 여자 손님들이 연신 이쪽을 보고 수군대고 있었다. 살짝 고양된 기운으로, 상기된 얼굴로.

"저, 실례합니다."

옥구슬이 굴러가는 것 같은 깔끔한 목소리. 서로에게 바둑돌을 쏘아대며 유치한 실랑이를 하던 마레와 아이는 손을 멈추고 그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바라보았다. 여자들이었다. 세 명의 여자, 머리를 아리땁게 땋아 올리고 한 송이의 꽃으로 고정한 여자들이 얼굴을 살짝 상기시킨 채 테이블 옆에 서 있었다.

"아까부터, 혹시 소문으로 듣던 그분들이 맞나 싶어 주목하고 있었습니다만. 수도사분께서는 혹시 아탕칼리의 심문관이신지요?"

"보면 알잖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이번에 추천장을 받아 새롭게 율사로 임명받게 된 라달라리아의 1위계 율사, 호즈 아도헤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갑자기 공손하게 인사를 하는 백금발의 율사. 뒤에 있는 두 명의 여자도 거기에 따라 다소곳하게 인사를 했다. 인사를 받으며 머리를 세우고 있기가 멋쩍어서, 엉겁결에 아이도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마레는 바둑책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행마를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저, 흰 머리의 남자 분... 맞으시죠?"

"아? 네."

"남자 분께서는, 아까 용병이라고 자칭하시는 걸 들은 것 같습니다만, 맞으신가요?"

"예. 맞습니다."

고개를 끄덕거리는 아이. 아이는 아직까지도 왜 이 여자들이 자기한테 다가와서 말을 걸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도 라달라리아의 율사들이.

이 메마른 사막 같은 센디엘에서, 그나마 가끔 있는 따뜻한 이야기나 미담의 주역은 대부분 라달라리아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아이는 그들이 마술사임에도 불구하고 라달라리아에 대한 인상이 그렇게 나쁘지가 않았다. 그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인식이기도 했다.

"역시. 그럼 당신은 천사가 아니었군요."

"천사?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얼마 전부터, 인근에서 그런 소문이 돌고 있었습니다. 후드를 뒤집어 쓴 어두운 죽음의 천사가 아니라, 하얀 머리의 아름다운 천사를 데리고 다니는 심문관이 저 북서 자치령의 험지를 돌아다니며 구원을 선물하고 다닌다고."

"쿨럭."

마레는 물을 마시다 사레가 들려 쏟을 뻔했다.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본다. 블로어를 찾아 돌아다니면서, 아이와 마레는 혹여라도 조디악이 손대지 못하도록 여러 마을에 아탕칼리의 인장을 선물하고 돌아다녔다.

그 과정에서, 그 인장을 선물받은 마을들을 중심으로, 뭔가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아이가 품고 있는 비인간적인 미색 때문일 것이었다.

"언제나 소문은 진실을 담아내지 못하는 법이지요. 하지만, 왜 그런 소문이 퍼졌는지는 알겠습니다. 정말로,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아름다우시군요. 그 마음씨도, 용모도."

아이의 손을 붙잡고 밝게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호즈 아도헤르. 아이는 손끝에서 전해지는 촉감을 느끼며 이 사람이 왜 이러나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그 손을 자신의 가슴께로 가져가며 눈을 감고 경건한 표정으로 외쳤다.

"심문관 분, 그리고 용병 분. 간절히 부탁드리건대, 그 따뜻한 마음씨를 잠시만 저희를 위해 써 주실 수 없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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