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37화 (37/279)

8. 수탐 ( 4 )

아이는 얼굴을 붉히며 화들짝 손을 떼고 되물었다.

"예? 도, 도움이라면요?"

호즈는 손을 펴서 입을 가리고 웃는다. 율사와 심문관. 복장만으로도 신분이 드러나는 특이한 두 집단이 접촉하고 있으므로, 점내의 이목은 이쪽에 크게 집중되고 있었다. 솜털이 빠지지 않은 걸 보면 아이와 비슷한 또래일까, 그렇기 때문일까. 호즈는 그 이목을 굉장히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희는 특별히 소속 학교에서 추천장을 받은 재원이라, 나이 스물이 될 때까지 고위 율사분의 도제로 재판을 연구하게 되어있답니다. 그다음에는 바로 판관으로 임용되어 율사 생활을 시작하게 되어 있죠. 즉, 학교와 법원에만 머무르다 바로 판관이 되는 셈이라... 이것을 좋게 보지 않는 사람이 많아서, 그 전에 반드시 고행의 순례를 하도록 되어있습니다."

그 말을 듣자 바둑책을 내려놓는 마레. 호즈는 어절과 어절 구분이 매우 명확하게 되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법조문을 읊는 듯한 목소리였다.

"순회 율사, 보통 그렇게 부르지요? 센디엘의 가장 험하고 법의 도움이 필요한 곳을 순회하며, 즉결로 범죄자를 심판하고 주민들의 분쟁을 조정하며 정의를 회복시켜주는 고행의 순례를 행하는 율사를 칭하는 말입니다. 몇 년에 한 번씩, 사망자가 나올 정도로 심한 고행이지요."

"그, 그렇구나..."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라달라리아의 율법은 어디까지나 제국 영토에서만 그 위력이 강하고, 제국 바깥에서는 그 힘이 형편없이 약해진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보통, 순회 율사들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제국 바깥에서 율사를 지켜줄 든든한 호위 무사와 동행합니다. 그분들은 보통 집행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시지요."

그 말을 하며 눈웃음을 치고 이쪽을 바라보는 호즈. 호즈 뒤에 있던 두 명의 법관도 은근한 기대를 가지고 이쪽을 바라본다. 마레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하지만 아이는 그제서야 영문을 깨닫고 소리쳤다.

"아! 그럼, 저한테 그 집행관이라는 걸 해 달라는 건가요? 음, 자치령 쪽의 사람들을 도와주러 순례를 떠나야 하니까?"

"바로 맞추셨습니다. 염치 없는 부탁이 될 수도 있지만, 물론 사례하겠습니다. 본디 용병이시라면, 의뢰를 받는 것에 거부감은 없을 것이라고 사료되는데요."

"음..."

마레를 쳐다보는 아이. 아이의 상식으로는 자신보다도 마레가 이 일에 쌍수를 들고 찬성할 것 같았다. 치마를 두른 인간만 보았다 하면 온갖 이상한 짓을 하며 추근덕대는 꼬락서니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레는 어떤 때보다도 싸늘한 표정으로 바둑돌을 매만지고 있을 뿐이었다.

"아, 물론, 집행관님을 돈으로 살 수 있는 값싼 사람이라고 생각한 건 아닙니다. 이렇게 아름다우시고, 또 천사로 불릴 정도로 긍휼하신 분을 곁에 모시고 가르침을 받고 싶은 마음도 있지요."

"에이, 뭐 그런..."

칭찬이 머쓱해서 코를 매만지는 아이.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되겠다. 호즈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밝은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손을 붙잡으려 들었다. 그것을 가로막은 것은, 마레의 알까기였다.

"앗!"

바둑돌에 손을 얻어맞고 손을 빼는 호즈. 마레는 냉담한 표정으로 그녀들을 물리쳤다.

"꼭 지켜야 하는 선약이 있다. 바빠서 힘들 것 같군."

눈웃음으로도, 친절하게 들리는 목소리로도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단단한 얼음 같은 선언. 억지웃음을 지은 채로 말을 고르던 호즈는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해 무안을 숨기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아이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웬일이에요?"

"뭐가."

"당신은 여자를 아주 아주 좋아하잖아요. 그래서 저런 일이 있으면 바로 달려들어서 수락할 줄 알았는데."

"이 지조 높은 수도사를 뭘로 보는 거냐. 응?"

한숨을 내쉬며 주머니를 더듬거려 담배를 꺼내는 마레. 별로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할 때마다, 마레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무는 습관이 있었다.

"넌 저게 정말로 고행을 자처하는 사람들의 복장으로 보이냐? 저번에 내가 변장한 거 찾을 때는 잘도 찾더니만. 분내 맡고 정신을 못 차려가지고."

"분내라니요! 음, 왜요?"

"옷만 봐도 이미 양잠으로만 만든 고급 비단에, 주름내는 방식도 최신 유행이고. 얼굴은 화장수를 사용한 티가 팍팍 나는데. 몸에 두르고 치장하는 데에만 한 30루덴은 넘게 썼을 거다. 세 명 다. 그렇게 두르고 고행의 순례를 나서는 여자가 세상 천지 어디에 있나?"

긴 말을 시작하려는 찰나, 점원이 고기파이와 도수가 거의 없는 사과주 그리고 적양배추 피클을 들고 테이블에 도착했다. 아이는 또르르 사과주를 따라 그 황금빛 액체를 한 입 홀짝 마셨다. 사과주는 인근의 유명 산지에서 담근 것이라 시고 달콤하며 시원했다.

마레는 음식에 닿지 않도록 피해서 담배 연기를 내뿜고는, 자기 몫의 고기파이를 손질하며 말을 이어갔다.

"저것들은 그냥 남자와 연애 놀이가 하고 싶은 거겠지. 무슨 집행관이 필요하겠어."

"연, 연애 놀이라면..."

"예쁜 순회 율사와 잘생긴 집행관이 험지 순례를 동행하면서 지들끼리 꽁냥대고, 가끔 나쁜 놈 무찔러서 불쌍한 사람들 구해주고 보답 받으면서 눈물도 흘리고 착한 척도 하고 풋풋하게 연애질하다 신분 차이 때문에 갈라지거나 사랑의 도피를 시도하는, 대충 그딴 클리셰의 염정 소설이 저 옆에 서점만 가도 한 수천 권 있을 거다."

"저 여자 꼬맹이들은, 그냥 그 소설 속 주인공인 양 연극을 해보고 싶은 거겠지."

아연실색하는 아이. 아이는 그런 책은 솔직히 손을 대 본 적도 없어서, 그게 사회적으로 그렇게 여겨진다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뭐, 또래답다면 또래다운 욕망이다만, 머리에 꽃봉오리를 꽂았으면 책임을 질 줄 알아야지. 율사들은 대부분 여학교에서 평생을 지내다 사회에 갓 나온 여자 꼬맹이들이라 말이야. 머리카락에만 꽃이 있는게 아니라 머릿속까지 꽃이 가득한 경우가 많아."

푹. 육즙이 뚝뚝 떨어지는 고기 파이를 질겅질겅 씹는 마레. 아이 역시 자기 몫의 고기 파이를 먹기 시작했다. 저번에 했던 생각대로 이 동네 사람들은 파이를 만드는 데 재능이 있는 것 같았다. 이 파이 역시 흠 잡을데 없이 맛있었다.

"돈 있고 딸 있는 집안의 공통된 소원은 자기 딸이 라달라리아의 율사가 되는 거지. 그러니, 아마 저 세 율사들도 다 꽤 윤택한 집안의 따님이실 거다. 그 윤택한 집안에서 딸을 그냥 고행길에 방치할리도 없으니, 괜찮은 용병이든 호위든 구해서 마차에 대기시켜놨겠지. 집행관 같은 건 애초부터 필요 없다. 그냥 연애 놀이가 하고 싶은 거지. 이제 좀 이해가 가나?"

"하지만... 아닐 수도 있잖아요. 정말로, 혼자 다니다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잖아요."

마레는 피식 웃으며 다시 한 번 담배를 들이켰다. 하얀 도너츠 모양의 연기가 떠올라 불빛 속에 사그라든다.

"그럼 저 여자들이 여기 있을 리가 없지. 아까 여기 들어설 때부터 지켜봤는데, 저 테이블이 저 여자들의 지정석처럼 되어 있는 모양이더구나. 여기에 꽤나 오래 머무르고 있다는 건데. 여기는 북서 자치령 인근에서 그나마 가장 치안도 안정되어 있고 살 만한 곳이지."

"왜 여기에 오래 머무르고 있겠나. 여기서 고행하라고 정해진 기한을 때우다가, 아주 잠깐 용병들 호위받으면서 어디 마을 하나 들러서 라달라리아 입교 성명서에 돈 주고 성명 몇 개 받은 다음 나는 고행했노라고 증거 챙겨서 귀환할 생각인 거겠지. 사실, 그 고행의 순례라는 제도는 이미 이딴 식으로 요식행사가 된 지 오래라고 들었다."

"그런...말도 안 돼요. 그럼 모든 율사가 다, 다 저렇단 말이에요?"

"말도 안 되긴. 뭐, 정말로 곧이곧대로 그 짓거리를 하러 북서자치령에 발을 내디딘 율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만, 그럼 애저녁에 죽었겠지. 그러니 모든 율사는 다 저런 게 맞다. 안 그런 율사는, 다 죽었을 테니 말이야."

자신이 평소 라달라리아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상상과 정반대되는 마레의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짓는 아이. 마레는 고기파이의 딱딱한 껍질을 물에 담가 먹으려 하면서 말한다.

"환멸했나? 나는 그보다 더 환멸했다. 나는 저런, 부잣집 귀족 아가씨의 자의식을 가진 여자들이 율사랍시고 머리에 꽃 꽂고 돌아다니는 걸 볼 때마다, 속이 굉장히 쓰려."

"서점의 법 관련 서적 칸에 저런 여자들의 이름으로 쓰인 책이 꽂혀있는 걸 볼때마다, 다 뽑아서 버려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 정도지. 그만큼, 이 나라의 법체계가 금권에 파먹힌 자국 같아서 말이야."

"모든 지식 계급은 필연적으로 언젠가 부인 계급의 옹호자가 되기 마련이라고는 하지만 말이야. 그래도 이 땅의 마지막 양심 취급을 받는 사람들이, 저러면 안 되지 않나. 뭐 그런 철없는 생각이 아직 가슴속에 남아 있어서 말이지."

"안 그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래, 그래. 어딘가에는 정말로 선의로 몸뚱이 하나만 들고 고행하고 있는 율사라는 게 있을지도 모르지. 같은 확률로 까만 백조도 있을 거다."

아이는 자신의 생각보다도 더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동화 속 이야기가 현실이 아니라는 말을 들은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어느새 침통함 때문에 손이 멈춰서 맛있게 먹던 고기파이도 다 먹지 못하고 남길 정도였다. 적양배추 피클을 덜어내 접시로 가져가던 마레는, 분위기를 좀 띄워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사실 그리고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는데 말이야."

"뭔데요?"

"저렇게 출신이 고급인 여자들은 잘 안 대주거든. 저런 사람들이랑 어울리면 대주지도 않는데 남자친구 놀이는 다 해줘야 되니까 피곤해."

"대,대주다니..."

그 말을 듣고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는 아이. 버터나이프를 붙잡고 호통치듯 말한다.

"공공장소에서 그런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돼요! 다, 다른 사람이 듣잖아요."

혹시라도 아까 그 율사들이 들었을까 곁눈질로 눈치를 보는 아이. 그 얼굴은 정말로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마레는 피식 웃으며 담배를 입에서 떼고 묻는다.

"응? 뭐냐. 너 열여섯이라고 하지 않았냐? 열여섯씩이나 됐는데 아직 한 번도 안 해본 거냐? 우리 고향에선 그때쯤이면 어디 보자, 나는 몇 번이더라..."

"당신이 지조가 있기는 무슨 지조가 있어요! 이 쓰레기 난봉꾼 파계승! 그, 그런 건, 정말 사랑하는 한 사람하고만, 결혼하고 나서 서로 존중과 합의 끝에 하는 거라고 그랬어요."

"누가 했는지는 몰라도 정말 인기라곤 하나도 없는 딱딱한 노처녀나 할 소리로구만."

"단장님이 그랬어요."

"크흠. 요즘 같은 풍진 시대에 찾아보기 힘든 낭만주의자셨구나... 칼! 칼 치워! 차라리 박치기를 해라, 제기랄!"

신기가 빨갛게 넘실대는 버터나이프에 목을 베여 정말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할 뻔한 마레는 질겁하며 몸을 뒤로 뺐다. 그렇게 실랑이를 하고 있는데, 작은 목소리가 두 사람의 귓전을 때린다.

"저... 렘 로피아델 님이 맞으신지요? 심부름으로 왔습니다만."

그건 마레가 암호 해독을 의뢰하면서 댄 가명이었다. 자그마한 꼬마 한 명이 서류봉투를 들고 서서 두 사람의 실랑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는 씩씩대면서도 자리에 앉았다.

"그래, 맞아. 수고했다."

마레는 1루덴 동전을 팁으로 건네주고, 아이가 내려놓은 버터나이프로 서류봉투를 북 찢었다. 그리고 암호 해독 결과 보고서를 읽어보기 시작한다.

"우선 낙죽장도의 손잡이에 적혀있는 암호문. 이건 연대를 측정해봤는데, 지금 새겨진 게 아니라더군. 굉장히 오랜 옛날에 새겨진 건데, 카나기의 전통 방식 암호문이라 그냥 방식이 일치했던 거고. 거기 적혀 있는 내용도 그냥 동화라는데."

눈을 크게 뜨고 마레의 말을 경청하는 아이. 마레는 진지한 표정으로 빠르게 보고서를 훑으며 말한다.

"음, 세상에 혼란과 절망이 가득 차면, 웨스벤 근처에 있는 호수에서 종말의 용이 몸을 일으킨다. 그러면 용광(龍光)이라는 검을 든 머리 검은 자가 그 용의 목을 베어 호수에 피를 뿌림으로써 원혼을 진혼하고 종말을 늦출 것이다... 그 촌장한테 들었던 종말의 용 전설인지 뭔지, 그거랑 같은 것 같은데."

"그럼 그 낙죽장도랑, 이 환도랑은 정말로 한 짝을 이루는 거겠군요."

"그래. 그리고 검날을 뽑아서 안을 살펴보니, 안에도 암호문이 적혀 있다고 하는데. 그건 아직 해석을 못 했다고 하는군. 복잡한 방식으로 된 거라, 오래 걸릴 것 같다고 해. 그런데 여기까지만 읽어봐도 이게 카나기 놈들이 지금 꾸미고 있는 음모랑 관련 없다는 건 알 수 있지. 그러니 일단 치워두고."

다음 보고서로 시선을 돌리는 마레.

"어디 보자, 음..."

그리고 그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엄중한 표정으로, 그 내용을 설명하는 것도 잊은 채 보고서를 살펴보던 마레는, 동전을 꺼내 식탁에 쾅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설명은 가는 길에 해 주마."

그리고 바람처럼 문을 나섰다. 영문을 모르는 아이도, 마레의 기세가 워낙 흉험했기에 두말없이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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